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1-7) 환난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으려면?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5)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2:1-7)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해 주려고 이천 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 비천한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말 구유에 태어남으로써 당신을 겸손히 낮추셨고 또 메시아로 사역할 동안에 받을 멸시와 핍박도 예시했습니다.
문제는 예수 탄생 기사가 구원 진리를 잘 아는 현대의 신자에겐 실감 나게 와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공간적으로 너무 떨어진 옛날이야기인지라 자칫 크리스마스카드 안의 그림으로만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탄생은 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실현되는 출발점이므로 신자가 반드시 자기 삶에 적용해야 할 영적 원리가 풍성히 숨겨져 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팁 하나는, 다른 모든 문학작품도 마찬가지이지만, 반복되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선 ‘때’라는 단어가 그러한데 세 번 나옵니다. 헬라어에는 시간을 가리키는 단어가 둘이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물리적인 시간은 ‘크로노스’라고 하고,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시간을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카이로스라는 단어는 사용되지 않았으나, 세 번의 때를 강조했기에 그 세 번의 때와 연결된 세 번의 일들이 각각 우연이 아니라 특정한 의도와 계획에 따라 이뤄졌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아기 예수는 하나님의 계획에 정해진 바로 그때와 그 장소에서 반드시 그런 모습으로 태어났어야 했던 것입니다. 첫째 시기는 로마 황제 아구스도가 모든 제국의 백성에게 인구 조사를 명한 때였고, 둘째 장소는 베들레헴이었고, 셋째로 너무 보잘것없는 상황에서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모습으로 탄생했습니다.
바울의 신학적 설명에 따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갈4:4)한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후 하나님은 장차 여자의 후손이 와서 모든 인간을 하나님과 원수 되는 자리에 빠트린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해줄 것이라고, 즉 구원을 약속했습니다.(창3:15)
따라서 구약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 최초의 약속을 점진적으로 이뤄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작정하신 때가 되어서 그 약속을 달성 하려고 여자의 후손. 즉 육신의 아비와 관계 없이 동정녀 마리에게서 아기 예수가 탄생하신 것입니다.
신자도 예수 믿은 후로는 이전과 달리 인생을 그냥 흘려보내는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허비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꿔야 하며 그렇게 할 수 있는 실력이 믿음입니다. 실제로 많은 신자가 이런저런 고난이 닥치거나 결혼이나 취직 같은 중대사를 결단해야 하면 하나님의 때와 일치시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해도 고난이 해결될 기미가 없거나 인생 중대사를 실현할 하나님의 때에 대한 계시를 거의 받지 못합니다. 자연히 하나님이 혹시 기도를 듣지 못했는지, 듣고도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짐짓 침묵하는지, 심지어 나를 떠난 것은 아닌지라는 의심과 원망이 생깁니다.
일상적인 때다.
하나님은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에게도 당신의 때를 매우 비상한 경우가 아닌 이상 기도한다고 미리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헤롯 성전이 완전히 파멸될 것이라고 예고하자 제자들이 그때가 언제일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라고 당신께서도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주님은 종말까지 포함한 이중적 의미로 예언하셨으나, 당시의 제자들로선 예루살렘 멸망의 시기가 임박할 때쯤 빨리 피난 가야겠다고 염려했는데 주님은 그들의 그런 염려가 잘못되었다고 꾸중하신 셈입니다.
신자들이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의 때를 미리 알면 고난을 더 잘 이겨내고 또 그분의 일에 더 헌신할 수 있겠다는 선하고도 순진한 의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성경의 진리와 상충하는 조금 잘못된 믿음입니다. 신자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본성이 게으르고 편안한 일만 좋아하므로 하나님의 때를 미리 알면 아무래도 마땅히 해야 할 일마저도 뒤로 미루게 됩니다. 거기다 신자들이 대체로 하나님의 때만 궁금해하는데, 뒤집으면 하나님이 역사하는 방식은 궁금하지 않다는 뜻이 됩니다. 말하자면 자기가 기도했던 자신의 방식대로 이뤄줘야 한다고 하나님께 고집부리는 것입니다.
정작 신자가 기도하거나 성경 말씀을 읽을 때 가장 먼저 신경 써야 할 차원은 하나님이 역사하는 방식입니다. 신자라면 위급한 일이 생기거나 중요한 결단을 해야 할 필요가 있으면 당연히 기도합니다.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는 것 자체로 이미 그분의 카이로스는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기도의 권능과 은혜가 얼마나 대단한지 확신한다면 그분의 때를 재촉하지 않고 담담히 기다릴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시작할 때를 알려주지 않고 불시에 행한다는 것은 신자 쪽에서 보면 일상의 시간입니다. 그분의 때가 다가오면 그분의 역사는 반드시 시작되므로 굳이 하나님의 특별한 때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평소처럼 범사에 당신께 진심으로 충성 헌신하면서 자기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영적으로 잘 분별하면 됩니다. 점점 타락해져 가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성경의 진리에 능통해져 하나님의 지혜를 알아나가는 일이 급선무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를 당신께서도 모른다고 했지만, 바로 이어서 그럴싸한 힌트는 주셨습니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24:37)고 했습니다. 홍수가 닥치는 구체적인 시점, 즉 크로노스의 시간은 노아에게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에게 홍수 심판을 예고할 때 앞으로 인간이 살아갈 날이 120년밖에 안 된다고 알려 주었습니다.(창6:3) 따라서 노아가 방주를 짓는 기간이 120년에 가까워져 거의 완성되어 가면, 즉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역사를 꾸준히 지켜봐 왔다면 홍수가 임박했다고 카이로스의 때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흔히 어둠이 짙어지면 새벽이 가까운 줄 알라고 말합니다. 모든 되어져 가는 상황이 일정한 방향으로 흘러가면 특정한 일이 일어날 때도 당연히 무르익게 됩니다. 예수님도 같은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16:3) 사람들이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그날 날씨가 좋지 않을 것이라고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특정한 상황이 조성되면 그와 연관되는 일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때는 잊어버리고, 자신과 주변 여건의 변화는 물론이고 기도했던 내용과 연결되는 일들이 생기면 그 전후 과정에 관심을 쏟아야만 합니다. 그 변화 안에 자기가 의도한 것이 아닌 새로운 맥락이 일관되게 나타나면 하나님이 어떤 형태로든 개입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맥락을 잘 읽어내면 그분의 뜻을 알게 되고 그러면 그분의 때도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시대의 표적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신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까지는 정확히 몰라도 됩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손길이 내 삶과 인생을 꽉 붙들고 있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확신할 수 있다면 아무리 고달파도 흔들림 없는 믿음과 간절한 소망으로 이제 곧 가시적으로 드러날 그분의 역사를 설렘과 기쁨으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역사다.
예수님의 탄생은 인류의 역사를 그 전과 후로 나눠야 할 만큼 인류 최대의 사건입니다. 구약성경에 계시 된 하나님의 모든 거룩한 뜻과 계획이 십자가에서 온전히 실현된 것입니다. 사탄에 미혹되어 죄 중에 빠진 인간들에게 그리스도의 조건 없는 용서를 베풀고 그 은혜 안에 들어온 신자로 인간이 반드시 살아야 할 충만한 삶을 살아가도록 해주셨습니다.
인간 중에서 그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카이로스 때를 미리 짐작하고 기다렸던 사람은 오직 요셉과 마리아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천사로부터 메시아의 인간 부모로 택함을 받았다는 엄청난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출생할 날은 계산할 수는 있었으나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 아이가 어디서 어떻게 태어날지 또 메시아 사역을 어떤 방식으로 달성할지에 관해선 구체적인 언질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거기다 아무도 성령의 잉태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을 믿지 않을 것이며 마리아가 혼전에 부정을 저질렀다고 판단할 것입니다. 그녀가 유대 사회에서 당할 수치 멸시를 막으려고 요셉이 미리 데리고 와서 동거는 했으나 부부관계는 맺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신부 동네에선 결혼식을 하지 않고 자기 동네에선 정식으로 식을 올렸을지 모릅니다. 그 후로 이 부부의 삶은 그저 평범하고도 가난한 유대인들의 일상적인 생활과 똑같았습니다.
그러는 중에 로마 황제의 호적조사 명이 떨어졌기에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 맏아들을 낳았습니다. 비록 도보 여행이 일상적이었던 때지만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약 70마일(112킬로미터)로 만삭의 마리아에겐 무리한 여행길이었을 것이나, 역으로 출산에 도움을 주는 운동이 되어서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곧바로 순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누가는 본문에서 ‘때’라는 단어를 세 번 사용했으나 사실은 하나님이 역사하는 방식을 더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아구스도의 호적 조사하는 때부터 그 방식에, 즉 하나님의 카이로스 때에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은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고 이미 예언해 놓았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5:2) 상고와 영원이라고 했으므로 하나님이 직접 오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성령의 잉태에 대한 천사의 계시를 받았다고 해서 미가의 예언을 자신에게 적용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 마리아가 구약에 능통해서 그랬다 쳐도 일부러 베들레헴으로 가서 출산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로마 황제 아구스도의 호적조사가 없었다면 마리아가 만삭의 몸으로 그곳으로 올라갈 리는 만무합니다. 만삭의 여인을 움직이게 만든 것은 이 땅의 최고 권력자인 로마 황제의 명령뿐입니다. 아구스도도 유대교 경전의 예언은 전혀 알지 못했고 단지 식민지 백성들에게 세금을 정확히 매겨서 제국을 부강하게 만들 목적으로 황제로서 당연히 해야 할 바를 일상적으로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부부를 처음부터 베들레헴에서 살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에서 나서 자라면 그 영리한 모습이 틀림없이 주위 사람에게 주목받았을 것이며, 동방 박사들에게 메시아 탄생 소식을 듣자마자 헤롯은 쉽게 찾아내어서 은밀하게 죽였을 것입니다. 헤롯이 부랴부랴 베들레헴의 두 살 미만 남자아이를 몽땅 죽일 때 하나님은 다시 천사로 미리 경고해서 요셉 가족을 애굽으로 피신케 했습니다. 나중에 헤롯 대왕이 죽자, 애굽에서 나사렛으로 돌아가게 해서 소년 예수가 안전하게 자라고 또 그곳에서 주님더러 랍비의 삶을 시작하게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정확히 말해선 당신의 계획대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이 유대인들로부터 시골 나사렛 출신의 랍비라고 무시당하게 했습니다. 또 이방 족속들과 어우러져 사는 갈릴리 변방에서 메시아가 절대 나올 수 없다는 멸시를 받게 했습니다. 애굽으로 피신한 것과 갈릴리에서 공사역을 시작한 것 등도 구약에 이미 다 예언되었습니다. 주님의 출생부터 공사역을 시작할 때까지도 하나님은 십자가로 향한 방향으로만 흔들림 없이 예수님의 삶을 진행시켰습니다.
마구간 구유에서 태어난 것도 너무나 완벽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고대의 여관은 술집도 겸하고 창녀들이 상주했는데, 그런 추악한 곳에서 주님이 태어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도 오지 않는 마구간이야말로 위생적으로 깨끗하고 은밀한 출산이 가능했습니다. 무엇보다 수난받는 종의 모습으로 오신다는 이사야의 예언이 그대로 이뤄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역사는 인간더러 일상적 삶을 살게 하면서 그런 일상의 때에 인간을 통해서 이뤄내십니다. 로마 황제에서 사관의 주인, 최고 권력자에서 일반 서민들까지 자신들의 평소 생각과 관습대로 행했으나 하나님의 뜻은 완벽하게 실현되었습니다. 그들이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은 당신께서 미리 마련한 일정과 장소에서 세상만사를 톱니바퀴처럼 완벽하게 서로 맞물려서 돌아가게 했습니다.
오늘날도, 아니 모든 세대에서 하나님의 일이 특정한 때에 아주 신묘한 방식으로 이뤄지는 일인 기적은 거의 없습니다.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엄청난 계획이 사실은 아주 일상적인 모습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신자는 그분의 절대적 주권에 따라 택함을 받아서 그분의 완벽한 섭리대로 그분의 특별한 일에 쓰임 받는 중입니다. 그분의 구체적인 계획과 뜻을 몰라도, 사실은 알 수도 없고 미리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분은 당신의 백성에게 가장 유익한 방향으로 신자는 물론 인류 전체를 이끌고 가십니다.
거짓 복음
그렇다면 인간이 느끼기엔 일상적 모습이나 하나님이 아구스도 황제 때에 예수님이 태어나게 하신 특별한 이유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아구스도는 쥴리어스 시저의 양자로 로마에 공화정 체제를 확립해서 정치적으로 안정시켰고, 지중해 세계를 완전히 정복하여 전쟁이 없게 했으며, 식민지를 늘려서 경제적으로 번창시켜 소위 로마 제국의 황금기(Pax Romana)를 열었습니다. 그는 원로원에서 최초로 황제(Emperor) 칭호를 받았으며 ‘아구스도’라는 명칭도 종교적으로 “높임을 받은 사람”, 즉 신(神)에 버금가는 존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는 제국에 속한 모든 나라 모든 백성에게 전쟁의 두려움이 없는 평화와 굶어 죽지 않는 기본적인 생활을 역사상 처음으로 제공해 주었기에 크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복음(good news)이라고 부르는데, 사실은 이때 아구스도를 세상에 좋은 소식(헬라어로 ‘유안겔리온’)을 가져다준 사람이라고 이미 칭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현실 삶이 무사 무탈해서 아주 좋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진짜 좋은 소식을 아기 예수 탄생으로 온 땅에 울려 퍼지게 한 것입니다. 목동들이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다가 천사를 만나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으나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목동들이 있던 근처의 말 구유에서 조금 전에 태어난 아기가 바로 그 좋은 소식이라고 칭해주면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는 찬양이 하늘에서 울려 퍼졌습니다.(눅2:8-14)
비록 아구스도가 정치를 잘해서 제국에 태평성대를 이루었으나 참 복음이 아니므로 인간은 절대로 참 평화를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에 그분과 온전한 화해를 이루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갈 때만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죄로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죄인을 대신하여 돌아가심으로써 그 죄를 사해주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33년이 흘러서 카이로스 하나님의 때가 되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고 천사가 예고해 준 것입니다.
제국이 사회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분명히 좋은 일이지만, 대신에 쾌락과 죄악으로 타락해 가는 시발점이기도 했습니다. 아구스도가 정복한 나라들의 시민을 노예로 잡아 와서 로마 시민들은 편안하게 살 수 있었으나 수많은 이방 노예는 평생 고통당해야 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삶에 걱정이 없어지니까 검투사 시합 같은 세속적 쾌락만 추구하고 성적으로 더욱 문란해졌습니다. 식민지의 환심을 사서 정치적 안정을 이루려고 그들의 종교를 인정해 주느라 로마는 당시의 모든 우상 숭배의 본거지가 되었습니다.
사회 질서를 바로잡으려고 인간이 도덕과 종교를 고안하는 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고안한 인간 선각자들부터 불완전한 죄인이라 항상 상대적, 일시적, 부분적인 규범밖에 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국수적인 이데올로기에 묶여서 민족과 나라 간의 차별 없는 공평하고 의로운 사회는 절대로 이룰 수 없습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그 진리를 증명해 줍니다.
아구스도가 인간 사회에 이전에 없었던 큰 업적을 이룬 영웅이었으나 현실적 안락만 주었을 뿐 정신적 영적 차원의 참 안식은 절대로 줄 수 없었습니다. 양심이 살아있는 자라면 인간은 내면의 자아에 충족이 없이는 절대로 참 평화를 얻지 못한다고, 즉 어떤 인간도 스스로는 참 평화를 얻지 못한다고 인정합니다.
모든 인간의 본성이 죄의 덩어리가 되어 사탄에 미혹되었기에, 그런 인간들끼리 모여 사는 세상 전체도 사탄의 지배 아래에 있습니다. 똑같은 죄인인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세상의 것들로는 아무리 해도 인간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진실로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오기에 그분을 등진 인간은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최고 영웅 아구스도가 들려준 좋은 소식이 결코 진짜 좋은 소식이 될 수 없음을, 하나님이 인간더러 정확히 비교 판단해 보라고 바로 그 아구스도의 때에 예수님을 탄생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완벽한 섭리
하나님이 물질계에 가시적 모습으로 임하면 죄에 찌든 인간이 모두 즉사합니다.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으로선 당신이 계획하신 일을 아주 비상한 경우를 빼고는 인간의 손을 빌려서 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선 모든 인간의 생각까지 주관하시기에 당신을 세상에 내보이지 않고도 인간을 통해 얼마든지 당신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신자의 일상적 삶을 통해 일상적 모습으로 수행될 수밖에 없는 첫째 이유입니다.
아구스도가 호적조사를 하게 된 배경에도 하나님의 완벽한 섭리가, 그것도 오랜 시간에 걸쳐서 작용했습니다. 쥴리어스 시저가 부르터스에게 암살된 후의 후계자들끼리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여 최초의 황제가 되게 했습니다. 여러 정치적 경쟁자 중에 가장 현명하고 관용적인 인물로 정권을 잡게 하고서 오랜 기간에 걸쳐 지중해 세계를 정복하게 했습니다. 그러다 마리아에게 만삭의 때가 차매 호적을 조사하도록 이끈 것입니다. 로마 제국 역사를 통틀어 그만한 황제가 없었고 아무리 도덕적으로 의로워 보여도 인간의 선행으로 인간을 만족시킬 수는 절대 없습니다. 인간 사회에 최고의 인간적인 복음을 들려주고 있는 아구스도 때에 하늘의 참복음을 들려주기 위해 예수님은 반드시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선지자 미가가 주님의 베들레헴 출생을 주전 700년경에 예언했으므로 그동안에 하나님이 이루신 필연적인 섭리도 도저히 셀 수 없습니다. 그전에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을 무너트린다는 약속은 최초 인간 아담에게 하신 것입니다. 창조 때부터 모든 나라와 족속의 흥망성쇠와 각 개인의 일생을 하나님은 예수님의 골고다 십자가라는 한가지 방향에만 맞추어 이끌어 오셨습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과 원수 되어서 오직 자기만의 안락과 형통만 추구하고 있어도 당신의 구원 계획을 당신의 카이로스 때에 한 치의 차질 없이 이루신 것입니다.
제가 예수를 믿고 나서 이 하나님의 완벽한 주권과 섭리를 깨달음으로써 생전 처음으로 인생과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고 감히 자신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극렬한 안티 크리스천이라 예수를 믿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교만했던 저를 하나님이 제 속의 사탄이 세운 견고한 진을 하나씩 깨트려 가면서 결국에는 눈물 흘리면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케 해주었습니다.
그분을 제 인생의 진짜 주인으로 모시고 나서 보니까 제가 계획하지 않았고 또 절대 우연히 일어날 수 없었던 그런 일들로 인해서, 또 제 주변의 수많은 사람을 통해서 주님이 저를 당신의 십자가 앞에 꿇어 엎드리게 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 모든 일들이 일상의 때에 일상적 모습으로 일어났지만, 오직 예수를 알게 하고 그 앞에 눈물 흘리며 엎드리게 하려는 감당치 못할 하나님의 섭리이자 은혜였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일상적인 때와 방식으로 모든 인간, 특별히 신자를 통해서 당신께서 일한다고 해서 신자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그분의 바로 이런 완벽한 섭리 위에 믿음을 올바르게 세워야 합니다. 지금껏 크리스마스 카든 안에 머물던 예수 탄생에서 그분의 참복음을 실제로 체험적으로 듣고서 현재의 자기 삶에 적용 실현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그래서 자기 인생이 하나님의 거룩한 손에 붙잡혀서 출생에서 죽음까지 거룩하게 인도되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구체적인 계획은 현재로선 또는 죽기까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심지어 자기 먼 후손을 통해서라도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모든 인생사를 또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수직적 평면적으로 눈앞의 개별적인 사건과 사람으로만 판단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일생 전체를 걸고 수평적 입체적 전체적으로 영원까지 이어지는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관점에서 분별 판단 적용할 수 있어야 믿음입니다.
쉽게 말해서 눈앞의 고난으로 일희일비하지 않고, 오히려 환난 중에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롬8:38,39) 바로 그런 믿음으로 언제 어디서나 세상과 죄악과 흑암의 세력 앞에 당당히 맞설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언뜻 너무 무리해 보이는 계명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윤리와 종교 차원으로 접근하면, 무엇보다 지금까지처럼 개별적 사건과 각각의 인물과 당장의 상황으로만 접근하면 아무도 행할 수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바보나 정신병자만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중심에 정말로 그리스도를 모시고 모든 생각이 그분 중심으로 바뀌어져 있다면 매일의 자기 삶에서 그분의 거룩한 계획이 지금 실현되는 중임을 알기 때문에 아무리 현실이 고달파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바로 지금 나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고 엄청난 역사가 실현되고 있고 또 죽을 때까지도 그렇게 쓰임 받으리라 확신하는데 어찌 범사에 감사하지 않고 또 항상 기뻐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물론 간혹 원죄의 본성이 살아나 자기를 높이고 싶고 세상의 유혹 시험이 매력적으로 다가와 쓰러질 수 있기에, 그 중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한 것입니다.
주님이 구유에 태어나 앞으로 당신이 받을 멸시 핍박을 예고했듯이 하나님의 일은 신자의 고난을 통해서 이뤄지는 경우가 더 많고 사실은 대부분입니다. 예수님의 본을 따라가는 제자니까 그분이 받은 수난에 동참할 수밖에 없습니다. 환난 중에 더 감사하셔야 하는데 끝까지 인내하면 나중에 더 좋은 복을 주신다거나 심지어 신자의 믿음이 더 성숙해질 것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주의 일을 하면서 받는 환난이기에 하나님의 더 큰 일에 쓰임 받고 있으므로 그런 자기 인생 자체가 너무 큰 축복이며 영광인지 제대로 알기에 항상, 특별히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믿음이 아무리 좋아도 어떤 일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그분은 신자의 삶에 일상의 때에 일상적 방식으로 개입하십니다. 그럼에도 요람에서 무덤까지 신자의 일생을 당신의 완벽한 계획과 섭리에 따라 차질 없이 이끌어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종착역에 당신께서 기어이 도착시키고야 맙니다. 그래서 신자도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 일생을 걸고 범사에 그분의 뜻을 분별하여서 자신의 삶에 정확히 반영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신자는 얼마든지 자기가 소원하는 대로 계획하고 자기 실력을 열심히 쌓아서 최선을 다해 현실의 일상적 방식으로 수행해야 합니다. 그 계획은 당연히 주님이 기뻐하는 일이고 그전에 인생관이 주님 중심으로 이미 바뀌었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자기 인생 전체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통합적으로 분별할 줄 알면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5/5/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