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1:1-5) 최고의 절망에서 최고의 영광으로
룻기 강해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종말의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
엄청난 자연재앙이 덮치거나 죄의 타락상이 극에 달할 때마다 사람들은 혹시 인류의 종말이 닥치는 것은 아닌지 염려해왔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종말론적 사건들은 지역적 일시적 현상에 그쳤습니다. 반면에 작금의 전 지구적인 펜데믹 사태는 일 년 반이 지나도 해결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오히려 확산되고 있습니다. 장기간의 사회적 격리가 정상적인 사람들마저 정신질환 내지 정서불안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거기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천재지변과 기후 및 생태계의 격변은 이제 막 시작되어서 급속히 악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마침 이번 주에는 미군이 철수하자 아프가니스탄이 탈레반에게 순식간에 함락되면서 벌어진 끔찍한 참상을 전 세계인이 목격했습니다. 심지어 최근에는 미국국방성이 그 존재를 정식으로 인정한 UFO의 출몰이 잦아져서 최첨단 가공할 문명을 지닌 외계인들의 침공이 닥친 것은 아닌지 불안해합니다.
아침저녁으로 접하는 뉴스에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괴상한 일투성이라 깜작깜작 놀랠 정도입니다. 인터넷의 발달로 비정상적인 사건과 현상들이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니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자연히 과격해지고 그 여파도 오래 갑니다. 시커먼 그림자가 지구 전체를 드리우고 있는 것 같다고 모두가 말은 안 해도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인류 종말에 대한 공포가 일시에 세계를 뒤덮은 것은 인류역사상 처음일 것입니다.
일부 불신자들은 인생을 완전히 포기한 듯 하루하루 찰나의 쾌락을 즐기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코로나를 무시하고 만 명이 넘는 청년들이 모여 일주일이나 광란의 파티를 벌렸다고 합니다. 돈 많은 부자들은 자기만 살아남으려고 핵과 세균을 차단하는 대피소를 짓고 있습니다. 세계적 갑부인 어떤 몽상가는 인류를 화성으로 도피시킬 계획을 세우고 착착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종말에 관해 더 예민한 신자들은 새삼 요한계시록을 배우려 합니다. 요한계시록에 주목하는 이유는 종말의 시기와 징조를 정확히 알아서 자신의 안전을 미리 도모하겠다는 뜻입니다. 좋게 해석하면 종말이 확실하다면 교회에 모여 함께 기도해야겠다는 뜻입니다.
종말의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자연 재앙이나 전쟁 등의 소식이 흉흉해도 종말이 아니라 시작되는 징조라고 말했습니다.(마24:6-8) 신자는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니까 더더욱 매일을 거룩하게 살면서 세상 앞에 자기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명해보여야 합니다. 종말이 두려워서 아니면 하나님더러 막아달라고 교회에서 기도만 하겠다는 것은 죄송하지만 현실도피하려는 광신자 집단이 하는 짓입니다. 신자는 미래의 종말은 주님께 일임하고 현재의 타락한 세태를 잘 분별하고 휩쓸리지 않아야 하고 그 일을 잘하기 위해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같은 시국에 불쌍한 두 여인의 짧은 이야기인 룻기를 살펴보려는 것이 생뚱맞게 여겨질 것입니다. 룻기는 단순히 며느리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잘 섬겨서 복을 받았다는 신데렐라 같은 동화가 아닙니다. 고대에 과부가 되는 것은 인생의 종말과 다름없는데 특별히 나오미의 경우는 정말로 그랬습니다. 그곳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방안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녀들의 삶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자세히 살펴보면 종말이 성큼 다가온 것 같은 이 시대에 사는 신자들이 삶에 적용해야 할 영적 진리를 풍성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흉년을 피했더니 죽음을 만났다.
본문은 앞으로 전개될 스토리의 발단이 되는 사건을 설명한 룻기의 서론입니다. 먼저 사사들이 치리할 때라고 합니다. 시대 배경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룻기가 허구의 소설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라는 뜻입니다. 사사시대는 가나안 전쟁을 이끈 여호수아가 죽고 난 이후 사울이 이스라엘 초대 왕이 되어 다스리기까지 약 342년의 시기를 말합니다. 중앙집권적 왕정국가가 설립되기 전으로 이스라엘은 블레셋 같은 주변 이방 족속들로부터 많은 고초를 겪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사사기의 결론(삿21:25)대로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더러 당신만을 왕으로 모시는 신정국가를 세우게 하려고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무시 배척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행했기에 하나님은 이방 족속을 도구로 사용해 징벌을 내렸습니다. 그들이 고난을 겪고서야 회개하면 재판관과 구원자 역할을 한 사사를 일으켜 세워서 구원해주었습니다. 그러다 다시 타락하면 또 징벌을 받는 악순환이 반복된 시대입니다.
그런 와중에 유대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사계절이 뚜렷하지 않고 비가 오는 우기와 오지 않는 건기로 나뉩니다. 매년 이른 비가 오는 10,11월과 늦은 비가 내리는 3,4월이 우기입니다. 나머지 8개월 일 년의 2/3는 건기입니다. 우기에 비가 너무 많이 오면 사막지대라 홍수가 지고 너무 적게 오면 식물이 자라지 않아서 흉년이 듭니다. 기후는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관하시므로 흉년은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의 죄를 징계하는 한 가지 방안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 보듯이 고대에는 기근이 닥치면 피해가 없는 주변지역으로 잠시 피신했습니다. 이스라엘에 내린 흉년 심판을 피해 모압으로 이주한 엘리멜렉에게 하나님은 더 큰 심판을 내렸습니다. 자기들 생명을 지키려고 피난 갔는데 오히려 죽음의 벌을 받았습니다.
가족을 살리려고 외국으로 피신한 것은 죄가 아니라 선한 일입니다. 두 번이나 그렇게 피신한 아브라함은 오히려 복을 주었고 지금도 다른 유대인들도 피신했을 텐데 다른 가족들은 두고 엘리멜렉만 심판했으니 쉽게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가족을 살리려는 가장의 마음을 무시할 만큼 독선적인 분은 아닐 것입니다. 본문에 하나님이 벌을 내렸다는 언급도 없기에 나이 들어 병으로 죽었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의 기록은 아주 정미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문구 단어 숫자 하나하나에도 그분의 뜻이 분명히 계시되어 있으므로 앞뒤로 잘 살펴보면 왜 그가 심판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이름이 여호와는 왕이시라는 뜻이듯이 엘리멜렉은 나름대로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친척 보아스가 상당한 유력자인 것을 보면 그도 유대사회에선 유명한 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룻기의 나중 기사를 보면 모압 땅으로 피신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고 그들은 무사했습니다. 그럼 믿음과 재산이 어느 정도 있는 엘리멜렉 가정도 남아있었어도 생존에는 지장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항상 이웃의 고난에 함께 동참해서 서로 힘껏 도와야 하는데 자기 가족의 안위만 걱정해 도망간 셈입니다. 흉년도 하나님이 주관하므로 정말로 하나님이 자기의 왕이었다면 그분의 형벌도 담담히 감수해야 합니다. 엘리멜렉은 자기 이름과는 달리 하나님 대신에 눈에 보이는 환경 즉, 물질을 왕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모압이 더 좋았던 엘리멜렉
엘리멜렉이 심판 받았다는 더 확실한 증거는 모압 여인과 결혼한 두 아들 말론과 기룐마저 자식 하나 없이 그곳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닮아서 두 아들이 다 병약해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두 아들 세 명이 이방에서 짧은 시간 안에 다 죽는 것은 아주 비상한 경우로 하나님의 형벌이 아니고는 쉽게 설명이 안 되는 일입니다.
성경은 엘리멜렉이 거류하러 들어갔다고 말합니다.(1절) 거류라는 단어는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다른 나라로 완전히 이민 가서 그곳 주민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모압이 좋아서 그곳 사람이 되려고 작정한 셈입니다. 둘째는 임시거처로 삼아 일시적으로 머문다는 것입니다.
만약 엘리멜렉이 기근이 끝나면 바로 돌아올 생각이었다면 두 아들이 그곳 여자랑 결혼하도록 허락해선 안 됩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아들들이 결혼한 시기의 전후관계는 불분명합니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 두 아들이 결혼했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아비가 여호와 신앙에 투철했고 율법에 능했다면 아들들에게 신앙교육을 철저히 시켰어야 했는데 두 아들이 이방여인과 결혼했다는 것은 그러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이래저래 아버지나 두 아들이나 하나님을 대적한 이방 지역인 모압에 사는 것이 더 좋았거나 최소한 영적으로 죄책감은커녕 전혀 부담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엘리멜렉은 모압으로 이주하고 싶었던 차에 마침 흉년이 닥치니까 옳다구나 하고 핑계 삼았을 수 있습니다.
율법은 명시적으로는 가나안 여인과의 결혼만 금했습니다.(신7:3) 그렇다고 해서 다른 족속의 여인과 결혼해도 된다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주시고 그곳에 신정국가를 세울 계획이었으므로 당연히 그곳 가나안의 우상숭배에 물든 여인과는 결혼하지 말라고 금한 것입니다. 이 규정이 결혼해선 안 될 이방 족속의 종류를 밝힌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주신 땅에서 당신을 아는 백성들끼리 당신을 왕으로 모시는 공동체를 설립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상을 숭배하는 여인들과는 어떤 종족이어도 결혼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결정적으로는 두 아들이 모압 땅에 십년이나 거주한 후에 죽었다는 사실입니다.(4절) 하나님이 애굽에게 벌을 주려고 의도적으로 계획한 기근도 7년으로 그쳤습니다. 성경 숫자가 의미하는 대로 애굽에 대한 완전한 형벌이라 7년이었지만 통상적으로 7년이나 계속되는 기근은 아주 드뭅니다. 말하자면 이 가족이 모압으로 이주한 10년 동안 유대 땅에 계속 흉년이 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6절이 언뜻 십년 후에야 유대 땅에 곡식을 주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 구절은 나오미가 유대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하게 된 이유를 밝히는 뜻일 뿐입니다. 거기다 이스라엘에게 곡식을 주셨다, 또 그 소식을 들었다는 두 동사 모두 과거완료형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흉년은 끝났다고 봐야 합니다.
그럼 엘리멜렉이든 두 아들이든 서둘러서 고향으로 돌아왔어야 하나 그러지 않고 그곳 여인들과 결혼까지 해서 눌러 앉으려 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유대의 흉년이 애굽처럼 7년이 갔다고 쳐도 하나님이 그들이 유대 땅으로 돌아가기를 최하 삼년은 더 기다려주셨지만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자 형벌을 내린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이라는 성경숫자가 완전히 가득 차는 것을 뜻하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한계까지 인내하신 후에 심판하신 것입니다.
룻기는 하나님 이야기
룻기는 전반부는 나오미 이야기로 후반부는 룻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책의 주인공은 하나님입니다. 책의 서두에서부터 유대 땅의 기근과 엘리멜렉과 두 아들의 죽음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의미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럼 나오미와 룻의 그 후의 인생도 하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 이끄실 것이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룻기의 서론도 단순히 엘리멜렉과 두 아들이 심판을 받았다는 점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두 주인공 나오미와 룻의 사정을 말하려는 데에 주안점이 있습니다. 특별히 전반부 주인공인 나오미의 인생이 완전히 지구 종말 같은 상황에 빠졌다고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한 미국 신학자가 본문이 설명하고 있는 나오미의 형편에 대해서 여섯 가지 비참한 처지에 빠졌다고 주석했습니다. 첫째 유대사회에선 인구조사에도 들지 못하는 여자였습니다. 둘째 힘이 없는 늙은 여자였습니다. 셋째 남편이 죽어서 없는 과부였습니다. 넷째 아무 재산이 없는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다섯째 부양할 자식이 없는 과부였습니다. 여섯째 이방 지역에서 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욥이 가장 고난을 많이 겪은 남자였다면 나오미는 가장 불쌍한 여자였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단 하나의 소망도 남지 않았습니다. 사방이 막혀 아무런 도움의 손길이 없습니다. 의지할 구석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은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지만 한국 속담에 여자는 평생토록 세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는 운명이라고 합니다. 결혼 전에는 아버지에게,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남편이 죽고 나면 아들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연약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그 셋이 다 없어졌습니다. 경제적으로 열악하고 사회보장제도가 마련되지 않은 고대에선 사실상 죽음과 방불한 상태이며 잘 되어도 거지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제가 처음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출석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하나 있습니다. 저도 경제적으로 완전히 파산해서 정말로 끼니를 이어가기도 힘들었습니다. 나름 인생에 성공할 자신감에 충만해서 젊었을 때부터 저의 재능과 장점이 그것이 전혀 아닌데도 사업을 한다고 설치다 쫄딱 망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한 교회에서 민방위 훈련을 받게 되었는데 주보의 목회단상에 저와 비슷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사업에 망해 완전한 절망에 빠져 있는 어떤 사람에게 크리스천 친구가 다가와 “이제야말로 하늘로 눈길을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사방이 다 막혔어도 하늘로 향한 창은 항상 열려 있으니 하나님께 진심으로 간구해보라.”고 권면했다는 것입니다.
그 간단한 이야기가 순간적으로 제 가슴에 쿵하고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렇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저를 열심히 전도하려 했던 교회에 출석했고 또 간절히 기도했더니 의외로 현실적인 문제들이 술술 잘 풀려나갔습니다. 몇 번 말씀드린 대로 로마서 강해설교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처음으로 접하자 속에서부터 눈물이 솟구쳐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에 대해서 배우게 되자 저의 사업의 실패는 물론 우연히 그런 글을 읽게 된 것까지 모든 일들이 주님이 나를 당신께로 이끌려는 사랑의 손길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
이제 사방이 꽉 막힌 나오미에게도 하나님은 동일한 역사를 시작할 것입니다. 아니 훨씬 전부터 이미 시작하고 계셨습니다. 그녀에게도 지난 모든 실패와 절망이 하나님이 미리 세워둔 거룩한 계획을 실현해 나가는 필연적인 과정이었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의 죽음까지도 사실상 나오미와 룻의 인생을 위해서 일일이 간섭해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세 사람의 인생이 억울한 것이 아니며 살펴본 대로 심판받아 마땅한 자들이었습니다.
이 가족의 고향은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5:2) 미가 선지자는 장차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아구스도 황제 때에 제국 전체의 인구조사를 행했는데 당시 로마의 관습은 호적이 있는 고향에 가서 해야 했습니다. 베들레헴은 다윗과 그 후손인 요셉의 고향이었고 마침 만삭의 마리아가 그곳에 인구조사차 들렸다 아기 예수를 출산했습니다.(눅2:1-6)
룻기의 마지막 결론(룻4:21,22)이 어떻게 끝납니까? 보아스와 결혼한 룻이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었습니다. 마태는 그래서 예수님의 족보에 비천한 이방 여인 룻의 이름을 올렸습니다.(마1:5) 룻기의 시작은 완전한 절망이었으나 끝은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엄청난 영광이었습니다.
룻기에는 여호와라는 단어가 19회나 등장합니다. 한 많고 불쌍한 두 여인의 이야기가 아니고 룻기도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 직후에 여인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부술 것이라고 즉,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으로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3:15) 그 후의 인류의 역사는 성삼위 하나님이 바로 그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를 향해서 진전시켜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룻기도 그런 필연적인 과정 중의 하나로 하나님이 당신이 택한 두 여종을 인류 구속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했습니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사항은 나오미, 룻, 보아스라는 룻기의 주인공 셋은 자기들이 그런 영광을 입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매일매일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고 율법에 순종하고 이웃을 사랑했을 뿐이지만 하나님이 이미 마련해 놓은 계획대로 결말지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멜렉과 두 아들의 당신을 배교한 실패마저도 그 각본의 조연으로 등장시켜 당신의 거룩한 역사를 이뤄냈습니다.
엘리멜렉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서 어떤 형벌을 받을지 전혀 몰랐듯이 나오미도 자신의 헌신 충성으로 어떤 축복을 받을지 전혀 몰랐습니다. 인생 만사는 당신의 뜻과 계획대로만 이끄는 하나님이 주관 통치하십니다. 결과는 그분만이 아십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간이 죄를 지으면 인간 자신에겐 부정적인 결과를 반드시 낳고 하나님께 충성하면 반드시 신자에게 유익한 결과로 돌아옵니다. 물론 그 방식과 시기는 하나님이 결정합니다. 인간의 어떤 흉악한 죄나 비참한 실패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항상 성공하고 항상 거룩하지만 인간은 자기 행함의 책임은 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모시고 평생을 그분께 의탁하고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받겠다는 철저한 소명의식과 내어줌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여전히 연약하기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감정과 욕심과 죄가 개입될 수 있지만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위해서 한 일이라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일로 영광을 받습니다. 룻처럼 본인이 전혀 모른 채 죽어도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위해서 신자가 행한 충성에 반드시 보답하십니다. 신자의 중심을 보시는 그분은 기어이 그 중심에 합당한 열매를 맺히게 해주십니다.
종말을 대하는 신자의 자세
작금 코로나나 지구 온난화와 같은 절망적인 사태에도 이 원리는 똑같이 적용됩니다. 신자 한 명이 행하는 일이 이 사태를 극적으로 전환시키거나 큰 힘이 되지 못할 수 있습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로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기도만 해선 안 됩니다. 모든 것이 다 끊긴 너무나 연약한 늙은 과부를 통해서도 하나님만의 큰일을 이루셨지 않습니까?
어쨌든 한 사람이 백신을 맞으면 그 만큼 병균이 덜 옮겨지고 어쨌든 한 사람이 에너지 절약을 하면 그만큼 지구가 덜 황폐해집니다. 그런 성도들이 모이면 금방 큰일이 일어납니다.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속담을 말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들의 그 작은 헌신을 보시고 하나님이 당신만의 규모로 바꿔주시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신자들의 사소한 불순종을 보시고 당신만의 규모로 형벌을 내리십니다. 그 규모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규모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의 거창한 일에 각오를 단단히 하고 목숨을 걸고 참여하라는 비장한 뜻이 아닙니다. 펜데믹과 지구온난화의 폐해는 당장 우리 자식들이 당해야 합니다. 엘리멜렉도 비록 하나님의 뜻에 어긋났어도 자식을 구하려고 기근을 피해 모압으로 간 것까지는 선한 일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백신을 맞고 지구 온난화를 막으려 에너지 절약하며 오염을 줄이려는 노력은 단 한 사람이 해도 아주 선하고 하나님의 뜻에도 합당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일부 신자들이 동참하지 않고 심지어 동참하는 신자들을 향해 하나님만 온전히 믿지 않으니 영적으로 어리석다고 비평할 수 있습니까? 일부 신자들과 교회들이 그런 말도 안 되는 비평을 하고 있는 현상이야말로 종말이 닥쳤다는 더 확실한 증거인 것 같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고난이 기다릴 줄 알고도 자기가 맡은 바 할 일을 하려고 과감히 올라갔습니다. 가는 곳마다 성령의 계시를 받은 장로들과 성도들이 이구동성으로 막았습니다. 바울 본인도 큰 위험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기도를 통해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겸손히 경고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을 위해 자기 전부를 바쳤습니다.
그런 위대한 사도요 영적인 분별력이 뛰어난 바울조차 그 다음에 하나님이 자기를 로마로 보낼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이단의 최고심장부에서 불신세상의 최고 지도층들에게까지 십자가 복음을 아무런 제약 받지 않고 자유롭게 전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했습니다. 그것도 죄수가 되어 온갖 고초를 당했고 배가 폭풍우로 파선했고 로마에 가서도 언제 극형에 처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도 하나님은 그를 통해 당신의 거룩한 일을 당신만의 방식으로 진행시켰습니다.
아무리 세상에 당장 종말이 임할 것 같아도 신자는 하나님의 이런 절대적 주권과 섭리에 대한 절대적인 소망을 절대 잃지 않아야 합니다. 현재 서있는 위치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바 최선을 다해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이 교회에 모여서 종교적 행사에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을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고 그런 섬기는 모습 가운데 예수의 빛을 비춰내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의 본질입니다. 교회에 모이는 것은 그 일을 잘하려고 배워서 미리 연습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닙니다.
룻기가 계시하는 신학적 주제는 생각보다 다양합니다. 가장 두드러진 것 하나를 들자면 인간의 공동체이든 개인의 인생이든 궁극적인 통치자는 하나님 그분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최고의 행운이든 최악의 불행이든 모든 상황의 최종적인 통제권은 그분이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통제의 결과도 항상 인간에게 특별히 당신의 백성에게 유익할 뿐 아니라 당신의 크신 영광에 동참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너무 연약해서 한 치 눈앞도 볼 수 없습니다. 엘리멜렉이 기근을 피하러 갔더니 죽음이 기다릴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자기 가족만 안전해지려고 모압으로 피신했더니 하나님은 아버지와 두 아들만 정확하게 꼭 집어서 벌을 주었습니다. 반면에 성경에서 최고로 불행했던 여인 나오미는 세상에선 모든 수단이 고갈되었어도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시고 그녀만 꼭 집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통제권은 완벽하며 선하시며 정미하고 신묘합니다.
지금 인류의 종말이 왔다고 신자들까지 불안에 떨며 기도만 해선 안 됩니다. 신자는 땅 끝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제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세대의 모든 제자들을 땅 끝까지 가야하는 선교사로 불러내었지 않습니까? 매일을 마지막 날처럼 주님의 일을 하고 있는데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을 직접 만난다면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주님도 우리의 그 중심을 보시고 너무 기뻐하시고 신자 또한 주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는 영광으로 가슴이 터져 나갈 것입니다.
현재 흑암의 그림자가 전 지구를 다 덮고 있는 것 같아도 하늘을 향한 창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그 창을 통해 들어오는 예수님의 십자가 광채는 전 지구적인 어둠을 단번에 걷어내고도 남습니다. 종말은 주님께 완전히 맡기고 신자는 현재 자기 처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그리스도의 빛을 세상 앞에 비춰내야 합니다. 이것이 룻기의 서론이 말하는 바요, 신자가 룻기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할 종말론적 교훈입니다.
(8/22/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