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15:1-2, 17:7-10) 예수 천당 불신 지옥.
돌아온 탕자 시리즈 (20 完)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15:1-2, 17:7-10)
처음과 끝이 같은 주님의 가르침
누가복음 15:1에서 17:10까지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제자들에게 번갈아 가며 일곱 개의 비유로 가르쳤습니다. 세부적으로 따지면 각기 다른 내용이나 놀랍게도 그 전체를 아우르는 한 가지 공통된 주제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무엇인지 살펴봄으로써 돌아온 탕자 시리즈의 결론을 맺고자 합니다.
거의 모든 글은 서두에 그 글을 쓰게 된 계기나 주제를 제시한 후에 그 의미를 풀어서 설명해나가다 마지막에 다시 그 주제에 맞는 결론을 내립니다. 주님이 일련의 가르침을 시작하고 마치는 두 성경본문을 비교해보십시다. 저자 누가가 처음에 언급한 내용을 마지막에 다시 되풀이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전체의 주제가 될 것입니다.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이 당신의 백성과 함께 식사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바리새인들이 비방하는 것으로 인해서 주님은 비유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비유에도 주인이 식사하는 동안에 종은 곁에서 시중을 들어야만 했고 주인이 식사를 끝내고 허락해야만 자기도 식사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 비유 자체의 주제는 제자들더러 하나님께 주인과 종의 관계처럼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으로 순종해야 할 일이 수도 없이 많은데 하필이면 주인의 식사 시중을 예로 들었습니다. 거기다 그 중간의 다른 비유들에도 함께 식사하는 이야기들이 계속 등장합니다.
목동이 잃어버린 양을 찾고 여인이 없어진 동전을 찾고선 이웃을 불러 모아 함께 즐겼다고 합니다.(눅15:6,9) 타국에 가서 죽도록 고생을 한 둘째 아들이 돌아오니까 아버지가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려주었습니다. 집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던 큰 아들은 자기에겐 그런 잔치를 베풀어 준 적이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 비유에서도 부자가 매일 호사스럽게 잔치를 했지만 죽어가는 나사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바리새인과 제자들의 반응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긴 했지만 이웃과 잔치를 벌이는 문제를 반복해서 강조했다면 특별한 의도가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세리와 죄인과 식사 교제하는 것을 바리새인들이 비방한 일이 당신께서 보시기에 한두 번의 가르침으로는 쉽게 깨우치지 못할 너무나 큰 죄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 일이 왜 그렇게 큰 죄가 되는지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
일곱 비유의 단일 주제
가장 먼저 바리새인들에게 잃어버린 양과 동전과 아들들을 찾는 비유 셋을 말해주었습니다. 당신의 택한 백성들이 길을 잃고 온갖 고난과 죄악 속에 신음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되찾으시고 찾고 나면 크게 기뻐하신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 땅에 죄인을 구원하려고 온 하나님이신데 바로 그런 목적으로 세리와 죄인과 즐겁게 식사 교제를 나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너희는 아버지에게 불평한 첫째 아들처럼 왜 당신을 비난하느냐고 변증한 것입니다.
그 후 제자들에게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말해 주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 평안을 위해서 돈으로 사람들을 조종하므로 자기들에게 유익이 되거나 마음에 드는 자들끼리만 교제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선 이 땅에서의 일시적인 안락은 얻을지 몰라도 영원한 구원에서 제외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더러는 하나님과 재물 두 주인을 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주인으로 모심으로써 영주할 처소를 준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마지막 비유 내용과 동일하게 종이므로 주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수여한 하나님의 입장에서 참된 제자도의 길을 계시해준 것입니다.
돈을 좋아한 바리새인들이 그 가르침을 옆에서 듣고 비웃자 주님은 그들에게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말해주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을 상징하는 부자는 매일 호사스런 잔치를 즐기면서 세리와 죄인을 상징하는 거지는 대문 밖에 죽게 내버려둠으로써 음부에 떨어지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특별히 아직 살아 있으면서 똑같은 잘못을 범하는 형제들에게 영계에서 메신저가 가서 잔혹한 음부심판을 증언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 했습니다. 바리새인들더러 이 비유의 뜻을 깨달았다면 죽은 후에는 제2의 기회가 없으니 제발 늦기 전에 회개하고 사람들을 외모로 차별 배척하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영계에서 구원과 심판을 주관하는 자가 아니라면 가르칠 수 없는 비유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제자들에게 겨자씨와 주인과 종의 관계에 대한 비유 두 가지를 말해주었습니다. 그 전에 제자들더러 바리새인들과는 달리 아무리 큰 허물과 잘못을 범해도 형제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끝까지 용서해주라고 했습니다. 용서해줄 대상에는 세리와 죄인들은 물론 바리새인들까지 포함됩니다. 그러기 위해선 겨자씨만 하더라도 순전한 믿음이 필요한데 그 믿음은 스스로 노력하여 키우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충성된 종이 먼저 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최종적으로 종은 자기는 무익한 종이니까 사례를 전혀 받지 않아도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했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일련의 가르침이 끝을 맺습니다.
마지막의 주인과 종의 비유를 당시 상황에 대입하면 어떻게 됩니까?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을 초대해서 식사를 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종으로 세워진 바리새인들은 마땅히 옆에서 시중 들어야 하는데도 뒤에서 비방했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종이면서도 하나님보다 돈을 더 좋아하여서 하나님의 보상이 따를 때만 순종했고 백성들에게도 자기들처럼 행하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제자들에게 스스로 조심하여 절대로 그들의 본을 받지 말라고 명한 것입니다.
결국 모든 비유에서 영원한 구원과 심판이 주제였고 예수님이 바로 그 일을 주관하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계시해주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 당신이 모든 인간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잃어버린 양들이었는데 당신께서 되찾았고 이제 앞으로 거룩하게 변화시켜서 새로운 시대를 위한 종으로 세우시겠다는 뜻입니다.
먼저 된 종인 유대교 지도자들은 형제를 세 번만 용서하면 충분하고 원수를 미워해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제 예수님에 의해 나중 된 종 제자들은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자기에게 잘못하는 자는 물론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단적인 예로 유대사회에서 통용되는 윤리 종교의 규정에 어긋났다는 이유만으로 세리와 죄인과 함께 잔치를 벌이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실족하지 말라.
세례 요한이 옥중에서 자기 제자를 예수님에게 보내어서 오실 이가 당신인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하는지 물어봤습니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예수님은 세리나 죄인 같은 사람들과만 교제 하지 로마를 물리칠 궁리는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자신은 헤롯 안티파스의 불법에 항거하며 회개하라고 꾸짖는 바람에 큰 고초를 당하고 있는 반면에 메시아로 오신 예수는 왜 유대사회의 불법과 죄악을 고쳐주지 않느냐고 따진 셈입니다. .
주님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보고 들은 대로 전하라”(눅7:22)고 대답해주었습니다. 로마나 헤롯을 물리쳐서 정치적 사회적 질서를 바로 잡는 것이 메시아로서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맹인, 앉은뱅이, 나병환자, 귀먹은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현대첨단의학으로도 불가능한 일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적입니다. 예수님 당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직접 아픈 자를 고치고 눈물을 닦아주며 무엇보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려고 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사야서 35:6을 인용하여 대답했습니다. 구약성경이 메시아가 오시면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라고 예언한 그대로 수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세리와 죄인 같은 비천한 자들과 식사교제를 하는 모습만 보고 당신에 대해서 오해하면 안 된다고 전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눅7:23)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누구인지 온전히 알아보지 못함으로써 메시아 사역에 대해서도 오해하는 것이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을 받는다고 했으니 예수님의 정체성과 십자가 사역의 의미를 정확히 깨달아 복음을 은혜로 받아들이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복음을 배척하면 아무리 인간 세상에서 존경받는 도덕가 종교가라도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믿어야만 구원받는다고 했으니 분명하게 자신은 하나님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유대인 인간 랍비라면 두려워서 절대로 입에 올리지 못할 말입니다.
한국교회에서 오랜 기간 외쳐왔던 구호대로 말하자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입니다. 이 구호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큰 반감을 갖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으므로 자기가 옳다고 믿는 구원의 길을 선택해서 따르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어떻게 기독교의 창시자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냉혹하게 심판하느냐고 반발합니다. 예수는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친 자비하신 분인데 자기를 믿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분이 심판할 리가 없다고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율배반적인 하나님이라 믿을 필요가 없다고 반박합니다.
불신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성경을 모르니까 이해해 줄만합니다. 문제는 일부 기독교인들이 지옥은 없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있으니 자기들이 알아서 믿으면 된다는 세상 의견에 동조합니다. 사후에 어떤 형벌도 없다면 사실상 구원 받은 셈이라 저라도 이 땅에서 실컷 호사스럽게 살다가 죽겠습니다. 바울도 부활이 없으면 예수 믿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신자들만 가장 불쌍하다고 선언했지 않습니까?
인간 추악함의 절정
예수님의 정체성을 모르거나 알고도 짐짓 부인하면 어떤 결과가 되는지 바로 이 바리새인들의 그 후의 행적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세 율법이 명시하지 않았는데도 단순히 자기들의 편의에 따라서 세리와 죄인과의 교제를 금지시켰고 또 안식일 규정 등 여러 부수 조항을 첨가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막상 자기들이 정한 규정마저 스스로 크게 어긴 일이 있습니다.
산헤드린은 예수님을 유월절 절기 마지막 날인 안식일 전에 나무에 매달아 죽이기로 이미 결의했습니다. 유대의 행정 사법 입법은 물론 종교까지 관장하는 최고 권력기관으로 70명의 공회원들과 의장인 대제사장으로 구성되는데 주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밤에는 공회를 소집할 수 없었는데도 한밤중에 오직 주님을 죽이려는 목적만으로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피고인 예수님을 변호해줄 증인들은 전혀 세우지 않고 반나절 동안에 여섯 번의 재판을 졸속하게 강행했습니다.
그리고 재판 심리를 진행한 후 형량에 대한 선고는 하루를 쉬고 난 후에 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재판 중에 자기 생각이 한쪽 논리에 기울어졌거나 개인적인 감정이 생겼을 수도 있으니까 최하 하루 정도는 냉정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판결을 신중하게 객관적으로 내리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다음 날 해가 져서 새 날이 시작되기 전까지 주님을 나무에 매달아야만 했기에 밤새도록 잠도 자지 않고 재판 과정을 급하게 몰아갔습니다. 실제 사형선고를 내릴 권한을 가진 로마 총독 빌라도조차 무죄임을 확신하고 풀어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도 군중을 선동하여서 로마 황제에게 총독의 비리를 고발하겠다고 협박하여서 기어이 십자가 처형선고를 받아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 말을 듣지 않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고 세리와 식사한 것 때문에 자존심이 크게 상했습니다. 그 동안 유대교에선 누리지 못한 예수님의 치유와 사랑을 맛보자 대중의 인기도 급속히 주님께로 쏠렸습니다. 자기들의 종교적 권세와 경제적 이득이 줄어들 것이 크게 염려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들도 예수님이 메시아일 가능성이 다분해서 조사단을 파견했습니다. 주님의 모든 가르침과 사역과 기적을 차분히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주님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최소한 주님이 오직 선만 행했지 처형당할 죄는 전혀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인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속으로는 익히 알고 있었을 텐데도 무조건 죽이려고만 들었습니다. 자기들 탐욕과 자존심을 채우려고 얼토당토 않는 거짓 죄목을 만들어서 덮어씌웠습니다. 예수님을 자기들 규정을 어겼다고 정죄 심판하면서 자기들도 아무렇지 않게 자기들 규정을 어겼습니다.
주님이 밤새도록 그들에게 아무런 항변을 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오직 당신을 십자가에 매다는 일에만 목을 매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해도 마음을 고칠 리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갔다 온 사람이 증언을 해도 믿지 않는 자들인데 자기들 이권과 자존심을 무너뜨린 시골 랍비에게 귀 기울일 자는 없습니다.
그들로선 나사렛 이단 예수를 하나님께 저주 받는 모습인 나무에 매달아 죽여 버리면 유대 대중들도 누가 세상을 다스리는 권력을 가졌고 누가 자기들을 보호해주는지 똑똑히 알게 될 것이라는 정략적 계산에만 몰두한 것입니다. 거룩하게 양육해야 할 하나님이 맡겨주신 양떼마저 거꾸로 사탄의 하수인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빌라도, 헤롯, 유대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들은 당시 인간 사회에서 가장 지혜롭고 경건하고 신령한 자들이었습니다. 가장 많이 배워서 법률과 종교의 전문가들이었고 일반 백성들보다는 아무래도 훨씬 의롭게 살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의 겉모습만 보고 존경했지만 그들의 진짜 속사람은 너무나 추악했습니다.
지금 유대인들 특유의 종교적 편견 오류 집착을 탓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날 미국이나 한국이나 최고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어려운 고시를 패스하여서 정치하는 사람이나, 비트코인 주식 부동산 투자에 천재적이 수완으로 큰돈을 번 사업가들 같은 사회 지도층이 가장 부패하지 않습니까? 가장 똑똑하고 의로운 자들이 범하는 죄악인지라 가장 교묘하고 음흉하며 규모 면에서도 엄청납니다. 그러나 법률이나 구변에 능해서 잘못한 것에는 완전히 시침 떼고 도리어 괴상한 논리로 자신의 정당성만 강변합니다.
일반 대중이라고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우선 남들보다 훨씬 착하고 의롭다고 자부 내지 착각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부패한 지도층들을 입에 거품을 물고 욕하면서 속으로는 그들처럼 되고 싶어서 안달이 납니다. 인생의 롤 모델로 삼아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그 자리에 오르려 노력합니다. 지금 세대는 대놓고 그들이 옳고 선하다고 비호 찬양하는 단계에 까지 왔습니다.
인간 세상은 아담의 타락 이후로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들이 이러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입니다. 인정하기 싫어도 실제로 우리가 매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나아가 자기도 알게 모르게 그 안의 일원이 되어 있는 엄연한 사실이자 진리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모두가 어려서부터 생각하는 바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줄 수 없는 상태입니다.
도덕과 종교는 믿음과 다르다.
만약 예수님이 인간 랍비라면 그분을 믿지 않았다고 음부의 심판을 내리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비방대로 말도 안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그것도 인간의 모든 죄 값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인생의 생사화복은 물론 구원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배척 대적한 것이 심판의 유일한 기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의 모든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존재인지 모르고 평생을 지냅니다. 나아가 스스로 남들보다 더 의롭다고 자신하기에 예수님이 거저주시는 십자가 속죄의 은혜는 전혀 필요 없다고 버팁니다. 지금도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내가 왜 죽어야만 하는 천하의 죄인이냐고 반박하기에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는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십자가 복음이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만의 구원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직접 모든 인간에게 가장 먼저 아니 죽기 직전까지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로 제시하신 것입니다. 도덕과 종교를 열심히 준행해서 정말로 구원을 얻을 수준이 될 수 있을지, 최소한 이 땅에서 마음의 평강을 얻을 수 있을지 잘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남들과 비교할 것 없이 자신의 진짜 영적인 실상을 완전히 까뒤집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세워보라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의 일생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행동과 말은 물론 머릿속까지 찍은 영상이 있다면 하나님과 함께 끝까지 볼 자신이 있는지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도무지 그럴 자신이 없다면 제발 예수님의 십자가에 실현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아들이라는 간절한 초대가 예수님이 가난한 자에게 전파한 복음입니다.
일곱 비유에서 가장 우리의 처지와 실감나게 가까운 둘째 아들 탕자의 경우를 다시 생각해봅시다. 그는 스스로 도덕적 종교적 회개를 한 적이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습니다. 큰 기근이 닥치자 그 동안 돈으로 사귀었던 친구들도 전부 자기를 외면했습니다. 그래서 돼지 사료라도 조금 얻어먹으려 했으나 그마저 거절당했습니다. 아직도 그는 비록 짐승처럼 살더라도 아버지 즉 하나님의 집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일찍이 이방의 나라로 제 멋대로 떠난 것도 청운의 꿈을 품고 크게 성공하려고 갔다고 해석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짐승처럼 사는 것이 더 좋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대신에 돈을 주인으로 모시고서 세속의 재미에 푹 빠져서 인생을 허랑방탕하게 낭비했던 것입니다.
그가 스스로 짐승 취급도 받지 못한다는 영적 각성을 한 것이 아닙니다. 이러다 정말로 죽겠다고 덜컥 겁이 났는데 아버지 집에 가면 굶어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서 돌아온 것뿐입니다. 돌아와서도 아버지께 뭐라고 말했습니까? 아들이 아니라 종으로라도 받아주어 숙식만 해결해주면 자기로선 마땅한 일을 넘어서 과분하다고 했지 않습니까? 마지막 주인과 종의 비유의 주제와 그 맥락이 똑같지 않습니까?
예수만 따르라.
유대 사회에서 세리와 죄인이 식사교제 금지를 당한 것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마저 완전히 빼앗긴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최고로 의로운 지도자들로부터 받은 상처인지라 세상에선 도무지 씻을 길이 없습니다. 주님은 그 상처를 씻어주려고 하늘에서 내려와 함께 식사했습니다. 결국 일곱 비유를 관통하는 한 가지 주제는 하늘에서의 잔치나 이 땅에서의 잔치나 그 주관자는 예수님 당신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더러도 돈과 하나님 둘 중에 한 분 하나님만 주인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분께 부름 받은 종이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 기꺼이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을 받고도 주님의 정체성을 끝내 깨닫지 못해 십자가 처형 전에 다 배반하고 도망갔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변화시키기 전에는 인간의 자력 구원은 젼혀 불가능하다는 증거입니다. 오순절에 지혜의 영인 성령님이 강림하자 주님이 미리 예언한대로 당신께서 가르친 이런 비유들의 뜻을 정확히 깨닫고 주님으로 인해 더 이상 실족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공회원이라 바리새인일 확률이 높은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의 극적인 변화입니다. 자기들이 유대사회에서 멸시 추방당할 것을 각오하고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주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향 품을 채우고 요셉의 가족묘지에 안장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마지막에 기도하면서 원수까지 품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이 그들을 완전히 새 사람으로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이 물 한 방울 마실 수 없는 음부로 떨어진 이유가 단순히 사람을 차별한 때문이 아닙니다. 결정적인 잘못은 예수님이 정확히 누구인지 모르고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갈릴리 시골에서 온 무명의 유대인 랍비이므로 산헤드린이 의결한 규율과 관습을 정작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뜻과는 어긋나는데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강요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주인이고 자기들은 그 종이라는 인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도리어 자기들이 자기 인생은 물론 이 세상의 주인 행세를 하며 자기기준에 따라 이웃을 정하고 나머지 모두는 잃어버린 양으로 방치했습니다.
예수님만이 모든 인생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 그분을 따르면 예수 천당이지만 그분이 어떤 분인지 모르고 거역하면 불신 지옥입니다. 비록 표현이 직설적이라도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절대적 진리이자 일곱 비유를 포함한 성경 66권이 말하는 한 가지 주제입니다.
일방적으로 예수님만을 찬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실상을 정말로 솔직하게 살펴보면 예수님을 은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젼혀 구원의 길이 될 수 없기에 인간에게 어떤 소망과 기쁨과 자유와 평강도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찬양을 받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 심히 기뻐했습니다. 인간도 그분을 찬양하지 않으면 그 삶에 기쁨이 없습니다. 찬양하려면 그분의 선하심을 정확히 알아야만 하는데 그 길은 순종뿐입니다.
불신 세상은 두 부류의 탕자로 나뉩니다. 둘째아들 같이 도덕과 종교 없이 세속의 재미에 빠진 탕자입니다. 또 자기 나름의 도덕과 종교를 가졌어도 첫째아들처럼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만 전문적으로 잡아내는 탕자입니다. 모두가 갈 바 모르는 길 잃은 양입니다. 그대로 두면 낭떠러지에 떨어지거나 맹수에게 잡아먹힐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스승을 세 번 배반할 때까지는 도덕과 종교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 번이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확인함으로써 그 죄를 깨끗이 씻어줌으로써 더 이상 당신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맡길 양을 치라고 명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게 된 신자는 이미 영생의 복을 완전히 다 받았습니다. 일생동안 할 일은 잃어버린 양을 한 마리라도 끝까지 되찾아서 함께 잔치를 벌이는 것입니다. 그 일을 등한히 하면 세상은 멸망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데 지금 서서히 아니 완연히 그런 징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돌아온 탕자의 일곱 비유가 던지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메시지는 불신자가 아니라 신자가 더욱 귀담아 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그분이 이 땅의 당신의 잃어버린 백성 한 명이라도 되찾아서 함께 희락의 잔치를 벌이기를 더 간절히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5/30/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