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전5:16-18) “범사에 감사하라”의 진짜 의미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연말은 감사의 계절인데도 올해는 유독 힘든 일이 많아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피부에 와 닿지 않습니다. 항상, 쉬지 말고, 범사라는 수식어는 언제나 무슨 일에서나 누구와 있더라도 그래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힘들면 포기해도 된다거나, 띄엄띄엄 쉬어가며 행하거나, 한참 중지했다가 다시 그래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거기다 범사에는 모든 고난도 포함되므로 고난의 이유를 몰라도 나아가 새로운 고난들이 겹쳐도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도무지 그럴 자신이 없고 실제로 지금껏 성공했던 해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물론 쉬지 말고 기도하고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도 분명히 신자가 고난으로 얼굴을 찡그리고 괴로워하며 의심 원망 불평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현실 삶은 고난의 연속이므로 열심히 노력해도 잘 되지 않으니 신앙적인 딜레마에 빠집니다.
간혹 당장에 감사가 안 되어도 의지적으로 감사하려고 노력했더니 아주 바람직한 모습으로 끝났고 점차 범사에 감사할 수 있었다는 간증들을 합니다. 추측컨대 몇 번 그럴 수 있었다는 뜻이지 범사에 항상 그러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내년부터는 아니 지금부터라도 진정한 감사로 올해를 마감할 수 있도록 무엇이 문제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문맥상의 정확한 의미
이런 딜레마에 빠지는 까닭이 신자의 소망이나 의지력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본문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 그 원인은 계속 강조하듯이 성경을 읽을 때 한두 구절만 따로 떼서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습성에 젖어있기 때문입니다. 크게 두 가지 잘못을 범하는데 첫째, 앞뒤 문맥의 흐름을 살피지 않고 둘째, 그 짧은 문장의 정확한 뜻조차 따지지 않습니다.
먼저 앞뒤 문맥에서 놓치고 있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단순히 신자 개인의 개별적 삶에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 서신서가 개인에게 보내는 것 몇 개 빼고는 대체로 그렇지만 데살로니가 전서에선 유달리 ‘형제들아’라는 호칭을 계속 반복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도 12절에서 ‘형제들아’라고 시작해서 18절에도 ‘너희를 향한’이라고 지칭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공동체를 향해 복음 안에서 올바른 신앙을 유지하면서 경건한 삶을 살도록 격려 권면하는 책입니다.
이 책은 바울 서신서를 포함해 신약성경 중에 가장 먼저 AD 51년경에 저작한 것으로 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자기들 세대 안에 임박했다고 성도는 물론 사도들까지 오해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 서신 후 약 6개월 뒤에 기록한 데살로니가후서에는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살후3:11)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곧 오실 텐데 일할 필요가 없다는 이단적인 풍조마저 교회 안에 생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저작한 목적 중에는 재림에 대한 성도들의 관심과 오해에 관해 해답을 주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대속죽음 이후 약 20년이 되어가므로 신자들 중에 이미 죽은 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자기들 당대에 예수님이 오신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느냐는 의문이 신자들 사이에 제기되었습니다.
그 의문에 대해 바울은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4:13)고 변증을시작합니다. 알지 못함을 원하지 않는다고 이중부정으로 표현했으니까 너희 모두가 반드시 알아야 할 진리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그 진리는 주님이 재림하면 예수 안에 자는 자도 함께 데리고 오시고(14절), 주님 강림하실 때 살아있는 자가 앞서지 못하며(15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니까(16절)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때와 시기에 관해선 쓸 것이 없다고 즉, 주님이 언제 재림하실지 가르쳐 줄 것도 없고 알 수도 없다고 다시 깨우쳐주었습니다.(5:1)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도적 같이 아무 예고 없이 홀연히 강림하시니까 신자들은 그 때까지 믿음으로 깨어 근신만 하면 된다고 권면했습니다.(5:2-10) 무엇보다 신자는 이미 빛의 아들이 되어서 어둠을 벗어나 빛 속에 있으니 언제 재림해도 아무 염려할 것 없다고 격려했습니다.(5:4,5)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신자가 죽으나 사나 항상 함께 살게 하려고 하신 것이므로 신자들은 피차 이런 믿음과 소망으로 서로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라고 권했습니다.(9,10절)
부활에 관한 의문에 대답을 하고 재림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권면한 후에 11절에 다시 ‘형제들아’라고 불렀습니다. 그 앞 10절에서 서로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라는 계명의 구체적인 실천방안에 대해 가르치겠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으로 귀히 여기고 화목하며 약하고 힘든 자들을 붙들어주고 오래 참으며 모든 사람을 항상 선으로 대하라고 했습니다.(12-22절) 이런 방안들 중에 상기 본문이 속해있습니다. 그 방안을 다 설명한 후에 다시 주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23절)
따라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계명은 기본적으로 주님의 재림을 대비하는 교회공동체에서 성도들끼리 서로에게 취해야 할 자세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 시기가 자기들 당대라고 믿는다면 마땅히 순전한 믿음을 유지해야할 것이므로 모든 악은 버리라고 명한 것입니다.(22절) 그 전에 성도들끼리 “악을 악으로 갚으면서”(15절) 또 범사에 하나님께 원망만 하고 감사하지 않으면 어떻게 마지막 구원의 완성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초대교회는 소유를 팔아 나누며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않는 순수하고 이상적인 공동생활을 했는데(행2:44-45) 이처럼 주님이 곧 오신다고 오해한 탓도 있습니다. 그러다 스데반 순교 사건으로 유대인들로부터 큰 핍박이 임해 신자들이 흩어져 버렸습니다.(행8:1) 또 글라우디오 황제 때는 큰 흉년이 들어서(행11:28) 더 이상 공산적인 공동체는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 당대에 예수님이 오시지 않을 것이며 무엇보다 아무리 종말이 임박해도 사람들로 일하지 않고 게으르게 만들 수 있는 공산주의는 당신의 뜻이 아님을 알게 해주려는 섭리였던 것입니다.
바울 본인은 어떻게 했는가?
물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도 종말의 시기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서를 저작했을 당시와 사실상은 동일한 상황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님 승천하신 이후로는 주님이 당장 내일이라도 다시 오실 수 있는 가능성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요즘 세태가 돌아가는 꼴을 보면 점점 더 임박해져간다는 추측도 감히 해볼 수 있습니다. 상기 말씀을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는 그대로 실천해야 합니다. 바울도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전제했으니 사실상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는 권면입니다.
그럼에도 반드시 설명 드린 두 가지 사항은 감안해서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재림의 시기를 자기들 당대라고 오해했던 상황에서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일차적으로 신자들의 개인 생활보다 재림을 대비하는 공동체에 주어진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바울이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면한 의도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뜻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현실 삶에서 생기는 고난들에 대해서 무조건 감사하라는 의미는 아니며 의지적으로 사고의 패러다임을 바꿔서라도 감사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예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실 시기를 아무로 모르므로 신자는 언제든 오실 수 있다는 종말관을 갖고 매일을 살아가야 합니다. 본문의 참 뜻은 매일 매일이 마지막 날이라고 여기고 주님 뜻에 순종하고 있다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성도들끼리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 개인의 현실적 고난에도 항상 감사할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할 것입니다. 실제로 이 권면을 한 바울은 고난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우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라고 자신의 죄에 대해 아주 괴로워했습니다. 이 말씀이 구원 전과 후 즉, 칭의와 성화 어디에 해당되는지 신학적으로 설왕설래가 있으나 저는 바울이 예수 믿은 후의 상황이라고 해석합니다. 구원 후에도 죄에 수시로 넘어지니까 어느 쪽으로 적용해도 상관없으며 지금 논의하려는 주제가 아닙니다. 죄는 반드시 부정적 파괴적 결과가 따라오니까 고난에 해당되는데 바울이 이런 실토를 했다는 것은 그 고난을 감사했을 리 없다는 뜻입니다.
그는 또 치명적인 병이 있어서 세 번이나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고후12:7-8) 일상적 고난인 질병으로 너무 고통스러워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은 응답해주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그가 사역을 하면서 겪은 환난은 예수님 다음으로 최고로 극심했습니다.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는 등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만은 절대로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의 믿음의 선진들이 순전한 믿음으로 어떤 죄도 짓지 않고 아무런 영적 갈등도 없이 주님께 완벽하게 순종 충성했다고 오해해선 안 됩니다. 그럼 그들을 예수님과 동일한 수준으로 격상시키는 꼴이 됩니다. 그들 모두가 우리와 성정이 똑같고 죄로 찌든 본성이 남아있는 연약한 인간들이었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과 상황에 여전히 죄 중에 있는 나를 대입시켜서 나라면 과연 어떻게 했을지 깊이 묵상해봐야 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마저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기에 항상 기뻐하거나 범사에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주님은 공사역 중에 종종 크게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화를 내고 저주했습니다. 예수님도 이럴진대 겨우 우리가 감히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또 그럴 자신이 있다고 여긴다면 너무나 큰 교만이자 자신의 종교적 의를 자랑하는 죄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지 말라거나 범사에 자기감정에 따라 멋대로 화를 내고 의심 불평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런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저자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의도로 저작했는지 알기 위해 문맥상의 의미부터 먼저 살펴본 것입니다.
문장에서 정확한 의미
이제 신자들이 성경을 읽을 때 범하는 두 번째 잘못인 문장 자체의 뜻도 잘 모른다는 차원을 따져볼 차례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에는 한 단어가 생략되어 있음을 거의 모든 신자들이 모르거나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나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에게”입니다.
영어번역을 보면 원문의 의미를 더 정확히 알 수 있는데 “in everything give thanks”라고 합니다. 영어는 목적어가 필요한 타동사인 “주어라(give)”로 표현했습니다. 그 동사에 걸리는 직접목적어는 감사이니까 우리말로 감사를 주라고 번역됩니다. 그럼 감사를 받는 대상인 간접 목적어가 생략된 셈인데 신자가 범사에 감사를 바칠 대상은 당연히 하나님뿐입니다. 모든 선한 것은 오직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에게서만 옵니다. 직역하면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려라”가 됩니다.
우리말로 ‘범사에’는 목적어로도 사용되지만 영어의 in everything은 감사를 해야 할 부대 상황 내지 조건을 뜻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와 무슨 일을 하고 있어도 하나님에게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이 이 우리말 문장 하나만 따로 떼서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니까 문제 고난 불행 등등 그런 일 자체에 감사하려 듭니다. ‘범사에’ 정확하게는 ‘범사에서’ 감사해야하는데 ‘범사를’ 감사하라는 뜻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컵에 물이 아직 반이나 남았다고 긍정적 사고로 바꾸어서 감사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물이 반이나 남은 그 사실을 감사하는 것이지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고로 잘 봐주어야 그렇게 생각을 바꾼 후라야 그렇게 해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그렇게 생각을 바꾸지 못하면 고난 중에는 하나님에게 감사하지 못하게 됩니다. 범사가 아니라 생각을 바꾸는 것이 감사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 됩니다. 거기다 성령의 역사는 전혀 개입되지 않고 인간의 적극적 의지로만 행한 인간의 행위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긍정적 사고로 바꿔서 감사하면 하나님이 범사를 긍정적인 결과로 바꿔준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이 또한 감사라는 인간 행위가 하나님께 복을 받는 조건이 되고 또 그래야만 감사할 수 있는 상황으로 바뀝니다. 본문은 감사할 수 있는 상황과 조건은 범사라고 한정했지 다른 어떤 것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어떤 방식의 조건과 상황을 허락해도 감사하라는 반응만 요구했습니다. 그분은 신자의 선행은 물론 악행을 때로는 초월하고 때로는 아우르며 당신의 뜻을 오직 당신의 주권에 따라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너무나 연약하고 죄의 본성이 살아 있는 존재인지라 문제, 불행, 재앙, 고난이 닥치면 당장에 괴롭고 힘듭니다. 생각을 바꿔 먹으려 열심히 노력해도 진정한 감사가 그 모든 경우에 가능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시편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았습니까?
범사에 감사하려면?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자가 고난에 원망 불평 혹은 기도로만 끝낼 수는 없습니다. 고난이 닥치면 새벽기도에 출석하여 뜨겁게 기도하여서 어떻게든 해결되면 또 게을러졌다가 또 다른 고난이 생기면 계속 기도로만 버티는 일을 반복하면서 신앙생활을 마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고난이 닥칠수록 성경말씀을 자기 삶에 비추어 파고들며 하나님 그분과 영적인 씨름을 지속해야 합니다. 고난이 닥치지 않으면 세상에 나가 즐기기 바빠서 하나님을 멀리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고난 중에 정말로 의도하신 뜻이 무엇인지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유익이 되는지 조금씩 깨달아 나가야만 진정한 감사도 가능해집니다.
바울이 자기 죄로 자신이 사망의 몸이 되었다고 한탄한 후에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5) 우선 그는 그런 고난을 감사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랬다고 합니다. 죄로 넘어졌지만 도덕적 양심과 의지로 이겨낸 것이 아닙니다. 어떤 흉악한 죄라도 진심으로 회개하며 실토하면 용서해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을 다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완전해질 수 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나 필요가 없었습니다. 바울도 자기 스스로 완전해지려고 발버둥친 것이 오히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무시 외면하는 잘못이자 교만이라고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으로는 아직도 죄의 법을 섬길 수밖에 없다고 덧붙인 것입니다. 그는 죄로 넘어진 것 자체를 감사한 적이 전혀 없고 그로 인해 예수님의 은혜와 십자가 진리를 다시 깨닫고 자기를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한 것입니다.
바울의 현실적 고통이었던 고질병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탄의 가시라고 표현할 정도였으면 엄청난 고통이 따랐을 것입니다. 세 번 기도했어도 낫지 않았으니 그 병으로 인해서 오랫동안 고통을 겪은 것입니다. 끝까지 기도가 응답되지 않자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한마디로 하나님이 자기를 낮추려고 기도에 응답해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치명적인 병으로 인해 바울이 자기 능력이 연약함을 절감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러서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영적 진리를 깨닫자 자신의 약함이 오히려 하나님이 역사하는 통로가 되므로 그 연약함을 기뻐하며 자랑하게 된 것입니다. 요컨대 정말로 하나님 그분에게 감사해져야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바울처럼 하나님과 자신과의 일대일의 관계부터 순전히 기뻐하는 관계로 회복시켜야 합니다.
이 서신이 저작될 당시도 예수 믿는 신자들은 유다 공동체에서 출교 되었고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이 심해졌습니다. 주님이 자기들 세대에 다시 오신다고 했기에 이미 죽은 신자 가족들이 주님을 보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하는 걱정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의 약속은 죽은 자에게도 동일하며 살아 있는 너희는 예수 안에서 빛의 자녀가 되어있으니 그 진리를 진정으로 믿는다면 범사에 즉, 어떤 고통스런 환난이 닥쳐도 하나님에게 감사할 수 있다고 위로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살라.
다시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지금 바울처럼 노력하면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 중에 어떻게 해야 진정한 감사를 할 수 있는지 그 성경적 원리만 설명하는 중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당시로는 세계에서 도덕적 영적으로 최고 수준이었고 그래서 자기 생명을 걸고서 스승을 지키겠다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막상 비천한 하녀가 추궁하자 비겁하게 겁을 먹고 저주하면서까지 스승을 세 번째로 부인했습니다. 바로 그 때에 새벽닭이 울었고 그 소리를 듣자 밖으로 튀어나가 통곡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그런 연약하고 죄에 찌든 모습을 보일 줄을 미리 다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지막 만찬 때는 물론 부활 후에도 아무 꾸중도 않으시고 당신을 사랑하는지 세 번 물어보고 용서해주시면서 큰 소명을 맡겼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제자들이 현실 삶에서 범사에 항상 감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고 또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주님이 제자들에게 이르신 이것은 최후의 만찬에서 다시 가르치신 복음과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이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앞으로 너희가 순교까지 당하는 극심한 환난을 당해도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한 은혜 안에 들어왔기에 성령을 받아서 담대해질 것이며 그럼 너희에게 평안을 빼앗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고 위로한 것입니다.
신자는 빛의 자녀가 이미 되었고 다시는 어둠으로 돌아갈 수 없는 신분과 소속이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의 내주는 부활의 영광에 대한 확증으로 그 영광은 전혀 수정 취소되지 않습니다. 신자가 정말로 그 영광을 확신하고 있다면 영원한 하늘나라를 향한 거룩한 소망을 어떤 방식으로든 실현하면서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고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 신자가 사람들로부터 능욕을 받고 일상 삶에서 현실적 피해를 입는 것은 부활의 영광으로 가는 필연적인 여정입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교인들이 순교를 당하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불에 타고 맹수에게 죽는 것은 크게 고통스러웠으며 그 일 자체를 감사한 것이 아니라 소망을 놓지 않고 그 고통을 인내하고 연단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그로 인해 일어나는 범사에 감사해야 하고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기 본문도 일차적으로 종말공동체에 주는 말씀으로 그런 상황이라면 예수님을 위하는 일 말고 다른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살펴본 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정확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만약 예수님을 빼고 따지면 세상의 상식, 윤리, 철학, 종교가 되어버립니다. 그 전에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만 높이는 역할을 하는 성령의 조명을 받지 못해서 정확한 해석도 할 수 없습니다.
바꿔 말해 신자의 믿음의 출발과 결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종교적 경건 혹은 훈련을 강조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성삼위 하나님은 세상만사를 태초부터 영원까지 오직 골고다 십자가에 드러난 당신의 긍휼과 권능으로만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5,16)
신자는 바울처럼 자신이 아직도 얼마나 연약하고 죄에 수시로 넘어질 수밖에 없는 사망의 몸인 줄 절감한다면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긍휼만 소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이 땅에서 걸어가신 그 삶의 족적대로 따라가고 있다면 세상에서 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참된 기쁨과 자유와 평강을 생생히 누릴 수 있습니다. 신자는 범사에 억지로 감사하려하기보다는 오히려 잠언의 이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5,6)
신자는 고난이 닥치면 언제라도 괴로운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울부짖으며 탄원하거나 심지어 의심 불평 원망 분노를 실컷 터뜨려도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서 행한 일이라 예수님이 베드로를 대하듯이 다 받아주십니다. 또 신자들더러 바로 그렇게 하라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범사를 감사하기 보다는 범사에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십시오. 아니 신자의 삶이 바로 주님께 받은 소명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런 신자에겐 범사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일이니까 얼마든지 인내하고 연단하며 소망을 키울 수 있습니다. 또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는 차원을 넘어서 환난 중에도 육신은 힘들어도 영혼은 천국 보좌에 게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감사의 계절에 하나님께 받은 현실적 축복만 헤아리지 마십시오. 내 삶을 통해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나도록 최선을 다했는지 되돌아보면서 올해를 마감하십시오. 만약 부족한 점이 있었다면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을지 겸허히 또 세밀히 살피면서 내년을 준비하십시오.
(12/5/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