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7:21-25)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겨라.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3)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7:21-25)
죄의 법을 섬기는 바울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당시로선 최고의 의인이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6)고 스스로 자부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로마 교회에 보낸 편지인 본문에 따르면 신자가 된 후에 오히려 더 나빠진 것처럼 보입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나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고 실토했습니다.(25절)
본문이 구원받기 전의 상태를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죄의 법을 ‘섬기노라’(serve)라는 동사의 시제가 현재형이므로 그가 이 서신을 기록하고 있는 때의 자기 상태를 설명한 것입니다. 표준새번역본 성경은 그래서 ‘섬기고 있습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믿고서 도덕적 종교적으로 더 나빠졌을 리는 만무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육신의 법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고 실토한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신자가 되고 나니까 죄에 대해 질적 양적으로 더 많이 깊이 깨달았기에 결과적으로 이전보다 죄에 더 많이 넘어졌다고 고백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오늘날 많은 신자들처럼 성화의 삶은 거의 포기하고 전도와 선교 같은 종교적 활동에만 매진한다는 뜻입니까?
성경에 관한 의문의 답은 가장 먼저 본문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선 “내가 한 법을 깨달았다”라고 말합니다.(21절) 예수 믿기 전에는 그 법을 몰랐으며 그래서 빌립보서의 고백처럼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착각했었다는 뜻입니다. 그가 깨달은 법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22절 이하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지체 속에 나를 사로잡아 오는 죄의 법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순종하려는 마음이 간절한 데도, 이상하게 실천하려니까 내 마음과는 달리 쉽게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본문 바로 앞에서도 그런 뜻이라고 이미 밝혀 놓았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9,20절) 나는 하나님이 바라는 대로 선을 행하고 싶은데, 내 속에 거하는 죄가 그 일을 막고 악으로 이끌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적용되는 규칙이라는 뜻인 법이라는 표현을 죄에 적용했습니다. 말하자면 환경, 사건, 상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거의 매번 내 속에 거하는 죄가 큰 힘을 발휘하더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 수시로 죄를 짓게 된 것에 대한 핑계를 댔을 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인 성경이 바울 같은 위대한 사도도 계속 죄를 지었으니까 일반 신자는 얼마든지 그래도 된다고 가르칠 리도 없습니다.
죄의 법이라고 해서 자기는 가만히 있는데 자동적 기계적으로 악을 범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죄를 저지르면서 죄라는 인식이 전혀 없는 자는 사이코패스 같은 정신이상자뿐입니다. 정상인은 악을 행하기 전에는 간혹 잘 모를 수 있어도, 악을 행할 때는, 최대한 양보해서 악을 저지른 후에는 죄책감, 수치심, 공포심을 느낍니다. 바울도 지금 죄의 법을 섬긴다는 동사를 현재형에다 능동태로 표현했으며 생략된 문장의 주어(主語)도 본인입니다. 자신이 죄의 법에 묶여 있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따져서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죄의 법은 자기가 속박되어 있다는 수동적인 의미인데, 그 법을 자신이 능동적으로 섬기고 있다고 이율배반적으로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바를 천천히 잘 따져보면 죄의 법을 섬기고 있다고 해서 실제로 악한 행동으로 옮겼다고는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자기 내면의 생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즉 자기가 새롭게 깨달았다는 그 법에 관해 설명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은 후, 특별히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알게 됨으로써 자신의 영적 내면의 실상을 정확히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근본 이유가 바로 그런 실상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문제이든 원인을 정확히 알면 그 해결책도 정확하게 세울 수 있기에, 매번 성화에 실패하는 우리에게 본문은 가장 바람직한 성화의 교본이 될 수 있습니다.
율법과 죄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선을 행하기를 원했고 하나님의 법인 율법을 즐거워했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자랑할 정도로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게 되니까 율법 준행만으로는 자신이 의롭다는 증거가 절대 될 수 없다는 사실부터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말로서 형제를 바보라고 비하하는 것도 인격적인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고 깨우쳐주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해서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는 것은 참사랑이 아니고 이방인도 그렇게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너희는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고 명했습니다.
특별히 모세의 율법에 아내에게 하자가 있다고 여겨지면 증서를 써주고 내쳐도 된다고 규정되었으나, 예수님은 음행하지 않은 아내를 단순히 증서를 써주고 이혼해도 하나님의 뜻 안에서 여전히 본남편의 아내로 남아있기에 이혼이 성립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내가 재혼하게 되면 새로 맞는 신랑과 함께 간음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나아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도 간음죄를 범한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모든 규정을 율법의 최고 전문가라고 자부하는 바울보다 더 꿰뚫어 아실 뿐 아니라 그렇게 제정한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까지 정확히 풀어서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혼 성서 규정도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19:8)고 했습니다. 이혼을 자유롭게 행하는 일을 허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래 뜻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밝혔습니다.
모세 당시에 여자들은 짐승 내지 물건 취급밖에 못 받았고 애굽에서 사백 년간 노예로 살았던 히브리인들도 그런 풍습에 물들었습니다. 율법의 이혼증서 규정(신24:1-3)을 자세히 보면 혼전에 결정적인 음행을 저질렀거나 혼인을 이어갈 수 없을 정도의 하자를 뜻합니다. 단순히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언제든 이혼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민족 앞에 제사장 나라로 서야 할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관습과는 달리 이혼증서를 발행해서 여자에게 최소한 재혼할 권리를 보장해주라고 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그 규정을 문자적으로만 지키면 된다고 여기고 여전히 여자를 무시하고 성적 노리개로만 여겼습니다. 자기 맘에 들지 않는다고 아내를 아무 때나 버려놓고도 다른 남자와의 재혼을 막았고 심지어 기분 내키면 다시 아내로 데려왔습니다. 그렇게 하는 일에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거꾸로 율법대로 따랐으니까 잘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하나님의 원래 뜻은 음행 이외의 사유로는 이혼해선 안 되고,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죄를 범한 것이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물론 불신 세상에서도 말로 욕하는 것은 인격 모독죄라고 실정법에 규정해 놓았습니다. 간혹 의롭고 현명한 불신자들은 생각으로 짓는 죄가 오히려 더 심각하고 교묘하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도 꿈에도 알 수 없고 예수를 믿어야만 깨닫는 죄에 대한 영적 원리가 따로 있는데, 바울이 깨달았다고 고백한 본문의 가르침입니다.
자기 실체를 대면한 바울
바울은 자기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이 자기 마음의 법을 이겨 죄의 법 아래로 끌고 온다고 실토했습니다. 자기 지체 속에 죄의 법이 있고(23절), 또 내 속에 죄가 거한다(20절)고 표현했듯이 죄를 하나의 영적인 실체라고 시인했습니다. 개별적인 악한 행동이 죄의 본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중 인격을 가졌다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자기를 완전히 지배할 정도로 자기 내면에 실재하고 있는 가공할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 힘이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법을 실현하지 못하도록 너무나 끈질기고도 교묘하게 막아선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주장하는 그런 죄의 법이 바울이 예수를 믿은 후에 새로 생긴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는 예수 믿기 전과 비교해 도덕적 종교적으로 더 악해지지 않았고 더 선해졌을 것입니다. 그에게 바뀐 것은 영적인 차원 하나입니다. 그런 죄의 법이 예수를 믿기 전부터 자기 속에 있었는데 예수를 믿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가 율법을 문자적으로 어긴 적이 없으니까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고 자랑한 일부터 육신이 자기 속에 거하는 죄의 법을 섬긴 결과라고 절감하게 된 것입니다.
나아가 현재형 능동태로 설명했으니까 예수를 믿어도 그 힘이 전혀 줄지 않고 여전히 똑같은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죄가 자신의 속사람을 완전히 차지하고 앉아 있는 셈입니다. 속사람은 행동, 말, 생각을 넘어서는 차원입니다. 생각까지 주장하는 더 깊은 심령에 자리한 인간을 실제로 움직이는 힘입니다. 누구나 경험하듯이 전혀 예상치 않은 시간, 장소, 사건에서 자기 생각과는 전혀 다르고 그래선 안 되는 말이나 행동이 불쑥불쑥 튀어나옵니다. 자기 생각으로 통제되지 못하는 인간 심령의 더 깊숙한 차원에 죄가 꽈리를 틀고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실상 그 죄가 한 인간의 핵심적인 본질이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도 않고 음식을 먹는다고 바리새인들이 장로의 유전을 어겼다고 따졌을 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15:18-20)
주님은 손을 씻지 않고 먹는다고 해서 사람 자체를 더럽게 만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당시에 위생 상태가 열악했으나 바이러스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기에 상한 음식이 아닌 이상 배탈도 잘 나지 않았습니다. 위생환경이 좋아진 오늘날도 밖에서 놀다 흙 묻은 손으로 음식을 먹었던 저희 둘째 손녀는 까딱없는데 부지런히 손을 씻은 큰 손녀가 오히려 감기에 잘 걸렸듯이, 인간에겐 이미 하나님이 주신 자가 면역 능력이 있습니다. 손을 자주 씻는 것은 어쨌든 좋긴 하나 그것이 종교적으로 사람을 차별할 기준은 절대 될 수 없습니다.
대신에 주님은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했습니다. 가래침이나 먹은 것을 뱉어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했으니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뜻합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존재로 생각과 별도로 행동하는 법은 없습니다. 주님은 지금 바리새인들이 조금 전에 당신의 제자들이 장로의 유전을 어겼으니 잘못되었다고 비방했던 그 말이 오히려 너희를 더럽힌다고 꾸짖은 셈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을 죄의 덩어리라고 표현한 셈인데 결코 과장한 내용은 아닙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의 아이들을 잘 관찰해보십시오. 아니 우리 자신이 어렸을 때 어떠했는지 진지하게 되돌아봐도 됩니다. 누가 강요하거나 시키지 않아도 자기 욕심과 자존심만 채우려 들었고 그것을 훼방하는 존재는 무조건 싫어했고 종종 대들며 싸웠습니다. 이는 학교 교육과 인생 경험에 따라서 행동하기 훨씬 전이라 모든 인간의 태생적인 본성이 그런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사람의 마음 안에 온갖 악한 것들로 가득 차 있어서 그것이 말과 행동으로 나온다고 깨우쳐준 것입니다. 본래부터 죄인이므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래서 죄의 법이 자기 속에 거(居, dwell in)하는, 즉 살아있는 자신의 또 다른 지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바울이 행동으로 간음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겠지만,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 않았다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거기다 기껏 인간 장로들이 만든 규정을 문자적으로 위반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예수 믿는 신자를 핍박했고 스데반의 처형을 주도했습니다. 예수님은 말로서 형제를 욕해도 인격적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고 말했고 신자라면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쳤는데, 자신은 단지 자기와 종교적 신념이 다르다고 행동으로 살인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한 후로, 죄를 절대로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으로 단순하게 접근해선 안 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자신을 비춰봤을 것입니다. 자기 마음도 이혼증서를 악용하는 자들과 하나 다를 바 없이 너무나 완악해서, 자기 임의로 율법을 곡해하며 자신의 의를 증명하는 데에 악용했다는 사실을 생전 처음으로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무리 행동으로 죄를 범하지 않았어도, 신자를 핍박한 것은 영적 진리를 잘 몰라서 그랬다 쳐도, 자신이 본래 갖고 있던 그런 완악한 마음 때문에 자신이야말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음을 예수님을 알고서야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인간사회에선 도덕적으로 최고의 의인이었고 종교적으로도 최고로 경건한 자요 율법을 가르치는 선생이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물론 십자가 대속 죽음의 은혜를 알게 되자, 율법을 문자적으로 준행한다고 해서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지 못하면 허사이고 오히려 죄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가 율법을 준행했던 의미도 어디까지나 자기 쪽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려 한 것일 뿐이었지, 정작 하나님이 자기에게 바라던 바에 순종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은 이와 정반대로 생각합니다. 죄를 짓기에 죄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을 자기 속에 거하는 죄의 법에 돌려본 적이 전혀 없고 죄가 또 다른 실체로 자기 속에 거한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지 못합니다. 죄를 지어서 양심의 가책이 생겨도 자기가 죄를 이기려는 의지력과 노력이 부족했던 탓이므로 다음에는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또 죄에 넘어가면 주변의 나쁜 사람들의 훼방이나 열악한 여러 환경 때문이지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흘이나 굶은 장발장이 성당의 은 촛대를 훔쳤으나, 그 소설의 제목 ‘Les Miserable’(자비를 받아야 할 자)처럼 자기도 모든 정황상 용서받을 여지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실정법을 어기지 않았으니 오히려 자신은 평균 이상의 의인이라고 큰소리칩니다. 바울이 예수를 믿기 전의 모습도 그랬습니다. 당신은 죄인이니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으시라고 전도해보면 많은 이들이 십계명을 어기지 않았고 예수 믿는 너희보다 더 의로우니 그럴 필요 전혀 없다고 거부합니다. 그들은 죄를 단순히 행동이나 말을 악하게 하는 정도로만 여기고, 또 그 행동의 죄조차 제대로 절제하지 못하는 이유가 자기 내면에 꽈리를 틀고 있는 죄의 법 때문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신자들입니다. 성화를 불신자들처럼 도덕적으로 선하게 되어야 하는 일로만 여기고서 그 방식도 자기 의지로 악행을 억누르려고만 하는 신자가 의외로 많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야단치신 대로 밖에서 자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자기를 더럽게 만든다고만 여기고 밖에서 들어오는 나쁜 것만 어떻게든 차단하려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자기를 정서적 경제적 영적으로 힘들게 하는 자기 주변의 사람이나 어려운 현실 고난을 자기가 반드시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자기 취미생활에 빠져서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남편, 낭비벽이 심해 자녀 양육을 소홀히 하는 아내, 유독 나만 미워하며 꼬치꼬치 잘못을 찾아내서 야단치는 직장 상사, 몰상식하게 자기들 이익과 편리만 먼저 챙기는 이웃. 교회 출석하지 말라고 강압적으로 요구하는 시어머니, 교회 직분으로 세도 부리거나 종교적 지식을 자랑하는 성도, 자신의 열악한 외부 환경이나 궁핍한 경제 사정, 심지어 중병을 앓고 있는 가족도 자기의 십자가로 여깁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나 상황만 아니라면 자신이 더욱 의로워질 수 있고 최소한 죄를 안 지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 자기 십자가 때문에 평생 자기만 손해 보아야 하고 또 그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어도 자기는 잘못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의지적으로 그런 사람과 부딪히지 않으려 하고 혹시 만나게 되어도 내가 일방적으로 참아야 하고, 열악한 주변 사정도 아무리 기도해봐도 개선이 안 되니 어쩔 수 없 견뎌내기만 하려는 절망에 빠집니다.
그런 생각은 여전히 행동으로 짓는 잘못만 죄로 여기고 또 자신이 성화를 이루지 못하는 원인을 외부에만 돌리는 것입니다. 불신자들과 동일한 생각으로 신자가 되어서도 가장 먼저 반드시 깨달아야 할 본문의 영적인 각성이 아직 생기지 않은 셈입니다.
예수님이 신자더러 지라고 말하는 십자가는 그런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주님은 분명히 자기의 십자가를, 그것도 매일 짊어지고서 당신을 따르라고 명했습니다. 다른 이의 잘못이나 현실적 고통은 매일 생기지 않고 때때로 일어나며, 또 그것이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참아내는 것은 신자가 져야 할 십자가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도 골고다 형장에 올라갈 때 로마법에 따라서 당신께서 십자가를 직접 짊어지셨습니다. 중도에 너무 힘들어 제대로 짊어지지 못하니까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져주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이 예수님 때문에 직접적인 손해나 괴로움을 당할 일은 전혀 없었고 단순히 주님을 측은히 여기고 도와주었을 뿐입니다.
주님은 어쨌든 실정법상 사형수로서 곧 십자가에서 처형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으로도 당신께서 인류를 대신하는 죄인의 자리에까지 낮아진 것이며 실제로 당신께서 완전히 죽을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십자가에서 매일 죽어야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며 그것도 자기 죄 때문이어야 합니다. 나아가 주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일 때문이라면 세상에서 온갖 능멸과 박해를 받는 최악의 비참한 자리에까지 내려가야 하고, 나아가 하나님이 죽음으로 이끌면 기꺼이 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믿음의 자세와 실천을 갖춘 자라야 당신의 제자로서 당신을 따를 수 있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성화의 출발을 바꿔라.
본문도 사실은 신자더러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뜻입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사모하나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는 자신을 매일 발견하고 매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화의 출발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또다시 자신의 욕정, 교만, 악한 마음 등을 의지적으로 죽이는 싸움으로 그쳐선 안 됩니다. 자칫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마음 다스림이나, 일반인들도 행하는 마인드콘트롤이 되어 버립니다. 가장 먼저 자신이 죄인이라서 죄를 짓게 된다는 그 영적 원리부터 정확히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심판의 형벌만 면제되었지, 여전히 그 영적인 실상은 이전과 전혀 바뀐 것이 없다는 사실부터 철저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자들이 본문을 주로 어떻게 해석합니까? 세상 사람들이 말하듯이 자기 속에 천사와 악마가 항상 싸우는데 주로 악마가 이기더라는 정도로만 이해합니다. 그래서 악한 생각이 들 때마다 의지적으로 부인하고 선한 생각을 따르면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신자가 되어선 아니 보통 사람도 조직폭력단처럼 악을 행사하는 일이 직업이 아닌 이상 살인, 강도, 불법 같은 악한 일을 저지르겠다는 생각이 계속 떠오르는 법은 없습니다. 신자가 죄를 지놓고선 본문을 빌미로 자기 속의 악마 때문이라고 핑계 대어선 안 됩니다.
서두에 말했듯이 본문에 바울이 사도가 되어서도 매번 자기 속의 악마에게 져서 죄를 범했다고 변명하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말과 생각으로도 죄를 짓지 않기로 했는데 문제는 생각조차 자기 뜻대로 통제가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 원인을 가만히 살펴보니 내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서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미 죄인으로 굳어 있는 본인이 자기 혼자 힘으로 죄와 싸우려 노력해봐야 한두 번은 몰라도 결국은 그 죄의 법이 자기를 묶어서 실패하게 된다고 겸허하게 인정한 것입니다. 자기 내면에 강력한 죄의 법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에 이젠 성화의 방향을 바꾸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한탄했으나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당시 최고의 의인인데도 통제 못 하는 자기 속에 거하는 죄의 법을 예수님이 이기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가만히 있는데 주님이 초자연적으로 역사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신 영적 진리나, 그 가르침 대로 실제로 본을 보였던 삶이나, 특별히 십자가에 아무 말 없이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그 모든 의미를 정확히 깨닫고 보니까 자신이 너무나도 비참하고 철저한 죄인이었다는 사실부터 겸허하게 인정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전처럼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윤리적 종교적 계명을 그대로 준행하려 해선 성화는 매번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너무나 무능, 무력, 무지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는 아예 시체가 되어 있어서 속에서 선한 것이 나오지 않더라는 비참하고 처참한 자기 실체를 인정하고 예수님 제발 저를 이대로 두시지 말고 도와달라고 십자가 앞에 엎드리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라고 말했습니다.(살전5:17) 모든 신자더러 기도원 원장이 되라는 뜻이 아니며, 힘든 일을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다 해결해주신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신자가 되어서도 죄의 법에 묶일 수밖에 없으니 매번 죄를 지을 때마다, 아니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나아가 주님이 나를 주장해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죄인이라 죄를 짓게 되고 죄의 법을 섬기게 된다는 사실만 알고 멈추면 성화를 포기하는 가나안 신자처럼 됩니다. 죄의 법을 섬길 수밖에 없는 존재인 죄인이므로 자신이 죄의 법을 이길 수는 없고 죄의 법보다 더 강한 다른 법을 더 강하게 섬겨야 합니다. 죄의 법이 인간의 본성상 남아있다면 그것을 이기는 법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법뿐입니다. 그 법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완전히 실현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되는 즉시 성령님이 평생 내주해주시는 것입니다. 신자의 진짜 주인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든 자신의 모든 존재, 삶, 인생을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능과 은총으로 통치해 달라고 내어드리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내 진짜 주인은 예수님이지 죄가 절대 아니라는 다짐부터 하는 것이 바로 성화의 출발입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6:16-18) 십자가 복음을 믿은 신자는 죄의 법을 완전히 승리하신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님의 종이 되었다고 과거시제로 설명했습니다.
이제 성화를 이뤄나가는 방식을 바울처럼 바꿔야 합니다. 자기 내면의 실상에 대한 영적 진리를 알고 그 진리에 맞춰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이전의 주인이었던 죄가 절대로 자기를 주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선 안 됩니다. 쉽게 말해 날이 갈수록 말씀과 기도로 예수님과 그분의 은혜 안에 사는 것이 너무 좋고 기쁘면 죄는 자연히 날이 갈수록 멀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7/16/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