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3:13) 마지막 환난을 끝까지 견디려면?
새롭게 읽은 신약성경 (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막13:13)
육체적 환난은 약과다.
성경은 인류 역사가 반복 순환하거나 영원히 지속된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관하는 시작과 끝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기독교 신자는 그래서 종말의 징조, 방식, 시기에 관심이 많은데 최근 자연 재앙과 전쟁이 빈번해져 지구 멸망의 두려움이 커지니까 더욱 그러합니다.
먼저 요한계시록에서 그 힌트를 얻으려고 해보지만, 상징과 묵시가 많고 반복되는 패턴 때문에 무슨 뜻인지 종잡을 수 없습니다. 복음서의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살펴봐도 여전히 체계적인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공통된 한 가지 결론은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신자들에게 극심한 핍박이 있을 것이므로 “끝까지 참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로마 시대에 순교한 초대 신자들의 모습에 자신을 대입시키게 됩니다. 나무에 묶여서 산채로 불에 타서 죽거나 콜로세움에서 맹수들과 맨몸으로 싸우다 물려 죽는 끔찍한 모습이 떠오릅니다. 아무리 따져봐도 자기에게 그런 핍박을 견뎌낼 만한 믿음과 담력이 없으니까 슬슬 불안해집니다. 나를 위해 목숨을 내어주신 예수님을 배반하는 죄책감은 둘째 치고 구원에서 떨어지면 어떡하나 염려가 앞섭니다.
결국 그런 엄청난 신체적 고통만 없다면 어떤 핍박도 견딜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그러나 주님이 끝까지 참으라는 당부가 그렇게 간단한 내용이 아닙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의미를 지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도 신자들은 세상의 큰 핍박 가운데 있으니까 넘어지지 말고 끝까지 견뎌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말의 때는 성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32절) 주님이 승천하신 이후로는 아무 때라도, 즉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오실 수 있습니다. 만약 오늘 주님이 오신다면 어제까지 세상에서 신자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큰 핍박이 가해졌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종교의 자유를 누리는 나라에서도 신자에게 육체적 고통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핍박들이 가해지고 있으며 그것들 또한 견디기 아주 힘들다는 뜻이 됩니다,
바꿔 말해 성경이 잘못 가르칠 리는 없으므로 신자가 현재 그런 박해를 실제로 받고 있지 않다면 자신의 신자 됨에 문제가 있는 셈입니다. 본문의 경고가 심각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씀드린 까닭입니다. 따라서 현재 가해지는 핍박들이 무엇인지 살펴본 후에 본인의 영적 상황에 비춰봐야 합니다. 혹시라도 아주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모르므로 지체하지 말고 곧바로 고쳐야, 즉 핍박을 찾아가서 받아야 할 것입니다.
세 가지 기본 태도
본문은 간단한 문장이지만 종말을 견뎌내는 신자의 자세나 방식에 세 가지가 필수적이라고 가르칩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받는 핍박이어야 합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최소한 다른 이가 보기에 확연히 알 수 있도록 신자답게 거룩하게 살기에 받는 핍박입니다. 단순히 주일에 신자끼리만 모여서 조용히 예배보고 헤어지는 차원의 신앙이 아닙니다.
둘째는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아야 합니다. 히브리 어법에서 ‘모든’이라는 표현이 대체로 전부(all)보다는 많다(many)는 뜻에 가깝습니다. 어쨌든 신자를 싫어하는 사람이 대다수여야 하고 아주 확실하게 미움을 받는 상태입니다. 역으로 따져서 신자는 세상 사람 모두가 예사로 여기는 불의와 불법에 전혀 동참하지 말아야 합니다. 쉬운 예로 한국 심야에 한적한 교차로에서 빨간 신호를 정확히 지킴으로써 뒤차에서 쌍욕을 들어야만 합니다.
셋째는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끝까지’라는 말 자체가 쉽게 견뎌낼 수 없는 외부의 훼방과 박해가 단계별로 중첩된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도 여러 환난을 반복 계시하는 패턴이지 않습니까? 극심한 육체적인 고통과는 별개로 자칫 넘어가기 더 쉬운 다른 시험 유혹 훼방이 많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신자는 바울의 권면대로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주목할 사항은 흔히 종말의 가장 확실한 징조라고 여기는 지진 전쟁 기근 같은 재앙을 주님은 그 시작일 뿐이라고 했습니다.(8절) 그런 재앙들은 비록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지만 신자 개인적으로, 그것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는 핍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악으로 사회와 자연을 왜곡 파괴한 결과이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 원망해서도 안 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신자는 육체적 고통과 다르며 더 괴로운 온갖 훼방과 핍박을 주님의 재림 때까지 주위 모든 사람으로부터 계속해서 직간접으로 받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주님은 앞에서 이미 열거해 놓았습니다.
거짓 메시아를 주의하라.
주님은 첫째로 자신이 재림 예수라고 칭하는 거짓 메시아를 조심하라고 합니다.(6절) 정통 교회에 다닌다고 이를 예사로 여겨선 안 됩니다. 사기꾼은 인간의 모든 약점을 파고들 뿐 아니라 거꾸로 의로운 일을 한다는 인식이 들도록 교묘한 덫을 놓습니다. 거짓 예수는 겉으로 가짜라는 냄새가 전혀 없이 거의 진짜로 나타나는 법입니다. 아무리 지식 지혜 경험이 많아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올무에 걸리게 됩니다.
한국 이단 교주들이 초기에 많은 기적을 일으켜서 크게 부흥했습니다. 마지막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도 신자를 미혹시켜서 배교(背敎)하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성경은 예언합니다.(살후2:3) 세상 사람들은 다 추종하고 교회에 성실히 출석하던 교인 중에도 다수가 거짓에 넘어가게 됩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당대의 주도적인 흐름에 속해야만 가장 안전하다고 여깁니다. 다수가 따르면 일단 진짜 같고 소수는 어리석게 보입니다. 이차 세계 대전 때 독일 교회 대다수가 나치 제국을 열렬히 옹호했듯이 말입니다. 소수를 경멸하며 불쌍하게 보는 절대다수의 시선을 무시하고 끝까지 자기 소신을 지킬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성경의 정통 교리를 잘 알면서도 지금도 이단의 미혹에 넘어가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기존의 교회, 목회자, 성도들의 불의와 불법에 너무 실망했기 때문인데 모든 이단이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파고듭니다. 도덕적인 삶을 실행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하거나 취소된다고, 평소에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던 그 부분에 대하여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모든 종교적 행사에 경건함, 엄숙함, 신령함으로 치장하여 인위적인 감동과 흥분을 조장합니다. 무엇보다 교인들끼리 서로 돕고 섬기며 단합하는 일에 주력합니다. 결국 이단이 훨씬 더 교회답게 여겨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내용에서도 기존 교회와 특별히 다른 점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단(異端)이라는 우리말의 뜻도 끝부분만 살짝 다르다는 것인데, 아주 교묘하게 말장난을 치는 것입니다. 탈도 많고, 말도 많은 기존 교회에 크게 실망 좌절하고 있던 참이라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초신자 시절에 한 이단 교인을 전도하려 했는데 첫째 반응이 외부에서 이단이라고 말하고 어떤 점에서 다른지 자기도 이미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더 나쁘므로 지금 교회에서 빠져나갈 생각이 전혀 없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현재 많은 정통 교회 내에 기복주의는 물론 온갖 불법과 불의가 판치고 있으니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재림 예수라는 뻔한 거짓말에 아무도 신경 안 쓸 것 같지만 주님은 종말의 징조 가운데 제일 먼저(5.6절) 또 유일하게 마지막에 한 번 더 언급할 만큼(21,22절) 가장 강조했습니다. 신자가 가장 잘 넘어가는 유혹이라는 뜻이며, 육체적 고통이 전혀 따르지 않는데도 주님은 이단에 미혹되는 일을 끝까지 참아야 할 첫째 과제로 꼽은 것입니다. 복음서와 요한계시록에서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이 말하는 바를 들을지어다”라고 계속 강조하신 까닭입니다.
고소당해라.
둘째로 참을 일은 사람들로부터 재판에 넘겨지고 매질을 당하는 것입니다.(9,11절) 아무 잘못이 없어도 예수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재판받고 형벌이 부과됩니다. 그 사회가 기독교 신앙 자체를, 아니면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구체적인 일들을 불법으로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자유가 엄연히 보장된 현대 미국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목사가 공적 예배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설교하면 차별금지법에 따라 고소당할 수 있습니다. 동성애자 커플의 결혼 케이크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거절한 빵집 주인이 고소당해서 오랫동안 고초를 겪었습니다. 최근에는 낙태 요청을 거절하는 의사는 주에 따라서 면허를 취소당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졌기에 스스로 지키고 싶은 자신만의 자존심과 인격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육체적인 고통에 비해서 자신이 꼭 지키고 싶은 삶의 의미와 가치가 훼손되는 일이 더 참기 어렵습니다.
신자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윤리와 진리를 배워서 실천하며, 무엇보다 하나님이 기뻐하고 소망하는 일을 자신도 정말로 기뻐하고 소망하게 된 자입니다. 그분이 자기를 통해서 이 땅에 실현하려는 그분의 가치와 의미가 침해당하면 자연히 가장 괴로워져야만 신자입니다. 목사는 그래서 성도들에 가르치고자 하는 하나님의 법이 절대적 진리이므로 현행법에 위배 되어도 가감 없이 과감하게 선포하며 실천해야 합니다. 신자도 성경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현실에서 경제적 정신적으로 큰 손해를 보는 한이 있어도 기꺼이 감내해야 합니다.
주님은 주변 사람의 고소 가운데 가족도 포함된다고 경고합니다.(12절)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만큼 아픈 일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고통 중에 기도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조금 있으면 사랑하는 제자들로부터 배신당할 것이며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될 일이 너무 가슴 아팠기 때문입니다.
틀림없이 핍박하는 쪽에선 고소하면 큰 상금을 주거나 지난 잘못을 묻지 않겠다고 할 것입니다. 실제로 네로 핍박 때에 교인들이 서로 밀고 했고 북한에선 모든 사람을 점조직으로 묶고서 현실적 보상으로 유혹해 서로 배반하게끔 만듭니다. 스승의 이 경고를 들었음에도 며칠도 되지 않아서 가룟 유다는 스승을 고발했고 나머지 제자들은 자기들 목숨이 위험해지자 곧바로 자기 믿음을 부인했습니다. 신자를 포함해 모든 인간의 체질이 연약한 진토 같으며 자기만 위하고 높이려는 죄의 본성이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미움받으라.
마지막 셋째는 이미 살펴본 대로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일을 참아야 합니다.(13절) 바로 이어지는 주님의 가르침에 멸망의 가증한 물건이 거룩한 성전에 서면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라고 했습니다.(14절) 역사적으로 주후 70년에 디도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가 말을 탄 채로 성전에 들어갔고 성경이 부정한 동물로 구분한 독수리의 휘장을 내걸은 일로 문자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이를 종말, 아니 지금의 종말 같은 상황에 대입하면 최악의 불법이 최상의 정의를 대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람이 비정상이 되었고 신자만 정상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라고 선포했습니다. 신약 신자는 자기처럼 굳이 전도 선교하지 않고 단지 신자답게 살기만 해도 세상으로부터 박해받는다는 것입니다.
바울 당시 로마제국 시민들은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우상숭배의 방탕한 관습과 문화에 완전히 절어있었습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대로 온갖 쾌락과 죄악을 즐기는 그들로선 기독교 신자들이 성경 진리대로 거룩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 대부분이 괜히 잘난 척하는 것 같아 아무 이유 없이 미워졌던 것입니다. 일부는 양심에 약간의 찔림도 받았겠지만,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말은 사실 올바르게 착하게 살라는 충고입니다. 그래서 아주 어려서 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청개구리 기질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현재는 신자를 미워하는 정도가 더 커지고 그 차원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모든 인간이 그대로 따라야 할 절대적 진리 자체가 없는 반면에, 인간은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할 개인적인 절대적 자유가 있다고 주장 실현하는 포스트 모던 시대입니다. 따라서 개인이 누리는 자유를 누구도 정죄 제한할 수 없고 종교적 도덕적 의견으로 충고해서도 절대 안 된다고 믿습니다. 이제 어른들도 청개구리 기질이 완전히 굳어져서 백약이 무효가 된 시대입니다.
이런 상황에 기독교는 예수 십자가만이 구원의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하고, 자기들 판단에 동성애나 낙태 같은 개인의 자유에 맡겨진 일마저 죄라고 판단합니다. 기독교 진리가 세상 사람 보기에는 완전히 비진리가 된 것을 넘어서 인간 사회의 분열과 증오를 조장하는 가장 큰 해악으로 간주합니다. 이미 신자는 정말로 신자답게 살면 모든 이의 미움을 사고 있는 셈입니다.
끝까지 참아야 할 이유
간략하게 살펴봤지만 지금 예수님이 경고하신 마지막 때의 현상들이 실제로, 그것도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기독교가 가장 왕성한 대표적인 나라인 한국과 미국에서 가장 기독교가 번성하니까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대로 이런 일들이 끝까지 참아내어야 할 마지막 때의 박해라고 여겨지지 않으면 그 믿음을 다시 점검해 봐야 합니다.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 끝까지 순교할 수 있을까만 염려해선 아주 잘못된 종말 신앙입니다. 그리고 단지 참아내어 구원에서 제외되지 말아야겠다는 동기뿐이라면 그 또한 매우 잘못된 신앙입니다. 주님이 인내력을 테스트해서 구원하지는 않습니다. 끝까지 참으면 그 상태로 당연히 천국에 입성하게 되며 또 제대로 믿는 신자라면 참을 수 있습니다.
물론 육체적인 극심한 고통이 염려스럽긴 하지만 예수님은 고발당해 재판에 넘겨져도 두려워 말고 성령이 심어주는 말만 하라고 명했습니다.(11절) 스데반의 죽기 직전 설교가 바로 그랬고, 특별히 주님이 천국에서 영접하는 영광스러운 광경도 보여주었습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그를 완전히 둘러싸서 순교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산 채로 화형당하고 맹수에 찢겨 죽을 때도 마찬가지로 주님이 함께해 주었기에 세상에서 누리지 못하는 기쁨과 평안으로 크게 감사하며 죽어갔을 것입니다. 실제로 로마 핍박 때 찬양을 부르며 순교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로마 시민이 주님을 따르고 믿었습니다.
저는 부끄럽게도 심약하고 아주 겁이 많은데 저를 더 잘 아시는 주님이 아마도 순교 당할 기회나 여건으로 인도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다 막상 대환난이 닥치면 제 중심은 통곡하면서 입술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을까 솔직히 두렵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신 전부를 내어주실 때 저라는 인간 전부도 용납하여 당신의 자녀로 받아주셨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제가 미래에 는 죄도 모두 용서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너무 무서워서 겉으로만 잠시 믿음이 없는 척했다고 그 관계를 끊을 리는 없습니다.
신자는 종말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합니다. 끝까지 참아서 구원에서 빠지지 말아야지가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자니까 당연히 끝까지 참아야 하고 또 참을 수 있는 이유와 근거가 차고 넘쳐야 합니다. 한마디로 세상을 참아내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어야 합니다.
끝까지 참는다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재림의 시기를 전혀 모르기에 엄청 괴롭긴 하겠지만 절대로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믿음이 인내력 키우는 씨름이 아닙니다. 모든 세상이 주변 가족마저 거짓에 넘어가도 자기는 절대로 진리를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외눈박이 원숭이가 대다수고 자기 혼자만 두눈박이로 남아도 일부러 애꾸가 될 수는 절대 없는 법입니다.
작금 세상 사람들은 자아실현이라는 그럴싸한 핑계를 대고 물질적, 말초적, 감정적 충족을 채우려는 한 가지 목적으로만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수단인 돈을 벌기에 급급합니다. 누구나 조기 은퇴가 꿈이며 그 후에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맛집을 찾아가 즐기려 합니다. 쾌락을 추구하다 못해 비현실적 환상에까지 빠져서 더 큰 쾌락을 얻으려고, 그 반대로 그렇게 하지 못해서 뒤처지는 괴로움을 잊으려고 일상적으로 마약 같은 약물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세속의 재미와 기쁨이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사람은 서로 사랑으로 섬기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인간 사회의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의 원천이자 공급자는 하나님 한 분입니다. 그분만 믿고 의지해야만 참된 인간으로서 참된 사랑을 실현할 수 있으므로 그 인생을 참된 가치와 의미 있게 꾸려갈 수 있습니다.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거역 대적한 상태에선 절대로 자아 충족이 되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원부터 모르기에 사실은 자신의 자아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물질에서 우연히 발전하여 짐승보다 조금 우월하다는 정체성과 또 물질에서 시작되었기에 이 땅이 전부라는 세계관만 남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현실 재미를 추구해도 항상 갈급하고 허망할 따름입니다. 물질이 물질로서만 행동하는데 무슨 만족이 생기겠습니까? 인생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하니까 당장 감각적인 만족이라도 느끼려 발버둥 치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의 품 안으로 되돌아와서 거하는 자입니다. 아무 의미와 가치 없는 문화 사조 풍조 관습 등에 붙잡혀 있는 세상 사람들의 영혼을 보면 자연히 불쌍히 여기게 됩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만들어졌기에 그분이 소중히 여기는 피조물이라 십자가 복음의 참 생명으로 회복시켜야 할 대상입니다. 신자가 그들 앞에 진정으로 가치 있고 아름답고 생명력이 넘치는 인생을 살아 보이지 못하면 세상은 완전히 사탄의 수중에 넘어가 버립니다. 그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겠지만 신자로선 하나님의 뜻에 충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신자는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을 큰 열정을 갖고 소망해야 합니다. 죽음이 인생의 끝이 절대 아니고 오히려 더 완전하고 아름답고 충만한 새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자만이 끝까지 핍박을 견딜 수 있습니다. 이 땅의 상황이 절망적으로 변해갈수록 앞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이 충만하게 완전해질 그곳에 대해서 더 큰 기쁨과 설렘으로 기대하지 않으면 현재의 핍박을 온전히 견뎌내기 힘듭니다.
신자끼리만 천국 간다.
그런데 간혹 하나님이 구원으로 택한 자는 어차피 성령이 역사하여서 구원할 텐데 굳이 전도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신자가 있습니다. 누가 구원을 받을지 모르니까 더더욱 무작위로 전도해야 합니다. 자기 자식을 그런 식으로 안심하고 가만히 놓아두는 바보 같은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우리와 달리 높고도 큽니다. 도저히 구원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는 죄인들이 오히려 구원으로 택함을 받았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회 소외된 불쌍한 자들을 먼저 찾아갔습니다. 성령의 구원역사와는 별개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복음을 듣지 않고는 알 수 없고 알지 못하면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자신이 성령으로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서 날마다 예수님과 교제 동행하는 새로운 삶이 너무나 좋다면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자기 자식은 더더욱 그런 삶을 어서 빨리 살게 해주고 싶을 것입니다. 아무리 구원이 하나님이 당신의 때와 방식에 따라 주관해도, 십자가가 정말로 가치와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체험적으로 확신하면 세상의 어떤 반박 멸시 핍박을 무릅쓰고도 전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기독교도 세상 여러 종교 중의 하나로서 자기만 위로하는 것으로 그치고 또 자식을 포함해 주변 사람이야 어찌 되든 자기 혼자 천국 가려는 심보입니다.
신자가 사탄에 미혹된 영혼이 너무 안타깝고 불쌍히 여겨지면 복음 전하는 일도 아주 기쁘고 보람찰 수 있습니다. 또 그래야만 마지막 환난이 언제 닥치든 상관하지 않고 계속 그럴 수 있고 최소한 그 고난을 참아낼 수 있습니다. 요컨대 예수 안에 사는 것만이 인생의 첫째 목적이고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어야만 합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품을 떠난 아담과 이브가 그랬듯이, 예수 믿고도 잠시라도 주님을 등지거나 잊으면 삶의 안전 평안 기쁨은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에 수치 눌림 불안이 임해야 신자입니다.
최근 한국에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너무 실망해서 교회 출석을 중지한 가나안(안 나간다를 거꾸로 표현) 성도가 많이 생겼습니다. 집에서 혼자서 조용히 신앙 생활하면 보기 싫은 꼴을 안 보니까 평안해지고 또 세상으로부터의 온갖 훼방도 없을 것입니다. 성령으로 온전히 거듭나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모시고 있다면 구원이 취소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작금의 일부 한국교회들이 비성경적인 불법과 부패를 자행하므로 너무 부끄러워서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전한 목사님이 이름도 빛도 없이 순전하게 목회하는 교회는 어딘가에는 있으므로 가나안은 일시적이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은 남들보다 도덕적 영적으로 우월한 신자라는 교만에 빠져서 다른 성도들과 목회자들을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열등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봐야 시간 낭비라고 여기는 것인데 예수님 당대에 스스로 의롭고 경건하다고 자랑했던 바리새인의 잘못을 따라가는 셈입니다.
단순히 용서만 받았을 뿐 여전히 죄의 본성이 펄펄 살아있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이며 그 안에 목사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모든 이가 결점투성이므로 필연적으로 상처를 주고받고 잘못도 범할 수밖에 없지만 주님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 사랑하며 함께 자라갈 수 있으므로 세상 공동체와는 전혀 다릅니다. 모퉁이 돌인 예수 안에서 연결된 서로를 보며 자기부터 깎여져서 함께 지어져 가는 곳이 교회입니다.(엡2:20-22)
계속 가나안 성도로 머물면 예수님이 함께 모여서 땅에서 매고 풀라는 교회를 설립하신 목적과(마16:19,19) 또 그래서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 제자로 삼으라는 지상명령(마28:18-20) 둘 다를 위반하는 셈입니다. 성경만 소지해도 총살당하는 북한도 아닌데 천국에서 주님을 얼굴로 맞대면할 때 스스로 생각해도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올바른 종말관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종말의 시기와 양상을 알아보려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만 골라서 미워하고 박해하면서 이미 마지막 때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이 세대를 보면 됩니다. 그 책의 주제도 신약 신자는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벌써 다 이뤄놓으신 완전한 승리 안에서 영원토록 거한다는 것입니다. 사탄조 무서워 벌벌 떠는 예수님이 언제 어디서나 함께하므로 로마제국의 핍박도 두려워하지 말고 안심하라는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매일매일을 주님이 이미 재림해서 자기 바로 곁에 계신 것처럼 살아가라는 권면입니다.
예수님이 요한을 통해 일곱 초대교회에 주신 서신에서 끝까지 견디라는 말씀 앞에는 각 교회의 잘한 일을 칭찬했고, 못한 일을 야단쳤습니다. 따라서 종말이 다가올수록 육체적 핍박을 견디는 일보다 신자답게 살아서 영적으로 흔들리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참아내지 못하면 구원을 취소하겠다는 으름장이 절대 아닙니다. 유감스럽게도 적그리스도에게 끝까지 버티지 못하면 구원이 취소된다고 겁주는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공사역 내내 거짓 선생을 경계하라고 주님이 가장 강조한 이유입니다.
주님이 정해주신 신자의 정체성부터 이름도 없이 땅에 떨어져 죽는 한 알의 밀알입니다. 단순히 순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타락한 흐름을 보면 저절로 혐오감, 거부감, 최소한 실망감이 너무 커서 절대로 함께 휩쓸리지 않는 것이며, 실제로 예수님을 참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그렇게 됩니다. 대신에 하나님이 신자마다 세상 사람들과는 비교조차 안 되는 너무나 아름다운 인생을 살도록 거룩한 계획이 이미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 계획대로 보호 인도해 주심으로써 세상의 어떤 핍박도 이겨낼 수 있게 성령님이 평생 내주해 주십니다.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을 증오심과 복수심 대신에 주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불쌍히 여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그래서 신자가 누릴 수 있는 여덟 지복(至福) 중에 마지막 최고가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마5:11)라고 했습니다. 바로 본문의 정확한 의미입니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정말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마지막 환난을 못 이겨서 구원에서 제외될지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고, 오히려 지금부터 범사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거룩하고 아름답게 승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더 실감 나게 말하면 만약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는 현실 고난과 세상에서 뒤처지는 것이 억울하게 느껴지고 힘들어하면 참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24/2024)
유튜브로 말씀을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