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8:23-26) 주기도문의 구약성경 버전
기도시리즈 (7)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창18:23-26)
이방인과 다른 기도를 하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인 열 명만 있다면 소돔의 멸망을 재고해달라고 기도했으나 조카 롯의 가정마저 의인이 아니어서 그대로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처음으로 그 경위와 내용과 결말까지 자세히 기록한 이 기도에서 반드시 배워야할 사항은 크게 둘이었습니다. 첫째 자기보다 남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과 둘째 심지어 남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도 그 응답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기도를 단순히 자기 삶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 받고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방안이라고 여겨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이 기도에 대해 일관되게 강조하는 내용이며 예수님도 기도의 이 두 가지 측면에 대해서 여러 번 가르쳤습니다. 실은 신자라면 이미 알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말씀 몇을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1-33)
이방인들은 먹고 마시고 입는 것만 구하지만 당신의 제자들더러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먼저 구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으니까 신자도 먹고 마실 것을 구해도 되지만 그것만 집중적으로 혹은 우선적으로 구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기도하는 순서에 관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이방인과는 전혀 다른 기도를 하라는 데에 초점이 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가 먹고 마시고 입을 것에 관해선 다 아시므로 그분의 나라와 의를 집중적 우선적으로 구하면 그런 것은 다 채워주신다고 했습니다. 신자는 굳이 그런 문제를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 말씀이 큰 환난이 닥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교회에 갖나온 신자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면에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한 신자에겐 매우 심각한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에는 관심이 없고 심지어 그것이 무엇인지도 몰라 먼저 구하고 있지 않다면 이방인 즉, 불신자와 똑같다는 뜻입니다.
그럼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열심히 봉사하고 성실히 예배와 기도 모임에 참여해도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거나 유보된 상태일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위해서 아무리 간절히 기도해도 하나님이 응답해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기도한 대로 이뤄졌다 해도 우연의 일치이거나 자신의 노력한 결과이거나 심지어 사탄이 그렇게 응답해주었을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는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미 설명 드린 대로 단순히 교회생활을 성실히 행하는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문맥상의 의미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이방인과 정반대되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도 인생사에 행운과 불행을 가져다주는 신적인 존재들은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상상으로 지어낸 것에 불과합니다. 그 신들과 실제적인 관계가 전혀 형성될 수 없으므로 자기들 생각대로 믿고 치웁니다. 신은 반드시 자기들이 바치는 치성에 비례해 축복해주고 화액은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고 정해버린 후에 현실적 형통과 안락을 위해서 예수님 말씀대로 자기들의 먹고 마시고 입을 것만 구합니다.
신자는 그와 반대여야 하므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만사를 다스리는 하나님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부터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바치는 정성과 열심에 비례해서 복과 화를 주지 않고 오직 당신의 거룩한 뜻에 따라서 신자의 기도는 물론이고 온 세상을 다스리는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당신만의 거룩하고 온전한 뜻과 계획에 따라 당신께서 모든 인생사를 주관 통치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분의 의는 당신께서 통치하시는 기준과 방식으로서 불의 불법 불공평 불합리한 것은 전혀 개입되지 않은 완전한 공의를 뜻합니다. 신자는 그래서 자신의 인생이 평생토록 그분의 거룩한 통치 아래 거하게 되고 나아가 이웃과 온 땅에도 동일한 은혜가 임하게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또 그분의 의로움이 자신의 하는 일을 통해서 아름답고도 풍성하게 실현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방인과 다른 기도를 하라고 가르친 후에 결론을 어떻게 내렸습니까?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34절) 매일매일 최선을 다해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면서 이방인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면 그런 것들을 하나님이 더하여 주실 것이므로 더 이상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난과 핍박이 일상사였고 죽을 고비도 여러 번 겪은 바울은 내 능력이 약한 데서 하나님의 은혜가 온전해지므로 오히려 그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고후12:9) 나아가 그는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딤후4:7,8)고 로마의 감옥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신자는 이 땅에서 살아있는 동안에는 어떤 위험에서도 지켜주시고 또 죽은 후에는 천국 면류관이 예비 되어있습니다. 바꿔 말해 어떤 현실적 문제라도 담대히 맞서지 못할 이유와 근거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물론 맞서 싸우는 동안에는 많이 힘들지만 영광스런 결과가 보장되어 있는데다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면서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극심한 가난과 핍박 중에도 자신의 사역을 위해서 후원한 빌립보 교회에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4:19) 빌립보교회가 선교 헌금을 보내준 것에 대한 감사 치레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자신의 현실적 궁핍이나 풍요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하나님께서 어김없이 이루신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체험하며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빌립보 교인들더러도 지금 무척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주님이 다 책임져 주신다고 자신이 실제로 받은 은혜를 간증한 것입니다.
이방인은 자기만을 위해서 기도하지만 신자는 그 반대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시기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먼저 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결국 주님의 이 가르침은 신자는 남을 위한 기도를 먼저 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하늘에서 이뤄진 뜻이란?
주님은 또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위선적 형식적 기도를 따르지 말라고 하면서 모범되는 기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제일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9)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로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모든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오직 하나님께 올려드린다는 뜻이므로 굳이 기도해야할 내용이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 다음의 “나라가 임하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10절)가 모든 신자가 가장 먼저 기도해야할 제목입니다. “나라가 임하시며”는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이 땅에 임하길 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고 가르친 것과 똑같습니다.
이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이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늘에서 이뤄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기도이자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응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라고 우리말로는 과거로 표현되었으나 원어는 현재형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안에, 거하는, 가지고 있는 등의 뜻인 전치사 엔(in)입니다. 시간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에게 현재형으로 갖고 있다는 것은 창조 때부터 영원까지 품고 있는 한 가지 뜻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로 그 뜻이 땅에 이뤄지도록 가장 먼저 기도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럼 그 뜻은 무엇입니까? 주님이 앞에서 말씀하신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신자더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즉, 하나님께 감사 찬양 경배를 돌리면서 기도를 시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뜻대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서 당신의 이름이 높여짐을 받게 되기를 영원토록 소원하십니다. 모든 사람으로 평생토록 당신께서 창조하신 목적대로 하나님 당신으로 인하여 기뻐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대로 순종하면 세상의 것과는 전혀 다른 하늘의 평강과 기쁨을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신자가 그렇게 기쁘게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본 이방인들로 그 기쁨에 동참하고 싶어지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문제는 아담의 타락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찾지도 않고 그분과 원수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 금령을 어김으로써 영적인 죽음이 모든 후손에게 임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하나님을 피하여 동산 깊숙이 숨었는데도 당신께서 먼저 찾아와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손수 지어 입히면서 그 죄를 용서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여자의 후손이 와선 사탄의 흉계를 깨트릴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3:15)
그 이후로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역사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에 맞추어서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다 때가 차매 약속하신 대로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케 하여 성자 예수님을 창조 때에 하늘에서 이뤄진 뜻을 이 땅에서 이뤄지게 하려고 보내셨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 값을 감당할 완전한 대속 제물로 바쳐지게 해서 인간이 다시 하나님을 기뻐하며 그 이름을 높일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었습니다.
그 전에 예수님은 십자가로 올라가는 도중에 제자들에게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잘 알다시피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이 그 때 기도에 대한 또 다른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7-19)
베드로가 그런 믿음을 갖게 된 것부터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이 있었으니까 그를 첫째 제자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로 하여금 교회를 세우게 하는 것도 하늘에서 이미 이뤄진 계획입니다. 그리고 교회 즉, 그런 믿음을 가진 성도 개인과 공동체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더 큰 권세를 가지게 될 것인데 그 권세는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게 해주는 것입니다. 신자가 어떤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응답해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 이미 천국 열쇠를 주신다고 한정했듯이 교회에 음부를 이길 권세를 주신다는 약속을 다시 풀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하늘에서 현재형으로 영원히 품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탄에 미혹되어서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주님은 신자더러 바로 그 뜻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한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십자가 복음이 증명되고 확장되는 차원의 기도를 하면 땅에서 반드시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중보기도
본문 23절은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라고 합니다.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에서 ‘나아가’의 원어는 법정에서 변호사로서 죄인을 변호하려고 재판장이 앉은 자리로 가까이 다가간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제사장적인 중보기도를 하도록 당신께서 나아오도록 이끌었는데 사실상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문을 미리 가르치고 있는 셈입니다. 한마디로 아브라함의 소돔을 위한 기도는 주기도문의 구약버전인 셈입니다.
제사장이란 백성들의 죄를 자신이 사해주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대리하여 하나님께 그 용서를 탄원하는 자입니다. 소돔사람처럼 자신이 어떤 비참한 상태에 있는 줄을 전혀 모르는 이웃의 이방인들의 죄를 변호하는 입장에서 재판장인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가는 것입니다. 신자더러 제사장적 기도를 하라는 것은 사탄에 미혹되어 죄의 노예로 묶여 있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택하신 자라면 거꾸로 사탄이 결박되고 그에게 노예로 묶여 있던 죄인들은 풀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중보를 요청하는 기도입니다. 중보는 서로 대적하는 사이의 중간에서 양쪽의 화해를 성립시키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십자가에 흘리신 피와 찢겨진 육체로 그 사이를 막고 있던 담을 허물었습니다.(엡2:14-16) 완전한 인간 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의로만 하나님과 원수 관계였던 죄인을 그분과 화해시킬 수 있습니다. 중보는 주님이 하시고 신자는 주님께 힘입어 중보의 간청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신자의 기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라는 말로 끝내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기도했던 내용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내가 지금 기도드리는 불신 이웃에게 베풀어주셔서 사탄은 결박하고 이 죄인은 풀어주십시오라는 의미였다는 고백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의에만 의존하여서 제사장적인 중보의 기도를 했으니 응답해 달라는 것이며 마지막에 아멘을 붙이는 것도 반드시 그렇게 응답될 것을 믿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하는 모습이 솔직히 어떠합니까? 처음에는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모든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 드립니다.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만사를 선하게 통치하시고, 신자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등등으로 찬양합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데는 어떤 제한도 없으며 자신의 의를 자랑하거나 혹시라도 현실적 이해타산의 뜻이 없이 진정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찬양한다면 얼마든지 많이 해도 됩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막상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죄송하지만 이방인처럼 자신의 현실적 문제와 고난들에 우선하고 집중합니다. 현재 자기를 묶고 있는 실패 고난 실망 등 현실적 제약에서 풀어달라는 간구입니다. 과연 그것이 음부를 이기는 권세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정말로 그런 현실적 장애가 사탄에 묶인 때문이라는 증거 내지 확신이 있다면 끈질기게 심지어 하나님께 따지듯이 기도해도 됩니다. 솔직히 그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묶고 있는 현실적 장애물만 풀어달라는 기도가 대부분이지 않습니까?
풀어야 할 대상과 묶어야 할 대상부터 정확히 구분해 기도해야 합니다. 풀어야 할 대상은 사탄에게 미혹되어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불신자 이웃과 그들의 부패한 심령입니다. 신자에게도 해당되는데 자기 욕심과 고집과 자존심에 묶여서 이런저런 잘못을 한 것입니다. 묶어야 할 대상은 세상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있는 사탄과 자신을 여전히 수시로 넘어뜨리는 죄의 본성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6:12)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친 까닭입니다.
신자가 정말로 이런 기도를 한다면 어찌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하늘에서 매어주고 풀어주십니다. 우리의 믿음과 기도를 보고 기특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중보기도자의 마음은 당연히 기쁘게 받으시지만 신자라면 마땅히 해야 할 기도를 했기에 응답되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이미 하늘에서 정해진 뜻대로 하나님이 시키신 기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내 자신의 풀리지 않는 문제와 계속 묶여 있는 고난은 언제 해결 받느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껏 설명 드린 대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전혀 걱정할 것 없다고 예수님이 확약했지 않습니까? 마지막 승천하시기 직전에도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가르쳐 지키게 하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함께 해주신다고 다시 약속했습니다.(마28:19,20) 나아가 아무런 계산 없이 이웃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면 넘치도록 더 부어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눅6:38)
수영장에 던져진 신자
미국 부모들은 자식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수영을 가르치는데 아예 아기를 수영장에다 던져버리는 식입니다. 어린이는 어떤 일이 힘든 지에 대한 경험이 적어서 물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태생적으로 몸의 밸런스를 잘 유지하고 힘들이지 않고도 주변 움직임에 적절히 반응합니다. 아무래도 육체적으로 장애가 되는 일을 많이 겪을 수밖에 없는 어린이를 보호하려고 하나님이 심어주신 어린이 특유의 반사 신경입니다. 물에 던져진 아이는 의외로 아주 쉽게 스스로 물에 뜨고 앞뒤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따로 불려 나왔다는 것은 수영장에 그렇게 혼자 던져진 것과 같습니다. 성령이 간섭하여 심령이 거듭나고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그 후로 성령님이 내주해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인 성경 말씀을 배울 수 있고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험한 세상을 이겨나갈 수 있는 세상 사람은 갖지 못하는 성령, 성경, 기도라는 세 가지 강력한 무기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갓 태어났기에 어린이가 태생적으로 수영장에서 물에 뜨고 헤엄을 칠 수 있는 운동신경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수영장에 아기를 던진 아버지는 아이가 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로 뜨게 되면 쉬운 평영에서 시작해 자유형, 배영, 접영 등 점점 어려운 수영기술을 가르쳐줍니다. 운동신경이 좋은 아이는 형들이 하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 따라하며 습득하기도 합니다. 그 후로는 물놀이나 다이빙을 하면서 신나게 놀고 깊은 곳에서도 안전하게 헤엄칠 수 있습니다. 때로 너무 신나게 놀다가 물을 마시고 허우적거리더라도 스스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수영이 미숙한 다른 아이에게 가르쳐주고 능숙해지면 물에 빠진 아이를 건져줄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됩니다.
하나님이 신자로 그런 수영안전요원이 되라고 세상에서 불러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탄의 수영장에선 줄에 묶여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므로 스스로 수영을 배울 수도 없고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세상을 둘러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흑암의 깊은 물에 빠져 갈 바를 몰라 허우적거리고 있습니까? 신자가 사탄을 쫓아내고 묶인 줄을 풀어내지 않으면 그들은 익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회출석한지 몇 년이 지나도 수영안전 요원이 될 생각은 않고 스스로 수영할 생각조차 않습니다. 대신에 조금만 깊은 물에 빠지거나 파도가 덮칠 때마다 도와 달라(help me)는 비명만 지르고 있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롯은 물론이고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은 이제 곧 익사하기 직전입니다. 사탄이 줄로 묶어서 끝까지 맘껏 신나게 갖고 놀 것이며 백성들은 그것에 익숙해져서 수영을 배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우르에서 불려 나왔어도 가는 곳마다 전부 우상을 숭배하는 사악한 도성이었기에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우상 신전이 있었을 상수리나무 수풀 마므레에 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소돔의 심판계획을 통보해주기 전까지는 그도 하나님 나라와 의가 자신과 자기 주변에 임하게 해달라는 기도만 하고 그쳤던 것입니다. 자기 집 뒤뜰 수영장에서 자기 식구만 챙기고 있었습니다. 당장 롯의 식구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었거나 알아도 내 코가 석자라는 핑계만 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와서 네 조카가 소돔 백성들과 함께 익사하게 될 것이라고 알려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낸 일차 목적은 자신을 위해서 먹고 마실 것을 먼저 구하는 자리에서 당신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자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자기 식구들이 아니라 남들에게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가 임하도록 기도하는 제사장이자 변호인으로 살아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여섯 번이나 의인의 숫자를 낮추어도 하나님이 다 용서해주신다고 한 것은 현실적으로 소돔에 의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토론을 하는 동안에 하나님이 소돔 같이 사악한 세상마저 긍휼한 마음으로 대하는 그 심정을 더 깊이 헤아려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복의 근원으로 세워진 소명과 신분에 대해서 정확하게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수영을 배워서 자기 혼자만 생존하라고 부른 것이 결코 아니라 안전요원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안전요원 자격증을 따지도 않고 따도 장롱에 묻혀두고, 사실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이미 받았는데도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천국에 가서 주님의 얼굴을 대면할 면목조차 서지 않을 것 아닙니까?
신자도 아브라함처럼 세상에 속하지는 않으나 세상 안에서 살아가야 하므로 어디가나 가나안 같은 우상의 도성입니다. 신약성도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소돔의 심판 계획을 직접 계시 받는 것 같은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으므로 개별 사건에 대한 그분의 뜻을 구체적으로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신자 인생에 대해 영원토록 품고계시는 뜻은 성경에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명확하게 이미 계시되었습니다. 따라서 매사를 오직 예수님의 이름이 높아지는 모습이 되도록 최소한 그런 방향으로 진전되도록 기도하면 하늘에서 이뤄진 뜻대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곧바로 쉽게 안전요원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에 혼자 뜨는 법부터 배우고 단계별로 수영기술을 배우다 다른 사람 구조법까지 배워야 합니다. 아브라함도 그런 경로를 거쳐 왔고 지금은 처음으로 하나님이 안전요원으로 테스트하고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안전요원이 되어도 병이 들거나 일을 많이 해서 지치거나 돌발적인 삼각파도가 덮치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 있습니다. 그럼 다른 요원에 의해서 구출 받을 수도 있고 힘을 얻어서 금방 본연의 직무에 충실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서로를 위해서 매고 풀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 최초로 자세히 기록한 기도가 죄악의 도성 소돔의 구원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정말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남을 위해서, 특별히 사탄에 묶인 데서 풀어주는 기도를 할 때에 음부를 이기는 엄청난 권세가 반드시 드러나고 이 땅과 주변 사람들이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사탄의 수영장에 세상 사람과 함께 어울려 살아야만 하는 신자로서 여러분의 영적인 수영실력은 지금 어느 단계에 와있습니까?
(2/13/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