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1:19-22) 나오미도 예수를 믿어 구원 얻었다.
룻기 강해 (4)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룻1:19-22)
룻기는 베들레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베들레헴 사람 엘리멜렉이 흉년을 만나 가족을 데리고 모압으로 피신했다는 설명으로 시작했습니다.(룻1:1) 아비와 두 아들은 모압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었고 과부가 된 어미 나오미와 두 이방 며느리 중 룻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19절) 그 후 베들레헴에서 일어난 사건이 룻기의 주제이며 룻의 증손자로 다윗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결론을 맺습니다.(룻4:22) 그 천년 후에 예수님도 베들레헴에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납니다.(눅2:4) 룻기는 결국 예수님의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선지자 미가가 그 근본이 영원에 속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예언한대로(미5:2) 이뤄졌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오미와 룻의 인생 여정도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셨고 그 여정 안에 십자가 구원의 뜻이 계시되었다는 것입니다.
신구약성경 66권 전체가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예수님을 빼고 해석하면 다른 일반적 도덕과 종교 차원으로 격하됩니다. 오히려 성경에는 종교경전에 담기에 부적합한 온갖 추악한 내용이 많습니다. 그만큼 모든 세대의 인간의 영적상태가 한 명의 예외 없이 비참했고 또 그래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 외에는 소망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도 내용상으로는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았던 것입니다.
한 미국신학자가 말했듯이 성경에서 가장 큰 불행을 당한 남자는 욥이고 여인은 나오미입니다. 두 사람의 인생여정이 거의 동일했다는 뜻인데 그 둘을 비교해 보면 예수님이 어떻게 간섭하여 어떤 은혜를 주셨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고난의 원인을 알고 싶은 욥
욥은 강도떼와 하늘에서 내린 불 번개와 큰 바람으로 아들들을 단 하루 만에 다 잃었습니다. 본인도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서 종일 기와조각으로 긁어야할 정도로 가렵고 고통스러웠습니다. 욥기는 서두에 그 큰 고난의 원인을 천상에서 하나님과 사탄이 욥의 믿음을 걸고 두 번 내기한 때문이라고 밝혀 놓았습니다. 동방의 의인이요 믿음이 좋았던 욥이라도 영계에서 하나님과 사탄이 자기를 두고 내기했을 줄은 꿈에도 알 수 없었습니다.
엄마로서 모든 아들을 졸지에 잃은 욥의 아내의 슬픔은 도무지 말로 설명하지 못할 것입니다. 인생사는 물론 자연재앙까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차원에서 보면 하루 만에 엄청난 불행이 세 번이나 겹쳐 일어났다는 것은 그분이 의도적으로 주도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에겐 하나님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원망스럽다 못해 크게 미워졌을 것입니다.
반면에 남편 욥은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라고 반응했습니다. 자식들을 다 잃었는데도 별로 슬퍼하는 것 같지 않고 자기도 원인 모를 중병에 걸렸는데도 도리어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습니다.
그런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는 아내로선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습니다. 욥에게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2:9)고 퍼부었습니다. 자식들이 잘 되는 것이 부부 인생의 목표인데 다 죽게 만든 하나님을 어떻게 원망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괜히 도덕적으로 의로운 척 종교적으로 경건한 척 가식 떨지 말고 차라리 솔직하게 하나님께 원망을 털어놓으라는 것입니다. 아주 일리가 있는 항변이자 인간적으로 공감이 갑니다.
아내의 잔소리를 들은 욥은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2:10)라고 대답하고선 여전히 입술로도 하나님께 범죄하지 아니했습니다. 저를 비롯해 우리 중에 욥처럼 의연하게 대처할 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욥의 두 고백에 드러난 믿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인간은 반드시 죽기 마련이며 그 살고 죽음을 주관하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살아 있는 동안의 복과 화도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둘을 합치면 죽음까지 포함해 아무리 힘든 일이 생겨도 하나님께 원망해선 안 되고 순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욥도 자기가 그런 고난을 당해야 하는 원인은 알고 싶었습니다. 틀림없이 하나님만의 뜻은 있었겠지만 자기가 당한 고통이 너무 크기에 과연 왜 자기에게 그런 시련을 주셨는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 욥을 위로하러 온 세 친구는 똑같이 네가 지은 죄가 많아서 이런 벌을 받는다고 아주 쉽게 말했습니다.
언뜻 정당하고 의로운 해명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궁극적인 차원에선 하나님이 선한 자는 상으로 악한 자는 벌로 보상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현실은 악인이 떵떵거리며 형통하고 있고 반대로 의인은 억울하게 심한 고난을 겪는 일이 많습니다. 욥도 자신의 평소 삶에 비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너무 과도하다는 의심을 도무지 지울 수 없습니다.
욥이 깨달은 영적 진리
욥과 친구들 사이에 아무 결론 없는 논쟁이 쳇바퀴 돌 듯이 지속되자 하나님이 보다 못해 욥을 직접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사시사철 몸으로 체험하고 있는 자연현상에 대해서 수많은 질문을 던졌으나 욥은 단 한마디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욥으로선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42:2,3)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난의 원인에 대해선 여전히 답을 얻지 못했고 대신에 가장 중요한 영적 진리 하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자기들이 매일 의존해 살면서 큰 혜택을 누리는 자연의 오묘한 이치에 대해서도 하나에서 열까지 철저지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어리석은 인간이 영계에서 모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 수 없고 가르쳐줘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전부를 알고자 일일이 따지는 것은 교만이자 심하면 불경죄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고난이 닥치면 자연히 의심, 불만, 원망 등을 가질 수는 있어도 그 전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면 그 어떤 일도 당연히 거룩하다는 믿음부터 확고히 가져야한다는 것입니다.
욥의 고백을 한마디로 바꾸면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선하시다는 것입니다. 비록 구체적인 의미를 죽을 때까지 온전히 깨닫지 못할지라도 말입니다. 자연은 물론 인간에게 선을 주시고 선하게 행사하실 수 있는 존재는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죄에 찌들고 어리석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결코 선할 수 없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욥은 진정으로 겸비해져서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의심과 원망까지도 완전히 내려놓게 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선하시다는 것은 어떤 인간도 하나님 앞에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또 그래서 모든 인간이 그분에게 바랄 바는 오직 그분만의 온전하신 긍휼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의 자녀들도 하나님께 심판받아 마땅했던 죄인으로서 하나님이 당신만의 때와 방식으로 심판했고 그 심판에 한 치의 불의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성경도 그 사실을 서두에 암시해 놓았습니다. “그들이 차례대로 잔치를 끝내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하게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위가 항상 이러하였더라.”(욥1:5) 잔치를 끝낼 때마다 욥이 혹시 자식들이 잔치 중에 죄를 범하지 않았을까 염려하여 대신 번제를 드렸다고 합니다.
바꿔 말해 자식들의 잔치가 종종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방식으로 치러진다는 것을 아비로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욥이 하나님께 입술로도 원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컨대 욥의 자녀들이 아무 죄가 없는데 천상에서 하나님이 사탄과 심심풀이로 내기해서 죽인 것이 아니라 당신만의 완전한 공의가 실현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생사의 대부분의 고난에 대해 인간의 영적 분별력이 너무 약해서 인간의 관점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합당한 원인이 없어 보일 뿐입니다. 그럼 인간이 마땅히 보여야 할 반응은 범사에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있다고 겸손히 인정하고서 하나님은 인간의 선과 악에 일일이 권선징악적으로 대응하는 분이 아니라는 점까지 믿어야 합니다.
욥은 고난 중에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23:10)고 고백했습니다. 어떤 인간도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가 소망하고 계획한 대로 그 삶이 진행된다는 보장이 절대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 인생의 모든 고난들은 순금으로 가는 길의 필연적 과정입니다. 욥은 결국 순금처럼 바뀌었는데 어떤 죄도 짓지 않는 도덕적 성결함도 아니요, 주님의 일에 헌신하는 종교적 경건함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옳고 선하시다는 확신 하나만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떤 큰 고난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게 된 것입니다.
욥과 동일한 고난을 당한 나오미
나오미도 남편과 두 아들을 졸지에 잃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죽기 전까지는 너무나 평안한 가운데 지냈을 것입니다. 모압에 와서 사는 것이 조금 꺼림직 했어도 흉년을 피해왔기에 특별히 죄라고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 자부가 기꺼이 시모를 따르기를 원한 것을 볼 때 평소 그녀의 성품도 자애롭고 선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남편이 죽었는데 어쩌면 평소에 병약했기에 일찍 죽었나보다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다 두 아들을 짧은 기간 안에 연달아 잃었습니다. 나오미도 평범한 아녀자인지라 남편을 잃은 데다 두 아들까지 잃었으니 자연히 하나님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도 들었을 것입니다. 이방 땅에 늙은 과부 혼자 어떻게 살아가라고 이런 큰 시련을 주느냐, 내가 평소에 잘못한 것이 무엇 있느냐, 남편과 아들 섬기는 데에 최선을 다했지 않느냐, 여자 의견은 아예 무시당하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않느냐, 얼마든지 하나님을 원망할 이유와 근거는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사실상 욥과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먼저 1:13에서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고 했으며 본문 21절에선 더 구체적으로 그 의미를 밝히고 있습니다. 우선 자기 가정이 고향을 떠날 때에 풍족하게 나갔다고 말합니다.(21절) 서두에 엘리멜렉과 두 아들이 심판 받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서 조금 미심쩍었으나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풍족하게 나갔다는 것은 재산이 많았고 남편과 두 아들이 있어서 자기 인생에 남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엘리멜렉이 구태여 모압으로 피신하지 않고 고향에 남아 있었어도 충분히 견딜만한 상태였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당장 끼니를 이을 것이 없고 막노동할 기회도 없어서 모압으로 이주했다면 하나님이 심판할 리 없습니다. 거기다 십년이나 머물면서 두 아들은 그곳 여자랑 결혼까지 했습니다. 언제 결혼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십년이 지나도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심판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오미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당시에 여자가 남편이 하는 일에 간섭해선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해도 최소한 두 아들의 결혼 문제에 대해선 자기 의견을 내세웠어야 했습니다. 남편이 죽고 나선 아들들에게 이방여인과의 결혼은 물릴 수 없어도 이젠 다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했어야 했습니다.
마침 두 아들 모두에게 자식이 없는 것을 보면 더더욱 그랬어야 합니다. 아비 엘리멜렉은 두 아들을 낳았으니 유전적으로 손이 귀한 집안도 아니었습니다. 자식을 낳느냐 못 낳느냐로 하나님의 상벌이라고 따지던 때인지라 속히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자고 권했어야 합니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는 이삭이 늙어서 기력이 떨어지자 나이 70이나 된 아들 야곱에게 지시해서 장자권을 차지하게 해주었지 않습니까? 성경에 어떤 암시도 없기에 나오미는 그 십년동안 남편과 두 아들의 영적 타락을 보고도 수동적으로 끌려가며 수수방관 했던 것입니다.
나오미의 처절한 고백
그녀가 베들레헴에 돌아오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라고 했습니다. 원어상 의미는 벌집을 쑤신 듯이 난리가 났다는 것으로 성의 모든 사람이 알 정도로 엄청난 화제 거리가 되었습니다. 베들레헴이 그리 큰 성읍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나오미의 시댁이 상당한 집안이었다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이 사람이 나오미냐(Is this Naomi?)라는 것은 나오미일 리 없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못 알아볼 정도로 완전히 거지꼴이 되었던 것입니다.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외국에 가서 떵떵거리며 잘 살아보겠다고 갔으나 정반대가 되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자기들끼리만 잘 살아보겠다고 가더니 꼴좋다고 고소해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나오미라는 이름을 부르자 그녀는 여호와의 심판을 받았기에 그런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없고 대신에 마라로 부르라고 대답했습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이고 마라는 괴로움, 쓴 것, 쓰라림이라는 뜻입니다. 알다시피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를 통과하며 사흘 동안 물을 마시지 못해 갈증이 났는데 처음 도착한 곳의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자 불인 이름이 마라였습니다.(출15:23)
마라로 불러야 할 이유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했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21절) 여호와가 ‘나를 치셨다’고 세 번이나 말했습니다. 지난 10년간의 모압에서의 생활을 곰곰이 되돌아보았더니 세 남자만 아니라 자기도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하나님의 벌을 받아 죽게 만들었으니 선조들 친척들 그리고 고향 사람들 보기에 면목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신도 남편과 두 아들을 따라서 함께 죽었어야만 했는데 그러지 못해 너무 부끄럽다는 것입니다.
성중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벌을 받지 않고서야 이런 행색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욥에게 아내가 하나님께 원망하라고 야단친 것과 세 친구가 네가 죄 지은 것이 많아서 벌을 받았다고 정죄했던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나 나오미도 욥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여호와께 벌 받은 것은 맞지만 그 원인에 대해선 조금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우선 나오미는 하나님이 아들들까지 심판하자 엄마로서 그들의 신앙교육을 잘못시켰다고 때늦었지만 뼈저린 회개를 했을 것입니다. 남편과 두 아들이 죽어서 더 살아갈 의미도 이유도 없어졌고 거기다 집안을 완전히 말아먹게 만든 죄인인지라 나도 같이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렸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전혀 없었고 다시 그 이유만 알고자 기도했어도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여전히 살려주시니까 서서히 하나님만의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보다 어렴풋이 짐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고향에 풍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당장 구체적인 뜻은 모르겠으나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 뭔가 거룩한 간섭을 하고 계시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아직도 젊은 며느리 룻이 이스라엘의 계대결혼법까지 설명해주면서 장래를 위해서 고향에 남으라고 신신당부했는데도 기어이 자신을 따라오겠다고 말했습니다.
거기다 룻의 대답에는 자기보다도 훨씬 나은 나아가 이스라엘 전체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순전하고 굳건한 믿음이 묻어져 나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나를 죽이지 않고 살려주신 이유가 바로 이 룻 때문일 수 있겠다고 여겨졌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며느리가 계대결혼을 함으로써 완전히 끊어진 가문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소망도 생겼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하라고 나와 며느리를 유다로 다시 돌려보내는가 보다는 생각까지 들었을 것입니다. 이는 제 개인적인 상상이나 추측이 결코 아닙니다. 나오미가 베들레헴에서 이후에 룻에게 행한 말과 일들을 연관시켜보면 분명히 성경이 말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이 다 늙은 자신을 살려준 위에 이처럼 순결한 믿음의 며느리를 노후를 위한 반려자로 부쳐주셨습니다. 나오미로선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은 몰라도 절대적으로 선하시고 의로운 분이라는 확신은 생겼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엄청난 벌을 주셨지만 그런 가운데도 소망도 함께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멸시받을 줄 알고도 베들레헴으로 돌아왔고 고향사람들의 반쯤 비아냥거리는 말에도 담담히 자신의 처지를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도 생전 처음으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상처, 슬픔, 원망, 사람들로부터의 멸시 천대, 현실적 궁핍까지 모두를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나오미의 이 고백은(20,21절) 비참한 신세에 빠트린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라기보다 앞으로 자기 인생을 거룩하게 이끄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나오미도 욥처럼 정금 같이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종말을 맞는 신자의 자세
이제 욥과 나오미가 내용적으로 예수님을 믿었다는 의미가 밝혀졌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에겐 자기를 높이려는 끈질기고도 교묘한 원죄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태생적으로 갖고 나오는 본성인지라 인간 혼자서 고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간섭해주어야만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둘 다 하나님의 형벌을 받고나서야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전에는 스스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었고 진정으로 그분 앞에 항복한 적이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찾기 힘든 믿음과 성품을 지녔었지만 성경에서 최고로 큰 불행을 겪고서야 비로소 자기 의를 깨트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 죄인을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이끌어 오시는 성령님이 가장 먼저 베푸는 믿음의 선물입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옛 자아가 온전히 깨어지지 않으면 인간의 상식으로만 하나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욥의 세 친구처럼 인간이 잘하면 상주고 못하면 벌만 주는 율법적인 하나님으로 그칩니다. 그런 하나님에겐 인간의 사정을 이해하여서 긍휼을 베풀 은혜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이 권선징악적인 차원만으로 세상을 다스리면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도 아예 없습니다.
구약의 하나님도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는 당신만의 긍휼을 이스라엘은 물론 열방의 백성 모두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긍휼을 세상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명료하게 확정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나 같은 천하의 죄인도 구원해주시니 내 인생을 주님의 뜻대로 들어 사용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고백 실천하게 되는 것이 예수 믿는 신앙의 출발이자 전부입니다. 욥과 나오미 둘 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시니까 내 인생을 당신께 완전히 바친다는 고백을 했기에 내용적으로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기 인생을 완전히 바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만 예수 믿는 믿음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무 조건 없는 사랑을 베푸신 데에는 믿은 이후에 신자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만의 더 거룩하신 뜻과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도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떠났는데(1:1) 십년 뒤에 다시 돌아온 때가 추수를 시작할 때입니다.(1:22) 현실적으로 굶어죽지 않게 인도하셨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추수가 끝나 인심이 풍성해질 감사 절기에 돌아오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추수를 시작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일을 수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세워진 거룩하고 광대하신 계획대로 겸손히 순복 헌신하는 두 여인을 통해서 예수님을 탄생케 하는 일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하려고 나오미를 성경에서 가장 불행한 여인으로 세운 것입니다.
작금 모든 이들이 너무 힘든 고난의 인생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펜데믹으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고 현실적으로도 사업이 망하고 직장을 잃은 자들이 아주 많습니다. 물가와 집값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엄청난 자연재앙까지 덮칩니다. 신자들도 개인적으로 그 동안 큰 죄 없이 하나님 잘 믿고 교회봉사 열심히 했는데 왜 이런 고난을 주시는지 의심 내지 원망도 듭니다. 모두가 종말이 곧 닥칠 것 같이 불안해하고 실제로 매일 뉴스로 접하는 일들이 종말적 사건들뿐입니다.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현실적 고난은 물론 하나님의 심판은 누구에게나 불시에 임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언제 어떻게 심판하실지 또 인류 종말의 시기와 방식은 하나님 그분만의 주권에 속합니다. 인류의 종말이 닥치고 주님이 재림하면 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산위에 숨는다고 바다 끝으로 도망간다고 그분의 사정권에서 벗어날 수는 결코 없습니다. 핵대피소나 화성으로 탈출한다고 하나님의 권능이 미치지 못할 리 없습니다.
욥도 나오미도 우리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인품이 훌륭하고 믿음도 좋았던 자들이나 성경에서 최고 큰 불행을 불시에 안기는 하나님입니다. 그렇다고 독선적인 분이 아니라 오히려 그럼으로써 그들을 더욱 거룩하고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자기 스스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구원을 선물로 받았고 그 후에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에 쓰임 받았습니다.
정말로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자는 언제 종말이 닥쳐도 하나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있기에 그분의 사랑 가운데서 끊어낼 것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신자 자신이 알든 모르든 그분의 거룩하고 영원한 계획에 쓰임 받고 있습니다.
그 계획을 구체적으로 몰라도 괜찮습니다. 세상에 미련을 가지고 죄악 가운데 있거나 게을러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지만 않으면 됩니다. 언제든 주님이 오실 수 있다면 오늘도 내일도 바로 종말이 될 수 있으므로 더더욱 세상 앞에 신자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자기 인생 전부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면 유일하게 선하신 하나님이 신자의 삶을 통해 당신만의 선을 실현해주십니다.
혹시라도 욥이나 나오미 같은 큰 불행에 처해있습니까? 감히 말씀드리건대 선하신 하나님이 정말로 선하신 뜻으로 베푸시는 은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립서비스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현실적으로는 나오미에서 마라로 바뀌게 했지만 영적으로는 마라에서 나오미로 바꿔주셨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었다는 뜻도 욥과 나오미처럼 고난이 바로 정금으로 가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매일을 종말 같이 산다는 것이 생명까지 걸라는 비장한 뜻이 아닙니다. 종말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며 신자에겐 구원이 완성되어 주님처럼 영광스럽게 바뀌는 날입니다. 그날이 오기까지 하나님이 신자 인생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점점 더 명확하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신자로선 나날이 그 소망에 더 충만해져 주님과 함께 기쁘게 걸어가면 됩니다. 지금의 코로나 사태와 미쳐 돌아가는 것 같은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9/12/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