(창31:26-32) 야곱의 반의반이라도 따라가자.
야곱 바로 알기 (16)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속이고 내 딸들을 칼에 사로잡힌 자 같이 끌고 갔으니 어찌 이같이 하였느냐 내가 즐거움과 노래와 북과 수금으로 너를 보내겠거늘 어찌하여 네가 나를 속이고 가만히 도망하고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으며 내가 내 손자들과 딸들에게 입맞추지 못하게 하였으니 네 행위가 참으로 어리석도다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이제 네가 네 아버지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옳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둑질하였느냐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생각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 외삼촌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둑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창31:26-32)
능구렁이 같은 라반
야곱은 20년간 라반의 야비한 술수에 억울하게 당하기만 했으나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으로 양떼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자기보다 더 큰 부자가 된 야곱을 라반이 극도로 미워하게 되었고 야곱으로선 그에게 알리지 않고 처자와 자기 소유를 챙겨서 고향으로 돌아가 수밖에 없었습니다.
용의주도한 야곱인지라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간 가장 바쁜 시기(19절)를 택했습니다. 라반은 야곱이 출발한지 사흘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고 급하게 추격하여 7일 만에 야곱 일행을 따라 잡았습니다.(23절) 본문은 그런 아주 어색한 상황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언뜻 보면 장인과 사위가 그 동안의 앙금을 대화로 풀어나가는 것 같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정반대 내용입니다. 결국에는 라반이 야곱과 화해의 언약을 맺고 축복하며 보내주었으나 어디까지나 라헬이 훔쳐온 드라빔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짧은 대화 가운데도 야곱에게선 우리가 반드시 본받아야 할 믿음이, 라반에게선 절대로 따르지 말아야 할 완악함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라반의 첫마디부터 적반하장도 유분수였습니다. “네가 나를 속이고 내 딸들을 칼에 사로잡힌 자 같이 끌고 갔으니”라고 합니다. 지금껏 라반이 야곱을 수없이 속였지 야곱이 그를 속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거기다 레아와 라헬은 이제 라반의 딸이 아니라 야곱의 아내입니다. 율법에도 규정되어 있듯이(민30장) 아내들은 남편의 뜻에 따라야만 합니다. 그 전에 아비가 자기들을 외국인 즉, 노예 취급했기에 자기들도 아비로 대우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자발적으로 따라나선 것입니다.
첫 마디부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것은 여전히 그가 야곱을 우습게 본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도 마음에 없는 입에 발린 소리를 덧붙였습니다. 정식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면 거창한 환송잔치를 벌여주었을 것이라고 합니다.(27절) 손자들과 이별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고 오히려 야곱을 나무라기까지 했습니다.(28절) 그러나 실은 야곱에게 적의를 품고 어떻게 하면 그 재산을 빼앗을 수 있을지 궁리하던 그였습니다. 자신의 음흉한 속내를 노련한 말솜씨로 위장하는 모습은 여전합니다.
“네가 나를 속이고”라고 두 번 강조했습니다. 우리말 속담에 방구 뀐 사람이 오히려 먼저 성낸다고 합니다. 라반은 속이는 일에 너무 익숙해 남을 전혀 믿지 못했고 그런 몸에 밴 불신이 자동적으로 말로 튀어나온 것입니다. 라반 같은 거짓말쟁이의 가장 큰 불행은 남이 자기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부터 진실하지 않으니까 다른 이도 다 그런 줄 의심하고 아무도 믿지 못하는데 그 안에 자기 자신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람도 뭔가 악한 생각을 가진 채 말하거나 거짓말을 할 때는 반드시 불합리하거나 모순되는 내용이 드러나게 됩니다. 야곱에게 자신의 섭섭한 심정을 알아달라고 잔치를 벌려줄 수 있었다고 했지만 입에 침도 안 바른 거짓말이었습니다. 평생을 거짓으로 살아온 라반은 입만 열면 거짓말이었습니다.
지난 이십 년간의 라반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야곱인지라 라반 자신보다 라반을 더 잘 알았습니다. 라반은 지금 야곱에게 씨도 먹히지 않는 거짓말을 할뿐 아니라 정작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자기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모든 상황이 자기 욕심과 계획과는 전혀 반대로 흘러가고 있어서 너무 황당하고 분노에 휩싸여있었기 때문입니다.
라반이 믿는 신
그런 당황함 때문에 라반은 해서는 안 되는 말까지 무심결에 뱉어버렸습니다. 너를 해할수 있는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네가 믿는 여호와가 나더러 너에게 선악 간을 말하지 말라고 어제 밤 꿈에 경고했다고 말했습니다. 선악 간을 말한다는 것은 히브리 숙어로 선에서 시작해서 악에까지 이른다는 뜻인데 여호와가 말로든 행동으로든, 그것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야곱에게 절대로 행하지 말라는 경고였습니다. 라반의 말은 여호와가 막았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야곱을 죽였거나 죽이지 않더라도 딸과 손자들과 양 떼는 무력으로 다시 빼앗으려 했다는 뜻입니다.
그가 한 말을 자세히 다시 보십시오. “이제 네가 네 아버지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옳거니와”(30절a)라고 했습니다. 네가 네 아버지 집으로 즉, 네 혼자서 돌아가는 것은 굳이 막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럼 딸들과 외손자가 돌아가는 것에 대해선 그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권한으로 막을 수 있다는 말이 생략된 셈입니다.
라반이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훤히 꿰뚫고 있던 야곱은 그래서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31절)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내 딸을 칼로 사로잡은 것처럼 끌고 갔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그럴 참이었다는 음흉한 본심이 무심결에 표출된 것입니다.
라반의 말 중에 거짓이 아닌 것은 왜 내 신을 훔쳐갔느냐는 추궁 하나뿐입니다.(30절b) 드라빔은 사람 모양으로 조각한 작은 신상인데 그 이름부터 “편안하게 살다”라는 뜻이듯이 집안에 모셔놓고 매일 절하며 형통과 풍요를 간구했던 우상입니다. 라반이 들판에서 양털을 깎고 있어서 라헬이 쉽게 훔칠 수 있었고 사흘 길이 떨어진 곳에서 그 일을 했으므로 라반의 양떼는 여전히 아주 많았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여기 내 형제와 외삼촌의 형제 앞에서”(37절) 잘 판단해보라고 촉구했습니다. 내 형제라고 말했으나 에서가 왔을 리는 없으며 야곱의 외사촌 형제인 라반의 아들들을 뜻합니다. 또 외삼촌의 형제는 라반의 형제들은 물론이고 히브리 어법상 형제에는 동족과 이웃들도 포함됩니다. 말하자면 야곱에게 노비들은 있었지만 라반은 많은 무리를 이끌고서 늙은 야곱과 딸들과 손자들로 이뤄진 연약한 일행들을 잡으려고, 사실상은 양떼를 빼앗으러 온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한 가문의 신상을 훔쳐가는 것은 엄청난 죄입니다. 드라빔을 훔쳐갔다면 아무리 사위라도 충분히 죽일 수 있는 구실이 됩니다. 그런 판결의 증인으로 세우려고 라반은 자기 친척과 이웃을 다 동원한 것입니다. 블과 이백여 년 전인 미국 서부개척시대에 자기 목장의 소를 훔친 도둑을 카우보이들을 이끌고 가서 잡으면 린치를 가하고 나무에 교수형을 시켰는데 지금 그와 방불한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라반더러 야곱에게 선악 간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개인적인 증오로 아무 죄 없는 당신의 종 야곱을 절대로 죽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인간 사회의 잘잘못은 너희 인간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며 정죄와 판단과 심판은 오직 당신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행할 바는 오직 당신의 진리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거룩해지는 것뿐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그 무리들 앞에서 자칫 생명이 날아갈 수 있는데도 만약 드라빔을 찾으면 그 훔쳐간 자를 죽여도 된다고 아주 당당하게 반응했습니다. 지금껏 라반에게 잘못한 일이라곤 티끌만큼도 없었고 라헬이 훔친 줄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32절) 지금도 여호와의 지시에 따라 가족을 위해서 정당한 일을 했기에 기죽을 필요도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종교성만 많은 라반과 라헬.
지금 오히려 라반의 모습이 백 살이 훨신 넘었는데도 너무 추하고 연약하다 못해 불쌍해 보이지 않습니까? 재물 욕심에 끝이 없었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닙니다. 야곱이 라반을 잘 아는 만큼 라반도 자기가 야곱을 계속 속였듯이 야곱은 정직하고 성실해서 남을 속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야곱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이번 얼룩진 양의 사건을 통해 여호와의 큰 권능을 이미 목격했고 어제 밤 꿈에는 경고까지 받았습니다. 여호와를 믿지는 않아도 어떤 존재인지 진지하게 알아볼 생각은 전혀 없고 여전히 드라빔만 찾고 있는 종교적 무지가 너무 어리석다 못해 답답할 지경이지 않습니까?
그는 여호와를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29절)이라고, 드라빔은 “내 신”(30절)이라고 칭했습니다. 각 가문에 고유의 신이 있고 장소와 시간에 따라 통치하는 영역과 그 힘만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제 밤 꿈에 나타난 여호와의 큰 능력이 당장 두려우니까 야곱을 해할 능력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내 신은 내놓으라고 다그쳤습니다.
만약 드라빔이 발견되면 야곱에게 해를 가해도 여호와가 더 이상 관여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발견되지 않더라도 너는 네 신을 섬기고 나는 내 신을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라반으로선 야곱과 헤어지고나면 여호와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지는 대신에 조상대대로 섬겼고 자기 지역과 종족의 신인 드라빔은 계속 잘 섬겨야 했던 것입니다.
라반은 지난 20여 년간 아주 영악한 술수로 사위를 맘대로 부려먹었습니다. 그 동안 아침마다 드라빔에게 간구했을 것이나 마지막 순간에 야곱이 믿는 여호와로 인해 완전히 역전이 되었습니다. 자기 집 안에서 가문의 신 드라빔이 여호와에게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무참하게 패배했습니다. 어제 밤에는 여호와가 당신을 믿지 않는 자기에게 나타나 아주 큰 권능으로 경고했으나 드라빔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럼 최소한 여호와가 어떤 존재인지 곰곰이 따져보거나 최소한 두 신을 비교는 해봐야할 것 아닙니까?
지금 라반은 야곱의 양떼를 탈취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있었기에 드라빔만 찾아내면 그것을 구실로 자신의 뜻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그럼 드라빔이 자기로 거부가 되는 일에 도움을 준 것이니까 더더욱 드라빔을 섬길 것입니다. 한마디로 라반은 여호와든 드라빔이던 어떤 존재인지 아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기를 형통케만 해주면 시간과 장소에 따라 얼마든지 여러 신을 동시에 혹은 바꿔가며 섬기는 자였습니다.
라헬이 드라빔을 훔쳐온 것도 드라빔에게 나름의 능력이 있다고 분명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레아보다 아들을 더 낳고 싶었기에 여호와와 드라빔 둘 다에게 빌면 더 좋겠다고 여긴 것입니다. 최대한 잘 봐주어야 가문의 신을 자기가 소지하면 아버지의 힘이 빠지니까 그의 추격이나 위협에서 자기 가족이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모든 종교의 신은 동일하니까 이왕이면 여러 신의 도움을 구하면 더 큰 능력이 나타난다고 믿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새벽에 장독대에 물 떠놓고 빌었던 우리들 어머님 할머님들은 기도드리는 대상을 천지신명(天地神明)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신들에게 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리스 아데네에 선교하러 갔을 때에 온 시내에 우상 신상이 가득했고 심지어 “이름 모를 신”이라고 적힌 신상도 봤다고 했습니다.(행17:23) 혹시라도 이름을 모른 신에게 미처 제사를 못 드려서 분노를 사는 일이 없게 하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헬라사람들을 바울은 범사에 종교성이 많다고 표현하면서 천하를 다스리는 신은 한분만 계신다면서 설교를 시작했습니다. 라반과 라헬은 단지 종교성이 많아서 여호와도 여러 신들 중의 아주 힘센 신이라고 여겼을 뿐입니다.
차원이 다른 여호와의 권능
본문 사건에서 정작 주목해야 할 사항은 지금 야곱은 라반과 라헬이 어떤 일을 행했는지 전혀 몰랐다는 것입니다. 라반이 자기를 죽이려고 무리를 지어서 턱밑에까지 쫓아온 줄 몰랐고 바로 어제 밤에 라반의 꿈에 여호와가 야곱을 절대 해하지 말라고 경고했다는 것은 더더욱 몰랐습니다. 처음 라반의 무리를 마주쳤을 때 야곱은 평소 라반의 완악하고 야비한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에 아무리 여호와가 지켜준다고 약속했어도 순간적으로 겁이 덜컥 나면서 이것으로 끝인가 보다하고 낙담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라반 스스로 내가 너에게 해를 끼칠 수 있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막았다고 간증했습니다. 야곱이 겉으로 표는 내지 않았어도 속으로는 너무나 오묘한 하나님의 권능에 새삼 놀라고 감격했을 것입니다. 당신의 입에서 나간 말이 실현되지 않고 땅에 떨어지게 버려두는 법은 절대 없음을 다시 확인했을 것입니다. 여호와가 당신의 장자권이 실현되도록 자기보다는 아들들을 위해서 베푸신 은혜라고 절감했을 것입니다.
야곱이 드라빔을 훔쳐온 자는 죽어 마땅하고 그 외에도 외삼촌의 것은 단 하나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고 장담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출발 전에 어린 아들들에게조차 외삼촌의 물건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가지고 떠날 생각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고 가족들이 평소에 자기 말을 잘 따라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곱이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 발견되거든”이라고 말한 것도 거짓으로 자기를 모함했던 외사촌 형제들더러 들으라고 한 말로서 제발 너희 잘못을 깨달으라는 뜻이었습니다.
라헬이 드라빔을 훔쳤으나 들키지 않은 것도 여호와의 간섭이었습니다. 라반이 야곱의 아내 넷 중에 라헬의 장막을 맨 마지막에 조사하는 바람에 말안장에 숨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33절) 만약 그 순서가 바뀌었거나 서열대로 두 번째로 조사했어도 들켰을 수 있습니다. 거기다 아무리 우상이라 해도 라헬은 감히 깔고 앉았고 경수가 있어서 일어나 아버지를 맞이하지 못함을 용서해달라고 말했습니다.(35절) 여호와가 라헬에게 순간적으로 대담한 지혜를 심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라헬이 한 일을 잘했다고 인정해준 것이 아니며, 드라빔을 보호하려는 뜻은 더더욱 없습니다. 나중에 베델에서 전 가족이 여호와께 예배드릴 때에 우상 신상과 그것들과 연결되는 모든 장신구들을 땅에 묻어버리게 했습니다.(창35:4) 여호와는 라헬더러 야곱에게서 열두 번째 아들 베냐민을 낳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야곱이 라반에게 했던 말의 신뢰성을 높여주려 한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아는 바대로의 진실만 말했습니다. 야곱이 거짓말을 일삼는 라반과 그 아들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임을 그들은 물론 함께 따라온 무리들에게 확인시켜주려는 뜻이었습니다.
라반도 사랑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역사는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만약 야곱만 보호하려면 얼마든지 추격 못하게 역사할 수 있었고 그 전에 라반이 야곱에게 행한 잘못만으로도 심판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그러지 않고 야곱의 소유는 물론 딸들과 손자들도 빼앗아 올 수 있겠다는 헛된 욕심에 차서 온갖 흉계를 꾸미는데도 그대로 놓아두었습니다. 그러다 마지막 날 밤에 큰 권능으로 꿈에서 경고했는데 라반더러 자기 잘못을 제대로 깨닫게 해주려는 뜻이었습니다. 여호와는 라반의 목숨을 살려주었고 그에게도 당신의 영광스런 빛도 비춰주었습니다.
나중에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 후에 야곱이 라반에게 여호와의 그런 은혜를 둘러서 설명해주었습니다.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41.42절)
외삼촌은 지난 20여 년간 나를 매번 속이기만 했으나 순전히 여호와의 은혜로 잃어버린 품삯을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여호와가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했는데 그 책망이 없었다면 나를 해하거나 빈손으로 돌려보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정작 말하고 싶었던 뜻은 외삼촌이 하나님의 경고대로 나를 죽이지 않았으니까 여호와도 외삼촌을 살려주었다는 것입니다. 외삼촌은 나의 수고를 원수로 갚았으나 내가 믿는 여호와가 외삼촌을 은혜로 살려주었다는 것입니다. 나를 해할 능력은 외삼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께 달렸고 지금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난 것은 내가 아니고 도리어 외삼촌이라는 사실을 제발 깨달아라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야곱은 지금이라도 여호와를 믿거나 최소한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진심으로 호소한 것입니다. 물론 여호와를 믿고 안 믿고는 외삼촌의 자유이므로 강요하지는 않겠지만 이 모든 사건의 진정한 실상을 정확히 알아야만 한다고 촉구한 것입니다. 드라빔을 되찾으려 하지만 그것은 아무 능력도 없고 말도 못하는 나무 조각에 불과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지금껏 거짓에만 의존했던 외삼촌의 인생을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온전한 진리 안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라반이 지난 20년은 물론 이번 사건만이라도 앞뒤로 천천히 따져보았다면 여호와가 절대로 한 지역과 한 민족의 신이 아님을 쉽게 깨달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너무나 어리석고도 불쌍하게 조상 대대로 섬긴 자기 지역 종교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우상은 실체가 없는 허상일 뿐입니다.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유지하거나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만들어낸 산물일 뿐입니다. 살아 역사하시는 참 하나님을 거역하고 인간을 높인 것인데 사탄이 그들을 미혹시켰기 때문입니다. 초자연적이고 기괴한 모습으로가 아니라 이 땅에서 당장의 형통과 풍요에 모든 생각을 집중시키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라반이 야곱의 양 떼에 집착하는 것이 욕심이 과한 탓만이 아닙니다. 사탄의 거짓에 속아 거짓된 인생을 사니까 무엇을 해도 기쁨과 만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믿음의 실체
지금 오늘날로 치면 불신자인 라반의 잘못을 지적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연약하고 불쌍하기 짝이 없는 라반 대신에 너무나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야곱의 본을 따르자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난 20 년간 처갓집이 섬기는 드라빔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라헬이 그것을 훔쳐도 몰랐던 것이며 본문의 현장에서도 그러합니다. 오로지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여호와와 맺은 언약의 계승자로 세상 앞에 서있습니다. 여호와의 장자권은 모든 사람의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 장자를 축복하는 자를 여호와가 축복해주고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시겠다는 약속이 지금 라반과 라헬에게 실현된 것입니다.
신자가 서있는 위치 신분 특권이 그러합니다. 지금 여호와는 야곱이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 혼자서 대적을 다 물리쳐서 보호해주시고 있습니다. 나아가 야곱으로 인해 라헬과 라반의 생명도 지켜주셨습니다.
야곱 또한 장인이 첫날밤에 사기를 치고 다음 칠년 동안 열 번이나 삯을 변경하는데 묵묵히 참아주었습니다. 장인의 잘못을 끝까지 혼자 감당하고 아내에게는 털어놓지 않았습니다. 마지막까지도 장인과 원수를 지기 싫어서 아무리 억울해도 먼저 양보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본문처럼 나와 내 가족이 외삼촌의 소유에 단 하나라도 손을 대었으면 죽어도 좋다고 당당히 선포했습니다. 야곱이야말로 라반에게 선악 간에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그럴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입니까? 거짓의 아비 사탄에 미혹된 거짓말쟁이 라반과는 정반대로 신실하신 여호와만 순전하게 따르는 신실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광야 같은 인생길을 걸어감에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정확히 알았던 것입니다. 세상을 정말로 주관 통치하는 이는 한 분 하나님뿐임을 알고 있었고 어떤 환난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그분을 따를 때만 자신도 온전하고 선해진다는 진리를 절감하고 자기 삶에서 실현해 보였습니다. 이 땅에서 인간이 반드시 살아가야 할 모습대로 살았습니다.
여호와에게 얼룩진 양을 번창게 해주는 기적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야곱에게 지은 죄만으로 죽어 마땅한 라반을 살려주었고 마지막 순간에 꿈에 경고하여서 장인이 사위를 살해하는 죄까지 막아주셨습니다. 죄인을 향한 넘치는 인내와 긍휼과 사랑 때문에 그 죄인을 살리려고 당신께서 대신 죽으신 십자가의 은혜가 이일에도 역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 때의 선악과 금령부터 영원토록 변함없이 불신자들마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만 주관 통치하고 계십니다.
기독교는 여러 종교 중에 가장 좋은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는 가장 좋은 스승, 선각자, 종교 창시자가 아닙니다. 그분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그것도 성령 하나님의 간섭으로 덧입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 그분이 이 땅에 직접 오셔서 나를 대신해서 죽었는데 어찌 여러 구원의 길 중에 하나요, 가장 좋은 종교로 그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골고다 십자가는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절대적으로 의탁하고 살아가야 할 절대적이고 유일한 진리입니다. 나를 대신해 죽으신 그분을 위해서 마땅히 우리 전부를, 목숨까지도 바쳐서 그분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데도 너무나 불행하게도 때로는 화가 날 정도로 작금 교회와 신자들이 아주 잘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고 성령님이 역사하여서 십자가 복음만을 증거 실현하려는 세상에 불려 나온 그분의 종들의 공동체입니다. 실상은 교회에 나와 입술로는 “주여, 주여!” 부르짖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드라빔을 붙들고 있는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저 세상에서 형통케 해달라고, 조금 양보하자면 지금의 고난에서 구해달라는 요구 말고는 믿음으로 행하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정말로 진리가 무엇인지 찾고 또 찾아서 목숨을 걸고 진리대로 살아가겠다는 열성과 믿음은 없고 그런 시도도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신자도 모르게 다 막아주시고 보호 인도하신다는 말씀에만 아멘 합니다. 드라빔이 라반 가문의 수호신이었듯이 주님을 그냥 자신의 수호천사로만 모시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인간 신자가 현실적 어려움을 없애는 데에만 우주의 주인 되시는 분을 부려먹고 있지 자기 존재가 거룩하게 되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신자는 야곱의 반의반이라도 따라가야 합니다. 무엇이 진리이며 또 어떻게 해야 진리대로 사는지 알고 있기에 아무리 억울한 일을 겪어도 정직하게는 살아야 합니다. 최대한 양보해서 다른 이들에 대해 선악 간에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며 끝까지 진실하게 대해주어야 합니다. 주님만 붙들고 진리에 따라 거룩하게 살아가면 하나님의 권능도 오묘하고 풍성하게 역사합니다. 야곱이 라반에게 행한 것처럼 불신자들더러 우리가 믿는 신에 대해 부러움을 아니 최소한 두려움이라도 느끼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거꾸로 불신자들이 우리들이 믿는 주님을 우습게 여기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교회와 교인들이 그들의 우상 신을 교회 안에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놈들이 우리와 같거나 더하다고 멸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코로나를 허용하신 뜻을 우리 모두가 잘 새겨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순전하게 실천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여호와를 다시 모셔 오고 예수님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진리를 순전하고도 당당하게 선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삶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면서 라반 같은 거짓에 속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증거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8/16/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