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5:19-23) 불신자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는가?
야곱 바로 알기 (20-완)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고 이삭은 사십 세에 리브가를 맞이하여 아내를 삼았으니 리브가는 밧단 아람의 아람 족속 중 브두엘의 딸이요 아람 족속 중 라반의 누이였더라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그의 아내 리브가가 임신하였더니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25:19-23)
장자권의 합법적인 양도
야곱과 그의 믿음을 열아홉 번에 걸쳐서 새로운 시각으로 살펴보았는데 간단히 정리하여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들이 많이 남아있어서 아쉽긴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오묘하고 풍성해서 야곱만 해도 일일이 다 알아보려면 끝이 없습니다.
결론을 내리려면 야곱이 인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참조해야 할 텐데 거꾸로 그의 출생을 설명해주는 본문을 다시 보려합니다. 성경 인물들의 삶과 인생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의 계획에 따라 주관하셨는데 본문이 야곱 인생에 대한 그분의 뜻이 가장 알기 쉽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야곱을 새롭게 조명해본 까닭은 그가 아주 영악한 거짓말쟁이 사기꾼으로 평가되어 왔는데 과연 그러한지 따져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전통적인 평가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성경을 앞뒤로 연결해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상당히 다르게 말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야곱이 그런 평가를 받게 된 것은 팥죽 한 그릇으로 형에게서 장자권을 양도 받은 일과, 아비에게 자신이 형인 양 거짓말로 속인 일 두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얼룩진 양으로 라반보다 부자가 된 사건은 살펴본 대로 하나님이 베푸신 기적이므로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선 팥죽 사건은 에서와 상호 합의에 따른 정당한 거래였습니다. 아비를 속인 것도 엄마 리브가가 먼저 제안하고 방법까지 가르쳐준 것으로 여러 정황상 그대로 따르는 것이 옳았습니다. 야곱은 결코 사기꾼이 아니었고 실제로 아버지를 속인 일 빼고는 일생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에서와 리브가가 그래야만 했던 배경과 이유부터 살펴야 하는데도 지금껏 그런 부분에 미진했던 것입니다. 먼저 에서는 성격이 급해 자기감정을 절제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평소에 장자권을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전문사냥꾼으로서 가나안 온 땅을 돌아다녀야하므로 장자로써 아비의 땅을 물려받는 일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던 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법적으로 장남이 장자권을 갖지 못하는 경우는 세 가지입니다. 본인이 스스로 다른 형제에게 양도하거나, 불법을 저질러서 박탈당하거나, 최종적인 권한을 지닌 아버지가 다른 아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에서의 경우는 이 셋에 다 해당됩니다.
에서는 분명히 자신의 자발적인 의사로 동생에게 양도했습니다. 이방여인과 그것도 두 명과 부모의 허락도 안 받고 결혼한 것은 여호와 언약의 장자로서 행해선 안 되는 큰 잘못이었습니다. 그리고 경위야 어떻게 되었든 아버지 이삭이 야곱에게 장자권을 공식적으로 물려주었습니다. 야곱이 에서라고 시침 떼고 거짓말한 것은 분명히 잘못이지만 이삭이 그 정도로 의심이 많이 들었으면 얼마든지 확인할 수 방법이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았으니 이삭의 책임도 큽니다.
셋 중에 하나만 충족되어도 장자권의 법적승계는 이뤄지는데 야곱의 경우는 셋 다 만족시켰습니다. 법적으로 야곱이 장자가 되고도 남으며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서 하자를 걸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야곱의 장자권 승계가 단순히 사기로 취득했다고 비난받을 소지는 사실상 없다는 뜻입니다.
간단히 이렇게 따져만 봐도 성경 자체가 야곱을 일반적 윤리가 아닌 다른 측면에서 평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무엇보다 야곱은 리브가가 시키는 대로 따랐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가 77세이므로 형에게서 장자권을 양도 받은 이후로 오랜 기간 심사숙고 끝에 결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럼 리브가가 왜 야곱더러 아비를 속이라고 지시했는지 이유와 당시 사정을 알지 못하면 야곱을 정확하게 평가할 수 없게 됩니다. 본문은 그 질문에 대한 결정적인 힌트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리브가의 믿음
우선 리브가는 이삭과 결혼하고 20년이 지나도록 임신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삭이 40 살에 결혼해서 60살에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남편 이삭과 함께 간절히 기도해서 쌍둥이를 잉태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리브가의 임신을 위해서 본인이 아닌 남편 이삭이 기도했다고 합니다.(21절) 라반의 집안에서 자란 리브가는 여호와 신앙을 남편 이삭을 통해서 처음으로 접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 초기에는 당연히 리브가의 믿음이 남편에 비해서 미숙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부부가 합심해서 무려 이십여 년이나 기도했습니다. 임신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리브가의 여호와에 대한 믿음은 아주 견고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배가 너무 불러서 아무래도 쌍둥이 같은데다 태중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 격렬했습니다. 틀림없이 두 가지 움직임이 동시에 감지되었을 것입니다.
이십년 만에 기도해서 된 임신인데 혹시라도 잘못될까 크게 걱정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리브가가 직접 여호와께 어찌된 일이지 물어보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의 태의 속에서 서로 싸우는데 그가 여호와께 물었다고 합니다.(22절) 기도한 자도, 응답 받은 자도 분명 리브가입니다.
하나님은 그녀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응답해주었습니다.(23절) 장남과 차남이 맡을 역할이 바뀔 것이라고 즉 야곱이 장자권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목할 사항은 두 형제가 싸운다고 하지 않고 두 국민, 민족, 족속으로 나눠지고 한 쪽이 더 강해진다고 했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후손인 이스라엘 족속과 에돔 족속에 대한 예언입니다. 장래에 일어날 일은 하나님만이 주관하시므로 그 두 종족이 서로 다투되 에돔이 이스라엘을 섬길게 될 것까지 여호와는 이미 다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마지막에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두 민족의 선조인 에서와 야곱도 그럴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한마디로 야곱이 형 에서 대신에 장자권을 차지하는 것은 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확정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이자 계획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처럼 야곱을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면 결과적으로 또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하는 꼴이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야곱을 사기꾼이라고 쉽게 판단 정죄해선 안 된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야곱을 그렇게 이끈 하나님의 잘못일 수는 결코 없습니다. 성경을 더욱 세밀하게 앞뒤를 연결해서 읽어서 행간의 의미까지 찾아내어야 합니다.
리브가의 당시 심정을 한 번 헤아려 보십시오. 먼저 이십여 년의 기도 끝에 하나님의 기적적 간섭으로 잉태했습니다. 태중의 비상한 움직임 때문에 다시 기도해서 차남이 장남 역할을 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는데 실제로 야곱이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오는 증거까지 받았습니다. 그녀의 여호와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으로 변하고 예언이 실현되지 않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 후로는 하나님의 그 역사에 쓰임 받으려는 믿음의 여종이 되어서 계속 기도했을 것이며 따로 야곱에겐 그 대비를 하라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에서는 장자권에 관심도 없는데다 야곱이 에서에게 정식으로 양도 받았다고 하니까 엄마로서 그 동안 장남에게 가졌던 미안한 마음도 해소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이삭이 노쇠해서 눈이 어두워진 어느 날 장자권을 에서에게 주려한다는 말을 리브가가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이 남편 이삭에 의해 무산될 판입니다. 부랴부랴 비상대책을 세워서 시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드시 이삭더러 에서 대신에 야곱을 축복해주도록 만들어야만 장자권 양도의 세 가지 법적 조건 중에 가장 중요한 절차가 마무리될 것입니다.
틀림없이 리브가는 이삭에게서 그의 출생의 스토리를 전해들었을 것입니다. 시어머니 사라가 아들을 줄 것이라는 여호와의 약속을 받았으나 기다리지 못하고 하갈을 아브라함의 첩으로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사라로선 끝까지 기다려야 했음에도 자기가 앞서서 인간적 수단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달성하려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리브가의 경우는 스스로 계책을 고안해낸 것은 사라와 같으나 나름의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끝까지 기다리지 못한 사라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아들끼리의 계약이 이뤄진 후에도 수십 년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급기야 하나님의 약속과는 반대로 사태가 흘러갈 판이라 어쩔 수 없이 바로 잡은 것입니다. 아비 이삭이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해버리면 끝이므로 당시 상황에선 최선의 방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섭리
물론 리브가가 남편을, 야곱이 아버지를 거짓으로 속인 것을 잘했다고 인정하고 또 그래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인생사란 통상적인 도덕이나 종교적 가르침으로 해결될 만큼 손쉽고 간단한 것이 아니며 선과 악 둘로 딱 부러지게 나눌 수도 없습니다. 야곱도 그가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그 인생을 붙들고 있는 하나님의 광대하신 은혜와 권능에 주목해야만 합니다.
만약 리브가가 이삭을 설득시켜서 하나님의 뜻이니 장자권을 야곱에게 주기로 했다고 에서에게 통보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에서로선 부모는 물론 여호와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원한을 갖게 될 것입니다.
가인은 아벨이 자기에게 직접적인 잘못을 하나도 범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이 자기 제사를 열납 하지 않자 친동생인데도 죽여 버렸습니다. 이삭이 에서에게 그렇게 통보하면 에서로선 하나님과 부모에게 대들 수는 없으므로 그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은 야곱을 죽이려 들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아비를 속이게 되면 에서가 아비와 여호와에게는 분노를 품지 않을 것이라고 리브가는 판단했을 것입니다.
만약 그녀가 하나님께 능히 못할 일이 없다고 믿고 끝까지 가만히 있었으면 어떻게 됩니까? 장자가 된 에서가 죽어야만 야곱이 계승합니다. 그렇지 않으려면 이삭이 갑자기 죽거나 사고가 나서 장자권 양도를 할 수 없어야 이미 계약한 대로 야곱의 차지가 됩니다. 리브가로선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시나리오입니다. 그녀는 이삭이 에서에게 말하는 것을 우연히 혼자 듣게 된 것도 그 일을 막으라는 하나님의 신호라고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거의 모든 신자가 경험하고 있듯이 어리석고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분별하여서 실제 삶에 정확하게 적용 실현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리브가는 주어진 여건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려 했고 그런 순전한 중심은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평가해주어야 합니다. 야곱 또한 형에게 장자권을 정식으로 양도 받았으나 77세가 되도록 일절 발설하지 않으면서 아버지 이삭에게서 인정받게 되기를 기도하면서 기다렸던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들의 거짓말을 변호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모든 일과 그 후의 야곱의 인생을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의 장자로 세우려고 당신만의 절대적 주권과 완벽한 섭리로 이끌고 계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 쪽에선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스스로 판단 결정 시행했어도 심지어 윤리적 종교적 허물이나 잘못을 범했어도 하나님은 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세운 당신의 계획대로 이끄실 뿐입니다.
야곱이 에서의 살해 위협을 피해 하란으로 도망가게 된 것, 그곳에서 탐욕스럽고 음흉한 외삼촌 라반에게 20년간 시달린 것, 얼룩진 양의 기적으로 거부가 된 것, 마지막에 라반과 큰 충돌이 있을 뻔 했으나 오히려 자신의 무죄와 정직과 성실이 이방족속들 앞에 증명된 것,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와 십여 년간 가족의 신앙교육에 등한히 하다 영적 개혁을 일으킨 것 등등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완벽한 각본에 따라 그분이 주도하신 것입니다. 당사자인 야곱은 현실적 개인적으로 큰 어려움과 희생을 겪었어도 결국은 그것이 자신에게 유익이자 영적 성숙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이방족속들 앞에서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이라고 번역된(32절) 히브리어 ‘베코라’는 초태생과 장남을 의미합니다. 영어로는 birthright 인데 원어 뜻대로 태어나면서부터 확보된 소멸될 수 없는 권리로 하나님이 그 집안에 최초로 부여한 생명입니다. 장남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생명은 물론 이어서 태어날 형제들의 생명도 귀하게 여기고 보호할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업을 다른 형제의 두 배로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그를 팥죽 한 그릇에 야곱에게 팔 때에 어떤 말을 했습니까?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문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창25:32) 팥죽 한 그릇은 한 사람의 한 끼의 허기만 채울 수 있습니다. 팥죽 한 그릇을 안 먹으면 자기는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허기진 상태를 강조하는 표현이라 해도 팥죽 한 그릇에 생명이 오간다고 했습니다.
장자권은 자신은 물론 가족의 생명이 걸린 너무나 고귀한 권한이자 책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기에 일생 동안 소중하게 실현해야 함에도 팥죽 한 그릇의 가치밖에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말에는 자신의 생각이 드러나는 법인데 평소부터 에서는 생명의 주관자인 하나님을 우습게 여긴 것입니다. 그는 장자권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었고 그랬다간 그 후손들마저 자기처럼 하나님과 등을 지게 만들 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아내들 또한 자식을 여호와 신앙으로 양육 시킬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요컨대 장자권은 처음부터 반드시 야곱에게 주어져야만 했습니다. 특별히 야곱을 통해 열두 아들을 갖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약속의 씨앗이 아브라함과 이삭 한 명으로 겨우 이어졌습니다. 삼대 만에 쌍둥이가 났으나 여전히 에서는 제외됩니다. 드디어 사대 째에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후손이 창성케 되는 증거를 장자를 바꿔가면서까지 보여주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형제라곤 쌍둥이 형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형은 온 들판으로 사냥을 다니느라 형제간에 우애를 나눌 겨를 없이 77년을 혼자서 외롭게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곱은 자식들만은 자기처럼 외롭게 지내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라반에게 속았지만 결국은 여종 둘을 포함한 네 아내를 두고서 아들만 열둘이나 낳았던 것입니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이 땅의 시간과 공간을 전부 아우른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신약의 열두 사도를 택한 것처럼 야곱의 열두 아들도 세상 모든 사람을 당신의 구원 대상으로 삼는다는 뜻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여호와를 따르는 백성에게만 신약에선 기독교 신자에게만 창성케 하는 복을 주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했다.
이 일을 두고 바울은 로마서 9:10-13에서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문맥상의 뜻은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 당신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을 베푸신다는 진리를 증명해주는 예로 야곱과 에서의 경우를 든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가 선악 간에 어떤 행위를 하든 하나님의 예정은 변함없다고 말합니다. 다른 성경이 야곱 사건에 대해 설명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 대해서 스스로 평가한 셈입니다. 장자권이라는 주제와 연결하면 에서와 야곱이 각자 자기 인생을 어떻게 꾸려갔던 간에 하나님 그분이 야곱을 장자로 세웠고 그 사실은 절대로 변화가 없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특이합니다. 기록된 바 즉, 말라기1:2,3을 인용하여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어에는 비교급이나 최상급 표현법이 없습니다. 같은 의미의 단어를 반복하거나 반대어를 사용해서 그런 의미를 드러냅니다. 에서보다 야곱을 더 사랑했다라는 의미를 드러내려고 에서는 미워했고 야곱은 사랑했다고 반대되는 묘사로 대조시킨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에서를 미워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에서는 사냥꾼이라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탓인지 아내는 셋이었으나 아들은 다섯만 낳았습니다.(창36장) 후손을 창성케 해서 여호와 신앙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데에는 아무래도 부적격이었습니다. 성경이 처음부터 장막에 조용히 거하길 좋아하는 야곱과 대조시킨 이유입니다.
에서가 한 끼라도 허기지면 견디지 못했던 것도 평소에 먹고 마시기를 아주 즐겼다는 반증입니다. 에서는 원래부터 하나님에 대해 관심은 없이 세상 쾌락을 즐기며 일생을 살아간 자였습니다. 야곱과 화해한 후에도 부모 곁으로 가지 않고 족장으로 통치하고 있던 세일로 돌아갔습니다.(창33:16) 하나님은 당신의 장자권에 아예 관심조차 없는 에서 대신에 야곱을 택해서 당신의 언약을 실현할 자로 준비 훈련 실현시킨 것입니다. 야곱을 에서보다 더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일을 맡기기 위해서 야곱을 택했을 뿐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불신자를 미워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그들이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거역하며 세상에서 살기를 좋아하므로 그냥 그대로 두신 것입니다. 신자를 세상 사람들보다 더 사랑해서 택하고 구원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언약의 장자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신자의 진짜 이름
그래서 야곱의 일생을 살필 때에 가장 주목해야 할 내용이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26절에 나옵니다. 야곱은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출생했습니다. 태아가 그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하나님이 행한 기적입니다. 당신께서 예언하신 대로 작은 자가 큰 자를 다스린다는 가시적인 증거였습니다.
나아가 쌍둥이이므로 출생 때부터 헤어질 수 없는 사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둘은 하나라는 것입니다. 에서는 자신의 인간적 죄악과 욕심과 감정에 휩쓸려 야곱을 원수로 미워했지만 결국 야곱의 호의에 감동하여 화해했습니다.
바로 그 전날 밤에 하나님은 야곱에게 하나님과 사람들과 겨뤄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었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후에 처음으로 사람들로 겨룬 대상이 형 에서였고 야곱은 살펴본 대로 자기 전부를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그분의 권능과 은혜로 이겼던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형통을 두고 불신자에게 승리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들에게 승리하여서 용서하고 품어서 그분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은 것도 장자가 될 야곱이 자기 때문에 장자 자리에서 밀려난 에서를 뒤에서 붙들어주는 형국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이름의 뜻도 본문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라 단순히 “발꿈치를 잡았다”고 설명합니다. 발꿈치를 잡는다는 것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는 뒤를 잡는 것이니까 남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사취를 하는 자라는 뜻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처음부터 야곱을 큰 자로 세우려는 당신만의 의로운 계획을 세우셨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오히려 긍정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아담이 사탄의 꾐에 넘어가서 타락한 후에 하나님이 사탄의 노예가 될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3:15)
여자의 후손은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님으로 주님이 오시면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나 사탄은 겨우 주님의 발꿈치만, 히브리 원어로 동일함, 상하게 한다고 합니다. 사탄이 사람들을 충동시켜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게 이끌었지만 주님은 사흘 만에 부활하여서 사탄의 흉계를 완전히 깨트리고 그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을 구원해준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십자가 복음입니다.
야곱은 에서의 발꿈치를 붙잡고 출생했습니다. 창조 시에 사탄에게 선포하신 하나님의 예언을 확대 적용하면 에서는 사탄의 종이 되었기에 그 발꿈치가 예수님처럼 사탄에 의해 상한 자입니다. 야곱이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놓지 않음으로써 태어날 때부터 참된 의미의 장자권을 에서를 위해서 사용한 셈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이미 들어온 야곱과 그 후손들이 그 언약 안에 들어오지 못한 에서와 그 후손들을 사탄에서 건져내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야곱과 에서의 예로 하나님의 예정 구원을 설명한 이유도 동일합니다. 당시에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먼저 믿은 반면에 예수님과 동족인 유대인들이 오히려 믿지 않고 주님과 신자들을 박해하는 것에 대한 변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십자가 구원 안에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롬11:25) 구약시대에는 이방인의 구원 순서가 에서처럼 야곱보다 뒤로 밀렸으나 신약시대에는 그 순서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외면했어도 하나님이 외면하는 민족은 에돔과 이스라엘을 포함해 단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야곱의 일생은 하나님의 영적 장자가 되어야 한다는 그분의 태생적인 프레임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야곱의 자유가 제한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정반대입니다. 그가 여호와 언약의 장자로서 끝까지 헌신 순종함으로써 도리어 참 자유를 누렸습니다. 야곱과 그의 인생을 이 하나님의 프레임을 배제하고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가 자신의 선의와 믿음으로 스스로 행했어도 심지어 아버지를 거짓말로 속였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대로 이끄신 것입니다. 야곱에게 장자권을 주신 그분의 뜻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에서처럼 살아도 너는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따져도 유산을 훨씬 많이 받은 장남 혼자서 안락하고 풍요롭게 살면 천륜을 어겼다고 비난 받습니다. 야곱에게 장자권을 주신 뜻은 에서 같은 자들을 너처럼 바꾸기 위해서 그들 앞에 네 거룩한 삶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장자 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 받은 신자들 또한 그분의 장자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이미 장자가 되었으니 더 이상 구원은 걱정할 것 없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장자로서 충성 순종할 일만 남았습니다. 실제로 그분과 말씀과 기도로 친밀하게 교제하며 일생에 걸쳐 신실하게 동행해야 합니다. 불신자들의 발뒤꿈치를 감싸 안아주면서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어떤 비방 멸시 학대를 받아도 그 일을 게을리 해선 안 됩니다. .
더 중요하게는 하나님 그분께서 신자의 일생을 야곱처럼 당신의 장자라는 프레임에서 절대로 벗어나게 버려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모두를 기어이 야곱이나 바울 같은 인생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우리는 심령의 중심을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던 오직 그 프레임 안에 위치시키면 됩니다.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진지하게 다시 점검해 보십시오. 야곱처럼 세상에 나가서 불신자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습니까? 혹시 교회 안에서 교인끼리만 붙들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 그마저 하지 못하고 지금 자신과 가족의 뒤꿈치만 닦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9/13/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