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6:8,9) 친구들 덕분에 천국 갈 자신이 있는가?
돌아온 탕자 시리즈 (12)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눅16:8,9)
더 난해한 비유의 결론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정작 가르치고자 하는 진리는 마무리해서 해설해주는 교훈에 드러납니다. 비유는 어디까지나 그 진리를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예화 같은 역할만 합니다. 비유 자체를 해석할 때는 반드시 그 결론에 부응하는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주님은 8절 후반부터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풀어주셨는데 가장 먼저 사람은 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따라서 두 부류로 나눠진다고 했습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출세형통만을 목적으로 사는 이 세대의 아들들은 자기 일신을 위한 돈 관리를 영리하게 잘하지만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빛의 아들들은 그러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그렇게 결론 내렸다면 청지기는 이 세대의 아들의 대표적인 예로 든 것입니다. 비유에서 주인이 그를 지혜롭다고 칭찬한 것을 의아하게 여기지만 단순히 자기 앞날에 대한 대비를 잘했다고 인정해준 것뿐입니다. “옳지 않은 청지기”라고 표현했기에 주인이 청지기의 사람됨을 칭찬할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행했기에" 칭찬한다고 밝혀놓았습니다.
이어지는 9절의 내용이 그 사실을 더 확실히 뒷받침해줍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이해하기 더 어려워 보입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면서 나중에 그 친구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한다고 합니다. 영주할 처소라면 천국이고 그럼 불의한 재물의 힘을 입어서 구원을 준비하라는 뜻이 되는데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천국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믿는 믿음으로만 들어갈 수 있지 않습니까?
어쨌든 이 말씀으로 인해 청지기 비유의 주제도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앞선 세 비유처럼 구원에 관한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졌습니다. 그런데 앞선 세 비유에선 목자, 여인, 아버지가 양과 동전과 아들을 찾아내어서 구원해주었습니다. 지금은 구원이 불의한 재물을 사용하는 인간 스스로의 노력에 달린 것 같이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주제를 그것도 가장 중요한 구원에 관한 영적 진리를 두고 서로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실 리는 결코 없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예수님이 왜 “불의한 재물”이라고 표현했는지부터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재물’의 원어는 맘몬 신, 보화, 재물이라는 뜻으로 중요한 영어성경들도 돈(money)이나 물질(material)이 아니라 ‘mammon’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돈이 신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헬라어 마모니스를 의인화한 것입니다.
이 맘몬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 네 번만(마6:24, 눅16:9,11,13) 등장하는데 특이하게도 전부 다 예수님이 사용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과 맘몬 둘 중에 한 주인만 모셔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맘몬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력을 지닌 존재로 묘사했습니다. 성경은 시종일관 하나님과 견줄만한 신은 단 하나도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맘몬을 사람을 조종 통치하는 능력에서 당신과 동격이라고 인정해준 셈입니다.
돈이나 재산 자체가 사탄이라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주님이 불의한 청지기 비유로 계시하려는 첫째 진리가 돈에 대한 태도로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눠진다는 것이었습니다.(8절b) 이제 9절은 그 진리를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재물을 가장 중요한 보물로 여기고 주인으로 모시고 섬기는 모습이 마치 맘몬 신을 숭배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불의하다는 단어는 영어로 unjust라고 표현되었듯이 법적 도덕적 불의, 불법, 사악함, 불공평 등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의롭다라고 말할 때는 단순히 착하게 살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순종 실천하는 것입니다. 불의하다는 것은 그 반대로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게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비유에서 주인이 청지기에게 자기 재산을 몽땅 맡길 테니까 자기 대신에 자신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책임지고 잘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만약 청지기가 그렇게 했다면 의로운 재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청지기는 주인의 뜻과 정반대로 주인의 재산을 임의로 낭비했을 뿐 아니라 당장 눈앞에 닥칠 자기 일신상의 안전을 위해서 착복했기에 불의한 재물이 되었습니다.
재물 자체는 가치중립적입니다. 그것이 의롭다 혹은 불의하다는 평가는 인간이 어떻게 사용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그분의 방식으로 벌고 쓰면 의로운 재물이며 그 반대로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세상적인 방식을 따르면 불의한 재물이 됩니다.
옳지 않은 청지기는 재물을 사용해서 친구를 사귀려 했습니다. 그가 주인 몰래 부채를 크게 감면해주는 부정을 저지른 이유를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4절)고 말합니다. 자기에게 큰 신세를 졌기에 자기가 궁핍해지면 어떻게든 그들이 도와주지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고 계산한 것입니다.
비유는 결론에 드러난 진리를 쉽게 이해시키는 역할만 한다는 원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비유에선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4절)고 표현했는데 비유를 해설한 9절에선 “저희가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고 말합니다. 친구가 집으로 영접하는 것은 같은데 처소에 ‘영주할’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만 다릅니다.
그럼 비유의 청지기는 이 땅의 친구 집으로 영접 받을 수는 있지만 영원한 처소로는 영접 받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재물로 친구를 사귀되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게 자기만 살려는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빛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재물을 의롭게 사용해서 친구를 사귀면 하나님의 영원한 처소로 영접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인가?
그런데 여전히 선행이 구원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문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에 대해 정답을 제시하는 성경 기사가 하나 있습니다. 잘 아시는 사마리아인의 비유(눅10:25-37)입니다. 그 비유를 설명하자면 몇 시간이 걸리지만 지금 살펴보고 있는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 문제에 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에게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눅10:25)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가장 중요한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잘하면 된다고 대답해주었습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의 대답이 도덕적 종교적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율법사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느냐고 즉, 행위 구원이 옳다고 전제한 후에 그 방법만 알고 싶다고 질문했기에 그 의도에 맞추어서 대답해준 것뿐입니다.
주님의 대답을 듣자마자 그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내 이웃이 누구인지 즉, 누구를 사랑하면 되는지 예수님께 반문했습니다.(29절) 그로선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하고 이웃사랑도 잘하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마리아 인의 비유를 말씀해주셨습니다. 길가다 강도당해 거의 죽게 된 사람을 지나가던 제사장과 레위인 둘 다 외면하고 자기 갈 길로 가버렸습니다. 사마리아인만 자기 바쁜 일정을 제쳐두고 자기 돈을 써가며 여관에 데려다가 정성껏 간호해서 살렸습니다.
비유를 마친 후에 예수님이 율법사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사마리아인 비유에 등장하는 제사장, 레위인, 사마리아인 셋 중에 누가 그 다친 사람의 이웃인지 대답해보라고 했습니다. 정말로 초등학생도 풀 수 있는 도덕 시험으로 정답은 사마리아인입니다. 율법사도 정답을 말했는데 그 대답이 조금 이상했습니다. 사마라이 인이라고 딱 잘라서 말하지 않고 단순히 자비를 베푼 자라고 답했습니다.(36절)
예수님과 율법사와의 이런 문답에 너무나 흥미롭게도 오늘 본문 말씀과 연결되는 영적 진리가 숨겨져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동족만, 그것도 율법과 장로의 유전을 잘 따르는 자들만 이웃이라고 간주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웃들끼리는 정말로 사랑을 잘했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일련의 비유를 말씀하게 된 계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세리와 죄인과는 아예 식사교제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영생의 길을 물은 율법 교사처럼 그들은 민족의 반역자인 세리와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은 자기들의 이웃 즉 친구가 절대로 될 수 없다고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북왕국이 앗시리아에게 점령당한 후에 그들과 혼혈로 태어난 사마리아인들도 민족 반역자로 정죄하고 아예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율법교사는 평소에 이웃이라고 취급도 않는 사마리아인을 강도당한 자의 이웃이라고 인정해주기 싫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단순히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의에 대해서 가르치는 율법사임에도 그 썩어빠진 자존심을 지키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이 얼마나 치사하고 비겁합니까? 그것도 그의 심령 깊숙이 꿰뚫어보시는 독생자 하나님 앞에서 말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인가라는 율법사의 질문은 이웃을 정하는 주체가 자기라는 뜻입니다. 그로선 남들보다 의로운 자기가 이웃의 자격과 조건을 정했으니 그 이웃의 범위가 틀렸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문장의 주어를 바꾸어서 반문했습니다. 이웃의 범위를 정하는 주체는 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랑을 베푸는 자라도 이웃을 고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당장에 궁핍하고 환난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그 누구라도 차별하지 않고 그 필요를 채워주며 섬기는 자라야 비로소 그 사람의 이웃이 될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유의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 질문을 한 율법사에 해당됩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에게 너는 이웃을 제대로 사랑하고 있지도 않고 그 전에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줄 자격도 없다고 꾸짖은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한 혈통으로 만드셨기에 구태여 이웃과 이웃이 아닌 자로 나눠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의롭고 경건한 도덕과 종교적 잣대라 해도 절대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판단 구분 차별해선 안 됩니다. 그런 것으로 인간관계의 기준으로 삼으면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만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질문한 율법교사나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제사장과 레위인은 전부 하나님을 잘 알고 뜨겁게 믿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재물을 사용하여 이웃들을 사랑하는데도 열심이었는데 그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고 선한 일입니다. 문제는 딱 하나 자기들이 사랑해야 할 이웃의 범위를 자기들 임의로 선택하고 시행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당신을 대신할 청지기로 세웠습니다. 가난하고 비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기도로 위로해주고 성전에 바쳐진 십일조로 섬겨서 살려내는 것이 그들이 맡은 직무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당신을 잘 아는 자들인지라 당신 대신에 사랑하라고 붙여주신 양들을 외면 배척 멸시 천대했습니다. 정작 사랑이 절실한 자들과는 식사도 나누지 않아서 세상에선 죽은 자와 방불하게 만들었습니다.
거기다 그들이 미처 몰랐던 사항이 하나 더 있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선 이 땅에서도 온전한 영접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탕자 비유의 둘째 아들도 처음에는 재물로 친구를 사귀려 들었고 어는 정도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큰 기근이 닥쳤을 때에 평소에 자기 돈으로 덕을 본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려 했으나 모두가 자기 살기 바빠서 아예 돼지 취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불의한 청지기도 둘째 아들의 경우에 설명했기에 생략되었지만 결국에는 친구들에게서 버림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결론에 따르면 불법에 동참한 자들도 돈을 주인으로 삼아서 자기만 높이려 들기에 자기 돈을 자기 외에는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상종도 않기에 상대 지역에 여행은 더더욱 하지 않기에 강도당한 자는 유대인으로 봐야 합니다. 일반 유대인은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섬깁니다. 강도당한 자가 일반 유대인이라면 평소에 섬기던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외면당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평소에 담임목사를 잘 섬기던 교인이 아파서 다 죽어 가는데도 목사가 심방 한 번 가지 않은 셈입니다. 만약 강도당한 자가 그들과 같은 신분이었다면 평소에 자주 만나는 가까운 사역자들에게 배척당했습니다. 탕자 비유의 이방족속과 똑같이 강도당한 자를 돌보기에는 자기 시간과 돈이 너무 아깝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선행 구원이 아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5:46)고 선포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기 동족만 이웃 삼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사람 취급도 않고 밥도 한 끼 나눠먹지 않는 세리도 그런 사랑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런 사랑에 무슨 상이 있으리요라고 선포했습니다. 반어법 적인 표현으로 하나님께 아무런 보상 즉, 구원도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마무리 하면서 율법교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사마리아인 같이)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해서 물었으니까 그에 대한 예수님의 최종 답변입니다.
그는 이웃 사랑을 잘하고 있기에 영생을 이미 얻은 것처럼 자신을 뽐내려고 예수님께 내 이웃이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 가르침과 반대되는 이웃 사랑을 했기에 영생을 얻지 못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대신에 자기들이 사람 취급도 않는 사마리아인이 그 상을 얻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재물로 친구를 사귀되 이 땅의 처소에만 영접하는 것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한 것 둘로 완전히 나뉘었습니다.
그렇다고 사마리아 인이 구원 받은 이유가 도덕적 종교적인 의로 선행을 베푼 때문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인이 유대 지역을 여행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긴급한 용무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강도당한 자가 유대인이라면 자기 원수나 다름없기에 자기 죄 값을 받았다고 고소하다고 여기고 방치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급한 용무를 잠시 제쳐두고 자기 시간과 비용을 전혀 아끼지 않고 환자에게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다 베풀었습니다.
평소에 어떤 사람도 그 민족 계급 신분 성별로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대하고 특별히 어려운 사람은 언제나 도와주는 사람이 아니고는 그럴 수 없습니다. 율법사는 상대가 되돌려주는 사랑을 보고 친구를 사귀었지만 사마리아인은 상대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먼저 다가가서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그의 사람 자체가 빛의 아들이었기에 의로운 일이 몸에서 우러나왔고 재물도 의롭게 사용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친구들이 영주할 처소로 영접할 것이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평소에 비유의 사마리아인과 같은 생각과 자세로 살고 있다면 친구들과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 마련이라는 것이며 또 그런 자는 당연히 천국으로 영접된다는 것입니다. 돈을 의롭게 사용한 행위 때문이 아니라 돈 대신에 하나님만 주인으로 모시고 실제로 그렇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차별 없는 진정한 사랑으로 섬겨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었기에 결과적으로 친구들이 천국으로 영접하는 셈이라는 것입니다.
재물이 없어질 때도 탕자인 둘째 아들이 파산한 것이나 불의한 청지기가 해고당한 때가 아닙니다.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는 일과 연결해서 말씀하셨기에 이 세상이 없어질 때인 마지막 날입니다. 어리석고 죄에 찌든 인간 친구들이 영주할 처소로 영접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재물 뿐 아니라 재물을 얻을 능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신8:18) 신자가 갖고 있는 소유의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며 신자는 그것을 그분의 뜻에 맞게 관리해야 할 청지기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재물을 주시는 이유도 일용할 양식을 제외하고는 고난에 빠진 이웃을 섬기는 일에 사용하여서 친구로 만들어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재물을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또 그러려고 자기와 수준이 비슷한 자를 사귀는 데만 사용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대적한 것입니다. 당연히 율법사처럼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섬겨도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친구들이 당신을 천국으로 보내어 주는가?
항상 그러하듯이 제자들에게 주신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단 한 치의 빠짐없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가 불의한 청지기는 아닌지 되돌아봐야 합니다. 혹시라도 예수님을 찾아온 율법교사처럼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만 사랑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가진 모든 소유는 물론 나라는 존재와 삶과 일생 전부가 하나님의 것임을 확신합니까? 그래서 정말로 가진 모든 것으로 이웃을 진정으로 섬기고 있습니까?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믿음이 아닙니다. 이번에 코비나 백신이 효과가 확실하고 부작용이 없다고 확신하면 어서 빨리 맞으려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믿음이라면 이웃을 전정으로 사랑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최근 미국에서 흑인과 아시아 사람들에 대한 인종차별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바이블 벨트라고 불리는 지역에서 오히려 그런 현상이 더 심합니다. 근본적으로 백인우월주의에 묶여있기 때문인데 예수님을 믿고도 노골적으로 인종차별을 한다면 그 믿음 즉, 구원여부도 의심해봐야 합니다.
마침 애틀랜타의 총기난사 범인은 교인이었는데 그가 출석하던 교회에서 뒤늦게 그를 파문했습니다. 물론 마땅한 조치이긴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를 파문했다고 그 교회와 교인들의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이 면제될까요? 그 또한 백인우월주의자인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잔인한 행동을 하게 된 배경에 교회에서조차 끼리끼리 모였기에 평소에 그가 차별대우 받았다고 느끼지는 않았을까요? 그런 따돌림이 계속 쌓이는 바람에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평소에 싫어하던 아시아인에게 폭발한 것은 아닐까요?
교회만은 세상에서 차별 박대 외면 받은 모든 자들이 마지막으로, 정확히 말해서 가장 먼저 찾아와 위로를 받음으로써 마음의 안식을 되찾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세리와 죄인도 마지막으로, 사실은 아무도 자기들과 교제해주지 않으니까 자기들과 신분과 위치가 다른 사람으로 자기들을 가장 먼저 만나준 사람이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위로와 사랑을 받아서 지난 모든 상처와 눌림이 깨끗이 씻어졌습니다.
교회에서 말썽이 많이 생기는 행사의 대표적인 것은 년 초에 구역을 재편성할 때를 들 수 있습니다. 왜 목사님과 당회가 마음대로 마음에 안 드는 데다 자신에게 전혀 이득이 될 것 같지 않은 사람들과 섞여놓았느냐고 반발합니다. 자기들과 잘 통하고 수준이 비슷한 사람들로만 묶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 전에 교회를 선택할 때부터 외적 여건과 신자들의 분위기부터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들 재물의 힘을 빌려서 자기를 높이려 들기에 결국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과만 사귀겠다는 것입니다.
재물로 진정한 친구를 사귀려면 친구가 재물보다 정말로 좋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다른 길이 없습니다. 재물로 인한 철저한 실패를 겪어야 합니다. 재물 때문에 비참해진 자기를 하나님은 끝까지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더 고귀한 하늘의 보물로 더 풍성히 부어주셨다는 생생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범사를, 그런 실패까지고 거룩하게 통치하시기에 그분을 떠나선 항상 더 처절한 실패뿐이라는 진리가 몸에 완전히 배여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든 진짜로 하나님이 자신의 주인이어야만 재물의 묶임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께 받은 것이 처음부터 자기 것인 양 착각했고 자기가 잘 관리해서 더 풍부하게 늘릴 자신이 있었습니다. 결과는 허랑방탕한 실패였고 큰 기근이 닥치자 그동안 돈으로 사귀었던 친구에게 배신만 당했습니다. 대신에 모든 것을 다시 더 풍성히 주시고 언제 어디서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처음으로 체험했습니다. 재물로 인한 큰 처참한 실패를 통해서 오히려 재물은 절대로 자기와 자기 이웃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음을 뼈저리게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 후로는 자기도 아버지처럼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해 하나님을 외면하고 돈을 쫓으려다 처절하게 실패한 자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흥미롭게도 성인이 되어서 교회에 제 발로 출석하는 이유의 대부분이 현실의 고난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성경에 계시된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를 깨닫게 되면 그 재물이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절감하게 해주려고 교회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오히려 더 감사해집니다. 이전에 재물이 없어서 가난한 것이 힘 들긴 했어도 예수님을 몰랐던 자기 자신이 훨씬 더 불쌍했다고 뒤늦게나마 깨달아졌기 때문입니다.
간혹 교회에서 다시 재물을 더 많이 얻으려 들거나 재물로 친구로 사귀려 드는 자들이 있습니다. 율법사처럼 이웃사랑을 잘못하고 있고 영생을 얻는 법도 완전히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구주로 영접했다는 증거는 간단합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가난에서 벗어나야만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 불쌍해지는 것입니다. 그들의 눈앞에 기다리는 것은 자기가 겪었던 것과 똑같은 실패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재물보다 친구가 더 좋아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처럼 자기 시간과 재물을 소비해서라도 고난 중에 있는 자를 도울 수 있는 자입니다. 신자란 재물로 이웃을 섬기는 모습 안에 십자가 복음이 드러나게 하는 자입니다.
주님은 지금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통해 제자들에게 돈으로 실패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찾아와서 상의하고 싶은 친구가 되어주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최소한 불의한 청지기처럼 불의한 재물로 불의한 방식으로 친구를 사귐으로써 주인인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변 친구들 덕분에 영주할 처소에 들어갈 자신이 있습니까?
(3/28/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