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1:14–20) 신자가 연말을 보내는 가장 바람직한 자세
성탄절기 설교 (1)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막1:14-20)
요한의 사역을 인계한 예수님?
연말이 다가오면 누구나 그 해의 삶을 되돌아보고 내년을 계획합니다. 한 살 더 먹는다는 것은 그만큼 죽음에도 다가가기 때문에 자기 인생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반추하게 됩니다. 신자도 동일한 감회에 젖게 되지만 삶의 현실적 차원만 돌아봐선 안 될 것입니다. 올해 과연 신자답게 살았는지 혹시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면 내년에는 어떻게 고쳐나갈까 등을 점검해봐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공사역을 시작하면서 첫째로 행하신 일입니다. 주님이 가장 먼저 가르치셨다면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드러낸 것입니다. 신자가 올해의 삶을 하나님 뜻 안에서 마감하려면 주님이 말씀하신 그 목적대로 살았는지 여부부터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마가는 우선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님이 활동을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갈릴리 지역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가 동생 빌립의 아내를 불법적으로 취한 일을 두고 대놓고 비판 정죄하는 바람에 투옥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헤롯에게 과감하게 반기를 들고 체포되었기에 요한은 유대사회에서 의인으로 한창 크게 칭송을 듣고 있던 때입니다.
마태는 요한이 잡히기 전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3:2)는 메시지를 전했다고 기록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요한이 잡힌 후에 그와 동일한 내용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언뜻 요한의 사역이 중지되어선 안 되니까 주님이 이어 받아서 행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어느 누구로부터도 당신의 사역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두 사람의 메시지를 자세히 살피면 그 의미는 물론 그에 따른 결과도 서로 다릅니다.
주님이 오시기 약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사람들로 메시아를 맞을 준비를 하도록 광야에서 외치는 사자를 먼저 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마가는 복음서 서두에 그 예언대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요한이 바로 그라고 밝혀놓았습니다.(막1:2-4) 요한의 메시지는 메시아가 올 때가 다가오니까 준비하라는 뜻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요한과 달리 때가 찼다고 확정적으로 선포했습니다. 영어로 ‘fulfilled’라고 번역되었듯이 헬라어 ‘플레레오’는 “꽉 채우다, 확증, 성취, 완성, 만기가 되다”의 뜻입니다. 이미 완전히 성취되었으므로 더 이상 기다릴 필요나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구원사역을 이루실 가장 적합한 상황과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사역을 시작함으로써 구약시대는 완전히 문을 닫고 새로운 시대가 활짝 열린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창세 때에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부술 것이라고 언약하신(창3:15) 바로 그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도 동일한 의미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제 곧 올 것이라는 시간적 개념으로 오해하는데 실은 공간적 개념입니다. 영어 “at hand”로 번역된 헬라어 ‘엥기조’는 가까이 다가오다, 가까이 가져 가다의 뜻입니다. 내 손만 뻗으면 닿을 만한 바로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바로 곁에 이미 와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도 천국이 가까웠다고 했을 때에 동일한 단어를 사용했지만 때가 찼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이미 와계시긴 하지만 아직 공사역을 시작하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도 동일한 맥락으로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겠다고 예언했습니다.(말4:5,6) 이 예언은 구약성경의 마지막 구절로 최종결론 격인데 구약의 메시지는 결국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른다는 것 즉, 구원과 심판을 나누는 메시아가 오신다.”는 것 하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성경에 최초로 등장하는 사건도 요한의 광야에서 외침과 이어지는 예수님의 공사역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바로 곁에 와있다면 주님의 다음 가르침은 당연히 그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에 관한 것이어야 합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회개라는 헬라어 메타노이어는 도덕적인 잘못을 뉘우치고 고친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 전부를 완전히 새롭게 고쳐먹는 회심(回心)을 뜻합니다. 요한도 예수님처럼 회심을 뜻하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했지만 물로 세례를 주면서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게 했습니다.(막1:5) 자복(自服)이란 윤리적 죄들을 실토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 죄들을 짓고 있거나 회개하지 않은 상태에선 메시아를 온전히 영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처럼 메시아를 준비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이미 곁에 와있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방안으로 회심하라고 한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주 간단한데 예수님 말씀대로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럼 또 복음은 무엇입니까? 그 내용도 아주 간단한데 마찬가지로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가 이미 바로 곁에 와있다는 것이 복음 즉, 좋은 소식(good news)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1:2-4) 한마디로 구약에 예언한 대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과는 일면식도 없어서 복음을 배운 바 없었고 십자가 처형과 부활 사건을 목격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인간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했다고 하며 그를 하나님으로 경배한다는 말을 듣고 천하의 이단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구약율법의 전문가로 성전제사를 지내야만 거룩해진다는 계명이 골수에 박힌 그로선 예수를 믿는 신자를 박멸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려 들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어떻게 이런 정반대의 극적인 선언을 할 수 있었습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내려 비췬 영광의 빛 때문에 삼 일간 봉사가 되어서 흑암 속에서 실질적인 죽음을 체험했습니다. 그러다 생면부지의 이름 없는 예수 믿는 신자가 성령의 계시를 받고서 자기가 그들의 원수임에도 먼저 찾아와서 기도해주자 세상을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로선 예수가 그 신자들이 말하는 대로 사람의 살고죽음은 물론 부활까지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려야 할 수 없었습니다. 또 바로 그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삼년 간 자기 같은 천하 죄인들의 바로 곁에서 참 생명을 심어주셨다는 사실을, 말하자면 예수가 복음이라는 진리를 온몸으로 절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사역을 시작하면서 맨 처음 선포한 본문 말씀을 풀어쓰면 이렇게 됩니다. “성부와 성령과 성자인 내가 합의하여 태초부터 미리 정해 놓았던 인류 구원의 시간이 이미 되었다. 그래서 독생자로서 내가 너희 곁에 왔다. 내가 너희를 구원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구세주로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진다.” 한마디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키는 자라고 스스로 자기증명을 하신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14:6)라고 말입니다.
복음은 이처럼 아주 간단합니다. 심오한 철학적 진리나 종교적 계명이라면 결코 좋은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초대교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간단하면서도 엄연한 사실이자 진리를 생생하게 체험적으로 알았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요1:1)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 땅에서부터 주님을 믿고 따르지 않으면 이 땅에서부터 영원까지 생명은 절대로 없고 죽음뿐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가장 먼저 복음인 당신을 믿으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재산을 다 버려야 하는가?
이어서 주님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회개의 첫 열매로 갈릴리 어부 몇 사람을 택하여 당신을 따르라고 명했습니다. 택함 받은 자들도 주님의 그 초대의 말씀을 듣자마자 고기 잡던 그물과 배와 아비를 뒤에 버려두고 곧바로 쫓았습니다. 혹시라도 전 재산을 팔아서 하나님의 일에만 전념하라는 뜻으로 오해해선 안 됩니다. 우선 당시의 랍비의 교육은 동고동락하면서 스승의 모든 말과 행동까지 그대로 따라서 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불러내고 당신을 따르게 한 것은 역사상 한 번 있었던 일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계실 기간은 앞으로 삼 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복음을 정확히 가르치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질병으로 힘들어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치유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시간인 카이로스의 때가 차면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실 것입니다.
주님으로선 삼위 하나님이 태초부터 계획하신 구원에 관한 비밀의 경륜을 제자들로 최대한 깨우치게 하고 성경을 저작케 해서 후대에 전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너무나 어리석다 못해 맹인이나 다름없는 제자들에겐 삼 년은 아주 촉박한 기간입니다. 주님은 그들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속성과외 반을 구성해 삼년 간 당신과 함께 기거하면서 복음을 배우는 일에만 집중하도록 생업을 잠시 뒤로 미루게 한 것뿐입니다.
예수님은 그 후 가버나움을 제자들 교육과 당신의 사역의 본거지로 삼아서 주로 베드로의 장모 집에서 기거했습니다. 젊은 남자 장정들만 최하 13명이 매일 먹고 활동하는 비용이 만만찮습니다. 그들이 재산을 처분한 것이 아니었고 추종자들의 헌금도 받았으며 알다시피 가룟 유다가 그 돈궤를 맡아 관리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재산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것 하나입니다. 본문 당시로선 제자들이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아직은 감도 못 잡았을 것입니다. 갈릴리 시골구석에서 생선만 잡고 있었는데 사람을 낚게 해준다니까 유대사회에서 높은 지위에 올려주거나 사람들 사이에서 신망과 칭찬을 받게 해주려나보다 짐작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곧바로 따른 까닭이 예수님에게서 성령의 권능이 강력하게 느껴져 거부할 수도 없었겠지만, 나중에 제자들끼리 계속 누가 더 높은지 다툰 것을 보면 세속적인 의미로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분의 일에 돈이 필요한 경우는 있지만 돈이 많아서 잘 이뤄지고 부족해서 이뤄지지 않는 법은 절대로 없습니다. 성도들더러 심지어 전임 사역자라도 재산을 다 팔아서 교회 일에만 헌신하라고 명한 적도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복을 더 많이 받는다는 법은 더더욱 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따라 자기 마음이 원하는 바대로 기꺼이 반응만 하면 됩니다. 그 반응을 두고도 금액의 많고 적음으로 비교 평가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당신께서 당신만의 권능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거룩하게 이루실 뿐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명하지 않고 내가 너희로 그렇게 해주신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나를 따라오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려고 다투던 제자들도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진리의 영인 성령을 받자 완전히 새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대로 성령의 권능을 입어서 죽기까지 주님만 따르며 복음을 전하는 십자가 군병으로 세상 앞에 당당히 서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할 이유는?
본문에서 정작 주목해야 할 사항은 예수님이 제자들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해주겠다는 이유입니다. 이 또한 간단하고 본문에 나와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간단히 말해서 그분이 통치하시는 시공간의 모든 영역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지 않았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 때까지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분의 영광을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대체하여 음란하게 숭배했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 유대인들마저 여호와와 함께 우상을 섬기며 온갖 죄를 범했습니다. 세상에 종교는 넘치도록 많았으나 사람들이 참 하나님의 참된 거룩한 통치는 끝까지 완악하게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삼년 간 거하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또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직접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특별히 요한이 잡힌 후에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했습니다. 비록 헤롯이 요한을 체포했지만 유대 땅을 다스리는 왕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세상만사를 다스리는 유일한 왕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메시지는 참으로 민감한 주제입니다. 당시 상황에선 유대인이라면 쉽게 말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헤롯의 왕권이 부인되면 로마의 권위가 무너집니다. 그럼 로마가 지금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어도 로마 황제 또한 세상의 진짜 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칫 로마에 반기를 드는 메시지라고 오해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나중에 유대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십자가에 처형해달라고 넘길 때 고소한 죄목이 바로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바꿔 말해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에 처형당할 구실을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그들에게 당당하게 미리 알려준 셈입니다. 십자가에서 너희를 위해 죽으려고 이 땅에 왔고 이제 삼년 뒤면 너희를 살리려고 골고다로 올라가는 것을 너희가 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자들로 헤롯이 아니라 예수님만을 왕으로 모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고 그런 자들로 구성된 새로운 사랑의 공동체를 세상 속에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의 현실적 역사는 주님 오시기 전에도 하나님이 주관하셨지만 이젠 죄인들을 흑암에서 건져내는 새로운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약시대에도 이스라엘에게 당신만을 왕으로 모시는 나라를 세우게 인도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은 아예 배척했고 유대인들끼리도 자기들이 만든 정한 기준에 따라 판단 정죄함으로써 하나님 나라 건국에 실패했습니다. 예수님이 세우실 새 왕국의 예표의 역할만 하고 그쳤는데 그마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들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제 참된 하나님 나라가 왔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올해를 회상하는 마음은?
올해를 마감하는 이 시기에 여러분은 솔직히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현실적으로 풍요롭고 좋았던 일과 궁핍하고 나빴던 일,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았던 일과 반대로 억울하게 상처 받은 일, 예상치 않은 행운과 아니면 이유도 없이 불시에 닥친 불행 등만 떠올려서 그 무게만 비교하고 있습니까? 코비나로 인해 집에 묶여서 불편하고 생업에도 큰 손해가 있어서 힘들었던 것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좋은 일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고난과 억울한 일은 하나님이 왜 그런 일들을 허락했는지 따지고 의심 원망 불평하고 있습니까?
물론 올해는 누구에게나 정말로 힘든 일들이 많았습니다. 신자라도 세상 속에 살아야 하므로 당장의 생업과 현실 삶에 따라 감정적인 기복도 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궁핍함과 가난함과 연약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죽을병에 걸려서 간절히 기도했더니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고 응답하시면서 십오 년을 더 살게 해주시는 분입니다.(왕하20:5)
그러나 주님이 오신 목적이 현실적인 복을 주시는 것이라면 공사역의 방향과 결과가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은 그와 완전히 정반대되는 결론입니다. 제자들도 체포될까 두려워서 뿔뿔이 흩어졌고 그들이 앞으로 엄청난 핍박을 겪을 것을 다 아시고도 주님은 항거는커녕 한마디 항변도 없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십자가야말로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현실 형통과 안락을 보장해주는 것과는 정반대의 표상이지 않습니까?
올해를 회상하면서 현실 삶의 문제에만 국한하면 엄밀히 말해서 불신자 시절과 전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서두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대로 올해를 살았는지 점검해봐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정말로 바울처럼 십자가 복음 안에 거하면서 복음으로만 살고 죽었는지 그래서 그처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살았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이 지금은 승천해서 하늘 보좌에 계시므로 바울과 같은 극적인 체험과 완전한 변화는 사실상 불가능 할 것이라고 여겨선 안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어떻게 약속했습니까? 당신께서 천국보좌로 돌아가는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인데 그 이유는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이 오면 당신께서 가르치신 구원에 관한 비밀의 경륜을 더 정확히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 그러면 세상으로부터의 어떤 환난도 이겨내는 권능을 입고서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까지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행하신 일보다 신자들이 더 많이 할 수 있다고까지 보장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신약성경도 다 작성되지 않았고 극히 일부만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게 회람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구약 성경 66권이 완비되었기에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에 대해서 더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겸손해져 성령의 조명을 구하면서 성경을 통해 예수님과 그 대속 죽음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면 그분과 실제로 인격적인 대면이 일어납니다. 십자가 앞에서 나 자신의 너무나 가난하며 추악하며 벌거벗겨진 실존을 발견합니다. 성령이 간섭해 주어서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 깨끗하게 씻음 받고서 마음이 완전히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회심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럼 제일 먼저 생기는 반응은 삶의 목적과 방향이 이전과는 완전히 뒤바뀌는 것입니다. 본문 약속대로 주님이 그렇게 바꿔주십니다. 알기 쉽게 말해서 삶의 목적이 내가 고기를 얼마나 많이 낚느냐가 아니고 사람을 얼마나 낚느냐로 바뀐 자가 신자입니다. 생업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단지 수단으로 활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상적인 삶에서도 어떤 방식으로든 복음을 아직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하며 구원으로 초대하게 됩니다. 신자인데도 올해의 현실적 삶만 되돌아보는 것은 여전히 생업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탓일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살았는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일이 사도들에게만 해당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당신께서 가르치신 것을 지켜 행하게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사도들이 제자들을 만들어 자기들이 행한 것처럼 하게끔 만들어야 하고 그 제자들도 자기들과 같은 제자들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 일이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이어집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서 죽었다 살아나는 체험을 하자마자 신자들을 체포하려 했던 그 다메섹 성에서부터 곧바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자기가 만난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키려 자기를 찾아왔고 또 그분만이 모든 인간이 반드시 믿고 따라야 할 구주임을 실제로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도 물론 하나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단순히 현실에서 먹고 마시는 차원에서만 주인으로 모셨고 나아가 자신의 도덕적 종교적 의를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는 용도로만 자기 믿음을 활용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종교적 명분만 있는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헛되고 헛되다 못해 사실상 영원한 죽음으로 가는 첩경임을 절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헤롯도 로마 황제도 세상의 왕이 아니라고 선포한 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이천 년 전에 이미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결과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예수님은 바로 내 곁에, 아니 성령의 권능으로 내 속에 이미 와있습니다. 실제로 주님과 말씀과 기도로 교제하며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다 보면 기쁨과 감사와 경배와 자유와 평강이 넘쳐납니다. 예수 믿은 이후의 삶이 정말로 이전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좋기 때문에 그 복된 소식을 예수를 모르는 이웃에게 어서 빨리 그대로 전해주고 싶어집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신자더러 올해 얼마나 전도를 많이 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그분이 신자를 판단하는 기준은 하나뿐입니다. 계속해서 복음을 소지하고 있느냐, 그래서 올해도 복음에 걸맞게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 있다면 자연히 복음이 가진 생명력으로 인해 예수님의 빛이 주변으로 새어나가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이 지닌 생명과 죽음으로 나누는 냄새는 자연히 주변에 번져 나가므로 초대교회 때처럼 복음의 염병을 세상 어떤 세력도 막을 수 없습니다.
죄송하게도 신자들은 올 연말에도 어김없이 현실 문제만 회상하고 있겠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남은 자 한 명이라도 찾고 계십니다. 물론 하나님이 현실적으로 올해도 어김없이 바로 내 곁에 항상 계셨습니다. 좋은 일에만 그분이 함께 해주셨거나 나쁜 일에는 그분이 부재했던 것이 아닙니다. 올해에 돈이 조금 부족하다고 해서 주님이 나를 덜 사랑한 증거도 아니며 돈이 많다고 해서 더 사랑한 증거도 아닙니다. 그러나 신자가 올해도 믿음으로 현실문제 해결에만 급급했다면 정작 신자가 누려야 할 복음의 생명력은 자기 주변은커녕 자기 자신에게도 전혀 발휘되지 못했습니다.
신자의 믿음을 판별하는 기준도 간단합니다. 세상에 아무리 돈과 권력과 명예가 많아도 예수가 없다면 전혀 부럽지 않고 오히려 너무 불쌍하게 여겨지는지 여부입니다. 돈 권력 명예가 쓰레기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자들도 인간 세상을 위해서 선한 일을 많이 합니다. 그들이 유달리 욕심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예수 십자가를 모르기에 무슨 일을 해도 참된 만족이 없을 뿐입니다. 영혼의 평강은 없고 항상 갈급합니다. 더더욱 불쌍한 점은 그들은 그 원인을 끝까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를 믿기 전과 후를 비교해보고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와 원인과 그 해결책이 무엇인지 깨달은 자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죽을 고비를 많이 겪고도 끝까지 그의 마음에 안타깝게 걸리는 것이 연약한 교회와 성도와 아직도 미혹된 영혼들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이 있는지가 바로 순전한 믿음의 척도입니다.
예수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에겐 참 생명이 그 안에 없습니다. 정말로 인간답게 살지 못합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된다는 것이 단순히 전도를 많이 해서 기독교 교세를 많이 늘리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세상 흑암 속에 갈 바 모르고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려져 있는 이런 자들을 단 한 명이라도 예수님의 참 빛 쪽으로 건져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구약 이스라엘의 실패를 다시 되풀이해선 안 됩니다. 절대로 어떤 사람이라도 외모로 판단해서 차별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로만 대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올해 연말은 이렇게 회상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올해 내가 행한 일과 내 삶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했을까, 십자가로 마음 문을 열게 하는데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 최소한 그런 일을 위해서 얼마나 많이 기도했는가, 기도마저 할 시간이 없었다면 내가 온전한 어부가 되도록 얼마나 많이 말씀을 공부하며 묵상했는가, 혹시라도 내 코가 석자라 신자의 본분을 잊고 있거나 등한히 했어도 계속해서 현실 고난보다 사람 낚는 어부라는 정체성이 마음의 가장 큰 짐이 되어 있었는가?”
하나님께 감사할 일도 현실 풍요보다는 그 일을 하는데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기회와 사람들과 자원과 지혜를 부어주셨는가 여부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연말을 보내는 신자의 태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현실의 고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왜 그런 일에 더 많이 쓰임 받게 해주지 않았느냐고 원망 불평하는 것입니다.
(12/12/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