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12:1-4) 인생관이 바뀌어야 성화가 실현된다.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5)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히12:1-4)
신앙은 방법이 아니다.
바울은 사도가 된 후에도 수시로 죄의 법이 자기를 묶으려 해서 곤혹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의 생각을 죽이고 성령의 생각을 좇음으로써 생명과 평안의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제자로 추측되는 히브리서 저자도 본문에서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죄와 싸워서 이기라고 권합니다.(3,4절)
그렇다면 우리 자신에게 진지하게 질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죄의 유혹이 임할 때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여서 이겨낸 경험이 있습니까? 그 전에 예수를 생각하여 죄를 이겨낸다는 뜻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는 아십니까? 추측하건대 ‘아니오’라는 대답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바와도 연결되므로 많은 신자가 신앙생활에서 무심결에 범하는 가장 기초적인 잘못 하나를 먼저 지적하고자 합니다. 성화를 포함한 모든 신앙 이슈에서 쉽게 잘 해결할 수 있는 간단하고도 구체적인 방법부터 찾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기도를 능숙하게 하여 응답을 잘 받는 비결이나, 복음을 설득력 있게 전하여서 믿음의 결단으로 인도하는 효과적인 전도 방법 등을 알아보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고 싶은 심정은 충분히 이해되고 또 그렇게 노력해서 어느 정도 선한 결실이 나타나지만, 주의해야 할 측면도 있습니다. 특정한 방법을 따르면 반드시 특정한 결과가 나온다면 하나님은 그 방법에 묶이는 종이 되고, 사실상 그 방법이 그분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셈입니다. 간혹 그분을 찾는 목적이 오직 그 특정한 열매 하나뿐인 신자들도 꽤 있습니다. 그렇다고 결과야 어떠하던 과정만 의로우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자라면 하나님이 주시려고 예비한 열매를 반드시 맛봐야 하며, 그러려면 그분의 절대적 주권과 오묘한 섭리를 최대한으로 인정 수용 기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특정한 방법 하나를 고수하겠다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는 방식이 복잡하거나 많으면 싫으니까 알기 쉽게 하나로 줄여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신자답게 살아가야 할 현실 삶의 방식에 관해서 성경에 계시 된 진리에 비추어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려고 씨름하는 일이 매우 귀찮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베푸시려는 은혜는 무궁무진한데도 신자로서의 특권을 스스로 최대한 줄여버리고, 하나님의 권능도 최대한 축소해버리는 너무나 어리석은 짓입니다.
성경이 바울을 통해서 육신의 생각을 따르지 말고 영의 생각을 따르라고 했고, 히브리서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성화의 방안을 가르치긴 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쉽게 따를 수 있는 현실적 방법이라기보다는 영적인 원리로서 제시된 것입니다. 지금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이라는 시리즈로 설교하면서도 실제로 구체적이고도 현실적인 방법을 다룬 적이 없는 까닭입니다. 대신 성화에 대한 기본적인 원리를 다시 정리해보고 있는데 성화가 무엇인지부터 정확히 알아야 제대로 된 성화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그분의 너무나 광대하고도 참으로 오묘한 은혜의 울타리 안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분의 의로운 손이 신자의 존재와 삶과 일생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거룩하게 붙들어 주십니다. 모든 신앙적 이슈도 하나님과 지속적 장기적으로 교제 동행하면서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은혜를 찾아서 누리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모든 신자에게 통용되고 또 신자 개인에게도 모든 시기와 여건에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전자기기 작동법 같은 신앙의 매뉴얼은 없습니다. 하나님 그분이 신자 각자와 일대일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교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
본문이 제시하는 주님을 생각하며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는 성화의 방안도 영적인 원리라는 맥락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솔직히 자기도 모르게 죄를 짓기에 예수님을 생각해볼 겨를이 사실 없지 않습니까? 나아가 예수님을 생각하면 대체로 그분의 무한한 사랑과 조건 없는 용서부터 떠올라서 바울이 염려한 대로(롬6:1) 죄와 싸우는 힘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문맥에서 그 뜻을 찾아야 하는데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으려면”이라는 앞의 말씀과 연결해서 해석해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십자가에 피 흘리며 죽기까지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신자도 죄를 이기려면 주님처럼 피 흘리기까지 참으라는 뜻입니다. 물론 모든 신자가 순교해야 한다거나, 과부가 자기 허벅지를 피가 나도록 찔러 욕정을 억누르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선 피 흘리기까지라는 표현부터 성화가 장기적으로 참아내는 과정이지, 죄의 시험과 유혹이 닥치는 특정한 순간마다 자기 의지로 악을 물리치는 일회적인 노력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신자에겐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격려합니다.(1절) 바로 앞 11장에 열거한 구약의 선진을 말하는데, 끝까지 믿음으로 인내하며 생을 마감한 그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어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2절)라고, 예수님의 삶도 본받으라고 합니다. 요컨대 믿음으로 죄에 승리한 삶을 살았던 신앙 선배를 닮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는 성화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허다한 증인들은 이미 11장에서 다 가르쳤으니까, 본문은 예수님의 인생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합니다. 우선 주님을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이라고 했는데, 엄밀히 말해 조금 부족한 번역입니다. 믿음의 주(主)라고 하면 언뜻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믿음으로 경배해야 한다는 뜻으로 여겨집니다. 또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는 이라고 하니까 신자의 연약하거나 불완전한 믿음을 주님이 온전하게 해주신다고 해석됩니다.
그러나 본문의 원어와 문법적 구조에 따르면 주는 영어 성경이 번역한 대로 Lord나 Master가 아니고 pioneer(선구자) 혹은 author(저자)의 뜻입니다. 그리고 신자의 믿음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을 당신께서 완전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본’ 성경은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라고 번역했습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주인으로서 우리 믿음을 온전하게 해주시는 분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문맥상으로 신자는 예수님의 믿음을 닮아가는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피곤하고 낙심되어도 실망 좌절하지 않기 위해 주님의 온전한 믿음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구약 선진들의 믿음도 훌륭하여 당연히 본받아야 하나 그들은 완성된 믿음은 아니었고 주님은 100% 순전한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라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의 성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단 한 치의 하자도 없었으므로 당연히 믿음의 완성자입니다. 실제로 주님은 공사역 내내 성령님과 일체가 되어서 오직 성부 하나님이 시키는 일만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아니라 주님을 믿음의 창시자라고 설명했는데, 십자가 대속 죽음으로 인류의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택하신 죄인에게 내주해서 피 흘리기까지 참는 성화로 이끌어 주실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선진은 평생을 그리스도 구원의 약속에 대한 증인으로 살았으나, 주님은 그 약속을 실현해 새로운 믿음의 시대를 열어주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의 은혜 안에 거해야 하는 신약 신자의 믿음의 창시자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대로 구약 선진과 예수님의 믿음 둘 다 본받아야 하므로 그 내용은 하나만 빼고는 사실상 같습니다. 유일한 차이는 지난주에 알아본 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약 신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확신에 근거하여서 내주하신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르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롬8:1,2)
예수님 묵상과 성화
문제는 예수님처럼 피 흘리기까지 참아내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성화라면 우리가 지키기엔 너무 버거운 영적 원리가 아닙니까? 과연 우리 중에 누가 율법의 정신까지 완벽하게 이루고, 성부 하나님의 시킨 일만 하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죄의 본성 자체가 없으신 성자 하나님이셨지만, 죽을 때까지 죄의 법에 묶여야 하는 우리로선 무리하다 못해 아예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당연히 성경이 인간더러 하나님이 되라고 명할 리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참아낸 대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죄에 대한 시험과 유혹을 참아낸 것이 아닙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으로선 당신의 내면으로부터는 물론이고 외부에서 오는 죄의 유혹과 피 흘리도록 싸울 일은 전혀 적용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2절b) 분입니다. 주님이 참으신 것은 십자가 처형의 그 엄청난 고통입니다. 앞에 있는 기쁨 때문에 참을 수 있었는데 비록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어야 했으나 부활하여서 하나님 보좌 우편의 성자 하나님으로 돌아갈 그 기쁨입니다.
주님이 단순히 부활만 바라보고 그 고통을 참으신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보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과 함께 운명하셨듯이, 이제 인류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것을 생각하니까 너무나 기뻤던 것입니다. 죄에 찌들어 아무 소망 없이 죽음만 기다리고 있는 인류에게 십자가는 최고의 기쁜 소식이 될 것입니다. 성령님이 강림하여서 당신의 기뻐하시는 택한 백성들을 구원으로 이끌고 그들에게 내주해서 거룩한 사람으로 자라도록 보호 인도해줄 그 기쁜 소망 때문에 참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부끄러움도 전혀 개의치 아니했다고 합니다. 십자가 처형은 원래 완전히 발가벗긴 채 달리는 너무나 수치스러운 죽음입니다. 그래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는 아무리 흉악범이라도 절대 십자가 처형은 하지 않습니다. 거기다 율법은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선언합니다.(신21:23) 실제로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자가 메시아일 수 없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사실은 유대 대제사장을 비롯한 관원들이 그런 효과를 노리고 십자가로만 처형하게 되어 있는 로마 반역죄로 몰아갔습니다. 빌라도 총독도 인정할 수 없는 날조된 누명이었으나 대제사장은 오히려 총독을 로마 황제에게 고소하겠다고 압박했습니다. 거기다 주님이 다윗 왕국의 영광을 재현해달라는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서 실망했고 또 죄에서 회개하라고만 선포하는 데에 분노한 대중들을 선동하여서 기어이 나무에 달리게 했습니다.
예수님으로선 메시아로서, 아니 랍비로서, 아니 성인 남성으로서도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수치스러운 죽음을 감내했습니다. 사랑하는 동족들로부터 나무에 달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으니 메시아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거룩한 성전을 헐겠다고 하는 천하의 이단 교주라는 비방만 받았습니다. 그런 수치와 모멸에 비하면 십자가 처형의 육체적 고통은 사실 별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쁨으로 그 일을 감당하셨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모든 되어져 가는 상황을 미리 다 아시고, 더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되도록 모든 상황과 사건을 유도하셔서 스스로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으로서 죄인을 구원하는 일이 가장 급선무이고 가장 기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당신께선 죄가 없으시나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기에 범사에 우리와 똑같은 감정적 반응은 생겼으므로 너무나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웠을 것입니다. 십자가 처형이 어떤 줄 잘 아시니까 그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로 변할 만큼 간절하고도 애통한 기도를 드려야만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이 당신을 거역한 그런 일을 참으신 까닭은 바로 그 죄인들이 심판이 아니라 구원해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가 당신을 체포하려고 군병과 관원들을 끌고 겟세마네 동산을 덮치자 베드로가 앞서서 항거했습니다. 주님은 당장이라도 천군 천사를 동원해 다 멸할 수 있으나 그러면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없다고 오히려 그를 야단쳤습니다. 현실적인 다윗 왕국의 회복으로는 인간의 문제가 절대로 해결되지 않으므로, 눈에 보이지 않아도 당신을 머리로 모시고 참사랑으로 섬기는 영적 공동체를 세우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삼 년을 동고동락하면서 천국 복음을 가르쳤으나 당신의 제자들마저 그때까지 하나님의 이 구원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보내주셔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정확히 가르쳐 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지상에서의 구원 사역을 성령 하나님께 일임했기에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고 십자가에 기꺼이 올라가신 것입니다.
참아낼 대상은?
히브리서는 유대교와 로마 당국의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히브리인 신자들을 위로 격려하려는 목적으로 저작되었습니다. 이 서신을 읽을 유대인 신자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할 대상도 일차적으로 죄의 유혹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흔들거나 빼앗으려는 외부로부터의 이런저런 훼방과 핍박입니다.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믿으면 성전에서 제사드릴 수 없고 하나님의 택한 족속으로서 신분과 권리를 다 빼앗아서 유대 사회에서 추방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받은 할례 없는 이방인과 똑같이 취급하여서 교제는 물론 아예 상종조차 하지 않겠다고 선포했습니다. 신자의 후손들에게도 그럴 것이며 자기들 선조와 함께 묻힐 수도 없다고 정죄했습니다. 유대인 신자로선 자기보다도 가족의 앞날을 생각하니 참으로 난감해졌습니다.
로마의 네로 황제도 대화재로 흉흉해진 민심을 누그러뜨리려는 정치적 목적 때문에 신자들을 체포하는 대로 맹수의 먹이로 던져주었습니다. 심지어 산채로 가로등처럼 묶이어서 로마 시민들의 잔치에 횃불로 밝혀주는 너무나 수치스럽고도 고통스러운 죽음을 겪어야 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스승인 바울도,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그런 와중에 순교를 당했습니다. 유대인 신자로선 믿음으로 살아가려니 유대와 로마 당국의 이중적인 현실적 고통을 넘어서 매일 죽음과 더불어 살아야 하므로 너무 힘들고 수시로 낙심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권합니다.(3절a) 윤리적 죄에 쓰러지는 것과는 차원이 전혀 달랐습니다. 이 서신의 당시 독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당장 쓰러집니다. 오늘날의 독자는 외부의 핍박을 믿음으로 견디어 나가는 인생길을 오래 걷다 보면 때로 지칠 때가 있으나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앞장서서 걸어가시는 예수님에 대해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가는 일을 고난의 길이라고 하지 않고 죄와 싸우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 신자를 핍박하는 이들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핍박에 져서 믿음을 버리게 되면 하나님께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핍박에 쓰러지는 이유가 하나님 대신 세상의 재물과 권세를 다시 자기 주인으로 모시는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성경은 성화에 대해서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는 것”(1절b)이라고 정의를 내린 셈입니다. 신자라면 자기 앞에 반드시 경주해야만 할 씨름이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기뻐하지는 못한다 해도 인내로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모든 신자가 예수 믿을 때 그런 경주의 스타트라인에 이미 섰던 적이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히 역사하여 선물로 받은 십자가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서 주님이 가신 길을 기꺼이 감사하며 따라가겠다고 결단 헌신했습니다.
예수님에겐 분명한 사역의 목표가 있었기에 절대로 중도에 수정 후퇴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이 지금 당하는 고통과 수치보다 훨씬 더 고귀하고 좋았습니다. 신자도 주님과 같은 그런 인생을 살아가야 하나, 그 일이 버거우면 최소한 구약 선진처럼은 살아가야 합니다. 또다시 죄를 안 짓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쉽게 판단해선 안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본받으라는 믿음의 증인들, 예컨대 노아 아브라함 야곱 모세의 삶이 윤리적으로 하자 없이 의로웠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본문은 그들의 삶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3-16)
약속을 멀리서 보고 환영했고 오직 그 본향을 찾는 삶을 살았고 결국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거룩한 성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십자가 처형만 빼고는 사실상 예수님의 삶을 설명한(2,3절) 내용과 똑같습니다. 앞에 있는 기쁨 때문에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감에 온갖 고통을 참았고 수치를 당해도 개의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나온 바 본향, 즉 하나님을 알기 전에 살았던 삶의 모습으로, 히브리서의 독자로 치면 유대교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어도 절대 흔들리지 않고 하늘의 본향을 향해서만 뚜벅뚜벅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고 합니다. 오늘날 신자가 그들처럼 살아가는 것이 성화라는 것입니다.
성화의 진짜 의미
구약 선진처럼 사는 일도 절대 쉽지는 않습니다. 예수 믿은 후에도 우리의 본성은 죄의 법에 묶여서 그 도덕성과 영성은 여전히 너무나 연약한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몰라도 동일한 성정을 지닌 구약의 선진들의 삶은 얼마든지 따라갈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성령으로 거듭날 때 주님을 따라가려고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을 이미 완전히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부인 거역 대적했기에 이 땅은 물질이 전부이므로 자기 힘과 노력으로 물질적으로 최고의 풍요를 누리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지난주 한국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남자 MC 네 명 모두가 버킷리스트의 첫째가 돈이 부족해 삶이 궁핍해지지 않는 것인데 그러려면 자기 돈이 통장에 얼마 있는지 모르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습니다. 저도 불신자 시절에는 그들처럼 재물을 주인으로 모시고 돈에 울고 웃던 돈의 노예로 살았습니다.
어떤 극악한 죄인도 성령의 은혜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먼저 그 죄인을 찾아와 인격적으로 만나주시는 체험을 하게 되면 인생의 목표와 방향이 정반대로 바뀝니다. 이 땅이 절대로 물질이 전부가 아니며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셨고, 그분이 영원토록 우주 만물과 세상만사를 거룩하게 통치하고 계시고, 특별히 당신의 택하신 자들의 인생을 거룩하게 주관하셔서 천국에서 영생의 면류관을 씌워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앞에 있는 기쁨인 하늘의 본향을 향해서 걸어가기로 결단 실행하며, 그 길을 막으려는 현실적인 고통과 수치에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백 퍼센트 완벽하지는 않아도 그렇게 살아가는 방향은 바뀌지 않습니다. 나온바 본향인 재물을 주인으로 모시는 인본주의적인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의 삶으로 절대 되돌아가지 않게 됩니다.
전쟁 중에는 돌아가는 다리를 폭파해버리거나 퇴로에 헌병을 세워서 후퇴하는 아군을 사살합니다. 오직 앞으로 진군만 해서 승리를 쟁취하려는 뜻입니다.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에 군인이라는 신분 때문에 본의와 다르게 억지 죽음을 겪습니다. 신자는 예수 믿을 때 주저하지 않고 기꺼이 인생의 돌아가는 다리를 스스로 폭파했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여 옛사람은 죽었고 새 사람으로 거듭 태어났습니다.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완전히 유턴한 것이 신자입니다.
결국 성화의 본질은 간단합니다. 예수 믿기 전의 세상에서 살았던 삶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평생을 두고 피 흘리며 싸워야 할 싸움입니다. 계속 강조하지만 예수 믿기 전에는 방탕하게 살았고 예수 믿은 후에는 의롭게 살아야 하므로 이전의 방탕한 삶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자가 되고 나면 아무래도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일반인들도 도둑질, 간음, 살인할 생각에 잠겨서 쉽게 행동으로 옮기지도 않습니다.
본문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라”(1절)고 권합니다. 왜 외부로부터 오는 핍박과 수치를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라고 표현했습니까? 신자의 신분은 하나님의 자녀로 그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열매도 영광스러운 부활 영생이며 영원토록 거할 곳은 하늘의 마련된 아름다운 장막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이르기 전까지 이 땅에선 세상 안에서 현실적으로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히브리인 신자도 유대 사회 내에서 그들의 문화 관습 생활 방식에 따라서 열심히 돈을 벌며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유대교 지도자들이 유대 사회에서 추방해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모든 불이익을 줄 것이며, 나아가 유대인이라는 신분의 정체성마저 말살하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당시 네로 황제는 신자는 체포해서 바로 죽음의 형벌에 처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잠시 포기만 하면 고통과 수치에서 해방되고 현실적으로 다시 풍요해집니다. 그런 현실의 삶은 무거운 짐이었고 잠시 믿음을 버리는 것은 너무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죄였던 것입니다.
종교의 자유가 허용된 오늘날의 세상에선 신자가 하나님을 부인하면서 세상에 타협하여 잠시 눈을 감고 불법 부정에 가담하면 돈을 쉽게 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가 거부되고 절대자는 아예 없다는 세상 풍조 앞에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하면 고리타분한 골통 광신자라는 조롱을 당합니다. 그럼에도 그런 현실적 유혹과 불신자들의 조롱을 이미 바뀌어진 내 인생의 목표와 방향에 따라서 즉,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에 따라서 참아내는 것이 성화입니다.
지금 진지하게 자신을 되돌아보십시오. 예수 믿을 때 주님의 삶을 따르기로 진심으로 결단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성화는 시작된 것입니다. 성화가 신구약 성경의 위인들만 이룰 수 있는 막중한 과업이 결코 아닙니다. 성화에 대한 방법을 찾지 말고 성화에 대한 개념을 다시 정확히 정리하셔야 합니다. 한마디로 현실 삶의 무게 때문에 피곤해서 지치는 것을 극복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신자에게 원하시는 것은 당신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은혜 안에 거하는 것 하나뿐입니다. 계속해서 넘어져도 그 안에 거하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평생을 두고 주님 따라가는 인생길은 좁고 협착하며 머리 둘 곳도 마땅히 없습니다. 지치고 낙심하기 쉬운 여정이라 끝까지 참는 인내가 요구되는데 버틸 수 있는 근거와 힘은 앞에 있는 하늘나라의 기쁨입니다. 바꿔 말해 성화를 이루는 방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완전히 바뀐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성화의 출발이자 핵심입니다. 한두 번의 윤리적 종교적 잘못으로 성화에 실패했다고 절대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러는 것 자체가 이전의 종교관으로 돌아가는 것이라서 오히려 성화에서 가장 큰 실패입니다. 대신에 때로 세상과 타협해서 넘어져도 앞에 가신 주님만 바라보고 계속 다시 일어서는 것이 성화에서 가장 큰 성공입니다.
(7/30/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