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7:5-10) 마땅한 신자와 못마땅한 신자.
돌아온 탕자 시리즈 (19)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7:5-10)
사도들에게도 불가능한 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기를 실족하게 만드는 자라도 회개하면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로선 세 번까지만 용서해주면 된다는 유대교의 가르침에 익숙한데다 실제 체험에 의해 어지간한 믿음으로는 일곱 번까지 용서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기다 주님의 계속된 가르침에 비추어보면 용서해주어야 할 대상이 자기들을 핍박할 바리새인들이므로 더더욱 힘들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자가 거지 나사로를 전혀 거들떠보지 않음으로써 물 한 방울 마시지 못하는 음부에 떨어졌다는 비유를 이미 배웠습니다. 형제를 자기 멋대로 차별 정죄하면 엄청나게 큰 고통을 동반한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스승이자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계명이니까 지키긴 해야겠는데 도무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달라고 즉, 현재의 믿음으로는 도무지 그렇게 용서할 자신이 없다고 실토한 것입니다.
누가는 제자 대신에 사도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사도는 특정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세상으로 파송된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사역 초기의 어느 날 밤이 새도록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 중에 열둘을 구별하여서 사도라고 칭해주었습니다.(눅6:12,13) 주님이 열두 명만 따로 세운 것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열둘 이라는 숫자에는 또 이 땅의 시공간을 다 아우르는 의미가 있습니다. 복음을 모든 족속에게 세상 땅 끝까지 끝 날까지 전하라는 뜻입니다.
그들 모두는 예수님과 처음부터 동고동락하며 당신의 기적과 사역과 가르침을 곁에서 보고 배운 자들입니다. 제자들 중에서 가장 믿음이 좋은 자들인데 누가는 지금 그런 사도들도 한 형제를 하루에 일곱 번이나 용서하는 일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려 한 것입니다.
사도들과 주님의 본문 대화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교회에 출석한지 상당 기간이 지났기에 목사가 직분을 맡기려고 의논하면 믿음이 아직 연약하니까 조금 자라면 맡겠다고 극구 사양합니다. 개인적으로도 조금만 힘든 일이 생기면 크게 불안해지거나 세상 시험과 유혹에 수시로 넘어지니까 내 믿음이 좀 더 견고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천 년 전의 제자들과 똑같이 우리에게도 절실한 이 문제에 대해 예수님이 어떤 해결책을 제시했는지 정확히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주님은 믿음을 더해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았고 대신에 두 가지 약간 생뚱맞은 비유로만 대답했습니다.
상식을 초월하는 믿음
주님은 첫 번째 비유부터 상식을 초월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6절)고 합니다.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아주 놀라운 진술입니다.
첫째 제자들은 믿음의 양을 더해달라고 했는데 주님은 제자들에게 믿음 자체가 있는지 여부를 문제 삼았습니다. 가정법 표현이긴 하지만 제자들에게 겨자씨 우리말로 치면 눈곱 혹은 먼지만한 믿음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제자들에게 믿음이 완전히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미약하거나 주님이 바라는 차원의 믿음이 전혀 아니라는 뜻입니다. 겨자씨는 눈에 보이는 것 중에서 가장 작으니까 어쨌든 믿음이 있기만 하면 믿음으로 가치와 권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믿음은 양이 아니라 순전성과 진정성으로만 따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믿음의 크기가 겨자씨만 해도 뽕나무에 명령해도 나무가 순종한다고 했습니다. 비유하는 의미를 강조하려는 과장법이므로 문자 그대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순전한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온 땅과 바다를 얼마든지 아름답고도 풍성하게 가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가진 믿음의 권능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온 세상을 다스려야 하는 청지기 역할을 하는 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승이긴 하지만 실제로 중세의 성 프란시스코 수도사가 말로 명령하면 애완동물은 물론 꽃과 야채도 따랐다고 합니다.
문맥에 따르면 더 중요한 주님 특유의 풍자적인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나무도 신자의 순전한 믿음의 말에 복종한다면, 아무리 자기에게 잘못한 원수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인간인지라 하루에 일곱 번이나 진심으로 용서해주면 순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삼국지에 보면 제갈량이 적국의 장수 ‘맹획’을 일곱 번이나 포로로 잡았으나 일곱 번을 풀어주자 결국은 제갈량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칠종칠금(七縱七擒)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습니다.
또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겨자씨에 비추어 가르쳤습니다. 겨자씨가 일 밀리미터도 안 될 만큼 작지만 나중에 새들이 깃들이고 사람들에게 그늘을 제공할 정도로 큰 나무로 자란다고 합니다.(눅13:19) 신자가 순전한 믿음으로 하나님 뜻대로 순종하면 주변의 힘든 사람들을 살려내는 의로운 열매가 풍성히 맺히기 마련인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제자들더러 믿음을 점점 키워나가야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씨앗만 봐도 장차 열릴 나무와 열매를 미리 알 수 있습니다. 해충이나 비바람을 막아주면서 물과 비료만 공급되면 자연히 열매는 맺힙니다. 겨자씨가 아무리 작아도 큰 나무가 될 모든 요소들이 이미 다 담겨져 있듯이 겨자씨 같은 믿음이라도 순전하다면 그 자체로 생명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순종을 하느냐 못하느냐로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를 가름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 안에 생명력이 있는데 그것이 자라서 나무가 될 수 있는 영양분이 바로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믿음을 더해달라는 요청에 대해서 주님은 사실상 순종만 하면 그렇게 된다고 대답해준 셈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따르기 힘들다고 미리부터 주저 염려하지 말고 일단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며 그러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도무지 실현이 불가능한 일을 시키면 당신께서 잘못한 것입니다. 당신의 일이니까 그 성취를 당신이 더 원하시고 신자를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아무리 원수라도 진정으로 한 번만 사랑하고 아니 용서해보면 그 다음에는 그 일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시도도 해보지 않고 순종할 자신이 없다고 하니까 주님은 믿음이 없거나 아주 미약하다고 꾸짖은 것입니다.
차원이 전혀 다른 믿음
이어지는 둘째 비유는 주님이 첫째 비유에 말한 순종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구체적인 예를 통해 설명한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주인이 종을 제 멋대로 냉혹하게 부려먹은 것 같은데도 종은 오히려 자신은 무익한 종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주인이 잘못한 일이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비유란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당시의 관습이나 물건에 빗대기에 그 배경을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당시의 종은 눈을 뜬 후부터 저녁에 누워 잘 때까지 하루 종일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해야 했습니다. 주인이 시키지 않으면 자기 맘대로 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주인의 말 한마디로 종의 생명마저 날아갈 수 있었습니다. 종이 영어로 servant라고 번역되었지만 헬라원어는 노예(slave)인 ‘둘로스’입니다. 그 어원적 의미도 waiter 즉, 주인의 명령이 떨어지기만 대기하고 있는 자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인이 명령하면 곧바로 그대로 따라야 하는데 그런 충성의 표시로 귀에 못을 박아 구멍을 내었습니다.(신15:17)
그러니까 종은 밖에서 밭을 갈고 양을 치고 있다가도 식사 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와 주인이 식사하는 옆에서 수종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인이 배불리 먹고 난 다음에 이제 가서 너도 밥 먹으라고 허락해야만 식사할 수 있습니다. 주인 명령대로 따랐다고 해서 주인이 종에게 사례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평생 주인집에서 숙식을 제공받는 것이 종이 받는 보상입니다. 아무리 일을 성실히 잘 수행해도 따로 상을 요구할 수 없으며 오직 주인의 처분에 맡겨져 있습니다.
제자들은 지금은 믿음이 연약해도 주님이 도와주셔서 최고수준에 도달하면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형제를 용서할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스스로 갈고 닦으면 늘어날 수 있는 자신의 정신적인 힘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주님더러 부족한 믿음을 당장 초자연적으로 채워 달라기 보다 믿음이 자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반면에 주님은 믿음을 주인과 종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종은 언제 어디에서나 주인의 말에 완전하게 순종해야 하고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습니다. 죽임을 당할 것을 각오하지 않고는 주인의 명령을 어기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 관계는 평생을 가도 변화 수정 포기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당신과 이런 관계가 되어 있는 것 자체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믿음에 대해서 제자들과 똑같은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예컨대 내가 말씀을 보고 몇 가지 깊은 진리를 깨닫고 기도하고 찬양하면서 영적으로 충만함을 맛보았으니까 믿음이 크게 자란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형제를 용서하는 일은 전혀 문제가 안 되고 해외선교사로 가라고 해도 순종할 자신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경건하고 신령해진 것은 잠시 그 때뿐이고 조금만 지나면 금방 유야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다 힘든 문제가 생기거나 막상 주님의 일을 해야 할 때에는 두려워서 주저앉기 일쑤입니다. 앞으로 믿음이 자라면 반드시 순종하겠다는 핑계만 계속 대다가 실제로 순종 헌신한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이전에 그렇게 믿음이 충만해졌던 체험은 아무 의미도 소용도 없습니다. 그리고선 나는 왜 모양 이 꼴이지 한탄만 늘어놓습니다.
만약 주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그런 관계가 맺어져있다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 보상을 바라지 않고 당장 선교사로 헌신할 수 있습니다. 형제를 일곱 번 용서하는 정도는 전혀 주저할 문제가 안 됩니다. 주님과 제자들이 서로 인식하고 있는 믿음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습니까? 이는 정확히 말해 수준의 차이가 아니라 아예 다른 믿음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도 믿음이 아니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겠지만 과연 주님이 소망하는 순전한 믿음인지 심각하게 점검해봐야 할 것입니다.
무익한 종의 믿음
정작 중요한 사항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제자들더러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0절) 신자가 순종하는 행위나 또 그럴 수 있게 해주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무익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니까 자신의 정체성과 신분이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자기 같은 종에게 주인이 숙식을 해결해주는 것만도 감사하다는 고백입니다. 자기는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 공로 조건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종더러 네 목숨을 바치라고 명해도 동일한 고백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이 가르치려는 순전한 믿음의 실체가 밝혀졌습니다. 비유에서 주인은 예수님이자 하나님이고 종은 신자입니다. 제자들더러 스스로 조심해서 절대로 바리새인들처럼 도덕과 종교의 잣대로 사람을 차별하거나 정죄 심판하지 말라는 맥락에 따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앞으로 나를 믿고 따르면 바리새인들에게 세리와 죄인과 똑같은 멸시 핍박을 받게 될 것이다. 그 때 내가 그랬듯이 너희도 그들을 끝까지 용서해주는 것이 마땅하며 또 그래야만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제자들도 사실은 하나님 안에선 그들과 똑같이 무익한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유대인들이라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되기 전에는 세리와 죄인은 물론 유대사회에서 비천한 자들을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고 상대도 않았던 자였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에게 어린 아이가 다가오는 것을 막았고, 12년이나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주님께 치유 받으려는 것을 야단쳤고, 주님을 배척하는 사마리아 고을들을 번개를 내려 멸망시켰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이 비유를 배웠는데도 7:11이 말하는 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에도 제자들끼리 서로 누가 큰지 다퉜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당신을 세 번이나 배반하는 제자를 포함해서 이런 제자들을 위해서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어떤 상태였던지 떠올려보십시오. 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이 무엇이며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다시 잘 생각해보십시오. 지금도 그분께 받고 있는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 따져보십시오.
잘못한 형제를 하루에도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하고 또 종처럼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결코 과도한 요구가 아닙니다. 우리가 평생토록 주님의 종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로선 감당 못할 과분한 은혜입니다. 믿음이 자라면 순종하겠다는 핑계는 섣불리 나와선 안 되며 그러지 않는 것이 신자 된 증거입니다.
믿음은 방법이 아니다.
많은 신자들이 본문의 제자들처럼 자꾸만 잘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해 합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처한 상태가 어떠하든 심지어 믿음 순종 헌신과도 관계없이 당신만의 계획을 당신만의 때와 방식으로 이루십니다. 신자의 상황과 관계없이 일이 이루어지려면 설령 신자가 죄에 빠져있어도 그래야만 하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자비와 은혜의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현실적으로 신자가 느끼기엔 고난 같아도 하나님의 더 오묘한 사랑이 풍성히 숨겨져 있습니다.
믿음이 뭔가 소망하는 결실을 맺기 위해서 신자 내면에 키워나가는 열정적 힘이 아닙니다. 바꿔 말해 도덕적 종교적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특별히 예수님은 특정한 일을 이루려고 특정한 방법을 취해야 한다고 절대 가르치지 않습니다. 신자가 성령의 간섭으로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순간 하나님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아버지와 부자관계로 맺어집니다. 하나님과 이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완전히 맺어졌기에 그 관계에 걸맞게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와 부자관계가 맺어지고 죽을 때까지 그 관계는 변경 취소 포기 될 수 없습니다. 아들이 아버지 말을 잘 들어야만 부자 관계가 되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그 반대로 아들이 아버지 말을 전혀 안 들어도 여전히 그 관계는 변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철이 들고난 이후로는 아들은 아버지가 시키지 않아도 아버지로부터 어떤 보상이 없어도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어떤 큰 결실을 맺어도 아들로서 마땅히 행할 바를 했다고 고백합니다.
나아가 정상적인 상식을 갖춘 자식이라면 한 결 같이 자기는 너무나 큰 불효자이고 자기를 보살펴 준 부모님의 은혜는 평생을 갚아도 모자란다고 고백합니다. 바로 그런 훌륭하신 부모님을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에게는 왜 그런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부모가 아니라 하나님 그분이 나의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거룩하게 주관하시어 당신의 영광 가운데로 반드시 이끌어 주시지 않습니까? 이 사실을 정말로 믿는다면 어떻게 그분의 뜻에 순종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은 지금 그런 관계를 조금 더 강력하고도 실감나게 표현하려고 주인과 종의 관계에 비유한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기를 위해 생명을 바치라고 요구하지도 않고 위험한 일도 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과 주인과 종의 관계이므로 그런 차원까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 땅의 육신적 생명은 물론이고 그것을 넘어서는 영원한 생명까지 주관하시는 분이므로 신자에게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신자의 무조건적인 순종만 일방적으로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그 곁에서 떠나지 않고 당신만의 사랑으로 신자의 일생을 붙들어주고 있습니다. 그 사랑에서 신자를 끊어낼 수 있는 존재라곤 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습니다.(롬8:38,39)
믿음은 그래서 내가 하나님 안에서 바뀐 신분 위치 소속을 잘 알고 있기에 정말로 그런 바뀐 상태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일 실제로 그분과 항상 교제 동행하고 있기에 세상이 줄 수 없는 은혜와 권능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더 기꺼이 그분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연약하고 죄의 본성이 남아 있기에 수시로 시험에 넘어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니까 매일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그런 부자 관계를 재확인하고 그래도 부족하니까 성령님이 신자의 평생 동안 내주해서 영적으로 깨어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마땅한 신자와 못마땅한 신자
다시 강조하지만 병이 낫고, 고난에서 구출 되고, 자식들도 번듯하게 자라고, 이왕이면 돈도 많이 벌고 싶은 목적으로 믿음을 키우려 들어선 안 됩니다. 믿음은 자기가 원하는 특정한 결과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 결코 아닙니다. 아무리 그 소망하는 결과가 의롭고 경건해도 인간의 욕심으로 그친다면 훨씬 더 좋고 유익하고 영화로운 하나님의 열매를 맛보지 못합니다. 엄격히 말해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셈입니다. 설령 성도와 이웃의 부러움을 사는 좋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배제되면 부족하고 어리석은 우리 생각대로 된 것이라 하나님이 보시기엔 악한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주인이신 하나님이 시킨 일이 아닌데도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적 행사만 열성적으로 치루면 이뤄질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나름대로 최고의 성의와 경건을 다 동원했는데도 바라는 대로 안 되면 하나님을 의심 원망 불신합니다. 심지어 이러면 교회 안 나오겠다고 공갈 협박까지 합니다. 곰곰이 따져보십시오. 정말로 하나님이 시킨 일을 최선을 다해서 이루려고 했다면 하나님이 비록 더딜지라도 그 열매를 반드시 맺히게 하실 것 아닙니까?
인간 아버지가 자기 뜻대로 해주지 않는다는 불평만 해도 천륜을 어긴 패륜아라고 비난 받는데 하나님에겐 예사로 그럽니다. 인간 아버지와는 달리 하나님이니까 일일이 벌주지 않고 참아주십니다. 그분이 언제까지 참아주실지 아니면 언제 어떻게 징계나 연단을 주실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비유에서 주인이 종을 혹사하는 것 같아도 종은 한마디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하고 싶지 않았거나 주인이 잘못된 일을 억지로 시킨 것이 아니라 마땅히 자기가 했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마땅히 순종하는 것은 그분을 진짜로 사랑해야 가능합니다. 누구를 정말로 사랑하게 되면 상대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해서 해주고 싶고 또 그러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최고 큰 기쁨이 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주인과 종의 관계로 맺어진 것 자체가 너무 좋고 종으로서 행하는 일도 너무 좋아야 믿음입니다.
그러려면 이전에 하나님 대신에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었던 때는 처절한 절망과 죽음이었음을 실제로 체험 절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품 안으로 옮겨져서 그분의 종으로 그분의 일을 하는 것이 이전과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좋아야 합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나를 사랑했기에 나 또한 주님을 죽기까지 사랑하게 된 것이 믿음입니다. 거기에 다시 더 노력해서 자라게 할 믿음은 없는 것입니다.
스승을 세 번이나 배반한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선 완전히 백팔십도로 바뀌었습니다. 주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질문하는 것으로 그의 지난 모든 죄를 용서해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개혁시킬 나사렛 예수 신흥종교 집단의 수제자라고 한껏 교만했으나 비로소 자기야말로 가장 무익한 종이라고 절감케 되었습니다. 그 후에 죽기기까지 복음의 종으로 순종했으며 마지막에는 무익한 종이라는 표시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렸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이 명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베드로처럼 목숨이 오고가는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간단하고도 쉬운 일로 세리와 죄인과 밥만 한 끼 나누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못을 범해도 회개하면 나 또한 하나님 안에서 무익한 종이니까 그의 행동이 아니라 그 사람을 용납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는 일이고 신자 아니 인간이라면 마땅히 행해야 하는 일이라고 확신해야 합니다. 실제로 한 번이라도 소외된 자를 찾아가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고 기도해주면서 복음을 전해 보십시오. 어떤 세속적 쾌락과는 비교가 안 되는 기쁨과 은혜를 넘치도록 맛볼 수 있습니다. 바로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비유가 말하는 바는 신자에겐 두 부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주인이신 하나님이 종인 자기에게 명령하는 것은 주인으로 마땅한 일이며 자기가 그 일을 순종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믿는 신자입니다. 하나님 그분이 마땅하신 분이니까 마땅한 일을 맡겼으므로 나도 마땅히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나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고 내가 기도하고 믿음을 키워 열심히 봉사했는데도 현실은 여전히 힘드니까 하나님 그분이 못마땅하다고 여기는 신자입니다. 자신에게 마땅한 일이 일어나야 하나님 그분도 마땅히 여겨지고 그래야만 나도 마땅히 순종해보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솔직히 여러분은 둘 중 어느 부류에 속합니까? 더 쉽게 질문하자면 하나님 아버지라는 명칭이 기도할 때에 따르는 수식어가 아니라 정말로 나의 아버지입니까? 그리고 나는 그분의 진짜 아들입니까? 그래서 아들로서 마땅히 살아가야 할 바대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5/23/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