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8:1-6) 성령의 법으로 죄에서 해방되려면?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8:1-6)
예수 안에 있다는 의미
바울은 사도가 된 후에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7:25b)라고 자신의 곤혹스러운 영적 상태를 실토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25a)라고 전제한 후에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예수를 믿었어도 자기 속에 또 다른 지체로 거하는 죄의 법이 자기를 묶으려들 때마다 예수님께 도움을 청해 죄를 물리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2:12)고 권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어떻게 예수로 인해 죄의 법에서 해방될 수 있는지 그 근거와 방안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신자가 성화에 성공할 수 있는 근거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1절)는 진리를 들었습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신자의 바뀌어진 신분으로, 주님을 순전히 믿어 자기 주인으로 모셨고 계속해서 그런 상태를 지속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신자가 되어서 얻게 된 특권으로, 예수 안에 있어도 다시 죄를 지을 수 있으나 그로 인해서 구원이 취소되어서 심판받는 법은 절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2절)고 구원을 이미 끝난 과거의 사건이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께서 죄로 타락하여 사망에 빠진 죄인을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서 구원의 새 생명을 주셔 놓고 그 생명을 다시 앗아갈 리는 없습니다.
어떤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간섭이 없을 것이므로 마음 놓고 죄를 지어도 된다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입니다. 굳이 정죄함이 없다고 말한 것은 혹시 죄를 지어도 일일이 문제 삼지 않으니까 그 징벌에 대한 염려는 끊어버리고 대신에 선을 마음껏 행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처리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구원과 심판 둘로 나누는 것뿐이라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다른 종교들처럼 사람이 죽은 후에 당신께서 구원해줄 자는 구원해주고 심판할 자는 심판하면 그만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은 신자로 평생토록 예수님과 전심으로 교제 동행하게 하는 것이 창조 때부터 삼위 하나님이 계획하신 죄 문제의 온전한 해결책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라고 가르칩니다. 신자에게 자격과 공로 하나 없으나 십자가 은혜로 구원하신 목적이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행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하나님으로선 신자에게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안도 마련해주셔야 하는데, 그에 대해서 3절 이하에서 설명합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
바울은 4절 후반에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신자에게 일어날 영적 변화를 미래형으로 표현했습니다. 율법의 요구가 이뤄진다는 것은 선한 일을 행하여 성화에 성공한다는 뜻입니다. 또 그럴 수 있는 방안은 4절 전반에서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신자가 영을 따라 행할 수 있는 근거도 당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었기 때문이라고(3절b), 즉 예수님의 은혜라고 다시 강조했습니다. 육신의 모양으로 보냈다는 것은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왔으나 육신에 적용되는 죄의 법에 전혀 묶이지 않는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육신에 죄를 정했다”는 것은 주님더러 인간의 죗값을 대신 감당케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있는 자는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고 그 후로도 정죄함이 없게 된 것입니다.
바울이 고백한 대로 예수를 믿어도 죄와 사망의 법은 그대로 남아있기에 하나님은 생명의 성령의 법도 함께 신자 안에 거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을 좇으면 육신의 생각을 하여서 육신의 일만 만들어 사망에 이르나, 영을 좇으면 영의 생각을 하여서 영의 열매인 생명과 평안을 얻는다고 성화의 방안을 가르친 것입니다.(5, 6절) 여전히 연약한 인간인 신자가 예수님처럼 율법의 요구를 일점일획도 빠트리지 않고 다 이룰 수는 없습니다. 신자 속에 남아있는 죄의 법이 육신의 생각으로 자꾸 묶으려 할 때마다 영의 생각을 좇으려고 최선을 다하면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성령이 매번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직통으로 계시해주는 법은 없으므로 실제로 성령을 좇기는 매우 힘듭니다. 그렇다고 모든 경우마다 그에 적용되는 성경의 영적 진리를 생각해 내고서 그대로 실현할 수 있는 실력도 없습니다. 단순히 저는 연약하고 어리석으니 성령님이 인도해달라고 매사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성령의 구체적인 계시가 없다고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자에게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은 구원의 취소가 없다는 뜻을 넘어서, 신자의 일상적인 현실 삶에 대해서 하나님 쪽에서 엄청난 포용성을 품고서 인자하게 기다려 주신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신자에게 자기 의지로 자유롭게 행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기에 그 은혜에 감사하며 순전한 믿음으로 그분의 뜻을 담대하게 실현해 나가면 됩니다. 신자가 하나님께 순전한 헌신을 하면 성령이 우리가 구체적인 과정은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는 모습과 방향으로 선을 행할 수 있게끔 우리를 보호 인도해주십니다.
어쨌든 신자로선 성령의 구체적인 지시는 받지 못하고 육신의 상태로 남아있기에 쉽게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영의 생각보다는 육신의 생각입니다. 따라서 성화의 관건은 육신의 생각을 완전히 끊어버리거나, 최대한 억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생각으로 음욕을 품는 것도 죄라고 했으니 그런 악한 생각을 억제하는 정도로는 크게 부족합니다. 악한 생각을 하는 것도 본인의 분명한 자기 의지에 따라 능동적으로 뇌가 움직이는 사고 활동이라 사실상 행동으로 범하는 윤리적 죄입니다.
그렇게 생각으로 음욕을 품게 된 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죄의 법에 져서 육신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육신이 무엇인지부터 정확히 알아야 육신을 좇는 생각을 금할 수 있고 또 육신의 일도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너무나 중요하고도 심각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신자의 육신이 육신의 생각을 하게 하여서 육신의 일로 이어지는데 그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 그와 반대로 가야 할 성화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다는 뜻이 되지 않습니까?
육신이란?
우선 육신은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육체와는 다릅니다. 만약 육체가 육신이라면 육체적 본능이 죄의 법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 본능은 하나님이 모든 생물에게 주신 일반은총이라 도덕적 가치를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다 그 육체적 본능을 최대한 채우려는 것은 짐승이 하는 짓으로 예수 믿지 않아도, 아니 도덕과 종교 훈련 없이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악인 줄 알고 절제하려고 노력합니다.
육신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죄로 타락한 인간 그 자체입니다. 육체와 그 본능과 그것을 통제하는 이성까지 포함하는 인격체 전부를 뜻합니다. 말하자면 소외되고 취약한 계층을 갈취하는 사악한 권력자도 육신이고, 정반대로 인간사회의 유익을 위해 큰 업적을 이룬 위인도 육신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모든 인간을 육신의 생각만 좇는 예수 밖에 있는 자와, 영의 생각을 좇아서 육신의 생각을 물리칠 수 있게 된 예수 안에 있는 자, 둘로 구분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외면 거부함으로써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 불신자는 육신으로 시작해서 육신으로 생을 마칩니다. 끝까지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자도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죄 중에 있을 때 구원해주었기에 육신은 그대로 남아있어서 자연스레 육신의 생각부터 솟아나게 마련입니다.
기억할 사항은 바울이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여호와 하나님을 알았고 율법을 지키려 노력했으며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더 열정적으로 사랑하며 섬겼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몰랐던 것은 예수님과 그 십자가 구원의 은혜였습니다. 자신의 분류법에 따르면 그는 성령이 내주하지 않는 예수 밖에 있다가, 예수 안에 들어옴으로써 영의 생각을 좇아 육신의 생각을 물리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가 아무리 위대한 사도라도 여전히 죄의 법이 그를 사로잡아 가려 했고 또 그가 그럴 때마다 성령의 법을 구체적으로 깨닫고 따름으로서 죄를 이겨낸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모르는 육신에서 발동되는 죄의 본질이 무엇이며 또 그 죄가 어떻게 자기를 묶는지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된 것입니다.
죄의 본질
성경은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죄로 타락했다고 선언합니다. 지금껏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 죄의 본질이라고 가르쳐져 왔는데, 이는 단순히 결과적인 분석이라 조금 더 깊이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 불순종한 행동이 죄의 본질이라면 종교적 훈련만으로 성화가 가능해진다는 뜻이 되지만, 바울부터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선악과는 하나님이 실존해야만 도덕적 종교적 명령으로서 성립됩니다. 그럴 리가 전혀 없지만 순전히 논리적으로 따져서 하나님이 없다고 가정하면 최초 부부가 선악과를 따서 나눠 먹은 일은 죄가 아니라 너무나 선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계셔야만 불순종의 죄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께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로 죄를 구분하려고, 즉 구원과 심판을 나누는 기준으로 선악과 금령을 제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당신의 품을 벗어나는 순간 인간에게 영적 죽음이 임하고 그로 인해서 온갖 현실적인 죄악을 범하게 되니까 절대로 당신과 등지지 말라는 사랑의 호소였습니다.
실제로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을 배제하자마자 가장 먼저 저절로 자기 자신부터 너무 추하다고 느껴졌습니다. 뭔가 자신에게 지울 수 없는 너무나 크고 더러운 흉터가 생긴 것 같아서, 그때까지 벌거벗었어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던 남편과 아내 사이임에도 서로에게 혹시 자기 그런 더러운 모습이 들킬까 두려워졌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자신이 완전히 없어졌고 틀림없이 그분에게 큰 벌을 받을 것 같아서 무서워졌습니다. 임시 조치로 나뭇잎으로 자기 앞을 가렸으나 아무 소용이 없어서 여호와를 피해 숨기 바빴습니다.
최초 인간 부부가 하나님의 품을 벗어나자 한순간도 기쁘지도 자유롭지도 않고 평안을 전혀 느끼지 못했고 반대로 그저 갈급하고 불안 염려로만 가득 찼습니다. 어쨌든 홀로서기를 시작했으니까 스스로 남은 인생을 혼자서 살아보려 했으나 전혀 대책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기들을 그렇게 만든 선악과나무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어서 깊은 숲속으로 파고들기만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미움과 두려움이 인 혼란한 감정 때문에 그분 쪽으로 돌아가 보려는 생각은 아예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 죽음과 방불한 절망 가운데 허우적거리는 아담과 이브에게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 주었습니다. 어떤 연유인지 이미 다 아시면서도 왜 이런 꼴이 되었느냐고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부끼리 상대에게 잘못을 돌리기 바빴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도적 능동적으로 끊어버리자 전혀 예상치도 못하게 가장 먼저 자신이 싫어졌고, 그 후로는 사람끼리 서로 미워하며 다투기 시작한 것입니다.
죄에 대한 성경의 최초 기록은 죄의 본질을 인간이 스스로 혼자 서기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과 분리가 된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자기가 자신과 세상의 주인이 되어서 자기를 절대자의 위치에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에서 완전히 지워버렸기에 하나님의 법을 사랑하는 마음도 아예 사라졌습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을 배제한 채 자기 판단과 뜻과 감정대로만 처리하려는 독립심이 죄입니다. 그런 원죄 하에 태어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찾지도 않는 자연인 상태가 바로 육신입니다. 자기가 높아지려는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나님 없이 자기 욕심과 감정대로 따르는 것이 육신의 생각입니다.
불신자들은 자기를 높이려는 인생 목적을 ‘자아를 찾아서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그럴싸하게 포장합니다. 자아 충족은 자아를 생성시킨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한 데도 끝까지 그분을 거부하기에 평생을 가도 성공하지 못합니다. 비유컨대 친부모를 잃어버린 고아는 평생 가슴 한 곁이 뻥 뚫려서 매워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과 분리된 모든 인간이 홀로서기를 앞다퉈서 맘껏 시도하니까 주변 사람과 필연적으로 마찰이 생겨서 시기 질투 다툼 분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모든 윤리적 죄도 하나님과 분리되었기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진리를 바울은 본문에서 예수 믿기 전에는 성령의 법이 없어서 육신의 생각만 좇게 만드는 죄의 법에 묶여 있다고 풀이한 것입니다.
성화의 본질
인간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인간을 더럽게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15:18-20)
이 말씀은 사실상 십계명을 다시 풀어서 설명해준 것입니다. 바라새인들이 율법을 잘 안다고 하면서 손을 씻지 않고 먹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자 주님은 거꾸로 너희야말로 십계명조차 알지 못한다고 꾸짖은 셈입니다. 십계명은 알다시피 첫 네 계명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를, 나머지 여섯 계명은 인간과의 수평적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주님이 마음에서 나온다고 열거한 것들은 십계명의 인간관계 계명을 어기는 죄들입니다.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 비방이 그러하며 악한 생각은 마지막 열 번째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마음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첫째에서 넷째까지의 십계명은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이며 특별히 첫째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절대로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지적하신 악한 행동의 죄를 유발하는 악한 마음은 하나님을 두지 않은 마음입니다.
이처럼 성경에 계시 된 하나님의 구원 진리는 선악과와 십계명과 상기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그 근본 맥락이 똑같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는 순간 모든 안전 평강 자유 기쁨 만족이 다 사라지고 거꾸로 불안, 묶임, 슬픔, 불행, 혼란, 분노 같은 온갖 악한 것들에 둘러싸여서 절망의 늪으로 침몰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마음속에 두지 않고 하나님과는 별개로 살아갈 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면 성화의 길도 당연히 하나님께 돌아가서 그분을 자기 마음의 중심에 자신의 진짜 주인으로 온전히 모시는 길뿐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반드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통과해야만 열립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께 그런 꾸중을 들은 바리새인들이나 주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도 하나님을 사랑했고 그분의 법을 따르려고 열심히 그분을 섬겼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에 의해서 유일하게 저주받은 자들이 그들이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해서 성화를 이룰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일반인들도 절대자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분의 마음에 들기를 소망하여 온갖 치성을 바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화는커녕 구원도 받지 못합니다.
예수 전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되 잘못된 방식으로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분에 대해서 제대로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따로 불러내어 세상 어떤 민족도 겪어보지 못한, 아니 알지도 못한 초자연적인 이적으로 보호 인도하셨습니다. 애굽에서 노예살이하던 그들을 열 번의 재앙과 홍해의 기적으로 건져내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율법을 수여하고 제사장 나라가 되기로 언약을 맺으며 이스라엘은 그 언약에 순종하기로 피의 맹세까지 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온전히 몰랐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실존하고 그분이 세상만사를 통치한다고 믿는 믿음만으로는 그분의 은혜를 받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이방인들도 큰 고난이 닥치면 아니 그전에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책임져 달라고 절대자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현재 하나님 앞에 자기들이 어떤 존재이고 어떤 상태에 처해있으며 그분이 자기들을 어떻게 대우 통치하시는지 모릅니다. 단순히 자기들 소원대로 현실적 형통과 출세만 보장해주길 바라고 그러지 않으면 하나님으로 모시지 않습니다. 특별히 그분이 자기들이 어떤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바에 관해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능력만 빌려서 자기 눈앞의 문제만 해결하려 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야단맞은 바리새인들과 예수 믿기 전의 바울의 종교적 개념도 사실상 이런 불신자들과 같았습니다. 자기들이 고안한 장로의 유전대로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구분해서 아예 교제도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 출발은 율법을 더욱 세밀하게 잘 지키려는 선한 뜻이었으나 갈수록 그것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구실로 삼았습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이 택한 민족이었기에 자기들 죄는 전혀 회개하지 않았고 아예 죄가 없어서 충분히 의롭다고 자신했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자기들은 어떻게든 율법을 더 열심히 준행하는 행위로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 그분에게서 받을 복만 더 챙기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자기들에게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선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아담의 원죄로 이미 죄의 덩어리가 되어 있고 진정한 선을 실천할 수 없는 비참하고 가난한 존재라는 인식은 꿈에도 하지 못했습니다. 원죄가 선조 아담의 죄로 후손이 연좌제 같은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며, 나아가 사람으로 악을 행하려는 생각만 들게 해서 악행을 일삼게 만드는 강제적인 힘도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처럼 인간이 스스로 고안한 규정, 법률, 관습, 문화, 전통, 철학, 도덕, 종교만으로 충분히 인간끼리 잘 살 수 있다는 완악한 고집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 고집이 바리새인의 율법 준행처럼 매우 고상한 방식으로 드러나므로 교묘하게 신자들도 속습니다. 지금도 교회 활동만 열심히 수행하면 반드시 그에 비례하는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엄격히 말해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는 관심이 없고 인간의 공적만으로, 설령 그것이 의롭고 경건해도, 그분을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라 교묘하게 위장된 원죄의 일종입니다.
성화를 이루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간이 반드시 인간답게 살아야만 하는 모습, 방식, 길에서 얼마나 많이 벗어났는지 온전히 보여 주셨습니다. 인간더러 몇 가지 의로운 선행이나 경건한 종교적 의식을 했다고 만족하거나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자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셨던 모습 그대로 당신을 자신의 전부로 모시는 자가 되길 바라신다고 가르치고, 실제로 그런 삶을 주님은 실현해 보였습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은 걱정하지 말라.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있으니, 하나님의 의와 그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서 대적하는 인간들을 가장 먼저 그분의 품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선악과 명령을 어기기 전의 에덴동산의 아담처럼 모든 것을 당신께서 책임져주며 아름답고도 진실하고 의로운 사랑의 관계로 이어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아무 말씀 없이 십자가에 오르셨으나 “아담아! 나를 피해 숲속에 숨어 있는 거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니 제발 내 품으로 돌아오라”라고 간절히 호소하신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달리신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성화도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정확히 알아야만 온전히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법을 따르면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는 근거로 예수 안에 있으면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고 전제한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간절히 기도한 내용을 보십시오.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6-19)
술 담배를 금해라, 거짓말 간음 도둑질 같은 악행을 하지 말라, 교회와 목사에 충성하고 예배에 빠지지 말라, 성도 간에 기도로 섬겨라, 열심히 전도하라 등의 권면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알고 그 사랑을 자신에게 충만히 채우라고만 했습니다. 십계명으로 따지면 인간관계 수평적 계명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수직적 계명에 먼저 전적으로 충성하라는 내용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가 행하는 성화는 인간관계와 사회생활에서 의로운 모습부터 드러내려 합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먼저 오로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분의 사랑을 온전히 알면 당신께서 성령을 통해서 인간관계 계명도 잘 지킬 수 있도록 인도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당대의 최고 의인이자 종교인이었던 바울도 예수 밖에 있을 때는 원죄에 묶여서 죽어 마땅한 천하의 죄인이었습니다. 바울의 경우에 비추면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사랑하는지는 정확히 모르고 관심도 없으면서 스스로 자기 필요에 따라서 자기 쪽에서 하나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것도 원죄의 일종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성령의 법이 내주하게 되자, 비로소 율법을 지킨 것으로 최고의 의인인 양 자부한 것이야말로 죄의 법에 묶인 사망이었다고 절감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예수 안에서 자기의 바뀐 신분과 특권을 제대로 알게 되자 율법의 문자적 요구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진정한 소원을 달성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자기의 의지적 노력으로 악행만 억제하려는 것이 성화의 본질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으로 죄의 본질인 육신의 생각을 좇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가 너무 좋고 사랑하기에 그분이 가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만이 자기 인생의 목표요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가난하고 연약하며 어리석은지 더 많이 더 깊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성화도 그만큼 진전될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지금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처럼 도덕과 종교 훈련으로 성화를 이루고 있다면 당장에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서 영의 생각을 좇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부터 하셔야 합니다.
(2023/7/23)
목사님 글은 업데이트 안되나요..?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