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7:1,2) 지옥에 떨어질 사람의 조건은?
돌아온 탕자 시리즈 (17)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눅17:1,2)
실족케 하는 것은?
성경의 장절 구분이 때로는 그 의미의 흐름과 조금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살펴본 대로 15장과 16장은 예수님이 한 장소에서 같은 주제로 바리새인과 제자들에게 번갈아가며 가르쳤던 내용입니다. 그리고 17:11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라고 장소와 시간이 변경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중간의 17:1-10의 본문은 주님이 지난 두 장을 말씀하신 곳에서 바로 이어서, 아니면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시간과 장소에서 말씀하셨다고 봐야 합니다. 본문을 16장 마지막에 포함시키는 것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
본문은 이 말씀을 하게 된 특별한 사건이나 계기를 밝히지 않고 단순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라고 시작합니다. 주님이 생각하시기에 제자들에게 지금까지의 비유와 해설을 간단히 정리해서 다시 상기시켜줄 필요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죄인을 차별하는 문제와 본문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주목해서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먼저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1절a) 실족은 본인이 부주의나 실수로 발을 헛디딘다는 의미대로 신자답게 살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을 어기거나 죄를 범하여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뚤어지는 것입니다. 실족하게 하는 것이라고 타동사로 표현한 까닭은 원어로는 덫, 미끼, 올무를 말하는 보통명사 스칸탈론인데 그 의미를 풀어서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또 그래서 실족하게 하는 것이라고 누가 덫을 놓는지 주체를 밝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없을 수 없다고 이중 부정으로 표현했으므로 강한 긍정으로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죄로 찌든 인간들 사이에 부대끼면서 이런저런 현실적 난관이 닥치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없을 수 없으나”라는 말은 불가피한 외부의 훼방으로 넘어졌으니까 언제든 진정으로 회개하면 용서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로 실족하게 하는 사람들을 향해선 주님은 ‘화로다’라고 말했습니다.(1절b) ‘화로다’는 큰 슬픔이나 싫어함을 표현하는 감탄사입니다. 다른 이가 넘어질 수밖에 없도록 덫이나 올무를 놓는 사람은 크게 슬퍼해야할 정도의 엄청나게 불행한 결말을 맞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나아가 그들이 겪을 불행보다 연자 맷돌로 목이 묶여서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더 낫다고 했습니다.(2절) 연자 맷돌은 앉아서 손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고 방앗간에서 당나귀가 끄는 엄청나게 큰 맷돌입니다. 그 맷돌에 목이 메어 바다에 던져지면 아무도 살아나지 못하고 곧바로 익사합니다. 실제로 고대 로마나 그리스에서 중죄인에게 시행하던 사형제도의 하나였습니다. 비유이긴 하지만 물보다 더 괴로운 지옥의 불 심판을 의미하므로 주님은 실족케 하는 자들에게 ‘화로다’라고 크게 탄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덫을 놓은 바리새인들
덫이란 교묘하게 위장해서 놓기에 반사 신경이나 감각기관이 뛰어난 맹수마저 걸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평소에 상당한 믿음으로 세심하게 조심해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걸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제자들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덫은 과연 무엇입니까?
지금껏 예수님이 바리새인에게 당한 일들에서 쉽게 알 수 있는데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안식일에 주님이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칠 때에 오른 손이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할 증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니.”(눅6:7)라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손 마른 사람이 병을 고침 받는 일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직 자기들의 경쟁자로 갑자기 인기가 치솟은 예수라는 시골 랍비가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지만 지켜보았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도 아랑곳 않고 오히려 회당 한 가운데 일어서게 해서 말씀 한마디로 고쳐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까 하고 서로 의논하기 시작했습니다.(11절) 오른 손이 마비가 되었다는 것은 정상생활을 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자를 회복시켜주었는데도 안식일에는 어떤 노동도 해선 안 된다고 자기들이 따로 만든 규정을 위반한 것을 꼬투리 삼아서 오히려 주님을 죽이려 들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옭아매어 핍박하려는 시도가 바로 덫입니다. 장차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도 동일한 덫을 겪을 것이므로 미리 경고해준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당신처럼 그런 덫은 완전히 무시하고 하나님의 뜻만 따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벌을, 그것도 지옥 심판을 받을 자는 오히려 그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이 쳐놓은 올무에 대해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9절)고 물었습니다. 당시 상황으로 따지면 안식일에 선을 행하여 생명을 구하는 것과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것과 어느 것이 더 중요하느냐고 말해야 합니다. 주님은 안식일 규정 대신 악을 행하고 죽이는 것과 대비했습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의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것이 악을 행하는 것이며 심지어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너무 심한 말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정상생활을 하지 못하는 자를 얼마든지 고쳐줄 수 있는데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그야말로 악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길 가다 강도 만나 죽게 된 자를 그대로 버리고 간다면 그를 죽인 것과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안식일 규정을 위반한 사례에서 많은 신자들이 미처 모르고 지나가는 너무나 중요한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십팔 년 동안 귀신들려 앓으며 허리가 꼬부라진 꼽추 여인을 안수하여서 고쳐주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회당장이 화를 내며 회중들에게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눅13:14)고 말했습니다.
이 회당장의 말도 분명히 일리가 있지 않습니까? 비록 불구이긴 했지만 십팔 년이나 되었으면 예수님이 하루 정도만 참았다가 안식일 다음날에 고쳐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럼 바리새인들과 분란이 일어날 리도 없고 주님은 당신의 권능도 보이고 또 율법도 존중한다는 의미를 드러내지 않습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속담대로 양쪽이 원하는 바를 다 이루면서 화평을 이룰 수 있지 않습니까?
굳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의미?
병자를 고쳐주는 것이 선하고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회당장과 그 회당에 모인 유대인들은 물론 믿음이 없어도 상식 차원에서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안식일에 고쳐주면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를 리 없습니다. 주님이 굳이 다른 날로 미루지 않았다면 반드시 안식일에 고쳐야만 했던 주님만의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뜻은 간단합니다. 만약에 치유만이 목적이라면 그 회당장의 말대로 주중에 행하면 됩니다. 당시 유대사회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정신과는 틀리게 안식일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그런 종교적 오류를 고쳐주는 것이 안식일에 행하는 선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누가 제정합니까?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제정합니다. 그럼 그것을 고치거나 추가하는 것도 오직 하나님만이 주관해야 할 그분 고유의 일입니다. 물론 삶에 적용 실천하기 위해선 구체적인 지침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게 율법을 해석하여서 그 뜻에 위배되는 추가 규정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추가 세부 규정은 꼭 지켜야 할 의미도 필요도 없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을 제정한 원래의 뜻은 무엇입니까? 십계명의 넷째 계명은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출20:9)라고 전제한 후에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명했습니다. 안식일에 쉬어야 할 일이 주중에 하는 생업이라는 뜻입니다. 의사도 생업을 쉬어야 하므로 안식일에는 병원 문을 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다 만들었습니다. 일곱 째 날에는 생명을 창조하는 일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반면에 당신께서 그 생명을 유지 보존케 하는 일은 창조와 동시에 영원토록 단 하루도 쉬지 않고 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으니까 신자도 노동을 완전히 중지해야 한다는 의미는 사실상 처음 계명을 제정할 때부터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인간을 창조한 후에 심히 기뻐하신 첫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최초 인간이 이 땅에서 처음 맞은 날도 바로 하나님이 최고 큰 기쁨 가운데 안식하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더러 당신의 그 기쁨에 동참시켜서 함께 교제하려는 목적으로 일곱째 날을 복을 주어서 따로 구별해낸 것입니다.(창2:3, 출20:11)
쉽게 말해 하나님이 내가 너희와 교제하기 위해서 따로 하루를 떼어낼 테니까 너희도 일주일 중에 하루를 당신을 위해 떼어내라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생명을 주시고 아름답고 건강하게 보존해주는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며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넷째 계명도 가장 먼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즉, 하나님의 그 뜻을 기념하라고 명한 것입니다.(출20:8)
지금 손 마른 자나 허리가 불구인 여인이 완전한 고침을 받고 정상인이 되었으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하나님도 인간이 저지른 죄악의 폐해로 그런 질병과 불구로 고통을 겪다가 당신께서 원래 창조했던 아름다운 모습으로 회복되었으니 하늘에서 크게 기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태여 안식일에 그들을 고쳐준 뜻은 하나님의 그 큰 기쁨에 동참하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안식일규정을 원래대로 바로잡음으로써 당신이 인간 랍비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낸 것입니다. 인간랍비라면 당연히 유대공회가 정한 규정대로 주중에 고쳐야 합니다. 지금 주님은 그 환자들은 물론 모든 사람들을 창조했고 거룩하게 통치하고 계시는 하나님이므로 더더욱 안식일에 고치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에 대해 아무리 유대교 지도자들이라도 인간은 절대 시시비비를 따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면 벌 받는다는 식이 아닙니다. 안식일이 단순히 종교지식의 많고 적음이나 또 그에 따라 계명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 여부를 가리는 날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께 상을 더 받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가르쳐선 더더욱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가르치고 그것을 덫으로 삼아서 편 가름하는 바리새인들이야말로 하나님에 의해 어두운 데로 쫓겨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주일에 예배당에 먼저 오셔서 좌정해계시고 신자가 어떤 모습이든 교회에 출석한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당신께서 선도적 주도적으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모든 상처 슬픔 고난을 치유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소원해진 관계를 완전히 정상으로 회복한 후에 그분의 큰 기쁨에 동참해야지 고난에 시달린 모습 그대로 잔뜩 찌푸리고 있어선 안 됩니다. 주님은 안식일이 종교적으로 경건하게 무게 잡는 날이 아니고 하나님과 기쁘게 교제하는 날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환자들을 고쳐준 것입니다.
신자는 주중 6일도 그래야 하지만 주일만은 하나님과만 정말로 기뻐서 춤추고 노래하는 날로 보내야 합니다. 주중에 일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하나님을 잠시 잊을 수 있고 무엇보다 실족케 하는 일들이 없을 수 없으니 그분께 의심 원망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만은 다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면서 자기 속에 그분과 교제에 방해되는 요소를 해소하는데 모든 관심을 쏟아야 합니다. 예배 중에, 최소한 예배를 끝낼 때는 만면에 미소를 띠어야 합니다.
작은 자 하나라도
주님은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하면 지옥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작은 자와 하나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주로 작은 자들을 실족케 할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작은 꼬투리라도 잡히면 바로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한두 가지 일시적으로 행한 행동으로 말입니다. 한 사람의 사람됨은 물론 처한 환경이나 그만의 개인적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종교적 권세를 유지하는 가장 손쉬운 길은 도덕적 종교적 계명으로 사람을 종속시키고 그에 따라 통제 관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동족이면서 로마를 대신해서 세금을 걷는 세리가 가장 좋은 먹이 감이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본성적으로 그들을 민족의 배신자로 여기고, 그런데도 돈과 권세를 누리고, 때로는 세율을 제멋대로 정하는 불법도 행하므로 모두 싫어합니다. 그들을 정죄한다고 해서 아무도 반대하기는커녕 더 좋아하고 그 본인도 자기 처지가 그러니까 전혀 반발을 못합니다. 나면서 불구자들이나 수십 년 먹은 불치병자들도 마찬가지이고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도 손쉬운 정죄의 대상이 됩니다.
그들의 그릇된 가르침에 넘어간 유대인들도 그런 자들은 자기들 이웃에 절대로 포함되어선 안 된다고 합니다. 자기들 공동체를 순전하게 유지하겠다는 의로운 목적을 앞세우니까 모두가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창녀, 세리, 이방인, 불구자, 불치병자, 고아, 과부, 귀신들린 자들처럼 인간사회에선 어떤 연유가 되었던 떳떳하게 자기주장을 할 수 없는 자들이 전부 작은 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처음으로 가르친 세 비유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잃어버린 양 한 마리, 동전 한 닢이라도 즉, 작은 자 하나라도 어떤 위험과 수고를 무릅쓰고도 끝까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찾아낸다는 것이었지 않습니까? 큰 죄를 짓고 심지어 아버지로 온전히 대접해주지 않는 아들이라도 아버지는 언제든 용서해줄 준비가 되어 있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아들로서의 모든 신분 특권을 회복시켜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참 목자이신 예수님은 작은 자 하나라도 결코 실족하지 않게 해서 당신의 자녀로 받아주셨습니다. 특별히 바리새인들이 멸시 했던 자들은 한 번도 물리치지 않았습니다. 아니 주로 그들을 당신께서 먼저 찾아가서 눈물을 씻기고 고통을 치유하고 원래 있었던 자리로 완전히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그들이 너희 바리새인들보다 절대로 더 악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나아가 너희 바리새인들을 포함하여 세상 어느 누구도 당신의 십자가 사랑을 모르면 너무나 비참하고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위대한 도덕 종교 선생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으로서 당신의 백성에게 반드시 베풀어야 할 사랑을 베푼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라고 자부하면서 그분을 위해서 최고의 열성과 믿음으로 더 엄격한 규정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지만 막상 하나님 그분이신 예수님은 그들과 정반대되는 모습으로 행하셨습니다. 그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과 가장 원수의 자리에 서있는 것입니다. 연자 맷돌에 묶여서 바다에 빠트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오히려 가장 의롭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거짓의 아비 사탄에 미혹되어 그 종이 되어있기 때문이며 또 그렇게 된 까닭은 돈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마음이 순진한 어린아이에게 작은 자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마19:14) 어린이처럼 하나님을 의심 없이 순전하게 믿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겸손한 자라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서 주로 교제 치유하며 가르쳤던 모든 자들은 세상에선 전혀 소망이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둘 수밖에 없었는데 그마저 유대사회에선 차단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치유해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이제 다른 이로 실족케 한다는 것의 진짜 성경적 의미가 드러났습니다. 바로 다른 이로 예수님을 믿지 못하도록 막는 것입니다. 그것도 합리적이고 의로운 도덕이나 종교 규정으로 덫을 놓아서 말입니다. 주님이 직접 실족하는 것을 당신과 연관해서 가르쳤습니다. 마태복음의 평행 구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마18:6)이라고 즉, 예수님을 믿으려는 작은 자를 못 믿게 하면 지옥심판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바리새인이 세리와 죄인이 예수님과 교제하는 것을 정죄하는 것이 그 대표적 예입니다.
또 그래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11:6)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 랍비인 줄로만 알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니까 신성 모독했다고 여기면 실족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실족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고 인간이라고 믿고 또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눅9:48)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큰지 다툼이 벌어졌을 때에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을 영접하는 것이 바로 당신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쉽게 말해 주님이 이 땅에서 사역하셨던 모습을 그대로 따라하는 만큼 하나님께 영접 받는다는 것입니다. 작은 자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더 많이 영접하면 하나님도 그를 더 많이 영접해주시므로 그분의 나라에선 가장 큰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에 실족케 하는 자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오늘날 교회 밖에선 예수를 믿지 못하게 만드는 일은 드뭅니다. 불행하게도 교회 안에서 이와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천 년 전의 바리새인들과 똑같이 위선적 형식적 율법적 문자적 신앙이 알게 모르게 성행합니다. 성경의 진리와는 아무 관계없는 기독교나 심지어 교회 자체의 이런저런 규정 관습 전통 등이 힘을 발휘합니다.
예컨대 구원과 상관없으며 믿음이 좋고 나쁨과도 직접 연결되지 않는데도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한 자들을 아주 경원시 합니다. 예수님은 공사역 중에 바리새인들로부터 술을 즐기는 자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물론 건강상 좋지 않고 그로 인한 여러 부작용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그것 자체가 그 사람의 인성 믿음을 판단 정죄하는 기준이 되어선 안 됩니다. 심지어 사업에 실패하거나 큰 병이 걸리면 새벽예배나 주중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뒤에서 비아냥거립니다.
무엇보다 거지, 문둥병자, 깡패, 창녀, 동성애자, 전과자,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 등이 예배에 출석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정말로 주님처럼 진정한 사랑으로 그들을 영접할까요? 대체로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요? 그들이 예수를 믿으러 왔다가 차별하는 예수쟁이들 때문에 교회 나오지 못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로 실족케 한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끼리는 바리새인들처럼 경건하게 잘 믿고 있고 기도도 뜨겁게 하며 열심히 성경공부를 해도 주님은 ‘화로다’라고 탄식하지 않을까요?
너무 과격하게 말씀드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죽으셔야만 했고 그 죽음과 부활이 나와 내 인생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면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내 자신부터 천하 죄인 중의 괴수인데 어떻게 다른 이를 외모만으로 판단 정죄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예수를 믿고도 한두 번의 실수가 아니라 계속해서 도덕적 종교적 기준만으로 그것도 한두 번의 행동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사실은 그 안에 예수님이 안 계신 것으로 그분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다 자기만 그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까지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신자가 행할 일은 모든 이로 예수님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흑암에 짓눌린 인생을 예수님의 참 생명으로 기쁘게 바꿔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규정들로는 인간을 변화시키지 못하며 오히려 처음의 선한 의도와는 달리 올무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선 순전한 십자가 복음만 전하고 가르치면서 성령님이 전적으로 역사해주길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근사한 종교단체를 유지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아진다는 법은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교회가 도덕적 종교적으로 의롭게 보이려고 엄숙한 질서를 유지하려는 것은 인간 목회자의 인간적인 욕심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은 오직 당신의 십자가 복음이 인간 세상의 작은 자들의 영혼에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사역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예수님이 주관자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머리가 되고 우리 모두는 그분의 지체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다른 단체와 다른 이유는 담임목사, 중직들, 돈과 권세 많은 자들이 절대 머리가 될 수 없다는 것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실족 당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주어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주어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비록 위선적 형식적 율법적 신앙이 아니고 순수하다고 해도 예수 믿은 후에도 많이 부족하고 어리석고 무엇보다 감정이 때로 앞서기에 서로에게 상처주고 실족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은 목사부터 갓 출석한 신자까지 모두가 어린 아이 같은 작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자기를 낮추고 남을 더 낫게 여기는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언제 어떤 사역을 하던지 모두가 여전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고 진심으로 자신을 낮추면 예수님이 역사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더러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신앙공동체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작은 자를 한 명이라도 끝까지 찾아내어 천국 잔치를 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자칫 자기부터 실족하여서 다른 이로 실족하게 만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5/9/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