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욘2:5-10) 복음의 네 가지 핵심과 코로나 사태
요나서 강해 (6)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욘2:5-10)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요나가 고래 배속에서 삼일 간 죽음과 방불한 흑암에 갇혔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예표 합니다. 그런데 그 외적인 모습 뿐 아니라 요나가 행한 기도의 후반부인 본문에는 실제로 기독교 구원의 핵심 진리 네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신약성경이 설명하는 복음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본문이 말하는 의미도 자기 기도가 응답되어 목숨을 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소와 시대에 관계없이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그에게 영감을 주어서 십자가 구원의 의미를 진술하게끔 인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네 가지 복음의 핵심에 비추어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 경위와 현재의 믿음 상태가 올바른지 다시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나는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9절)라고 고백했습니다. 구원의 첫째 핵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너무나 당연한 진리를 성경이 강조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들이 여호와 외에도 구원의 경로가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나 당시는 각 족속들마다 고유의 신을 섬겼으나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입니다. 우상 종교가 없어진 오늘날에는 인간 선각자가 깨달은 종교적 진리를 배우고 그 계명대로 따르면 구원을 얻는다고 믿습니다. 이 또한 아무리 경건하고 신령해 보여도 죄에 찌든 인간이 같이 죄에 찌든 다른 인간을 구원하려드는 것으로 구원과 전혀 무관합니다.
인간이 고안한 모든 종교는 시대를 막론하고 남들보다 의롭게 살다가 죽으면 신이 구원해준다고 가르칩니다. 언뜻 합리적인 것 같으나 그 신은 인간이 이 땅에서 치른 시험의 점수를 채점하는 자에 불과합니다. 신자 본인도 남들이야 심판 받아 지옥에 가든 말든 자기만 의롭게 되면 된다는 뜻으로 자기 노력으로 자기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리를 인간이 대체한 것으로 아담이 타락한 상태에서 한 걸음도 진전하지 못하고 더 완악해졌습니다.
밤중에 구원의 길을 물으러 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5)고 대답했습니다. 여러 의미가 있지만 지금 살펴보고 있는 요나서와 연결시키면 성령님이 간섭해야 구원되므로 인간이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오셔서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배속에서 행한 기도의 전반부에서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 지라도”(욘2:4)라고 했습니다. 쫓겨났으니 여호와가 먼저 그렇게 행동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기도했더니 그대로 응답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고래에서 구출 받은 후에 그 모든 일들을 따져보았더니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셨을 뿐 아니라 이미 다 계획 예비해 놓으셨던 일이었음을 정확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일생이 하나님의 손 안에 꼼짝없이 붙잡혀 있는 신분이라는 점도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후반부인 본문에서 빗장으로 막힌 산의 뿌리와 구덩이에서 즉, 스스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죽음의 자리에서 여호와가 생명을 건져주셨다고 고백한 것입니다.(6절)
십자가 복음은 체험이다.
한 죄인의 내면에 성령이 초자연적으로 간섭하여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야 구원을 얻습니다. 그 중생의 구체적인 과정과 방식과 기간은 사람마다 각기 다 다르며 한 사람도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성령님이 역사했기에 그 결과는 모두에게 동일합니다.
각자가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죽음의 긍휼 앞에서 자신이 천하죄인 중의 괴수임을 깨닫고 진심으로 통회 자복하며 항복하는 순간이 반드시 있습니다.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 하나님의 원수 자리에 있던 나를 만나주시고 지난 모든 죄들을 다 용서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따뜻이 품어주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할 수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와 삶과 인생 전부가 예수님의 사랑과 권능의 품에 이미 안겨졌고 평생토록 벗어나지 않게 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깁니다.
그래서 신자도 자신의 전부를 예수님에게 의탁하고 그분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십니다. 죽으면 죽었지 예수님을 모르며 세상 속에서 완악하고 추하게 살았던 이전의 삶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단 헌신하게 됩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라는 진술이 인간이 머리로 성찰 각성해낸 종교적 명제가 아닙니다. 요나에게나 오늘날의 신자에게나 실제로 음부의 문턱에까지 갔으나 하나님이 주시는 참 생명으로 다시 살아서 돌아왔다는 생생한 체험적 사실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고백으로만 그치지 않고 자신의 진짜 주인인 예수님을 자기 모든 것을 동원해서 역동적으로 따라가고 있다는 간증입니다.
때로 엄청난 고난이 닥쳐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고 잠시 의심 내지 불만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나를 일부러 괴롭히려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습니다. 요나처럼 아무리 그분께 쫓겨난 것처럼 여겨져도 주의 성전을 바라보려고 간절히 기도하면 언제나 당신의 뜻 안에서 구하는 것 이상으로 선하게 응답해주십니다. 신자는 그래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달리 하나님의 구원을 자신의 믿음으로 얻으려 노력하는 신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예수님을 일대일 체험적으로 대면해서 성령의 역사로 새 사람으로 거듭난 체험이 없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어 마땅한 죄인 중의 괴수라는 점을 잘 실감하지 못합니다. 대신에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다 보면 언젠가는 구원을 얻겠지 막연히 기대합니다. 종교적 활동에 열심을 내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고 또 그럼 그분의 은혜도 더 많이 받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때때로 간절히 기도해서 고난이 해결되면 자신의 열성과 수고를 하나님이 좋게 보시고 응답해주셨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이 나를 개인적으로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에 더 거룩하게 성장시켜서 당신의 영광에 참여시키려는 뜻으로 미리부터 마련된 고난이라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고난이 닥칠 때마다 빨리 구해달라는 기도가 신앙으로 자발적으로 행하는 일의 거의 전부입니다. 문제가 해결된 뒤에 하나님의 뜻을 곰곰이 따져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
교회에서 교리를 배워서 납득 수용하고 목사가 가르치는 대로 성실히 준행하는 것은 아무리 그 모습이 경건하고 의로워도 자기가 자신에게 스스로 구원을 주는 것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로, 신자 스스로 열심을 다하는 신앙 행위로, 풍부한 신학적 성경적 지식으로 구원 얻지 못합니다. 오직 성령이 간섭하여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함으로써 죽어있던 자신의 영적 실체가 실제로 되살아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작금 코로나 사태로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너무나 연약하다 못해 무력함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활동을 못할 뿐 아니라 정말로 죽음 앞에, 그것도 자기에게 귀책사유가 전혀 없는 억울한 죽음 앞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 재물 지성이 아무리 많아도 심지어 믿음이 아무리 좋아도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너무나 황당한 상황입니다. 일부 신자들마저 영적으로 침체되다 못해 심한 우울증에 걸리고 있습니다.
죽음을 눈앞에 두면 거의 모든 사람이 그동안의 추악함과 완악함이 없어지거나 줄게 마련입니다. 영원에 대해서 생각하고 죽음 이후를 걱정하게 됩니다.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만들어졌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인식하지 못해도 하나님께로 돌아가려는 본성이 심겨져 있습니다.
지금이야 말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하나님이 마련해준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 문제의 근본원인이 하나님을 멀리한 인간의 탐욕과 죄악 때문임을 잘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궁극적인 구원은 여호와께만 속했고 그 구원은 또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길 밖에 없음을 때를 얻든 못 얻든 전해야 합니다.
영혼이 구원 받는다.
요나는 또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는데”(5절),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다”(7절)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완전히 음부에 떨어진 줄 알았고 더 이상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음부는 아무 의식 없이 영혼마저 무한정 잠만 자는 곳입니다. 그런데 다시 살아났으니 그의 영혼이 구원 받은 것입니다.
복음의 두 번째 본질은 육신이 아니라 영혼이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죽을 때에 육체는 이 땅에 남아서 썩고 영혼만 천국으로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거듭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3:6) 예수님을 모르고 육의 상태에 있는 인간이 고안한 종교는 이 땅의 육신의 삶에만 영향을 미치지 영의 구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을 대적했던 죄에서 용서받음으로써 그분과 실제로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심판에서 면제되어서 그 영혼이 천국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오늘 당장 죽어도 천국 갈 자신이 있다고 담대히 자백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공로 자격 노력에 따른 구원이라면 감히 꿈도 꾸지 못하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실제로 대면함으로써 성자 하나님이신 그분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런 담대한 자신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9)고 선포했습니다. 인생에 사후 심판이 없이 이 땅뿐이면 가장 현명하게 사는 길이 무엇입니까? 법적심판을 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온갖 쾌락을 즐기며 사는 것입니다.
신자는 영원한 구원과 심판이 있음을 알고 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말씀과 기도를 통해 매일 만날 수 있습니다. 죄로 타락한 세상에서 함께 뒹굴 수는 결코 없습니다.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으려 노력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열심히 섬깁니다. 그러나 아무런 현실적 보상은 없고 심지어 핍박까지 받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천국을 위해서 사서 고생하며 목숨까지도 바치는 맹신자 내지 광신자였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신자에겐 성령이 평생 내주합니다. 인간이 만들어질 때부터 천국 바이러스가 심어져 있는데다 성령 하나님 그분은 언제 어디서나 천국을 지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의 이 땅에서의 모든 삶은 주님과 함께 천국까지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경건한 여행길입니다. 신자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영이 거듭나지 않으면 아무리 교회 안에서 동일한 성경을 배우고 동일한 기독교 교리를 실천해도 육의 종교가 됩니다. 육에서 난 것으로 육을 가꾸어서 이전보다 훨씬 나아져도 영은 그대로이므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자기 의지로 경건한 종교인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일뿐입니다. 단적인 증거가 지금 당장 죽어도 천국 갈 자신이 있느냐고 물으면 확답을 하지 못하는 즉, 여전히 이 땅의 육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하나님이 나를 지켜 달라고 뜨겁게 기도하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만약 그것이 전부면 이 땅에서 자기만 살려는 이기주의로 육에서 나오는 기도일 뿐입니다. 코로나가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아서 엄청난 희생자가 나오더라도 이곳보다 비교가 안 되는 더 좋은 보금자리가 천국에 이미 마련되어 있으므로 담대하게 평안을 유지할 수 있어야 신자입니다.
반면에 아직도 예수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멸망뿐이므로 정말로 안타깝고 불쌍하게 여기고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 십자가의 빛을 어떤 방식으로든 비춰주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자를 가장 불행하게 보지만 사실은 그렇게 보는 자들이 진짜로 불행하다는 것을 신자는 알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제사를 드린다.
셋째로 요나는 “주께 제사를 드리겠다”(9절)고 했습니다. 음부의 문턱에서 생명을 건진 요나로선 너무나 당연한 반응입니다. 신자도 구원 이후에는 마땅히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간혹 주일예배를 종교적 의무로 강요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원론적으로 틀린 말은 아닙니다. 의무란 반드시 지켜야 하고 준행 여부에 따라 보상이나 형벌이 따라옵니다. 예배가 종교적 의무라고 여기면 혹시 주일예배에 빠지면 하나님께 벌 받지 않나 염려부터 생깁니다.
모든 성경의 계명이 그러하듯이 주일 예배는 하나님이 신자에게 간절히 바라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한 후에 심히 기뻐하셨고 최초의 인간이 이 땅에서 맞은 첫날이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예배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주일예배는 하나님이 날을 하루 따로 잡아서 종일 우리를 기뻐해주시는 그 기쁨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 안에서 만난 형제자매와 아름다운 공동체를 가꾸어가는 것이 너무 신나고 즐거워서 주일마다 자연히 교회로 향하는 것입니다. 일주일의 첫날을 그분과 함께 하지 않으면 주중에 내내 영적으로 침체되는 것을 느낍니다. 주일예배는 신자의 일주일간의 삶의 중심점이 됩니다.
주중의 일상적 삶에서도 자기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면서 이웃 사랑을 행하면 반드시 은혜가 넘치고 거룩한 열매로 결실 맺습니다. 예배는 신자의 의무가 아니라 찾아서 누려야 하는 축복이자 은혜입니다. 그분의 은혜와 축복을 소망하는 신자라면 일주일 내내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그 중심은 성전을 바라보다가 주일 아침 신이 나서 교회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작금 코로나 사태로 인한 온라인 예배를 종식하고 어서 빨리 현장 예배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며 그렇게 되도록 신자들이 합심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거듭난 신자라면 인터넷 예배라도 순전히 집중하여서 온전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오지에 외로이 섬기는 선교사님들처럼 혼자서 집에서나 심지어 여행 중에 호텔 방에서도 얼마든지 성경을 묵상하고 기도 찬양하며 경건하게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예배의 방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외롭고 죄 많은 여인에게 예배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쳤습니까?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여인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중에 어디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주님은 여기서도 저기서도 아니라고 하면서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는데 아버지는 그렇게 예배하는 사람을 찾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서 은혜의 복음이 온 천하에 선포되는 날이 곧 온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성령으로 거듭나서 당신을 진짜 주인으로 모시고 전적으로 헌신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찾으시고 또 그들이 드리는 예배를 기뻐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온라인 혹은 오프라인 같은 장소와 형식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오직 십자가 복음을 순전하게 전하여서 영과 진리로 예배할 참 신자를 단 한 명이라도 양육하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아무리 언택트 시대라도 신자 한 명이 불신자 한명은 섬기고 기도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서원을 주께 갚는다.
요나는 넷째로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9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가 한번만 살려주시면 무슨 일이든 순종하겠다는 서약이었습니다. 누구라도 생명의 은인이 부탁하는 일이라면 다 들을 것입니다. 요나도 처음과는 달리 군말 없이 니느웨에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라고 여겨선 안 됩니다. 요나는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8절) 자기는 그들과 달리 서원을 지키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받은 은혜를 저버리는 자들은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궁극적이고도 유일한 소망과 가치가 되는 하나님의 반대쪽에 선 자들입니다. 불신자들에게 가장 크게 은혜를 베풀었지만 가장 크게 원수로 갚은 것이 바로 골고다 십자가였지 않습니까?.
신자들이 요나처럼 하나님께 구체적으로 서약한 일이 없다고 가볍게 생각해선 안 됩니다. 처음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지금껏 헛되고 거짓된 삶을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 진실 되고 가치 있는 삶을 살겠다고 서원합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습니다.(고전12:3) 예수님을 입술로 주라고 부르는 정도가 아닙니다. 주님이 진짜 주인이 되는 것으로 생사여탈권을 주님께 온전히 맡기고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세상에서 당신의 일꾼으로 세우려고 불러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출애굽 후 시내 산에서 어떻게 언약을 맺었습니까?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19:5,6) 새 이스라엘인 신약신자들도 열방들에게 유일하신 창조주 참 하나님을 알게 해주는 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제사장 나라 역할을 하라는 직통계시를 받고도 거부하고 도망갔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그곳으로 가도록 이끄신 것입니다. 요나가 제 2의 인생을 살아야 할 이유와 목적도 그분께 은혜를 갚는 것 하나뿐임을 절감했기에 서원을 주께 갚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종교로는 평생토록 하나님의 일을 대신 수행할 동역자가 절대 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위로하거나 구원 하는 일에 바빠서 정신이 없습니다. 오죽하면 바리새인이지만 온유하고 합리적이었던 니고데모마저 도덕과 종교에 최선을 다했는데도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예수님께 구원의 길을 물으러 왔겠습니까?
바울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끝까지 충성하다가 결국에는 순교까지 당할 수 있었습니까? 종교적 의무감에 따라 그런 행위로 스스로 공로를 쌓으려 했다면 너무 힘들어서 일찍 포기했을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여서 예수님이 사람들을 대하는 마음을 그에게도 충만하게 심어준 것입니다. 바로 연약한 교회와 성도는 물론 아직도 예수를 모르는 불신자들에 대한 애끓는 염려와 긍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핍박 받는 자, 소외된 자, 불치병자, 불구자, 창녀, 고아, 과부, 세리 같은 자들을 주로 만나서 교제하고 위로 기도하고 치유해주신 심정을 바울도 깊이 이해하게, 아니 가슴 가득히 그대로 채워진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심정을 신자들에게 심어줍니다. 그래서 남들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고 중심에 예수님을 모셨는지 아닌지만 보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도 내주하시는 성령님에게 우리 마음을 활짝 열어드려야 합니다. 내 욕심과 고집을 죽여주는 대신에 예수님의 심정으로 충만히 채워져서 바울처럼 살아가겠다고 서원해야 합니다.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 나오며 절대적 진리는 오직 그분의 말씀입니다. 진리만 힘이 있고 그분의 사랑만이 사람들을 사람답게 바로 세워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분의 진리를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그 진리대로 살아가면 넘치는 복이 임합니다. 정말로 평안과 자유와 기쁨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철학적 도덕적 종교적 구호나 개념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실제로 살아 역사하는 말씀입니다. 그분은 나에게 정말로 당신을 대리하는 전권대사로 세상과 사람 앞에 당당하게 세워주십니다. 그럼 또 당신의 모든 권능이 임해서 하늘의 신령한 보물들이 이 땅에 심겨지고 열매가 맺힙니다.
쉽게 말해 한 번이라도 하나님의 진리대로 따르고 또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섬겨본 자는 반드시 살아 역사하는 그분의 권능과 은혜를 넘치도록 체험하게 됩니다. 그 일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좋고 의미와 가치가 있고 진실함을 깨닫게 됩니다. 자꾸만 더 많이 계속해서 하고 싶어집니다. 세상 모든 것이 그 일에 비하면 재미 의미 가치가 너무 적어집니다.
코로나 사태로 사람들은 세상의 것들로는 궁극적이고 온전한 충족을 얻지 못하며 모든 것이 일시적 상대적이라 순전한 관계를 맺을 수도 없음을 조금씩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역사상 최고의 환난인데도 역사상 최고로 서로 배반하고 음해 모략하며 자기가 더 많이 차지하려고 시기 경쟁 다툼 분노 저주합니다. 정치 지도자들부터 그러합니다. 영적으로 너무 피폐해져 있음을 모두가 느끼고 있습니다. 인간이 정말로 걸어 가야할 바른 길을 온전히 걸어가는 영적 지도자가 절실한 때입니다. 아무도 겉으로 말은 하지 않아도 모두가 절실하게 구원자를 찾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결국 돌아갈 곳은 예수님의 십자가 그늘 아래 한군데뿐입니다. 신자는 예수를 따라가며 정말로 신나고 즐겁고 활기차게 사는 모습을 세상 앞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이런 고난의 때일수록 신자들이 어떻게 하는지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땅에 떨어진 기독교와 예수쟁이와 교회에 대한 신망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말씀드린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진리의 중요한 핵심 넷은 하나도 빠져선 안 되고 마지막 넷째까지 실현하고 있어야 합니다. 요나는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만 미래 시제로 표현되었습니다. 새 생명을 얻고 난 이후로 평생을 두고 실천해야 할 유일한 과제라는 뜻입니다. 종교적 의무감으로 행하면 번번이 실패합니다. 절대로 성령의 역사를 경시해선 안 됩니다. 바울처럼 저들이 너무 불쌍하고 또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너무 기쁘면 성령님이 일상적인 삶에서 한 걸음씩 인도해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예수 안에 들어왔는지 아닌지 오직 둘로만 나누십니다. 신자도 이미 천국을 확보했기에 하나님께 서원을 갚아나가는 자와 구원을 얻으려 노력하는 중이라 하나님께 서원조차 하지 않은 자 둘로만 나눕니다. 예수님을 진짜 주인으로 모신 신자이냐 교회활동으로 스스로 경건해지려는 종교인이냐의 차이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속합니까?
(10/25/2020)
신앙 행위로, 풍부한 신학적 성경적 지식으로 구원 얻지 못합니다 => 구원을
: 오타라기보단 목사님의 말투(또는 문체)로 이해하고 넘어갈 부분인 것 같습니다.
치유해주신 심정을 바울도 깊이 이해하게, 아니 가슴 가득히 채워진 것입니다 => 채워준
: '채워진'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굳이 바꾼다면 '심정을'을 '심정이'로 바꾸는 쪽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 일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좋고 의미 가치 있고 진실함을 깨닫게 됩니다 => '의미와 가치가 있고' 가 조금 더 부드러운 것 같습니다.
: 첫 번째와 동일
모든 인간이 결국은 돌아갈 곳은 => '결국' 이 조금 더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 위와 동일. 틀린 지적은 아니지만, 명백한 오타라면 모르겠으나 말투 또는 문체, 특징으로 볼 수 있는 부분까지 세세하게 지적하실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네, 오타라기보단 목사님만의 특유의 말투 또는 문체인것이 맞습니다. 설교육성이 담긴 동영상을 직접 볼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치만 영상없이 글로만 읽을때는 조금 더 자연스런 느낌일것 같아 오타제보하면서 그런부분도 함께 제보해 왔습니다. 오타제보하다보니 딱히 이와 같은 경우 따로 명명할것이 마땅치 않아 그냥 계속 오타제보라 통칭했습니다. 보시기에 거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앞부분에 '심정을'를 사용했다면 ~ 채워준이 맞습니다. 또는 낭여님 지적처럼 심정이 ~ 채워진
결국은 ~ 곳은 처럼 한문장에서 서술하려는 주체가 동일 반복 될때의 어색함을 없애려 앞쪽의 결국은에서 은을 빼는것이 한결 자연스러울것 같습니다.
목사님의 글이 미려하고 또 그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잘 전달되어지는 이미 훌륭한 글임에도 작은 것 하나로 그것이 아쉽게 느껴질까 하는 마음에 오타제보하다 보니 말투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것도 제 개인적인 욕심에 지적아닌 지적을 하게되었습니다. 다른 많은 분들도 보시는데 너무 제 개인적인 생각만을 고수한것 같아 죄송하고 사과드립니다. 제 오타제보는 목사님께서 보시고 수정하실것만 수정하시고 제 댓글은 바로 삭제하시니 그 시간동안만 양해 부탁드립니다^^;
목사님의 글을 읽을 때 그 특유의 말투/문체를 좋아해서 제가 과민하게 반응한 것 같습니다. 제 댓글이 혹시 공격적으로 느껴지셨다면 죄송합니다. 날마다순종님께서 이 사이트와 목사님의 사역을 많이 아끼시고 또 여러가지로 수고해시고 (사역을) 응원하시는 점 좋게 생각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ㅇ '채워준', '채워진'에 대해서
: 전체 문장을 보면 '예수님이 핍박 받는 자, 소외된 자, 불치병자, 불구자, 창녀, 고아, 과부, 세리 같은 자들을 주로 만나서 교제하고 위로 기도하고 치유해주신 심정을 바울도 깊이 이해하게, 아니 가슴 가득히 그대로 채워진 것입니다.'이 해당 단락입니다. 문맥 상 "예수님이 ~ 치유해주신 '심정을' 바울도 깊이 이해하게," 여기서 '심정을'은 뒤에 따라오는 '깊이 이해하게'에 대응하는 것이고, 그 뒷 부분에서 '예수님의 심정을 바울이 깊이 이해한 정도가 아니라, 그 심정이 가슴 가득히 채워졌다'는 의미로 '채워진'이라 쓰인 것입니다. 즉, "~ 심정을 바울도 깊이 이해하게, 아니 가슴 가득히 그대로 (심정이) 채워진 것입니다." 따라서 사실 아무 문제 없는 문장입니다. '채워준'으로 바꾸면 오히려 어색하고 잘못된 문장이 됩니다.
아닙니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을 보실 다른분들을 고려치 못한 제가 죄송합니다. 그리고 제가 제보하는 것중에 눈에 띄는 오타외에 지적해 주신 부분같은 경우처럼 이런것은 제가 독자로서 읽다가 무언가 어색함이 느껴지면 저도 확실치 않아 조심스레 더 나을것 같다고 나름 부연하여 제보한 것입니다^^; 글작성에 있어 저와는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뛰어나신 목사님께서 보시고 판단하여 수정할것만 수정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오직예수인가를 아끼는 마음이 낭여님의 지적에 담겨 있어 저와 같은 심정일것을 생각하니 너무 좋습니다^^
혹 언제든 제가 잘못하고 있는것이 보이면 오늘처럼 일깨워 주십시요. 샬롬!
오타제보 : 신앙 행위로, 풍부한 신학적 성경적 지식으로 구원 얻지 못합니다 => 구원을
치유해주신 심정을 바울도 깊이 이해하게, 아니 가슴 가득히 채워진 것입니다 => 채워준
그 일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좋고 의미 가치 있고 진실함을 깨닫게 됩니다 => '의미와 가치가 있고' 가 조금 더 부드러운 것 같습니다.
영적 지도자 절실한 때입니다 => 지도자가
모든 인간이 결국은 돌아갈 곳은 => '결국' 이 조금 더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영혼이 구원 받는다.
감사의 제사를 드린다.
서원을 주께 갚는다.
저를 비롯하여 이곳을 찾는 주님의 자녀들 모두가 주님과 인격적 만남을 통해 날마다 십자가 복음을 체험하여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과 은혜에 평생을 감사, 찬양하며 순종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