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2:17-23) 하나님께 기적 같은 은혜를 받는 비결
룻기 강해 (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어머니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어머니에게 드리매 시어머니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 룻이 누구에게서 일했는지를 시어머니에게 알게 하여 이르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하는지라 나오미가 자기 며느리에게 이르되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모압 여인 룻이 이르되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하니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의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하는지라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니라.”(룻2:17-23)
첫 날에 벌어진 기적
룻이 추수철에 떨어진 이삭을 주으러 나간 첫 날에 놀랄만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연히 도착한 곳이 인자하고 믿음이 좋은 보아스의 밭이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을 자기 여종과 같이 대우해주었고 앞으로도 다른 밭으로 가지 말고 자기 밭에서 맘껏 이삭을 줍도록 허락해주었습니다. 본문은 종일 수고한 룻에게 보인 나오미의 반응인데 신앙적으로 특별히 기도에 대하여 새겨봐야 할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나오미와 룻 두 과부가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는 사방이 막히고 아무 대책이 없는 빈털터리였습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고 굶어 죽지만 않아도 다행이었습니다. 하루하루 끼니만 이을 수 있다면 주위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은 감내해야할 처지였습니다.
과부가 떨어진 이삭을 줍는 것은 오늘날로 치면 홈리스가 길거리에서 동냥하거나 동전을 주워서 싸구려 햄버거로 식사를 해결하는 셈입니다. 그런데 첫날부터 룻이 주워 온 곡식의 양이 어마어마했습니다. 추수 현장에서 단을 털어서 알곡만 갖고 왔는데 한 에바 약 22리터 정도 되었습니다. 한국은 곡물 한 되가 1.8리터니까 12되인데 두 여인이 아껴 먹으면 몇 주도 버틸 수 있는 양입니다. 정상적으로는 도무지 주울 수 없고 유대인도 아닌 모압 여인으로선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양을 주어왔습니다. 거지가 우연히 아주 인자한 부자를 만나 백 달러짜리 지폐를 여러 장 받은 정도의 큰 횡재였습니다.
나오미는 유력한 집안으로 모압으로 이주했다가 남편과 두 아들까지 죽고 돌아왔기에 고향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룻은 모압 여자니까 어차피 멸시 받을 것을 각오했고 나이든 시모가 힘들 것까지 감안하여 혼자서 주으러 나갔습니다. 거기다 나오미에게 “그가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드렸는데. 그날 낮에 보아스가 넘치도록 나눠준 볶은 곡식을 남겨서 가져온 것입니다.(룻2:14) 나오미로선 룻이 자기를 부양하려고 모든 현실적 난관을 각오하고 따라와 준 것만도 대단한데 자상한 마음씀씀이가 눈물겹도록 고마웠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이른 아침 며느리 혼자 내보낸 후 여호와께 간절히 기도드렸을 것입니다. 첫날이니까 문전박대 받지 않고 율법대로 행하는 인자한 주인을 만나서 조금이라도 주울 수 있게 해달라고 매달렸을 것입니다. 내심으론 성추행을 당하지 않고 성한 몸으로만 돌아와도 다행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한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엄청난 결과를 갖고 돌아왔습니다.
나오미로선 그 날 하루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너무 궁금해졌습니다.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고 두 번이나 거푸 룻이 만난 밭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물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양을 줍도록 허락한 자가 있다니 자기 기도에 대한 응답이 분명했으므로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덧붙였습니다.
룻은 그날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시모에게 말씀드렸는데 나오미가 밭의 주인이 보아스라는 말을 듣자 다시 여호와께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은혜를 베푼 그가 보아스와 여호와 둘 중에 누구인지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말 앞에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고 했는데 당연히 복 받을 자는 보아스입니다. 이어서 동일하게 ‘그’라는 대명사로 받았기에 의미의 흐름상 보아스가 복을 받아야만 할 이유를 설명한 것으로 봐야합니다. 만약 그가 여호와가 되면 죽은 자 엘리멜렉과 두 아들은 여호와의 심판을 받았는데 거꾸로 여호와가 은혜를 준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성경적으로나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보아스가 룻을 넘치도록 도와주었기에 자기도 도움 받았고 그럼 사실상 엘리멜렉 집안에 은혜를 베푼 셈이라는 뜻입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큰 은혜를 베푼 보아스에게 감사와 축복을 한 후에 그가 자기들 근족 중의 한 명이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베들레헴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 룻이 마침 기업 무를 자 중에 한 사람을 만난 것은 전혀 기도하지 않았던 일입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게 당신만의 계획을 갖고 자기들에게 간섭하고 있다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보아스가 근족이라는 말을 듣자 룻은 보아스가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자기 밭에서만 이삭을 주우라고 말했다고 강조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젊은 모압 과부가 유대인 시어머니 나오미를 정성껏 섬기는 효성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순전히 따르는 믿음 때문에 도와준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룻은 너무 과분한 배려인지라 완전히 납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다 지금 그가 나오미의 근족이 된다는 말을 듣고서야 왜 그런 말과 대우를 해주었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오미도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고 당부했습니다, 이왕이면 근족에게 계속 신세지는 것이 좋지 다른 밭에 가면 이만한 양은 절대 주울 수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기업을 무를 자
본문의 상황에선 나오미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치 국물부터 마신다는 속담처럼 룻을 보아스와 계대결혼 시킬 꿈에 부푼 것은 아닙니다. 우선 룻이나 나오미나 그런 사람을 만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고 단지 이삭만 주울수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무엇보다 나오미가 그는 너와 계대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단순히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라고만 말했습니다. 히브리어로 ‘고엘’이라고 하는데 (남편과) 가장 가까운 남자친척을 뜻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고엘이 감당해야 할 임무는 크게 넷이고 계대결혼은 그 중의 하나입니다.
가장 먼저 친척이 살해당했을 때는 방심하다 실수로 죽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고엘이 피의 복수를 해도 정당했습니다.(민35:19-21) 또 빚을 갚으려고 팔았던 가문의 재산을 다시 돈을 주고 사야하고(레25:25), 빚을 갚기 위해 종으로 팔려간 친척도 다시 사야 했습니다.(레25:47-49). 그리고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으면 그 남자 형제들이, 그마저 없으면 가장 가까운 인척이 미망인과 결혼할 책임이 있었습니다.(신25:5-10) 고엘은 한마디로 가문의 이름과 기업을 유지해 나갈 재산과 자식이 없을 때에 가장 가까운 남자 형제 내지 친척으로 대신 책임지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말하자면 나오미가 고엘이라고만 언급한 것은 단순히 위급하면 경제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하나님이 붙여주셨다는 뜻이었습니다. 지금 남의 밭에서 이삭을 주워야 할 처지니까 엘리멜렉이 대대로 내려온 기업을 모압으로 이주하면서 다 팔았거나 빚을 져서 남에게 넘어갔을 것입니다. 나오미에게 보아스와 룻의 계대결혼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잠시 스쳐지나갔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날 저녁만은 룻이 가져온 곡식에 놀라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그래서 보아스의 나이, 외모, 성격 같은 신상정보를 전혀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룻은 시어머니의 당부대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칠 때까지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웠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보리 추수는 대체로 사월 중순에 시작되고 밀 추수는 유월 중순에 행하니까 약 두 달이 걸립니다. 절기로 따지면 유월절에서 맥추절까지 7주간 정도 됩니다. 맥추절은 유월절 7주 이후니까 7X7=49 다음의 오십일 째가 되므로 오순절로도 불립니다.
단순 수치로 계산해보면 안식일에 노동을 쉬었다 치면 룻은 43일을 일했고 첫날 주운 양 6.7되의 43배는 약 29말이나 됩니다. 두 여인이 다음 해까지 먹고도 남으며 여유분을 팔아서 생계비용에 보태어도 됩니다. 사실상 보아스는 나오미 즉, 엘리멜렉의 기업을 대신 책임져 준 셈입니다. 그가 종들더러 단에서 룻 몰래 얼마를 빼어서 흘리라고 명령할 때부터 이미 근족으로서 의무를 행해야겠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두 달간 나오미나 룻 쪽에서 그와 계대결혼을 해보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보아스와 마찬가지로 나오미와 룻에게도 이기적인 욕심이 없었고 어떤 계략을 사용해서 보아스라는 근족을 이용해먹으려는 의사도 전혀 없었습니다. 성경기록 그대로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한” 것뿐입니다. 룻은 매일 보아스가 이미 종들에게 지시해놓은 은혜에 따라 묵묵히 감사함으로 이삭을 주웠고 시어머니를 성실하게 섬겼던 것입니다. 보아스도 자신이 할 바를 이미 다했으니 구태여 룻과 개인적인 접촉을 가질 이유도 없었고 그러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나오미와 룻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의탁은 날이 갈수록 더 깊고 견고해졌을 것입니다. 사방이 완전히 캄캄했었는데 첫날부터 여호와의 소망의 빛으로 완전히 밝아졌고 두 달 내내 자기들 주변을 환하게 비춰주었습니다. 아침마다 룻이 보아스의 밭으로 나가기 전에 두 여인은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면서 보아스를 축복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나오미의 간절한 소망
그런데 두 달의 추수가 끝나고 결국은 보아스가 정식으로 나오미의 고엘이 되어서 룻과 계대결혼하게 됩니다. 물론 룻으로 다윗과 예수님의 조상이 되게 하려는 계획에 따른 하나님의 주권적 간섭의 결과입니다. 그와 동시에 나오미의 두 달 간의 간절한 기도가 응답이 된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그렇게 오래 기도한 정성을 갸륵하게 여겨서 응답해준 것은 아닙니다. 나오미의 성품과 믿음에서부터 그런 응답을 받을만한 요소가 충분히 있었고 또 그러니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선 본문 다음날부터 행한 기도의 내용이 첫날과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첫날은 말씀드린 대로 어떻게든 인자한 주인을 만나서 이삭을 조금이라도 주울 수 있게 해달라고, 최소한 불쌍한 며느리에게 나쁜 일은 생기지 말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이삭을 주워왔고 고엘이 될 수 있는 인자가 넘치고 믿음이 좋은 근족까지 만났습니다. 기도한 내용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정확히 말해 기도하지 않은 복까지 받았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큰 기도 응답을 받은 것으로 솔로몬을 꼽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왕상 3;11,13)
흔히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린 정성과 세속적인 것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광도 받았다고 이해합니다. 어디까지나 표피적인 해석입니다. 이미 그는 왕이 되었으므로 온 나라 전체에 최고로 부귀하고 영광스런 자가 되었습니다. 명령만 하면 무엇이나 차지할 수 있기에 굳이 그런 것들을 구할 필요도 이유도 없었습니다.
솔로몬은 젊은 나이에 왕이 된데다 다윗의 적손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충직한 부하였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불륜을 저질렀고 들키지 않으려고 우리야를 죽였습니다. 밧세바에게서 두 번째로 태어난 서자 왕자였으니 우리야와 함께 고생한 신하들이 당연히 우습게 여기다 못해 미워할 것입니다. 그에게 최고 큰 고민은 어떻게든 신하들을 잘 통솔하여서 나라를 잘 다스리는 일뿐이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은 다 갖추었으나 하나 아쉬운 것이 정치적인 지혜와 경륜이었기에 오직 그것을 간절히 구하고 또 구한 것입니다. 왕으로서 나라를 잘 다스리겠다는 열정과 소망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해서 기도한 그대로 응답 받았던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 받은 지혜로 나라를 잘 다스렸으니까 자연히 부강해지고 인근에 그의 이름이 높아진 것입니다.
천일 새벽기도를 하거나 의도적으로 의로운 내용으로 기도한다고 응답이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기도 응답을 잘 받는 방법을 따지는 것부터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들 중에 자기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을 두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으로선 응당 응답해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첫날에 기도하지 않은 것까지 응답받은 근거도 솔로몬의 경우와 정확히 똑같습니다. 그녀에겐 자신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자기를 따라온 이 착한 며느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주는 것이 이제부터 행해야 할 유일한 일로 최대 관심사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방 여인 과부로 룻이 베들레헴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아무리 생각해도 유대인과 재혼뿐입니다. 룻이 아직 젊고 성품과 효성이 좋다는 소문이 났고 용모도 아름다웠을 테니까 결혼하겠다는 유대 남자가 나설 수 있습니다. 만약 다른 지파에 시집가버리면 나오미와 룻은 완전히 남이 되어버립니다. 룻이 자기를 따라오지 않고 그냥 모압 땅에 남은 것과 하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룻이 계대결혼 하여 가문의 이름과 기업을 이어가며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고 계속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 일은 율법에 규정된 제도이므로 자기의 개인적인 욕심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입니다. 나오미도 솔로몬처럼 자신에게 가장 절실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두고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침 룻이 첫날 나갔다 와선 근족을 만났다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평소 가깝게 지내며 알고 있던 친척 즉, 당장 계대 결혼이 가능한 상대는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일차 고엘은 따로 있었습니다.(룻4:1) 그럼에도 하나님이 나의 기도에 뭔가 반응을 하시는가보다 여겼을 것입니다. 그 다음날부터는 이제 생계 문제는 해결되었으니 룻의 장래를 두고 보아스와 연결된 하나님의 선하시고 확정적인 뜻을 보여 달라고 계속 기도했을 것입니다.
나오미의 진짜 중요한 기도 제목
거기다 나오미의 기도와 믿음에서 성경 기록에는 없지만 반드시 주목해야 할 사항이 하나 따로 있었습니다. 룻이 기어이 어머니를 따르겠다고 하면서 행한 신앙고백이 나오미의 머리에 완전히 각인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1:16b,17)
룻은 여호와만 믿고 시어머니를 따라갈 것이며 그러면 여호와가 책임져 주실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모압의 이방 신들을 다 버리고 이스라엘의 신만 따르겠다는 뜻입니다. 거기다 죽기까지 시어머니를 모시겠다고 했으니 나오미도 죽기까지 룻에게 보답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나오미로선 베들레헴에서의 룻의 새 인생이 그 아름다운 신앙고백대로 실현될 수 있게 현실적은 물론 영적으로도 최선의 길로 인도해달라고 하나님께 계속 기도했을 것입니다.
출애굽 후 모세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받으려고 시내 산에 올라갔는데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금을 모아서 애굽의 황소 신상을 만들고 그 앞에서 음란하게 먹고 마시며 춤을 추었습니다. 그것도 여호와 절일에 그랬습니다.(출32:1-6) 여호와가 크게 진노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진멸하고 모세로 다시 당신의 백성들을 새로 세우려 했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까?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출32;11)
애굽에게 열 가지 큰 재앙을 내려서 이스라엘을 탈출시켜 놓고 다시 다 죽여 버리면 애굽이 왜 그런 헛고생을 했느냐고 조롱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신은 애굽뿐 아니라 자기 백성에게까지 제 기분 내키는 대로 화를 내는 독선적인 신이라고 비난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반드시 들여보내겠다고 아브라함과 맺었던 언약을 일방적으로 깨트리지 말아달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쉽게 바꾸면 하나님 체면이 너무 손상되니까 아무리 이 백성이 죽을죄를 지었어도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려면 차라리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했습니다.(출32:32) 그 죄 많은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서 모세는 자기 생명까지 걸었습니다.
나오미도 틀림없이 이 가련한 며느리가 본토와 친척 아비 집을 다 버리고 혈혈단신으로 여호와만 바라보고 왔으니 제발 외면하지 말아 달라고 간구했을 것입니다. 이제 막 순진하고 풋풋한 믿음을 갖게 된 룻을 사람들은 몰라도 당신께선 실망시킬 수는 절대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면 룻은 정말로 죽은 목숨이며 차라리 고향에 남아 있었던 것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모압의 이방 신들보다 여호와가 못하거나 같은 수준이 되어서 모압 사람들은 물론 고향에 남은 동서 오르바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룻의 인생이 망가지면 나오미로선 남편, 두 아들, 자기를 부양하러 따라온 며느리까지 즉,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 모두를 실패하게 만든 너무나 말도 안 되는 처지에 빠집니다. 그들보다 오히려 자기가 더 저주 받은 인생이 되기에 더 이상 살아갈 의미도 없어집니다. 나오미도 모세처럼 차라리 자기를 죽이더라도 하나님더러 룻의 인생을 당신의 이름과 권능을 걸고 책임져달라고 요구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큰 죄악을 저질렀어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고 나오미는 이방 여인의 순전한 신앙고백을 붙든 것만 다를 뿐입니다.
그런데 룻이 이삭 주우러 나간 첫날부터 근족을 만나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나오미로선 자신의 평소의 소망 내지 기도에 부합하게 하나님이 역사하고 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달 가까이 지나도 특별한 일도 그럴만한 징조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나오미는 룻을 위한 기도를 쉬지 않았을 것이며 룻은 자기가 행할 바를 매일 최선을 다해 묵묵히 행했다고 본문은 결론 짓고 있습니다.
종말을 대하는 신자의 자세
지금 인류는 코로나와 지구온난화로 인한 종말 같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욕심과 죄악 때문입니다. 당장 눈앞의 안락과 형통을 위해서 돈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서 자기 마음에 옳다고 여기는 대로 행한 결과입니다. 나라나 개인이나 서로 남들보다 앞서려고 무차별적 경쟁을 하니까 생존환경은 황폐해져서 온갖 바이러스가 출현하고 극심한 자연재앙도 빈번히 발생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더 악화될 것이며 시급히 적절히 대처하지 않으면 최악의 사태도 예상보다 더 빨리 맞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다면 세상 타락이 당신의 인내의 한계까지 차올라서 가히 심판하기 직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처럼 그분의 이름만 높이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걸며 기도하는 신자들이 절실합니다. “이번 사태가 비록 인간의 죄악과 욕심 때문인 것은 분명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 이런 처참한 지경인데도 손을 놓고 두고 보시기만 할 것입니까? 얼마나 더 많은 희생자가 나와야 분이 풀리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도무지 자격과 염치도 없지만 그래도 당신의 인자는 영원하시고 끝이 없지 않습니까? 어서 빨리 그 큰 긍휼을 내리셔서 이 사태를 선하게 인도해 달라”고 매달려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기도자들부터 모세나 나오미처럼 평소부터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그분만 범사의 중심에 두며 그분의 일에 충성 헌신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자답게 매사에 당당하고도 거룩하게 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 그렇게 당당하게 요구할 자격이 최소한 담대함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물론 마찬가지로 아무리 간절히 기도해도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여건이 되어져 가는 모습을 영적으로 잘 분별해가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개입하심에 대한 소망을 끝까지 놓치지 말고 점점 더 키워나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분의 완전한 긍휼이 임할 때까지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비록 세상에는 온갖 죄악이 들끓고 여전히 회개할 생각이 없지만 그래도 아니 그럴수록 하나님만의 권능과 은혜를 반드시 이 땅에 드러내달라고 당당하게 아뢸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결과가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천하 만민이 보고 당신께 엎드리게 될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들의 모습이 솔직히 어떠합니까? 자기가 소원하고 계획한 개인적인 일들을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므로 반드시 이뤄주실 것이라 착각하고선 뜨겁게 기도합니다. 아무리 종교적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해도 자기 형통만 바라는 기복주의일 뿐입니다.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한 것이라 제대로 얻지도 못합니다.(약4:3)
여러분 정말로 단 한 번이라도 하나님더러 당신이 약속하신 말씀을 지키라고 당당히 요구한 적이 있습니까? 그 전에 개인적으로 받은 분명한 소명이 있고 그 실현을 위해 목숨을 건 적이 있습니까? 그래서 그 소명을 이루는데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체면과 위신이 깎인다고 담대하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까? 무엇보다 나를 통해서 내 주변의 불쌍한 자에게 당신만의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그러지 않을 양이면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매달린 적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완악하게 죄를 짓고 또 죄를 지어서 염병 자연재앙 전쟁 등의 엄청난 징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수만 명의 죽음을 당한 후라도 전백성이 옷을 찢고 재를 덮어쓰고 금식하며 회개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정성과 열심을 본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한 마음이 되어서 진심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고 징벌을 멈춰 주었습니다.
지금 미국은 코비나로 사망자가 70만 명이 넘어섰고 역사상 최악의 펜데믹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온 나라가 백신의 의무적 접종 여부 하나로 좌우로 분열되어서 서로를 원수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한 마음이 되어 함께 기도해도 모자랄 판국에 교회마저 그 흐름에 휩쓸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실적 최선책인 백신으로 언젠가 이 사태가 종식되겠지만 현대인들이 구약의 이스라엘 정도도 회개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므로 더 큰 재앙들이 닥칠 것도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때를 대비해 신자를 세상에서 따로 불러내었다는 뜻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오미는 하나님이 그 큰 고난을 겪게 했지만 순전한 믿음의 며느리 룻을 통해서 그분의 뜻을 하나씩 분별해 나가며 그에 합당하게 기도했습니다. 모세처럼 하나님의 직통계시를 받은 것도 아니고, 오늘날 신자처럼 성경적 진리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했습니다. 며느리 룻이 생명을 걸고 자기를 섬기면서 여호와를 죽기까지 사랑하니까 자기도 무슨 희생을 당해도 좋으니 룻을 위해 최선의 길로 인도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뿐입니다.
종말 같은 시대라고 따로 특별히 취해야 할 강력한 믿음의 방안은 없습니다. 나오미처럼 가장 가까운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매일 최선을 다해 섬기면 됩니다. 그마저 힘들면 기도라도 매일 해주면 됩니다. 누차 강조했지만 미래는 하나님의 몫이고 현재의 주변에 힘든 이웃은 당장 신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10/3/2021)
말씀 감사합니다. 녹음이 거의 끝부분에 짤린 상태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아쉽지만 나머지는 글로 봐야겠네요. 2주 연속 목사님 모습을 뵐 수 없는 것도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