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6:66-71) 오병이어의 이만 배 축복이 이천 배로 축소되었다.
오병이어 기적시리즈 (15-완)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요6:66-71)
요한의 정반대의 결론
오병이어의 기적은 네 복음서가 다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기적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준 충격과 감동이 최고로 컸다는 뜻입니다. 남자만 오천 명이었으니까 아이, 여인, 노인들은 빠졌습니다. 히브리어법상 남자 몇 명이라고 말하면 주로 가구 수자를 뜻합니다. 그럼 아무리 작게 잡아도 이만 명은 됩니다. 예수님은 한 아이가 가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그 많은 무리가 배가 부르도록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에 가득 남게 했습니다.
그런데 마태, 마가, 누가는 기적의 객관적 사실만 기록하고 있지 그 다음에 전개된 일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이 그 세 복음서를 통해 오병이어의 외적인 결과만 접하면 아무래도 그 엄청난 규모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실제로 교회에서 지금껏 작은 것 하나라도 주님의 일을 위해서 기꺼이 내어드리면 엄청난 축복을 받는다고 배워왔습니다. 교인들도 교회에서 봉사를 하거나 헌금을 드리면서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수십 배 수백 배의 은혜로 되돌려달라고 기도합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은 기적보다 그 직후에 벌어진 일을 더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살펴본 대로 주님이 왜 무리를 피해서 따로 기도하러 갔는지, 그런데도 이튿날 일찍부터 주님을 찾으러오자 주님이 그들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먼저 백성들이 원하는 현실의 풍요와 안락은 썩을 양식이므로 영생을 주는 떡을 먹으라고 권했습니다. 그 떡은 바로 하나님이 인 치신 인자인 당신이므로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했습니다. 이제 곧 십자가에서 대속 제물로 바쳐질 것을 예언한 것이나 누구라도 그 말씀이 어렵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당신께서 하늘로 다시 올라갈 것이라고 즉, 당신이 바로 죄인을 구원하러 온 하나님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자 당신을 따라다녔던 제자들마저 많이 떠나고 다시 함께 다니지 않았습니다.
요한이 오병이어 기적에 관해 내린 결론은 공관복음의 내용과 정반대로 달라졌습니다. 그 수많은 추종자들은 물론 제자들마저 많이 떠나가 버렸고 배반할 유다를 빼면 열한 명의 제자만 남았습니다. 사람 숫자로만 따지면 주님께 이만 명이 복을 받았으나 열한 명만 남았으니 약 이천배로 복이 줄어든 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나 형벌의 의미와 가치를 수치로 따질 수는 없지만 어쨌든 오병이어의 큰 권능을 보고 예수님을 열렬히 쫓으려했던 백성들의 마음이 완전히 식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도 주님 쪽에서 먼저 이해하기 어려운 가르침으로 그들의 기대와 믿음을 깨트려버렸습니다. 오병이어의 감동을 주님이 주도적으로 지워버렸고 또 그 기적을 직접 체험한 당사자들도 다 떠나버렸다면 오늘날 신자들이 그런 식의 엄청난 축복을 달라고 기도한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또 그런 기도가 과연 응답이 될지 심각하게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의 진짜 은혜
오병이어 기적에서 각 사람이 받은 은혜는 시리즈 서두에서 말씀드린 대로 단순히 저녁 한 끼 즉, 도시락 하나뿐입니다. 각 사람마다 이만 장의 호텔 뷔페 무료식사권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의 숫자가 이만 명이니까 이만 개의 도시락을 주신 것입니다.
바꿔 말해 자기가 봉사 헌금 충성한 것을 구실로 자기에게 오병이어 같은 엄청난 복이 올 것이라고 기대해선 처음부터 틀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중심을 꿰뚫어 아시기에 각자의 중심에 합당하게 한 치의 오차 없이 상과 벌을 주실 뿐입니다. 십일조를 바치면 쌓을 곳이 없도록 하늘에서 복을 부어주신다는 말라기의 약속(말3:10)도 앞뒤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같은 원리입니다. 수입을 수십 배로 늘려주는 것이 아니라 황충과 가뭄 등을 막아주어서 풍성한 수확을 보장해준다는 뜻일 뿐입니다.
오병이어에서 정작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는 물론 이웃과 사회를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며 작은 일에라도 헌신할 때에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거룩한 은혜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하면서 제자들에게 유언처럼 주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주님이 오병이어 기적으로 베푸신 은혜의 본질은 결코 양적인 축복이 아닙니다. 당신께 가르침과 치유를 받으러 온 불쌍한 당신의 자녀들이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한 명도 굶지 않게 일일이 사랑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신분 계급 재산 학력 권세 등에 따르는 구분이나 차별은 아예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더 많이 먹거나 적게 먹은 자도 없었고 각자가 양껏 먹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이를 똑같이 사랑하시되 모든 이의 형편을 한 사람 한 사람별로 정확히 다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바로 천하 만물은 물론 인간을 지으시고 거룩하게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여실히 드러낸 것입니다.
백성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 까닭도 오병이어를 단순히 이만 배의 권능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만나를 항상 먹게 해달라고 했듯이 오직 이 땅의 풍요와 안락에만 관심이 가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준 자만 당신을 믿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그분보다 그분이 주시는 축복에만 관심을 쏟는 자들은 주님이 누구인지 왜 이 땅에 왔는지 아무리 설명해주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모든 관심이 현실 풍요에만 가있으니 아예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주님은 마지막까지 당신 곁에 남은 열두 명의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택했다고 격려해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들 모두를 한 명씩 다 알고 계시고 한 명씩에게 은혜를 주시고 한 명씩 맡길 일을 주실 것이라는 진리를 더 확실하게 밝힌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중에 그들을 택한 이유를 정확하게 풀어서 설명해주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요15:16)
하나님의 능력에만 주목하는 신자는 이 말씀에서도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한다는 부분에만 주목하고. 믿음으로 기도만 하면 다 이뤄주신다고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기도를 응답하신다고 약속하면서 그렇게 하려고 당신께서 제자들을 택했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단순히 신자더러 착하게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자기 문제만 해결 받으려고 하나님의 능력에만 초점을 맞추는 신자의 기도를 주님은 응답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오해가 없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의 기도를 통해 상상도 못할 권능을 발휘해줍니다. 기도에 응답하는 것만도 불신자들은 알지 못하는 너무나 큰 은혜요 기적입니다. 그러나 자기 고난만 없애달라는 기도는 자기만 안락하면 된다는 뜻이므로 주님이 신자가 맺기를 원하는 열매가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미처 모르는 초신자 때는 그런 믿음만으로 기도해도 그런대로 응답 받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응답을 해주신다는 즉, 하나님이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아시고 보살피고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런 표적은 몇 번이면 충분합니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그런 기도만 하면 점점 응답이 안 되는 일들이 많아집니다.
그럼 신자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보다, 나를 알지 못하는가 보다 오해하고 의심과 원망이 쌓입니다. 열심히 기도했어도 응답은 가뭄에 콩 나듯이 되니까 점점 건성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죄송하지만 가족 중에 누가 암이나 걸려야 새벽기도에 나오는데 불행하게도 천일 제단을 쌓은 공로도 아무 소용없이 죽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말로는 고인이 이 땅과 비교되지 않는 더 좋은 천국에 가서 감사하다고 하지만 속마음은 주님과 점점 멀어집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서로 다른 기대
오병이어가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바라는 것과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씨앗이 되는 열매를 맺기를 바라는데 신자는 무슨 문제든 기도해서 응답 받는 것만 신앙으로 맺을 열매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튿날 아침부터 배를 타고 주님을 열성적으로 찾아왔던 백성들은 가버나움 회당에서부터 더 이상 주님을 따르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썩어질 자기 육신만 위하는 양식을 달라고 주님을 찾았으나 주님은 끝까지 그 요구를 거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줄 때부터 당신의 제사장 나라로 세울 목적이었고 실제로 시내 산에서 그렇게 언약을 맺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준 만나는 제사장 나라로 세우기 위한 일종의 훈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택한 백성과 항상 함께 하므로 어떤 어려운 환경에서도 당신만 바라보라는 뜻이었습니다.
불행하게 유대인들은 제사장 나라 언약을 온전히 실현한 적이 없었고 율법을 문자적 형식적으로 지키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대신에 아이들처럼 언제 어디서나 달콤한 사탕만 달라고 했고 예수님은 이빨만 썩게 한다고 거절하자 그들도 주님을 배척해버렸습니다.
제사장나라로 세워진 당신의 백성들마저 하나님께 현실의 상황을 풍요롭게 바꿔달라는 요구만 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먼저 거룩한 백성이 되길 바랐습니다. 서로가 다른 선로에서 평행을 이루며 달리는 기차인지라 평생토록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택하긴 했어도 마귀라고 불렸고 끝내 스승을 팔아버린 유다는 오히려 나름대로 선한 열매를 맺으려 노력했습니다. 성경은 그를 돈을 탐하는 자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정말로 돈만 탐했다면 예수님을 따라다닐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주로 소외된 사람들을 도와주는 모습이었습니다. 마지막 만찬 때에 주님이 유다더러 네가 할 일을 속히 하라고 명했을 때에도 제자들은 가난한 자에게 무엇을 주라는가 보다 여겼지 않습니까?(요13:29) 사도들로 구성된 최초의 예수공동체는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쓰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가룟 유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선 유다라는 이름이 예수님의 동생과 또 다른 제자도 갖고 있기에 구분하기 위해서 그렇게 붙였습니다. 가룟이라는 단어의 뜻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출신지역과 열심당원과, 배반 거짓이라는 셋은 유다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열심당은 당시 이스라엘의 독립을 추구하되 세계 최강제국 로마에 조직적으로 군대를 결성하여 전쟁할 수 없는 사정이라 중요 인물들을 암살하고 국지적으로 테러를 일으키는 비밀결사조직이었습니다. 요한은 본문 71절에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인 시몬도 열심당원이었다는 뜻이며 유다는 그런 가정환경에서 자랐던 것입니다.
따라서 유다가 예수님을 따라다닌 더 중요한 이유는 유대사회에 굽어진 공의를 바로 잡아보려는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로마의 정치적 폭정과 경제적 수탈로 인해 괴로워하는 동족의 아픔을 해소해주는데 인생의 목적을 건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쏟아 부을 것이 아니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원망한 것입니다.
그로선 처음에는 주님이 주로 가난하고 소외 받은 자들을 만나서 위로하면서 많은 이적을 보였기에 이 랍비를 따르면 자신이 소망하던 일을 함께 이룰 수 있겠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스승이 로마에 항거할 의도는 전혀 드러내지 않았고 계속해서 그런 힘든 사람들만 만나고 있었습니다. 유대 사회가 지켜온 의로운 전통과 관습까지 무시했습니다. 로마를 무찌르기 위해서 힘을 합쳐야 할 유대 당국과는 거꾸로 대립각을 더 날카롭게 세웠습니다. 거기다 당신이 십자가에 죽을 것이고 사흘 만에 부활하겠다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고 너무나 연약해 보이는 말만 했습니다. 그러다 마리아가 그 비싼 향유를 낭비하는데도 야단은 치지 않고 도리어 칭찬을 하자 그 동안에 참았던 불만이 폭발한 것입니다.
아무도 몰랐던 하나님의 신비
그럼 예수님은 유다가 생각하는 것처럼 동족의 아픔을 외면한 것입니까? 로마 같은 부패한 흑암의 세력이 세상을 지배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방치하고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만 천국으로 데려가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까? 인간 사회에선 항상 악인들이 득세하는 대신에 의인들이 항상 손해를 보는 데도 언제까지나 팔짱을 끼고 두고 보시는 것입니까? 하박국 선지자처럼 신자들이 하나님께 던지는 이 근본적인 두 질문에 대해 주님은 답변을 못하시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선 유대 사회에서 힘이 없어서 소외되고 비천한 사람들을 주로 만나서 교제해주었습니다. 제자들이 잠에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유대사회의 회복을 위해서 아침저녁으로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당신을 팔아넘길 줄 알고도 열심당원인 유다를 제자로 택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종교적 행사뿐 아니라 유대사회의 모든 측면을 통치하는 최종적인 권한을 지닌 기관이었습니다. 성전에서 부패한 장사치와 환전상을 불같은 화를 내면서 내쫓은 것만큼 주님이 인간 사회의 굽어진 공의를 안타깝게 여긴다는 확실한 증거도 없습니다.
인간사회가 서로 시기하고 분쟁하여서 수많은 모순 문제 환난 고통이 끊임없이 산출해낸다는 사실을 교육, 도덕, 종교 수준과 상관없이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소시오 패스가 아닌 이상 인간이라면 이대로는 안 된다고 안타까워하지만 각자가 처한 환경이 다르고 내 코가 석자라 행동으로 나서지 못합니다. 유다 같이 의로운 생각을 갖고 행동으로 나선 이도 있지만 극소수라 역부족입니다. 그런 이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인간사회가 조금씩 개선되어 왔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았다는 것이 인류역사가 증명하는 바입니다.
그럼 무슨 뜻입니까? 그들이 선한 열매를 맺어보려 했으나 지금껏 시도한 모든 방법이 적절한 효과를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돈이 없는 가난이 문제이므로 돈으로 가난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로마의 압제가 문제이므로 로마만 무너뜨리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판단했습니다.
유다가 끝까지 몰랐던 영적인 진리이자 굽어진 공의를 바로 잡은 해결책은 따로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미리 이 진리를 깨달았다면 자살도 하지 않고 베드로처럼 끝까지 주님께 남아서 회개하고 아주 훌륭한 사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은 삼십 세겔에 주님을 팔아 넘겼는데(마26:15) 은 한 세겔은 노동자의 나흘간 품삯인 4데나리온에 해당되니까 총 120일치 임금입니다. 당시로선 서민들에겐 아주 큰돈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깨트린 향유 값의 삼분의 일 밖에 안 됩니다. 그리고 만약 예수님이 맘먹고 유대 대중들의 인기와 지지를 이끌어내면 유대 종교 지도층들이 거꾸로 겪을 경제적 손해에 비교하면 턱없이 적은 액수입니다.
유다가 정말로 돈에 눈이 어두워서 그 정도라도 감사히 받았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성경기록에 따르면 그는 대제사장과 보상금을 두고 밀고 당기는 식으로 흥정한 적이 없습니다. 스승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컸기에 원망도 같이 커져서 아무 생각 없이 주는 대로 받았던 것입니다. 스승이 막다른 궁지에 몰리면 큰 권능으로 뭔가 엄청난 기적을 일으켜서 로마를 물리치고 굽어진 공의를 바로잡을 것이라고 내심 기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유대 주민은 매년 주민세 격으로 은 반 세겔씩 성전에 바쳐야 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이 달아준 삼십 세겔은 어른 육십 명의 주민세입니다. 일차적으로 예수라는 랍비는 한 작은 마을의 지도자 감밖에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은 삼십 냥은 율법에 따르면 노예 한 명의 몸값입니다.(출21:32) 율법에 능통한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아예 노예 취급하여서 모욕감을 주겠다는 의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최고로 능통한 그들마저 하나님의 진짜 비밀은 전혀 눈치도 못 챘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슥11:12) 스가랴 선지자가 메시아에 대해 은 삼십에 팔려갈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비천한 종으로 깔아뭉개는데 급급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메시아임을 더 확실하게 증명하게 된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유다 또한 전혀 알지 못하고 지난 삼 년간 스승을 따랐던 것에 대한 화끈한 결말을 빨리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유 의지로 자기들 생각과 판단에 따라 마음대로 행하도록 두시고도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온 천하에 분명하게 증명해냈습니다. 유대 지도층이나 가룟 유다나 당시로선 도덕적 종교적으로 최상위에 속한 인물들입니다. 그들 나름대로는 모든 되어져 가는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최선의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려는 측면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유대 공동체를 위해서 내린 선한 결정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유대 공동체는 물론 자신들에게도 어떤 실제적인 도움도 주지 못했고 자신들의 심령이 얼마나 추악한 지만 온 천하에 드러났습니다. 윤리적으로는 물론이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최악의 죄를 범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성삼위 하나님이 태초부터 작정하신 인류구원계획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완벽하게 이뤄냈습니다. 주님은 지금 그런 완벽한 주권과 섭리로 당신께서 택한 나머지 열한 명을 마지막 날까지 당신의 참 생명으로 살려주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로마가 문제이므로 로마만 물리치면 된다는 유다의 생각은 사회적 구조와 환경의 불균형 때문에 가난이라는 문제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이미 일어난 문제해결에만 급급하지 진짜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전혀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백성들이 참 표적이신 예수님을 외면하고 육신만 위하는 떡을 달라고 요구한 것도 당장 눈에 보이는 모든 문제를 돈이 쉽게 해결해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난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는 말씀은 가난을 돈으로 해결하려 들어선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난의 원인을 제거하지 않고 이미 발생한 부정적인 결과만 없애려 드는 꼴인데 암이 걸렸는데도 수술은 않고 고통을 느낄 때마다 진통제만 먹고 견디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또 당신께서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고 있다는 유다의 의로운 불만보다는 마리아의 당신을 향한 장례예배가 옳다고 칭찬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지 않고는 공의가 굽은 것을 포함해 인간사회의 모든 문제가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지 않으면 인간은 오직 자기 안일만 최우선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해야만 이웃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고 그 결과 인간 사회에 공의도 바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오병이어는 복음이었다.
한마디로 요한의 오병이어에 대한 기록은 십자가 복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의미가 참으로 오묘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수만 수백만 명의 사람에게 만나를 내려줄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해달라는 백성들의 요구를 첫마디에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또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인간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라 베드로를 포함안 모든 인간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인데다 예수를 믿어서도 그 본성은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이 가신 길을 정말로 따라가지 않으면 아무리 인간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어도 자신의 욕심과 자랑과 교만이 개입될 수 있습니다. 인간 사회의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이 하나님을 멀리 했기 때문입니다. 골고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으로만 하나님과 다시 화해될 수 있습니다. 인간 개인은 물론 공동체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에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오병이어 때의 유대인들과 똑같이 영적인 시체였습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받아서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바꿔 말하면 이웃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단순히 기독교의 첫째가는 강령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 문제의 근본적이고 유일하고 완전한 해결책입니다. 말하자면 작금의 펜데믹과 지구온난화 사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다시 재발하지 않게 하는 궁극적인 길입니다.
최근에 가톨릭은 인간 사회의 문제들을 남들이나 환경에 잘못을 돌리지 않고 “모두 다 내 탓이오!”라는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개신교는 신자들끼리 모여서 교회에 봉사 충성 헌금했으니 오병이어처럼 나에게 수십 수백 배의 축복을 내려달라는 기도만 하는 측이 다수가 되어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예수를 믿는 목적이 단지 현실 문제 해결이라면 굳이 교회 나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다고 여깁니다. 자기 노력으로 돈을 많이 벌고 세상 지식과 지혜를 쌓고, 그래도 부족하면 전문가나 권세자의 도움 받는 것이 언제 응답될지 모르는 기도보다 훨씬 빠르고 효과적인 대책이라고 여깁니다. 거기다 사회적 공의를 바로 세우는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적극적으로 지역사회를 섬기면서 내 탓이오 운동을 벌리는 가톨릭으로 발걸음을 돌리게 됩니다. 개신교는 절대적이고 유일한 구원진리를 소유했음에도 실제 삶에 적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가 백성들로 인본주의적인 거짓 가르침에 넘어가게 만든 것과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면서 기껏 이만 배로 멈추는 것부터도 잘못입니다. 우주 전체를 만드신 그분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주셨습니다. 지금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신자들이 세상 끝 날까지 세상 땅 끝까지 가도 함께 해주십니다. 바울은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도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를 얻은 것을 가장 귀하게 여겼습니다. 바울처럼 사나 죽으나 자기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그분의 이름만 높이는 믿음을 이젠 찾아보기 너무 힘들어졌습니다. 안타깝게도 세상 사람들도 개신교 교회에 참 생명이 거의 사라졌다고 이미 눈치 채고 있습니다.
펜데믹과 지구온난화는 세상 앞에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한 신자의 책임이 더 크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 지금처럼 오병이어마저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그래서 교인들이 세상에서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앞으로도 신자 본인은 물론 이 세상은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갈수록 세상의 공의는 더 굽을 것이며 여러 계층 간의 격차도 극심하게 벌어질 것입니다. 사람들의 불평불만이 늘어나 인간사회의 공권력이 차라리 없는 것이 더 좋겠다는 지경까지, 이미 그런 조짐이 다분히 보이지만, 갈 것입니다.
요컨대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자기는 이미 구원 받았기에 종말이 언제 와도 된다고 아니 이렇게 어려울 거면 차라리 더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말해선 안 됩니다.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어서 예수 십자가 복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면 다시 오신 주님은 한 달란트 받아서 땅에 묻어 두었다고 엄중하게 꾸중하실 것입니다.
(8/15/2021)
오병이어의 기적에 담겨진 주님의 참뜻을 알게 되어 기쁘고 즐겁습니다^o^
새삼스럽지만 늘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