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3:14-18)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큰 장애가 나타나면?
룻기 강해 (10)
“룻이 새벽까지 그의 발치에 누웠다가 사람이 서로 알아보기 어려울 때에 일어났으니 보아스가 말하기를 여인이 타작 마당에 들어온 것을 사람이 알지 못하여야 할 것이라 하였음이라 보아스가 이르되 네 겉옷을 가져다가 그것을 펴서 잡으라 하매 그것을 펴서 잡으니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지워 주고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룻이 시어머니에게 가니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 하니 룻이 그 사람이 자기에게 행한 것을 다 알리고 이르되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 손으로 네 시어머니에게 가지 말라 하더이다 하니라 이에 시어머니가 이르되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룻3:14-18)
반만 응답된 기도
룻이 여자로서 쉽게 행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보아스의 인격을 믿고 고엘의 역할을 감당해달라고 먼저 구애를 했습니다. 보아스가 흔쾌히 승낙했지만 나오미와 룻이 약 두 달간 기도했던 일이 온전히 응답되지 않고 반만 이뤄졌습니다. 보아스에게 룻과 계대결혼을 기꺼이 할 용의는 있으나 막상 율법이 정한 일차 고엘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의 신자들은 성경을 통해 결론을 아니까 하나님이 선하게 해결해주셨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당시의 룻으로선 전혀 예상치 못했던 터라 참으로 난감했을 것입니다. 율법이 규정한 신성한 제도이긴 하지만 아무 정분도 없는 사람과 결혼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보아스와 룻이 몰래 결혼할 수는 없고 또 서로 언약을 맺고선 일차 고엘이 죽을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도 없습니다. 자기들 개인적인 욕심을 달성하기 위해서 율법 규정을 알면서도 어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종종 겪습니다. 기도한 내용의 반만 먼저 응답되어서 좋아하고 있는데 그것을 뒤집어엎는 장애요소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실감나는 비유를 하나 들자면 오랜 기도 끝에 선교사로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신학교 공부까지 마쳤는데 부모가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신학교에 입학시킨 것은 당신의 뜻이라고 인정해준 셈인데 막상 선교사로 떠나려는데 너무 큰 불행이 닥친 데다 모든 여건이 정반대로 흘러갑니다.
본문은 그런 경우에 신자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범적인 가이드를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이 결혼의 세 당사자들이 각기 어떻게 반응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최적의 신랑감 보아스
먼저 보아스는 룻의 입장을 배려해서 그날 밤에는 단둘이서 조용히 대화만 나눴습니다. 그 전에 낯선 여인이 자기 잠자리에 누워있는 것을 보면 깜짝 놀라서 고함을 지를 수 있는데 전혀 그러지 않았습니다. 밤새 룻의 정절을 지켜주었고 새벽에 일찍 깨어서 “사람이 서로 알아보기 어려울 때”(14절)에 룻이 왔다갔다는 사실조차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평소에 그가 얼마나 노련하고 침착한 성격인지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보아스로선 나중에 일차 고엘에게 책임 추궁을 당할 수 있으니까 반드시 그래야만 했습니다. 술 마신 김에 하루 저녁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관계를 맺으면 룻의 자신에 대한 믿음에 상처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혹시라도 주변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알게 되면 룻은 물론 보아스 본인의 명성에도 크게 금이 갑니다.
기원 후 3세기에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탈무드의 주석인 미쉬나에는 흥미로운 규정이 있습니다. 이방 여인과 성적 관계를 먼저 맺었다고 의심되면 그 여인과는 계대결혼을 할 수 없다고 규정해놓았습니다. 미쉬나가 오래 전부터 시행되어 오던 관습을 다시 정리했는지 아니면 룻기의 보아스의 선례를 바탕으로 그런 해석을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보아스로선 일차 고엘이 있다는 사실을 떠나서 자신의 인격을 걸고 이 결혼절차를 아무런 흠결이 없게 이끌려 한 것입니다.
그리고 룻에게 다시 곡식을 여섯 번이나 되어서 지어주었습니다. 성경이 단위를 밝히지 않고 있어서 당시의 도량형으로 추측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추수 첫날에 주은 이삭이 한 에바 정도였는데 여섯 에바라면 7말이 넘으므로 여자 혼자서 질 수 있는 양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섯 세아로 추측하는데 첫날 주은 양의 두 배인 두 말보다 조금 더 됩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네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다고 말했는데 그 감사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실현해 보여준 것입니다.
그 동안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주은 이삭만으로도 충분히 그 해를 넘길 수 있기에 지금 이삭을 담아주는 것은 생존을 돕는 구제의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룻에게 일차 고엘이 거절하면 곧바로 결혼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13절) 그에 대한 증표로 준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 이 결혼이 이뤄지도록 노력할 테니까 안심하고 있으라는 뜻입니다.
집에 남아있던 나오미는 밤새 거의 잠도 못 자고 룻의 구혼을 보아스가 받아들여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새벽까지 소식이 없으니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는가보다 짐작은 되지만 최악의 경우가 생겨서 집에 들어오지 못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쨌든 뜬 눈으로 지샜을 것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곡식을 퍼주면서 어떻게 말했습니까? “빈 손으로 네 시어머니에게 가지 말라”(17절)고 했습니다. 만약 룻이 빈 손으로 돌아가서 보아스가 결혼 승낙을 했다고 말로만 전하면 어떻게 됩니까? 나오미로선 룻이 걱정 끼치지 않으려고 거짓말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이 곡식은 룻은 물론 나오미까지 안심시키는 증표였습니다.
보아스는 룻이 시어머니의 지시대로 행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다 눈치 채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압 여인 룻에게 이스라엘의 계대결혼에 대해서 가르치고 특별히 이날 밤 사람 눈에 띄지 않게 행하도록 한 것 등을 볼 때 나오미 또한 믿음이 좋은 현숙한 여인임을 짐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전에 룻이 시모를 존경했기에 자칫 과부로 수절할 수 있는데도 베들레헴까지 따라왔다는 사실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계대결혼이 성사되면 법적으로 나오미는 보아스의 양어머니가 되고 보아스는 죽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셋째 아들이 됩니다. 보아스는 그 결혼과 입양을 확약한다는 보증금조로 첫날 걷은 이삭의 두 배의 양을 갖고 가서 시모에게 보여주라고 한 것입니다. 만약 결혼이 성사되면 자기와 동년배이지만 나오미를 어머니로 존경하고 계속해서 룻과 함께 잘 보살피겠다는 표시였습니다. 나오미는 보아스가 모든 면에서 지혜롭고 처신이 올곧을 뿐 아니라 믿음도 최고인지라 룻의 남편감으로는 최적이라고 다시 확신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지워 주고 성읍으로 들어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른 새벽 룻을 먼저 떠나보내자마자 약속한 것을 실현하려고 곧바로 성으로 고엘을 만나러 갔습니다. 고엘은 평생 그 신분이 변화되지 않으니 보아스로선 반드시 만나서 담판을 지어야만 합니다. 쇠뿔은 단김에 뽑으라는 속담처럼 전혀 주저함이 없이 자신이 행해야만 하는 길대로 뚜벅뚜벅 걸어갔습니다.
보아스도 그 동안 내심 그녀를 좋아했고 결혼하길 원해 기도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막상 룻으로부터 먼저 구애를 받자 일차 고엘이 장애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지레 포기하지 않았고 또 전혀 불평 원망하지 않고서 곧바로 본인이 현재 처한 환경에서 반드시 행해야 하고 행할 수 있는 일들을 시행했습니다.
앞에서 비유했던 선교사의 경우도 동생들이 스스로 독립할 때까지 선교사의 길을 잠시 보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재정적 필요를 채워주지 않는 한에는 그 길이 최선입니다. 설령 돈 문제가 해결되어도 부모 역할을 대신해주어야 하니까 동생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그래야만 합니다. 눈앞에 장애가 나타나면 신자도 모든 현실적 수단을 동원해서 맞부딪히며 싸워야만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소명을 무시하고 어려운 현실과 타협하라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그런 여건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면 그에 대한 해결책이 마련되어 있거나 최소한 그에 대한 당신만의 거룩한 뜻과 계획이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워낙 치사하고 완악한지라 본인도 그런 어려움에 닥쳐야만 더 깊고 간절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 친밀한 교제를 할 수 있으며 그분의 뜻도 그런 어려운 여건 가운데 오히려 더 분명히 드러나는 법입니다. 하나님이 사전에 의도하신 뜻이 있기에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방식대로 곤경을 벗으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의 더 완벽한 섭리가 작용됩니다.
나오미와 룻의 반응
이제 나오미의 반응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그녀가 철야 기도한 대로 룻은 보아스의 승낙과 함께 증표도 받아왔습니다. 더 가까운 근족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조금 당황했겠지만 곧바로 오늘 중에 그를 만나서 담판을 짓겠다고 약속했다고 하니 조금 안심이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 상대가 누가 되던 일차적으로 룻의 계대결혼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몰락한 엘리멜렉 가문은 살아나고 두 불쌍한 과부도 생존에 지장이 없어집니다. 룻이 아직 젊으니까 손자를 보게 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왕이면 인품과 믿음에서 하자가 없는 보아스와 맺어졌으면 좋겠으나 그 일은 자기들 손을 떠났습니다. 이제는 보아스와 그 고엘과의 담판이 긍정적으로 끝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일만 남았고 하루만 기다리면 가부간 결론이 납니다.
그래서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고 말했습니다. 나오미와 룻은 자기들이 행할 바는 다 행했기에 보아스의 처분에 온전히 맡기자는 뜻입니다. 만약 일차 고엘이 계대결혼을 승낙하면 하나님의 뜻이니까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마지막 말이 조금 흥미롭습니다.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말 그대로 보아스가 끝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 쉽게 포기하고 물러서지 않으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치 그녀들의 바람대로 반드시 성취해주리라고 예상한 것 같은 표현입니다. 그녀가 일차 고엘에 대해 잘 알고서 거절하리라 예상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룻을 술에 취해 잠에 떨어진 보아스의 잠자리에 밤중에 밀어 넣은 것은 분명히 나오미가 그 근족에 대해서 몰랐다는 증거입니다.
나오미의 뜻이 뭔지 알려면 계대결혼과 고엘 제도의 관계부터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둘은 독립적인 별도의 제도가 아니고 계대결혼은 고엘 제도를 실현하는 한 가지 방안입니다.
계대 결혼은 기업을 이을 아들이 없이 남편이 죽었을 때에 가장 가까운 형제랑 결혼하는 제도입니다. 만약 아들이 있고 죽으면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당연히 자유롭게 재혼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계대결혼은 단순히 과부의 장래 삶을 보장해주는 제도가 아닙니다. 기업을 무르게 하는 것이 첫째 뜻이고 그러기 위해 계대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기업을 무른다는 것은 지파별로 분배 받은 땅을 가난해져 팔거나 빚보증으로 다른 가문으로 넘어가면 가장 가까운 형제가 돈을 주고 사서 다시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이는 가난한 형제가 살아 있을 때에도 즉, 자식 없이 죽지 않아도 근족으로서 감당해야 할 의무입니다.
지금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이 다 죽어 기업 무를 남자가 없습니다. 거기다 이삭을 주어야 할 정도라면 모압으로 이민 갈 때에 이미 기업은 다른 가문에 넘어간 것으로 봐야 합니다. 따라서 나오미의 고엘은 먼저 다른 가문에 넘어간 기업을 돈으로 되사야 하고 그 후에 기업을 이어갈 아들자식을 낳기 위해 계대결혼도 해야 하는 이중의 의무를 져야 합니다.
그런데 일차 고엘이 엘리멜렉의 기업을 사고 룻과 계대결혼까지 하겠다고 승낙해도 보아스가 시도해 볼만한 한 가지 방안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간의 모든 사정을 솔직하게 말하고 난 뒤에 더 좋은 값으로 그에게 지불하고 고엘의 권리를 양도 받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보아스의 재력과 인품은 물론 결혼의 증표로 보리를 보내준 것 등으로 판단해볼 때에 룻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고 말하면서 룻을 안심시켜준 것입니다.
보아스가 기업 무르는 절차가 끝나기 전까지 계대결혼을 미루고 또 룻의 정절을 지켜준 이유입니다. 당시에 사실상 거지인 모압 족속 과부가 베들레헴의 유력자에게 이런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며, 계속 강조하지만 보아스와 나오미의 믿음의 순종이 없이는 아예 불가능했습니다. 그 배후에 강력하게 역사한 하나님의 인애가 얼마나 대단한지 정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그런 사실을 잘 알기에 나오미와 룻도 자기들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서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다 실천했습니다. 이제 주사위는 보아스, 아니 하나님께로 완전히 넘어갔습니다. 이제부터 보아스가 고엘의 권리를 양보받기를 바라며 간절히 기도할 것입니다. 물론 보아스가 고엘이 되는데 끝내 실패하면 그 고엘과 결혼할 준비를 시작할 것입니다. 결국 세 당사자들은 예상치 않은 장애가 나타났어도 각기 그 결혼이 성사되도록 최선을 다해서 극복하려 노력했습니다. 더 근본적으로 세 사람 모두 자기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먼저 배려해주고 상대부터 살리려고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믿음은 순종이다.
하나님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신자는 현실적 장애가 나타났다고 크게 좌절하여 하나님께 원망 섞인 기도만 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주저앉아 있는 자입니다. 믿음이 필요한 때는 고난의 때이지 평안할 때가 아닙니다. 어떤 처지나 환경이나 사건이든 반드시 신자가 행할 수 있는 최선의 최소한의 방도는 있습니다. 운신도 못할 정도의 중병이 걸렸거나 자신이 취할 수 있는 현실적 방안이 완전히 고갈되지 않은 이상 마냥 엎드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신자로 그런 현장에 밀어 넣은 가장 첫째 이유는 바로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믿음으로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고난의 시편을 보면 하나님께 한탄 의심 원망을 터뜨리다가 그분으로부터 지금껏 받은 은혜와 권능을 회상하면서 점점 평강 믿음 소망을 회복하고 결국에는 감사와 찬양으로 다시 일어서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까?
믿음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순종의 실천이 내포된 것입니다. 그 무거운 비행기가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당연히 비행기 여행을 해야 합니다. 이번에 코로나 백신도 예방 효과가 있고 부작용이 생길 확률이 비행기 사고 나는 것보다 낮다고 믿는다면 안심하고 맞아야 합니다.
간혹 확률이 낮아도 불의의 사고가 일어날 수 있어서 두려울 뿐이라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에겐 기도라는 가장 강력하고 손쉬운 수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논의하고 있는 문제는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예상치 못한 장애가 생긴 경우입니다. 이미 기도한 것과 정반대되는 상황이 발생했기에 하나님이 외면 내지 거부하신 것 같습니다. 아무리 확률이 낮아도 위험할 수 있다고 두려워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되는 고난이자 요구되는 믿음의 차원이 다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부부는 둘 다 생리적으로 임신은 전혀 불가능한 상태인데도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집고 넘어갈 사항이 둘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도 그 약속한 내용이 도무지 믿기진 않았으나 약속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그대로 믿어보기로 단단히 작정한 것입니다. 둘째는 그 늙은 몸을 이끌고 임신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성관계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 신자가 하나님께 힘을 보태어 서로 협력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분명하게 주신 약속도 실제로 그 약속대로 행동으로 순종하지 않으면 내 것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예 불가능하니까 가만히 기다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는 방식으로 이삭을 줄 리는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단순히 전지전능하신 분이 실존하여서 인생만사를 주관 통치하신다는 진리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정도는 모든 종교가 심지어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알고 있는 진리입니다. 기독교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당신만의 선하시고 거룩하심으로 신자 개인의 인생과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의 뜻에 따라 보호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신자가 기도하는 대상이 하나님이고 기도하는 내용을 이루시든 거절하든 행하시는 이는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전적인 순종이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신자로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충분한 증거를 이미 주셨습니다. 독생자 하나님이 십자가에 신자 각자를 대신해서 당신의 죽음으로 모든 죄 값을 치루셨습니다. 그 은혜를 진심으로 받아들인 자는 성령이 간섭하여 새 사람으로 바꿔주었습니다. 옛 자아를 완전히 깨트리고 새롭게 했다면 반드시 그 새로운 인생에 걸맞게 모든 것을 당신께서 책임지신다는 뜻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신자를 혼자 버려두는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습니다. 현실고난이 너무 커서 도저히 그러지 않을 것 같지만 당신만의 더 큰 권능과 사랑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바꿔 말해 믿음이란 그분의 전지전능하심보다 그분의 선하심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심에만 초점을 맞추면 자기 기도한 것과 다른 상황이 나타나면 당장 의심 원망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반면에 그분의 선하심에 초점을 맞추면 어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하든 또 새롭고 더 큰 고난이 겹쳐도 하나님을 놓치지 않고 붙들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기도하는 내용이 분명히 그분의 선하심에 합당하다면 반드시 어떤 방식으로든 언젠가는 이뤄지므로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하고 기도한 대로 자신도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나오미는 율법에 규정된 대로 룻의 계대결혼을 위해서 기도했으니 그분의 뜻에 어긋날 리 없습니다. 무엇보다 룻이 자기를 섬기려 베들레헴으로 따라올 때부터 어제 밤까지의 모든 정황을 판단해보면 여호와의 역사하심이 룻의 계대결혼이라는 한 가지 일관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룻이 추수하러 간 첫 날부터 인품과 믿음이 뛰어나 근족 보아스를 만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보아스가 일차 고엘을 만나서 담판을 짓는 일도 반드시 그분의 선하신 뜻대로 특별히 자기가 기도한 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거의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나오미가 말한 결론의 정확한 의미는 이것입니다. “그 사람 보아스가 아니라 하나님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나오미는 지금 이 자리까지 이르게 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룻을 보아스 외의 인물에게는 시집가지 않게 해주시리라는 믿음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천국을 침노하라.
이처럼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이 지금 나를 당신만의 선하신 계획에 따라서 영광스런 목적지를 향해서 일관된 방향으로 이끌고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진행 과정과 결과를 당장에는 알지 못하지만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떤 일을 하던 하나님의 너무나 오묘하고 풍성하며 선하신 은혜와 권능이 나를 감싸 안고 있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의 품안에 완전히 잠겨있는 것이 신자의 신분입니다. 여전히 연약한 신자가 때로 자기 욕심으로 심지어 죄로 인해서 잘못하고 넘어져도 그 사랑의 품 안입니다. 반드시 성령님의 인도로 회개하게 해주시며 나아가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기도해주는 그런 신분이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권능이자 은혜입니까?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고 선포했습니다. 요한이 헤롯의 음행을 정죄하여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의 정체성을 다시 확인하려 했을 때에 주신 대답이었습니다. 옥중에 있으면서 들리는 소문에는 예수님이 로마나 유대당국과 맞서서 이스라엘에 공의를 회복할 시도는 전혀 하지 않고 주로 과부, 창녀, 세리, 죄인, 귀신들린 자, 가난한 자들을 만나서 가르치고 치료해준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가장 먼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고 그렇게 선포하면서 세례까지 주었음에도 주님의 하시는 일을 보면 자기가 바라고 기도했던 것과는 크게 다르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에게 주님은 그들의 스승 요한의 때부터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고 말했습니다. 침노라는 단어는 강력하게 적극적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을 뜻합니다. 천국이 침략과 약탈의 대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적극적 능동적으로 뜨겁게 기도 찬양하며 믿으면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누가는 같은 말씀을 조금 더 쉽게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16:16)고 설명합니다. 요한은 메시아인 예수님이 오셨다고 선포함으로써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역할을 마쳤는데 그와 함께 율법에 따라서 도덕적 종교적 의로 사람을 구별하던 시대도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자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온전히 알게 해주고 모든 죄인에게 차별 없는 사랑을 부어주시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자꾸만 이스라엘의 소외되고 비천한 자들을 주로 만났었기에 메시아의 정체성을 의심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오히려 그런 자들을 사랑으로 치유하고 차별하지 않고 구원해주는 바로 그 때문에 자신이 메시아가 분명하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애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성되었습니다. 그 은혜를 순전히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를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로 삼아서 더 이상 정죄를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랑 가운데서 신자를 끊어낼 것은 세상에 단 하나도 없으며 그런 사랑으로 세상 끝 날까지 세상 땅 끝까지 함께 해주십니다. 그 사랑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신자는 어떤 환난이 닥쳐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며 결국에는 그분께서 보여줄 그분만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할 일은 예수님처럼 환난 중에 있거나 사회에서 소외되어 힘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는 사랑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신분이 되었다는 것이 절대로 천국보험증서로 끝나선 안 됩니다. 이 시대의 소외된 과부, 세리, 죄인, 병자, 귀신들린 자들을 찾아가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권세를 이미 충분히 받았습니다. 모든 신자는 진리의 말씀인 성경과 그 진리를 실현할 기도와 그 둘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인도해주시는 성령 셋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권세를 사용하지 않으면 주님으로부터 게으르고 무익한 종이라는 꾸지람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거의 종말 같은 시대가 도래해서 너무나 많은 어려움들이 성도와 교회 앞에 닥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 때에 이미 도래한 천국은 아무 변함없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 천국을 이 땅에 세우는 일은 신자들에게 맡겨졌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고 현재 위치에서 자기에게 맡겨진 일들을 기도한 대로 하나씩 실천해야 합니다. 신자가 행하는 일의 방향이 주님을 따라가는 쪽이 확실하다면 하나님이 그 일을 성취하기 까지 쉬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예상치 못한 큰 장애가 나타나도 이 세 사람처럼 맞서 싸워 이겨나가면 반드시 하나님의 거룩한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신자가 거두는 그 거룩한 열매만이 갈 바 몰라 방황하는 이 세대에게 유일한 소망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10/24/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