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2:6-11)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 예수

구원 얻는 믿음 (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6-11)

 

믿음이 온전한가?

 

믿음이란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정체성이 자신의 구원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체험적으로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구원받으려면 먼저 완전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모셔야 하는데 그에 관해선 지난주에 살펴봤습니다. 금주는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알아볼 차례입니다. 

 

주님이 이천 년 전에 유다 지파 다윗 가문의 요셉의 장남으로서 랍비로 활동하신 인간이셨다는 사실을 모르는 신자는 없습니다. 하나님 본체이심에도 인간으로 오셔야만 했던 목적이 무엇이며 내 믿음이 정확하게 그 목적과 부합하는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자기 인생의 목적을 달성하고 죽는 자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예수님도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시고 운명하셨습니다. (요19:30) 문제는 주님의 이 땅에서의 인생은 알다시피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는 것입니다. 

 

삼 년간 동고동락하며 가르치며 사랑을 베풀었던 제자들은 전부 다 자기들만 살려고 떠났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찬양하며 열렬히 따랐던 대중들은 분노에 가득 차서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외쳐댔습니다. 보잘것없는 유대 공회의 종들과 로마 군병들마저 주님께 침을 뱉고 뺨을 때리며 멸시했습니다. 누가 봐도 ‘다 이루었다’라고 말할 만한 상황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 오르기 전까지 주님이 하신 일들은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첫째 목적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주님은 생전에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지만 사흘 후에 부활하실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가르쳤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신 궁극적 목적은 무덤에서 부활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부활이 없고 죽음으로 끝나면 한 종교 선각자가 진리를 가르치고 몸소 본을 보인 것뿐이며, 그럼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끼리 추모 모임을 하는 것으로 그만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인간으로 오신 목적이 부활이지만 죽음 이후 부활까지는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행하실 일입니다. 완전한 인간으로서 주님이 이 땅에서 반드시 행할 바는 부활의 준비 즉, 부활하기 위해서 먼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예수님이 이 땅에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목적은 죄에 찌든 인류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생전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라고 선언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곧 숨이 멎을 것이므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주목해야 할 바는 예수님이 죽기는 죽되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겠다고 미리부터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마20:19)고 예언하셨습니다. 본문도 그래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라고 끝나지 않고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그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목적을 정확히 알려면 십자가에 죽기로 작정하신 이유부터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 처형의 의미

 

로마는 식민지 백성에게 그들 고유의 관습과 문화와 종교는 물론 일정 부분 행정적 자치까지 허용했습니다. 그러나 제국에 거역하는 죄는 인간이 고안한 방법 중에 가장 고통이 극심한 십자가 처형으로 아주 엄격하게 다스렸습니다. 

 

십자가 처형이 얼마나 잔인한지 증명해주는 좋은 예가 있습니다. 영화로 잘 알려진 흡혈귀 드라큘라는 15세기 루마니아의 그 이름을 가진 한 잔인한 성주가 실제 모델입니다. 그는 정적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끔찍하게 죽여서 아예 반역할 꿈도 꾸지 못하게 했고, 외적이 쳐들어오다 길가에 나열된 그런 십자가 죽음들을 보고 너무 두려워서 전쟁도 치르지 않고 도망갔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로마도 식민지 백성에게 반역의 결과가 얼마나 끔찍할지 똑똑히 보라는 경고로 십자가 처형을 시행한 것입니다. 

 

식민지에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었기에 유대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모세 율법을 위반한 죄인으로 자치적으로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주도 아래 스데반을 나사렛 이단으로 정죄하여 돌로 쳐서 죽였듯이, 주님도 십계명에서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컬었고 안식일을 위반한 죄로 사형시키면 되었습니다. 

 

복음서 기록에 따르면 유대 공회원들은 주님을 일찍부터 죽이려고 결정하고서 그 방법만 계속 모의해왔습니다. 그 모략의 결론은 주님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칭했다는 죄목으로 로마 총독인 빌라도에게 판결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은 로마 황제가 임명하는데 주님이 스스로 유대 왕이라고 칭했다면 로마에 반역한 셈이고 빌라도로선 십자가 처형으로 다스려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의 음흉한 의도는 지난 삼 년간 백성들에게 추앙받았던 주님을 자기들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주님의 예언대로 이방인인 로마인의 손을 빌려 죽이려 한 것입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21:23)는 율법 말씀을 예수님에게 적용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 대중들에게 하나님께 저주받아 죽은 예수는 메시아가 절대 될 수 없다고 인식시키려는 뜻이었습니다. 

 

만약 로마 반역죄가 아니면 빌라도는 굳이 자기가 판결할 필요 없이 끝까지 유대인들의 자치에 맡겼을 것입니다. 대제사장으로선 십계명을 위반한 죄로 처형시킬 수밖에 없는데 백성들 사이에 종교적 시기 질투로 주님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동정 여론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가장 염려했던 측면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로선 반드시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아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모습을 드러내 보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흉계마저도 다 아시고, 정확하게는 오히려 그 모략에 적극 동참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스스로 올라갔습니다. 성경 기록을 잘 살펴보면 주님이 그런 판결이 내리게끔 당시의 모든 상황과 사건과 사람들을 당신께서 주도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마지막 날 밤에 얼마든지 천군 천사를 동원해 로마를 물리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자고 촉구하는 제자들을 오히려 야단쳤지 않습니까? 

 

대신에 주님은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쳤는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27:46, 막15:34)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기 싫다는 뜻이 아니라 그 반대로 이 죽음의 의미가 바로 그런 뜻이라고 당신의 말로 미리 밝힌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곧 죽게 되면 성부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될 일이 너무 괴로웠던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실제로 저주할 리는 없습니다. 죄로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려면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똑같이 범한 죄, 그것도 죽음에 해당하는 죄부터 하나님께 용서받아야만 합니다. 인간이라면 한 명의 예외 없이 덮어쓰고 있는 죽음의 형벌을 벗겨내야 하므로 주님은 인간 사형수의 자리에까지 자신을 낮추신 것입니다. 결국 성부 하나님은 인간을 대리해 죽을 죄인이 된 예수님을, 더 정확히 말해서 주님이 덮어쓴 그 인간의 죄를 저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예수

 

모든 인간이 죽음의 벌을 받아야 할 하나님께 저주받은 죄는 바로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원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최초 인간 부부는 사탄의 꾐에 넘어가 스스로 하나님보다 자기들을 더 높여서 에덴, 즉, 이 땅의 주인이 되려고 그분을 거역 대적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어도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이 곧바로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만 끊어져서 그분에게서 어떤 선도 공급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이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는 죄악뿐으로 육체는 살아있어도 그 영혼에 실질적이고 완전한 죽음이 임했던 것입니다. 

 

바꿔 말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일차적으로 인간들이 범한 윤리적 죄들의 값을 갚으신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윤리적 죄들은 최초 부부가 하나님을 거역하여 그 영혼에 죽음이 임하자 그 후에 필연적으로 따라온 것입니다. 하나님과 등지자마자 곧바로 죄책감과 수치심과 두려움이 저절로 생겼습니다. 부부끼리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았는데 자기가 자신을 봐도 너무 추하게 느껴졌고 어떻게든 들키지 않으려고 감추려 했습니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부부가 죄의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겼습니다. 하나님께 벌 받을까 두려워져 그분의 눈을 피해 숨기 바빴습니다. 

 

아담 이후로 태어난 인간들도 그 원죄가 영혼 깊숙이 각인되어서 아무도 하나님을 진심으로 두려워하지도 찾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의 본성은 이 땅의 좋은 것을 먼저 많이 차지하려는 탐욕과 또 그 전에 자기만 높이려는 교만으로 완전히 부패되었습니다. 필연적으로 세상은 인간끼리 서로 시기 질투 분쟁 살인하는 윤리적 죄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물론 인간에겐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흔적이 왜곡 파괴되었어도 도덕적 양심으로 일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만 높이려는 가공할 만큼 강력한 본성 앞에 양심은 완전히 무력해졌기에, 남이 조금이라도 자기 이익을 침범하면 곧바로 원수로 여깁니다. 불신자들이 간혹 나는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서 착하게 살았기에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다고 큰소리칩니다. 역으로 따져 남이 나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기에 나도 그렇게 했다는 뜻일 뿐입니다. 

 

윤리란 인간사회의 질서와 안녕을 지키기 위해서 인간이 고안한 것입니다. 행동으로 범하는 잘못만 죄로 여기므로 사람을 의인과 악인으로 나누고 착한 자가 천국 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행동의 죄만 잘 통제하면 스스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데 심판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원죄입니다. 최고로 잘 봐주어야 하나님을 사람의 생전의 행적에 대해 점수만 매기는 기술자로 격하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 자들이 인생을 마감할 때는 한결같이 자기들 주장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이 받아주실지 모르겠다고 크게 염려하거나 혹은 그렇게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생전에 남들 앞에서 의로운 척하며 자기를 감췄으나 자기는 자신이 얼마나 추하고 악한 존재인지 잘 알기 때문입니다. 최초 인간의 최초 범죄 때처럼 남들은 전혀 모르고 그래서 남들에게 아무 피해를 주지 않는 잘못을 범했어도 스스로 크게 부끄러워지고 두려워졌던 것입니다. 

 

거기다 평생토록 행동으로 범하는 죄라도 고쳐보려 아무리 노력했어도 마지막 순간까지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오래전에 아주 고매하신 한 불교 스님이 자신은 지옥 갈 것이 틀림없고 또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고 실토해서 큰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아담 이후의 인간은 영적 죽음이라는 절망 아래에서 평생 죄의 노예가 된 그 멍에를 벗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영적 시체 상태의 인간을 구원하려면 우선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부터 회복되어야 하는데 그분 쪽에서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주어야만 합니다. 모든 인간이 당신을 찾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고 자기들 멋대로 행했고 심지어 당신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원죄부터 엄격하고도 정확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거역한 인간을 괘씸하게 여기고 복수하려는 한풀이가 아닙니다. 육체적인 죽음보다 더 허망하고 비참한 영적 죽음에 처한 인간이 너무 불쌍해서 피해자인 당신께서 가해자인 인간에게 먼저 자비를 베풀어 새 생명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아담이 타락 당시에는 받지 않았던 죄에 대한 완전한 저주인 육체적 죽음을 당신의 독생자인 예수님더러 짊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으로선 자기 죄를 스스로 처리할 수 없고 그 전에 자기가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인식부터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고 선언한 까닭입니다. 

 

완전한 속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저주받은 죄의 본질을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아 당신의 사랑 안에서 당신의 뜻대로 따라야만 온전해질 수 있는 존재인데도, 인간은 그것이 싫고 귀찮아진 것입니다. 엄격히 말해 육체적 본능에만 충실하겠다고 인간의 정체성을 벗어던지고 짐승이 되어버린 죄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인간 본연의 모습이 바뀜으로써 모든 인간이 나면서부터 평생 덮어쓰고 있는 존재론적인 죄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누구나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법이 없다는 식의 윤리적 죄들부터 용서해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마15:19) 뿐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모든 윤리적 죄는 마음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그 마음이란 한 인간 전체를 말합니다. 인간이 지은 개별적인 죄들이 아니라 이미 죄인 된 인간을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죽음으로는 다른 사람의 죄 전부를, 특별히 존재론적인 죄는 절대 용서받지 못합니다. 간혹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 대신에 다른 사람이 죽겠다고 나설 수 있습니다. 빌라도 총독이 무죄인 예수님을 살리고 싶어서 흉악범 바라바를 대신 죽이려 했듯이 말입니다. 그래봐야 사형수의 목숨만 건지지 그 죄까지 용서받는 것은 아닙니다. 

 

죄에 찌든 인간은 같은 죄인인 인간 전체를 대표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제물이 결코 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완전한 인간으로 오셨다는 뜻임)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4:15,16)고 설명합니다. 아무 죄가 없어야 하므로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또 존재론적 죄를 완전히 씻으려면 실제로 완전히 죽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완전한 하나님만으로는 죽음을 겪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완전한 인간만으로는 죽음을 이겨내어서 부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단순히 도덕적 종교적 개념으로 접근해선 절대 안 됩니다. 흔히들 “그렇게 극심한 고통을 당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가 그런 은혜를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는가?”라는 식으로 감상적 접근에 그쳐선 안 됩니다. 주님은 모든 세대 모든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극심한 저주를 실제로 당신의 완전한 죽음으로 다 받아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없었다면 지금까지도 모든 인간은 절망적 죽음에서 절대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모든 인간에게 십자가만이 유일한 소망이며 예수님이 처음이자 끝입니다. 인류 역사는 물론 구원받은 신자 개인의 인생도 십자가 전과 후의 의미와 가치는 정반대로 전혀 다릅니다. 

 

사탄도 이기는 신자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교리적 종교적으로 강조하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삼위 하나님은 창조 이래로 세상만사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달성하려고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 후로도 그 십자가 은혜로만 인류 역사와 각 개인의 인생을 주관하십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할 것을 다 아시고, 사실은 그것도 각오하고서 예수님을 태초부터 십자가에 달려 죽일 것을 계획하셨던 것입니다.(요 1장) 아담의 타락 후에 그 죄악의 원흉인 사탄을 여자의 후손이 와서 그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3:15) 

 

사탄은 예수님이 이 땅에 아기 예수, 즉 완전한 인간으로 오시자마자 창조 때에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임을 가장 먼저 알아챘습니다. 곧바로 헤롯 대왕을 부추겨 예수님을 죽이려고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다 죽였고 그 후로도 유대 종교 지도자, 빌라도, 우매한 백성들을 부추겨서 주님을 십자가에 죽게 이끌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어버리면 더 이상 자신의 머리를 상하게 할 대적이 될 수 없다고 섣불리 판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살펴본 대로 주님은 사탄과 그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들의 모략을 오히려 역이용하여서 실제로 하나님의 죄에 대한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럼으로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길을 열었고 나아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당신의 십자가 대속 죽음의 은혜를 믿는 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서 부활 영생까지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계획하셨던 대로 사탄의 머리를 완벽하게 상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당신의 독생자가 아니라 사실은 인간 죄의 원흉인 사탄을 완벽하게 저주한 것입니다. 

 

본문도 그래서 “땅 아래에 있는 자들도” 그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라고 말한 것입니다. 땅 아래 있는 자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지만, 죽음은 사탄의 꾐에 넘어간 죄로 인해 하나님께 저주받은 형벌입니다. 결국 사탄도 예수님의 이름 아래에 무릎을 꿇게 하신 것입니다.

 

당시 예수를 살리려고 나름 애를 쓴 빌라도 총독도 사실은 사탄의 종이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지 않으면 황제에게 이 사실을 직소하겠다는 으름장에 져서 그 처형을 허락해주었습니다. 가뜩이나 당시 황제의 불신을 받고 있는 차에 작은 식민지의 사소한 종교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한다는 추궁까지 당하면 총독 자리까지 위험해질까 봐 부랴부랴 유대인들의 분노를 잠재우려고 허락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빌라도는 유대인의 요구에 끝내 굴복한 것이 아니라고 자기 자존심을 세우려 했습니다. 대제사장과 유대 장로들이 반대하는데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히브리어, 라틴어, 헬라어 셋으로 쓴 팻말을 붙였습니다.(요19:21) 유대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그 죄목으로 고소해놓고도 막상 그런 팻말이 공개적으로 붙여지는 것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이 얼마나 인간이 완악한 죄인입니까? 그것도 가장 의로웠던 종교 지도자들이 말입니다. 

 

빌라도의 속내는 너희가 고소한 대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시켰으니 그가 유대인의 왕이 맞는다고 그들을 조롱한 것입니다. 당시에 통용되는 세 가지 공용어로 그렇게 표현했으니 그는 자기가 의도하지 않았고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이 모든 족속의 왕이라고 공표한 셈입니다. 또다시 사탄은 예수님에 의해서, 그것도 십자가의 죽음으로 완전히 저주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은 이처럼 사탄이 인류 전체를 누르고 있던 공중권세를 완전히 거두어냈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사탄마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는 신분이 되었습니다. 존재론적으로 사탄의 종이었다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완전한 구원이 이뤄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가르치면서 그들의 공동체에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열쇠를 맡겨 주신 것입니다. 또 그래서 여전히 사탄에 미혹된 영혼들을 당신의 심정으로 불쌍히 여기고 땅끝과 끝날까지 십자가 복음을 전하라고 명한 것입니다. 당신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모든 신자에게 주신 이 소명이 십자가상에서의 다 이루었다는 말씀 대신에 진짜 마지막 유언이었던 것입니다. 

 

십자가 처형과 믿음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셨다는 의미는 간단히 말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의 근본 원인이 공동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진리에 대한 무지나 도덕을 실천하려는 노력의 부족에 있지 않다는 것을 정확히 밝힌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생긴 모든 결핍과 왜곡과 부패를 스스로 자기 실력으로 아무리 해결하려 노력해도 이미 죄의 힘에 묶여서 전혀 그럴 수 없다는 점이 인간의 가장 첫째가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주님은 공사역 중에 가르치신 천국 복음과 사역과 특별히 십자가 죽음으로 명백히 계시해주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졌기에 하나님과 함께 교제 동행하지 않으면 결코 그 삶이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2:13)고 선언한 대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신 의미도 온 천하에 대고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을 거역 대적한 탓이라는 선포입니다. “지금껏 너희가 법률 윤리 종교 그 어떤 것으로 노력해도 갈수록 오히려 사회가 타락해져 가고 개인적으로도 평안을 전혀 누리지 못하지 않느냐? 하나님인 내가 너희의 구원을 더 간절히 원하고 또 얼마나 너희를 사랑하는지 그 증거로 내 생명을 내어놓을 테니까 제발 나에게로 돌아오라.”는 절절한 호소였습니다. 

 

죄란 인간으로서 하나님과 반대편에 서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요, 최고로 좋다고 느끼는 것을 넘어서, 끝까지 그렇게 믿게 만드는 인간 본성 안에 심어진 거부할 수 없는 가공할 힘입니다. 그 본성을 바꾸려면 자기 외부에서 그보다 더 큰 힘이 작용해서 그 근본부터 갈아엎어서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의 권능이 역사하여 그 심령을 거듭나게 만들어야 합니다. 

 

주 후 4세기의 신학자 어그스틴은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본 고백록에서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할 때까지는 무슨 짓을 해도 안식을 얻을 수 없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고 실토했습니다. 그는 젊어서 창녀와의 사이에 자식을 낳을 정도로 방탕한 삶을 살았고 자기 죄의 문제를 스스로 씻어보려고 노력했던 자였습니다. 어떤 노력을 해도 자신의 의지로는 도무지 그 일이 불가능했고 자기 존재 전체가 죄의 덩어리임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여 하나님께로 자기 전부를 돌이키자 비로소 영혼의 평안을 얻었던 것입니다. 영국의 신학자 겸 작가인 체스트톤이 인간은 기생 집에서 방탕한 죄악을 즐겨도 하나님을 찾으려는 몸부림이라고 설파했는데, 그 생생한 예가 어그스틴이었습니다. 역으로 따져 십자가의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은 평생을 사탄의 노예로 지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인류를 위해서 훌륭한 업적을 쌓고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며 의롭게 살았고 또 그래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조차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서면 자기 심령의 절대적인 궁핍함을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최고로 의로웠던 예수님의 인생이 당시 인간사회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거꾸로 모두가 조롱 멸시했다는 사실만큼 인간이 사탄의 종이자 죄의 노예라는 확실한 증거도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첫째 목적은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저주인 죽음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이었습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인 그분을 주로 시인하여 구원받았다는 의미도 십자가에 올라가 정작 죽음의 심판을 받아야 할 자가 주님이 아니라 내 자신이라고 체험적으로 절감해야 합니다. 

 

사탄의 종이 된 인간이 사탄을 이겨낼 수 없으므로 어그스틴처럼, 그전에 예수님이 이미 니고데모에게 가르친 대로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은혜가 주도적 선도적으로 임해야만 원죄의 멍에를 벗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령의 역사가 임하면 그 권능이 압도적이라 거듭나게 되고 주님처럼 “다 이루었다는” 고백도 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옛 자아가 완전히 죽음으로써 완전히 실패했던 이전의 인생을 완전히 마감했다고 실토합니다. 

 

혹시라도 아직 그런 고백의 체험이 없다면 진정으로 다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성경을 묵상하면서 사모하십시오. 주님이 먼저 나를 찾아와 만나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 전에 곰곰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 은혜 없이 내가 스스로 노력하여 구원받을 수 있을지를 말입니다. 신학적으로 어렵게 따질 필요 없습니다. 어떤 외부적 시험 유혹 없이 혼자 있는데도 죄를 지은 적이 있는지 따져보십시오. 또 그런 때에 다른 이가 아무도 모르고 또 그들에게 아무 피해도 가지 않았는데 저절로 부끄럽고 두렵게 여겨졌는지 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것뿐이지 않습니까?

 

(5/21/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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