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2:6-11) 정말로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가?
구원 얻는 믿음 (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6-11)
하나님이신 예수님
기독교는 인간 선각자가 세상과 인생에 대한 진리를 깨달아서 가르치는 다른 종교와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죄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러 하나님 그분이 직접 이 땅에 오셨다는 역사적 사실과 그 의미를 계시해 놓은 종교입니다. 요컨대 본문이 선언하는 대로 이천 년 전 골고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셨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믿음도 그럼 하나님 예수님과 인간 예수님에 관해 각각의 의미가 무엇이며 또 자신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정확히 정리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금주는 먼저 하나님 본체로서 예수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 랍비로 활동한 인간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의심하지 않으나, 간혹 하나님 본체였다는 점은 온전히 믿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폭풍우가 몰아치는 자연에 명령하여 잠잠하게 만들었습니다. 현대 첨단 의학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질병과 불구를 말씀 한마디로 순간적으로 완벽하게 고쳐주고 죽은 자도 살렸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자연과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 바로 그분이었습니다.(골1:15, 요1장)
인간이라면 스스로 십자가에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을 여러 차례 예언한 후에 그대로 실현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승천할 때까지 지구상의 물리적인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그 한계를 초월하신 것과,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승천하신 것도 완전한 하나님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라고 선포했습니다. 당신을 믿어야만 영생을 얻는다고, 즉 자신을 심판과 구원을 주관하는 하나님과 동격의 위치에 세웠습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도 담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당시의 종교적 인식에 따르면 상상도 못 할 영적으로 발칙한 도발이었습니다. 인간 랍비 주제에 자기가 구원을 베푸는 존재라고 칭했으니까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컬어서 사형에 해당되는 죄였습니다.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가 명쾌히 분석한 대로 예수님은 미쳤거나 정말로 당신의 말씀대로 하나님이신, 둘 중 하나의 가능성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리 따져봐도 예수님이 미쳤을 리는 없으니 당신 말씀대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십자가에 죽으심이라”(8절)고 말한 후에 접속사 ‘이러므로’로 이어집니다.(9절) 언뜻 인간 예수가 십자가에서 인류를 대신해 죽는 위대한 희생을 바치자 하나님이 그를 높여서 가장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즉, 당신의 아들로 삼아주신 것처럼 오해할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6절에서 ‘하나님 본체’라고 예수님의 존재론적인 정체성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10,11절)라고 사람들로 예수님을 경배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단지 칭호만 가장 높게 부쳐 주었다면 주님은 여전히 인간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아무리 위대한 일을 했어도 사람이 사람에게 경배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후에 하나님이 가장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는 말씀은 메시아로서 소명을 완성했다고 그 직분적(職分的)인 정체성을 확인해준 것입니다.
본문의 의미는 간단히 둘로 구분됩니다. 전반 6-8절은 성자 하나님 예수가 이 땅에 인간으로 와서 십자가에 죽었다고 주님의 지상 사역을 설명합니다. 후반 9-11절은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목적에 대해 밝혔습니다. 본문의 결론에서 그 목적은 모든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11절)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아무도 예수를 주라 시인 할 수 없습니다.(고전12:3) 따라서 본문이 말하는 바는 한마디로 예수님을 진정으로 주라고 시인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느냐가 구원에서 관건이라는 것입니다.
주라고 시인하는 뜻
한 죄인이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알려면 본문이 기록된 배경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본문은 바울 본인의 저작이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알다시피 그는 예수님을 나사렛 이단의 괴수로 여기고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선 그 추종자들을 말살해야 한다고 믿었던 열렬한 유대주의자였습니다. 그런 열정으로 다섹의 신자들을 핍박하려고 가던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을 실제로 보고서 사흘간 봉사가 되었습니다. 그때 바울은 예수님이 이단 괴수가 아니라 그와 그 신자들이 선포한 대로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로 실제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철저하게 체험한 것입니다.
그 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사도들과 교제하며 자기가 깨달은 사실이 절대적 진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공동체에선 본문을 이미 예배 중에 오늘날 사도신경을 낭독하듯이 암송 내지 찬양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교리가 모든 신자에게 이미 절대적 진리가 되어 있었기에 그들의 선조들이 부르던 여호와 대신에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했던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의 서신서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초대 교회의 비슷한 고백들을 여럿 인용해 놓았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사역을 마치고 승천하신 직후인 주후 35-40년 경부터, 즉 신약성경이 저작되기도 전에 신자들 스스로 확신했던 믿음이었습니다. 본문(6-11절)을 포함해 그런 구절들을 신학적으로 ‘바울 이전 신조“(Pre-Pauline Creed)라고 부릅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가 주후 50-55년 에 신약성경 중에 최초로 저작되었다고 보는데 그보다 20여 년 전이었습니다.
이렇게 신학적 연구가 진행되기도 전에 일반 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확정해 고백할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입니까? 우선 그들은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의 직간접적인 수혜자였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골고다 언덕, 아리마대 요셉의 빈 무덤, 승천하신 감람산 언덕의 현장에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셨다는 것은 굳이 변증할 필요가 없는 단순한 사실이자 진리였습니다. 오순절에 예수님 예언대로 진리의 영인 성령을 받자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던 의미, 즉 당신의 십자가 죽음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한 뜻까지 정확히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요16:7-11)
사랑하고 존경하던 아버님이 돌아가시면 자녀들이 수시로 모여서 아버지가 이런저런 분이었고 우리에게 이런저런 은혜를 주셨다고 회상합니다. 마찬가지로 초대 교회의 초기 예배에선 성경이 저작되기 전이라 예수님에 대한 생전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절차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각자가 받은 은혜를 나누다가 가장 핵심적이고 공통적인 사실과 진리를 교리나 찬송으로 축약하여 예배의 한 절차로 채택한 것이 바로 본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는 첫째 의미는 그분이 만물을 지으시고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주라고 시인하는 더 중요한 의미를 당시의 정황에 비추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의 주인(master)은 종의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책임져주되, 주인이 시키는 일에 종이 불순종하면 형벌을 가하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이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곧바로 순종해야 하며 어떤 원망 변명 핑계도 되어선 안 됩니다. 요컨대 주인은 왕이고 종은 노예로 주인이 죽으라고 하면 실제로 죽는 그런 관계였습니다.
예수님도 그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엄중히 선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입술로만 시인하고 행동으로는 주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면 당연히 주님을 온전한 주인으로 모신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면서 주님을 종교적으로 이용하거나 주님의 능력만 빌리려 한 것입니다. 본문도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했으니, 주님께 행동으로 순종하지 않고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는 절대 없습니다. 예수님이 기껏 인간들의 립서비스만 받으려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바꿔말해 아무리 현실 세계에서 권력이 강력해도 주님 외에 다른 존재를 절대로 자기 주인으로 모시지 않아야 합니다. 본문의 신앙고백을 한 초대 교인들은 나중에 로마 황제들을 입술로도 주라고 시인하지 않아서 순교 당했습니다. 설령 황제의 말 한마디로 자기 생명이 없어질 수 있어도 자기들의 진짜 주인인 예수님을 배반할 수는 없었습니다. 십자가 전의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으나 오순절 이후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는 순교도 기꺼이 감당했지 않습니까? 그에게 스승이었던 주님이 진짜로 그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
당시의 로마 황제는 사회 경제 정치적 측면에서 절대적 안정을 이루어서 제국의 모든 백성의, 노예를 포함하여, 생존을 실제로 보장해주었기에 사실상 신적인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황제 숭배가 하나의 종교가 되어서 만신전에서 황제가 최고의 뛰어난 이름을 얻고 그 조각상이 최고 높은 자리에 자리 잡았습니다. 신자들은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 안에서 사악한 로마제국과 황제들이 반드시 언젠가는 심판받을 수밖에 없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신자들로선 행동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첫째가는 일이야말로 로마 황제를 말로도 주라고 시인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순교할 수 있었던 근거
초대 교인들이 자기 목숨까지 기꺼이 바치며 예수님을 입술이 아닌 삶의 주인으로 모실 수 있었던 근거는 사실상 하나였습니다. 로마 황제에게 죽임을 당해도 자기들도 반드시 부활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다.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면서 육체적으로 운명했습니다. 로마 군병이 옆구리에 창을 찔러 완전히 죽은 것을 확인한 후에 요셉의 무덤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리고 인봉한 큰 바위로 입구를 막아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게 했고 혹시라도 시신을 훔쳐 가지 못하게 군인들이 그 앞에서 밤이 새도록 파수를 봤습니다. 그러나 큰 바위는 저절로 굴러져 무덤이 열려버렸고 그 안은 텅텅 비워졌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당시 법정의 증인으로 인정도 못 받는 여인들에게 먼저 나타나서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제자들은 여인들의 증언을 믿지 못했는데 주님이 홀연히 그들이 숨어 있는 방에 나타나 못 박힌 손바닥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만져보게 했습니다.
주님이 생전에 예언한 대로 사흘 만에 신령한 육체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다시 교제할 때 제자들의 가슴이 뜨거워지며 평안과 기쁨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스승이 생전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라고 가르치신 말씀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진리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순교자라는 영어 단어 마터(martyr)는 헬라어에서 왔는데 그 원어의 뜻은 목격자(eyewitness)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열두 제자들 외에도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고전15:6)라고 증언합니다. 부활 주님이 제자들에게만 나타나면 그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아무도 믿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나 제자 대신에 형제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니 일반 유대 대중도 부활하신 주님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는 뜻입니다.
헬라어로 목격자가 순교자라는 뜻으로 전용된 까닭은 부활을 목격했기에 자기들의 부활도 온전히 믿고서 자기 생명을 던질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또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는 순교라는 단어가 없었다는 뜻이므로, 인간이 각성한 진리나 계명을 따르는 일반 종교인들은 그런 가르침에 자기 생명까지는 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주님이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니까 자기 생명을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들의 순교를 주관하시는 것도 그 전에 부활 신앙을 구원의 선물로 갖게 해주는 이도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순교를 원하거나 그 고통이 괴롭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고 그분의 인도대로 살다 보니까 당시의 어쩔 수 없는 사정상 순교도 따라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너무 좋아서, 또 자신들에게도 천국 영생이 기다리고 있음을 분명히 알기에 풍요든 궁핍이든 세상의 것들에, 심지어 죽음이든 크게 좌우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네로의 일차 핍박 때에 순교한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천국이나 이 땅이나’라는 뜻임)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이는 자신의 부활을 확신하지 않고는 절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입술로 주여주여 하지 말라는 경고에는 자기 믿음을 자랑하려는 영적인 허세도 부리지 말라는 의미도 있지 않습니까?
놀랍게도 앞에서 인용한 고린도전서 15:3-8의 부활의 목격자들에 대한 바울의 기록도 예배 중에 낭독된 신조로 알려져 있습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자신의 부활을 성경으로 배워서 믿어보려 노력한 것이 전혀 아니라 이미 확정된 사실로 소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부활 증인의 리스트에 포함되었으나 네로의 박해로 순교 당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 담대히 선포할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구원 얻는 믿음이란?
이제 구원 얻는 믿음의 본질이 정확히 밝혀졌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믿는 자에게 부활 영생을 주려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자신의 주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전혀 의심하지 않는 믿음이라면 당연히 행동이 따라야 합니다. 주인도 종을 믿지 못하면, 즉 진정한 신자가 아니라면 어떤 일도 맡기지 않습니다. 종은 주인에게 자기 생명을 완전히 맡겨야 하며 언제 어디서나 자기 뜻이 아니라 주인의 명령에만 순종해야 합니다.
단순히 사역자더러 주님의 일에 충성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라 시인해야 신자가 되니까 일반 신자도 당연히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는 아주 심각한 뜻입니다. 고대의 주인이 종을 무조건 혹사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려 충성된 종 엘리에셀을 보낼 때 전권을 그에게 위임했고, 심지어 아들이 없어서 자신의 후계자로 세우려 했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후의 천국 영생은 물론 마지막 날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과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 하게 해줄 것입니다. 그 전에 이 땅에서부터 예수님과 동행하면 성령이 역사하여 세상을 바꿀 소금과 빛으로 서게 해주십니다. 신자는 자기 삶에서 사망과 생명의 냄새를 피워서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도 십자가 구원으로 초대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거룩하고 신령하게 사는 모습으로 세상의 부패를 막을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를 실제로 움직이는 자는 정치가나 재력가가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는 우리 같은 신자들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본체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신령하고 엄청난 은혜입니까? 그 사실 하나만으로 아무 조건 없는 은혜의 구원과 부활 생명을 주시기 위한 목적임을 입증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이 땅에 오실 필요 없이 천국에 좌정하여서 일반 종교가 가르치는 신들처럼 사람이 죽어서 영계로 넘어오면 생전의 업적을 심사하여 구원과 심판으로 나누면 됩니다. 주님은 단지 천국 입장권을 직접 나눠주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의로운 인간도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들 수 없으며 스스로 죄를 온전히 회개하지도 못합니다. 모든 인간이 영적으로 시체가 되어 있어서 참 생명으로 되살려내어야 하므로 하나님 그분이 오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도 단순히 천국을 소망하는 정도로 그쳐선 안 됩니다. 지옥 심판이 두려워서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니까 어쨌든 믿어보려 노력하는 정도로는 너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그분 외에 주인으로 모실 수 없으며, 특별히 돈이 주인이 될 수는 절대로 없어야 합니다. 초대 교인들처럼 부활 생명을 믿으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소지하고 있어야만, 돈이 없거나 부족하 당장은 불편할지라도 주님과의 주종관계가 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고난이 닥쳐도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평안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물질계에 제한된 연약한 존재인지라 당장 눈에 보이고 몸으로 겪는 고난과 문제에 믿음이 흔들릴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말씀과 기도로 예수님과 실제로 깊이 교제하고 그분의 손을 절대 놓지 않아야 합니다. 실제로 주님과 삶에서 동행할 때만 다른 것에 대한 흥미 관심 재미 기쁨들이 예수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등하여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체험적으로 절감할 수 있습니다.
게으름에 주저앉은 기독교
오늘날 기독교, 교회, 목회자, 신자 가릴 것 없이 무력해지고 세상을 거룩하게 바꾸기는커녕 거꾸로 비난받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본문의 신앙고백조차 진정으로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리적으로는 잘 알고 입술로는 주여주여 하지만 실제로 부활 영생을 자기 안에 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신앙의 궁극적인 도착지가 하늘에 이미 내 이름으로 마련되어 있는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하고 아름다운 처소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그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대신에 이 땅의 일시적 장막인 아파트 평수를 늘리기에 바쁩니다. 이미 넓은 평수에 사는 자들은 너무 편하고 안락해서 굳이 희생 수고해 가며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이유가 없습니다. 가장 신령한 능력이 있어 보이는 예수님의 고귀한 이름을 입술로만 부르며 천국행 열차에 무임 승차하려는 심보입니다.
그러니까 주변의 불쌍한 이웃을 섬기기는커녕 기도도 해주지 않습니다. 그냥 교회 생활 열심히 해서 자기가 당면한 문제와 고난을 해결 받거나, 그런 문제가 없다면 더 큰 불행이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나 기도하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성도들끼리 교제도 즐겁습니다. 평소 죄 안 짓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그런 나를 하나님이 기쁘게 보셨는지 삶에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 신앙도 좋고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살피면 모든 시선이 나와 내 주변의 이 땅의 삶에만 모여 있습니다. 교회에서 영적으로 충만해지는 것도 지금 내가 당면한 이 땅에서의 나의 정서적인 문제일 뿐입니다. 현대 신자들의 믿음에는 하늘과 부활이 실종되어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정말로 부활 영생을 소지한 자는 현실에서 돈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또 돈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불의 불법 부정에도 타협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도 이 땅에서 돈이 필요한 일상적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속해 있습니다.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고 고백했습니다. 부활 영생이 없다면 감옥에 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불신자들이 항상 주장하는 것처럼 개처럼 돈 벌어서 정승처럼 떵떵거리며 사는 가장 현명합니다. 바울도 바리새인 랍비로서 대제사장의 신임을 듬뿍 받고 있었고 나사렛 이단을 핍박하여 유대교를 위해서 혁혁한 공로를 세워가고 있으니 유대 사회에선 장래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서 주로 모신 후로는 수많은 죽을 고비를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감수했습니다. 자기를 사흘간 봉사로 만들었던 예수님의 큰 능력이 무서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고난 중에도 연약한 교회와 성도들이 가장 안타깝고 염려스러웠다고 고백한 대로, 예수님과 동행하고 그분의 뜻대로 사도로서 소명에 충성하는 것이 너무 좋았기 때문입니다.(고후11:28,29)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것이 이 세상의 삶뿐이라면 신자가 가장 불쌍하다는 진술은 아주 심각한 의미를 지닙니다. 한마디로 예수 믿었다고 하나님이 현실적 형통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도 잘 믿고 현실도 형통하는 법도 절대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 갈 보험도 들었고 현실 고난도 없으니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믿음은 완전히 엉터리라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의미는 모든 인간에게 예수를 주로 모시고 하늘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에서 가장 현명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신자라면 누구나 갖고 있던 믿음이었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능통한 훈련을 받았고 하나님으로부터 논리적 사고와 글쓰기 재능을 받은 위에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구원의 진리를 자세히 논술했던 것뿐입니다. 본문과 신약성경에 인용된 여러 바울 이전 신조들은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지은 성경 이전의 성경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자기 부활은커녕 예수 부활이라도 믿어보려고 노력하면서 입술로만 쥐어 짜낸 고백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그들의 실제 삶을 간증한 것이었습니다.
변함없는 성령의 권능
초대 교회 신자들은 부활을 목격했으니 그런 강한 믿음을 가졌으나 성경 기록으로만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우리는 다르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는 없습니다.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자를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한 것은 주 후 90-96 년의 도미티안 황제 때부터였고 그 후로도 약 이백 년 동안 여덟 차례나 더 있었습니다. 바울이 인용한 부활의 목격자는 다 고인이 된 후인데도 수많은 신자가 로마 황제를 잠시 입술로 주라고 시인하지 않아 순교 당했습니다.
당시 기독교와 교회들을 빨리 굳건히 세워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성령의 권능이 충만하게 역사하여서 신자들로 순교를 감당할 힘을 주신 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이신 성령의 권능이 시대와 여건에 따라서 절대로 줄어들지는 않습니다. 오늘날도 이단 종교가 번창한 곳이나 공산 국가에서 순교하는 자들에게 초대 교회와 동일한 성령의 위로와 권능이 임합니다. 그 외의 99%가 넘는 신자들은 순교의 위험이 없습니다. 그럼 더더욱 기꺼이 주를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에 더 열심히 순종해야 하지 않습니까?
제 경우를 말씀드려 죄송하지만, 저희 아이들이 아빠가 예수를 믿어 목사가 된 것만 봐도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이 완전히 믿어진다고 말합니다. 저가 잘났다는 뜻이 아니라 도무지 예수님을 믿어보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바울처럼 극렬한 안티크리스천이었습니다. 오직 성령의 권능이 역사해 저를 완전히 정반대의 사람으로 바꿔서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게 이끌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같은 수준의 믿음이 되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기에 하나님이 저를 지금처럼 자유로운 상황에 두신 것에 너무 감사해서 나름대로 열심히 충성하고 있습니다. 혹시 순교할 상황이 닥치면 하나님이 너무나 부족한 저에게도 감당할 힘을 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새사람으로 거듭나야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됩니다. 그럼 신자는 영적이긴 하지만 일종의 부활을 이미 맛본 것입니다. 더 쉽게 말해 기도에 응답받는다는 사실 하나만도 너무나 신비한 기적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시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우리 곁에서 우리를 지켜봐 주시고 가장 유익한 방향으로 우리 인생을 이끌고 계신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그분을 온전히 믿는다면 당연히 부활 영생도 소유한 것 아닙니까? 여러분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자문해 보십시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직접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러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무엇보다 그분이 지금 여러분과 함께하심도 믿습니까? 그럼 이미 구원받은 것인데 왜 돈이 조금만 없으면 그저 불안해하십니까?
(5/14/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