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20:18-21) 구약 백성은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새롭게 읽는 구약성경(5)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심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백성은 멀리 서 있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출20:18-21)

 

불공평한 하나님?

 

성경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는 예수님의 선언만큼 기독교 외부로부터 공격받는 말씀이 없을 것입니다.  단지 예수를 믿었다는 이유로, 그것도 착하게 살았던 적이 한 번도 없는 흉악범마저 교회에 출석했다고 구원해 주는 기독교의 하나님은 너무나 불공평하고 편애하는 존재라고 비난합니다. 인간을 지으셨기에 그 모두를 사랑하는 한 분 하나님이 절대 그럴 수 없으며 착하게 살았다면 누구나 구원해 주어야 한다고 항변합니다. 

 

그 모든 비방은 성경을 제대로 연구해 본 적이 없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문제는 오히려 그런 반발과 비난에 대해서 제대로 변증하지 못하는 신자들입니다. 말재주가 없어서 체계적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는 괜찮으나, 그런 주장에 내심으로 은근슬쩍 동의하는 신자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 말씀을 온전히 믿는 신자에게도 미처 자기들이 모르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 말씀을 너무 문자적으로 접근해서 구원의 기준을 예수님을 믿었는지 하나로만 판단하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구약시대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 의심과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을 따른 이스라엘 백성 전부가 구원받았다거나, 시대 장소 민족 별로 하나님의 구원 방식이 달랐다는 비성경적인 주장에 현혹됩니다.  

 

이는 이천 년 전 이 땅에서 사역하셨던 인간 예수님에게만 집착해서 생기는 혼선이므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차원으로도 함께 접근해야만 풀립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성품, 속성, 권능, 의지 등이 똑같으므로 한 분 하나님입니다. 당연히 구원 방식도 태초부터 마지막 날까지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은 다중 인격자가 아니므로 시대와 장소별로 구원 방식을 바꿔서 신자들로 혼란에 빠트릴 리는 절대로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 태초부터 계셨습니다.(요1:1)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과 동의어(同義語)가 됩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을 온전히 믿으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그러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특정 인물이 없었다고 구원이 없었다면 하나님까지 부재한 꼴이 됩니다.

 

직접 말씀하신 여호와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는 본문이 예수님과 전혀 무관할 것 같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구약 백성의 십자가 구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만은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구출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을 시내 산 아래에 모두 집합시켜 놓고 당신께서 직접 선포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출20:1)라고 시작해서 2-17절까지 열 계명을 순서대로 풀어서 가르쳤습니다. 그 후에 백성들이 큰 두려움으로 반응했다고 증언하는 내용이 본문입니다. 

 

하나님으로선 십계명의 준행 여부가 모든 인간이 정말로 살고 죽는 문제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절감시키려는 뜻이었습니다. 당신의 백성들은 더더욱 평생토록 그 말씀대로만 살아가야 한다는 당신의 엄중한 뜻을 당신의 육성으로 그들의 귀에 온전히 각인시키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모세에게 삼 일 후에 시내 산 정상에 강림할 예정이므로 백성들로 일정한 거리 이내로 접근하지 말게 하라고 명했습니다. 악한 것과는 단 일 초도 공존하지 못하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실체를 죄에 찌든 인간이 대면하면 순간적으로 소멸합니다. 백성들로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멀찍이 떨어져서 듣도록 한 것입니다. 그 전에 하나님은 백성들로 삼 일간 성결례를 치러서 생명의 말씀을 받을 준비를 하라고 명했고 백성은 그대로 지켰고 여인도 가까이하지 않으며 경건하게 지냈습니다.(출19:10-15) 

 

이스라엘은 출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세상 어느 민족도 경험은커녕 보고 듣지도 못한 엄청난 권능을 온몸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이적을 통해서, 또 구름과 불기둥 같은 상징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간접적으로만 대면했습니다. 여호와가 온 백성 앞에 직접 강림하신 것은 인류역사상 유일무이한 일로 당사자들에겐 엄청나게 경이로운 체험이었습니다. 

 

시내 산 위에 구름이 빽빽하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고 우레와 번개가 치니까 모든 백성이 심히 떨 수밖에 없습니다. 산 위에 연기가 자욱하고 불길이 솟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면서 전 백성이 다 들릴만한 음성으로 모세를 불러올리니까 더더욱 두려워졌을 것입니다. 정말로 사시나무가 떨듯이 엎드려서 하나님이 자기들 히브리말로 가르치는 십계명을 들었고 그 단어 하나하나가 가슴에 완전히 박혔을 것입니다.(출19:16-25)

 

하나님을 대면하면? 

 

그런데 백성이 보인 반응을 자세히 살피면 조금 이상한 사항이 발견됩니다. 백성들은 ‘멀리 서서’(18절) 하나님이 지정해 놓은 경계선을 침범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장엄한 광경을 목격하고 우레와 같은 음성이 울려 퍼지니까 떨기만 했습니다. 하나님도 그들에게 아무런 벌을 내리지 않았고 꾸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떨림은 엄청난 자연의 위용 앞에 서거나, 영화 소설 같은 예술 작품에서 큰 감동을 받으면 자기도 모르게 소름이 끼치는 것 같은 현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모세와만 대화 교통하시던 여호와가 자기들에게도 직접 당신의 뜻을 말씀해 주고 계시니까 아주 기뻐야 정상일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더 많이 받아서 자신들도 영적인 지혜와 분별력을 더 키우고 싶어져야 할 것입니다.

 

실상은 정반대로 모세에게 하나님 제발 더 이상 말씀하지 않도록 요청하고, 그더러 대신 전해달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면은 더 이상 하기 싫다는 뜻인데, 그 이유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라고 실토했습니다.(19절)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죽일 양이면 애굽에서 구해 내어서 온갖 이적을 베풀어 줄 리 없습니다. 먹고 마실 것 없는 황량한 광야로 끌고 왔다고 온갖 원망과 불평을 털어놓을 때 심판하면 그만입니다. 지금 이렇게 모아 놓고 하나님이 직접 가르친 까닭은 당신 쪽에서 이스라엘과 더 친밀히 교제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20절)고 깨우쳐 준 것입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듣고 있다가는 정말로 죽을 것 같으므로 그만둬 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겠습니까?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고개를 쳐들고서 하나님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겠습니까? 한 명의 예외 없이 그저 두려워서 안절부절못할 것입니다. 

 

실제로 모든 이가 죽음 직전에 이르면 하나님의 심판대를 통과할 자신이 도무지 없어 전전긍긍하지 않습니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자기가 무슨 행동과 말과 생각을 했는지 전부 꿰뚫어 아시는 분이라 곧바로 엎드려 발이 손이 되도록 살려달라고 빌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생전에 착하게 살려고 시도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행위 구원을 믿는 자들은 더더욱 자신의 의지로 열심히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을 것이나 마지막 순간까지도 도무지 의로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스스로는 잘 알기 때문입니다. 

 

아니 생전에도 수시로 죄에 넘어지니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도무지 바로 설 수 없는 추한 존재라는 사실을 모두가 종교적으로 고백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인식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먼저 경계선을 긋고서 더 이상 올라오지 말라고 만에 하나의 사태를 대비해서 명했으나, 그런 명령이 없었어도 아무도 감히 그분께 가까이 올라가려고 시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져서 본인이 의식하든 못하든 도덕적 종교적 존재입니다. 거기다 아담의 원죄로 모두가 그 본성이 하나님과 그분의 의를 따르기보다 사탄에 미혹되어서 세상과 죄를 더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남들 앞에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지 않다고 큰소리치는 자라도, 어쩌면 그런 자일수록 자신이 결코 그런 존재가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는 점을 인정하기 싫어도 자기만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실화니까 계속 예를 들지만, 죄를 멀리하려고 평생 면벽 수양을 했던 한국의 한 큰 스님이 오래전 임종할 때 자신은 지옥 가야 마땅한 사람이라고 실토했지 않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더더욱 죽어서뿐 아니라 생전의 어느 때라도 하나님을 일대일로 대면할 자신은 도무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호기심이 아니라 진심으로 만나고 싶다는 소망도 사실은 성령으로 간섭하여서 그분이 심어줘야 생기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상한 고백

 

예수님이 밤새도록 고기를 하나도 잡지 못한 베드로 일행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어부로서 경험과 지식을 모두 동원해도 잡지 못했는데 목수인 주님이 그렇게 말하자 틀림없이 조금 어이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혹시 싶어서 말씀한 대로 따랐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눅5:8)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제발 여호와더러 계속 말씀하지 말게 해달라고 그러면 죽을까 염려된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십계명을 시내 산에서 우레와 같은 음성으로 선포하셨던 그 하나님이 지금 베드로 앞에 완전한 인간 예수의 모습으로 서 계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처음 만난 주님께 잘못한 일 하나 없습니다. 오히려 고기 잡는 일에 미숙한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으므로 주님의 칭찬을 기대해도 될 상황입니다. 또 고기 잘 잡는 비결을 가르쳐 주거나 앞으로 동업하여 갈릴리 바다의 고기를 싹쓸이하자고 요청해도 될 판입니다. 

 

그런데도 뜬금없이 자기는 죄인이라고 고백했는데 굳이 윤리적으로 따지자면 그럴만한 이유 하나는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목수 예수의 말을 믿지 못했기에 만약 그대로 따랐는데도 고기를 못 잡으면 크게 놀려주거나 혼낼 생각을 했을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속내였다 쳐도 사람을 잘못 보고 잠시 오해했다고 용서를 빌면 됩니다. 

 

그런 시간과 그런 날씨에 깊은 곳에 그물 던지는 일은 어부 백과사전에는 없는 사항입니다. 베드로로선 당연히 주님이 깊은 바닷물 속까지 꿰뚫어 보는 혜안(慧眼)을 가졌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다 고기도 그 시간에 그물이 닿지 않는 깊은 곳에 숨어서 잠자느라 미동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자연의 이치를 잘 아는 어부들은 요행수를 바라지 않는 이상 절대 그렇게 그물을 던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고기들을 깨워서 그물에 걸리게 한 것이므로 주님은 자연까지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인 하나님이라는 뜻이 됩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말은 자기라는 인격체 전부가 죄에 찌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계속 서있자니 마치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선 것처럼 큰 두려움을 느끼고 죽을까 염려되었기에 떠나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가 그 순간에 그렇게까지 신학적 영적으로 정확히 분별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신적인 권능 앞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너무 추하게 여겨져 한시도 함께할 수 없다고 느낀 것입니다. 주님이 그에게 성령으로 간섭하여서 자기 내면의 깊은 곳에서부터 그 고백이 저절로 우러나오게 이끈 것입니다. 

    

평범한 일개 어부 베드로는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면 반드시 드러낼 수밖에 없는 반응을 그도 똑같이 내보인 것입니다. 누구나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혹은 죽음 직전에 갖는 그런 두려움입니다. 그의 실토 후에 예수님은 사람을 낚는 어부로 세워주시면서 제자로 삼아 천국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그 후 삼 년 동안 베드로는 주님이 말씀 한마디로 폭풍우를 잠재우고 당신께서 물 위를 걸으심으로써 자연을 다스리는 분인 줄 알았습니다. 거기다 불치 불구를 완전히 고치는 일은 물론이고 죽은 자도 살려내시는 이적을 두 눈으로 똑똑히 계속 목격했으므로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인 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의 자의식으로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마16:16) 그러나 사실상 주님을 처음 대면할 때부터 하나님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는다는 교리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창시한 이천 년 전 유대의 한 의인을 믿는다는 수준이 절대 아닙니다. 그가 가르치는 계명을 따르고 매주 성실히 교회에 출석해서 경건하게 예배드리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간절히 기도하는 기독교 신자들만 하나님이 편애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첫째가는 가장 기본적인 뜻은 그분을 하나님으로서 믿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는 당연히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심판받는 것이며, 구약시대에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가르치신 십계명 중,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20:3)는 첫 계명이 오직 하나님을 믿고 따르라는 뜻입니다. 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는 주님의 말씀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대입하면 그 첫 계명과 똑같은 뜻이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면 사실상 죽은 존재가 됩니다. 모든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오기에 그분을 등진 인간은 온전한 인간으로 살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죄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죄에서 구원받으려면 하나님을 자기의 주인으로 온전히 모시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 원리는 태초부터 마지막 날까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첫째가는 철칙입니다. 아담에게 주신 선악과 금령부터 그랬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16,17) 이 말씀이 선악과 과일을 먹지 말라는 종교적 계명에 순종하라는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이 땅의 주인이자 인간의 보호자 구원자이므로 그의 품을 절대 벗어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첫째 계명대로 하나님 외에 다른 존재나 물건을 절대 의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당신을 등지는 순간 반드시 죽는다고 엄숙히 선포했습니다. 육체적 생명이 아니라 당신으로부터 공급받는 거룩한 영적 호흡이 끊기면 윤리적 죄로 발전되면서 수치와 두려움에 빠지기에 절대로 참 인간답게 살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아담이 선악과를 따서 먹자마자 육신과 정신은 멀쩡한데도 도무지 절제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워지고 죽을 것 같은 불안으로 가득 찼습니다. 스스로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앞을 가렸으나 수치심과 죄책감과 공포심이 없어지지 않아서 계속 동산 깊숙이 숨었습니다. 그런 모든 사정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찾아와 아담을 부르자 아담이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 죄에 찌든 피조물 인간이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대면하면 보일 수밖에 없는 반응입니다.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에 강림한 하나님이 두려워서 계속 대면할 수 없으므로 모세더러 대신 만나달라고 부탁한 뜻과 같습니다. 그들도 하나님 앞에 자신들이 벌거벗은 줄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난 베드로가 당시 그 지방에선 틀림없이 의인이자 유력한 지도자였을 텐데도 자기를 떠나달라고 말한 것도 자기가 벌거벗은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전도하다 보면 많은 이가 나는 십계명을 어긴 적이 없어서 죄인이 아니니까 예수 믿을 필요가 없다고 반박합니다. 그들은 행동으로 지은 죄만 죄라고 여기니까, 즉 다섯째에서 열 번째까지 인간관계 계명을 어긴 적이 없다고 믿으니까 그렇게 반응합니다. 그 뜻은 단순히 감옥에 갈만한 죄는 범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죽을 때가 되면 두려워지는 이유가 그런 기본적인 계명마저 제대로 지키지 않았고 자신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자기만은 알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마지막 계명을 어기지 않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잘 나가는 이웃을 볼 때마다 아무 까닭 없이 미워서 시기 질투했습니다. 거기다 인간관계의 첫째 계명인 부모 효도를 온전히 행한 자도 없습니다. 목사인 저는 지금까지도 십계명에만 비춰봐도 저의 너무나 가난하고 수치스러운 영적 실체를 종종 발견하고 괴롭기 짝이 없습니다. 

 

십계명의 비밀

 

십계명은 열 가지 개별적으로 독립된 계명이 절대 아닙니다. 육체를 강건하게 만들려면 팔, 다리, 어깨, 가슴, 허벅지, 목 등등 부분별로 나눠서 집중적으로 단련하는 운동 법이 있습니다. 그처럼 인간의 도덕적 영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 부분별로 나눠서 지켜도 되는 계명이 아닙니다. 열 개 중 다섯 개만 잘 지키면 50%의 영성이 성숙해지는 식이 아닙니다. 

 

인간의 나고 죽음은 오직 하나님께 달렸으므로 그 중간 과정 또한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관하십니다. 그 전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닮게 해서 당신께서 만드셔서 이 땅을 당신 대신에 아름답고 활기차게 가꿔야 할 청지기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뜻을 교통할 수 있도록 인간만 영적인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우선 두 발은 땅에 딛고서 살아야 하므로 그 육체는 이 땅의 자연계에 제한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두 팔은 하늘로 향해 활짝 펼칠 수 있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그대로 순종할 때 청지기의 직분을 다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그런 존재로 만드신 그분의 계획대로 참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인간이 하나님을 외면 배척하는 순간 하늘로 향해 들어야 할 두 팔이 자기도 모르게 땅으로 향하게 됩니다. 마치 네 개의 발로 기는 짐승처럼 육체적 본능에 묶여서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의 풍요만 추구하게 됩니다. 그렇게 짐승처럼 바뀐 인간들이 모인 세상은 적자생존의 무한경쟁에 빠져서 서로 시기 질투 분쟁 증오 살인하는 난장판이 되어버렸습니다. 

 

십계명은 그래서 첫 계명을 지키지 못하면 곧바로 둘째부터 열째까지 나머지 모든 계명도 절대 온전히 지키지 못합니다. 첫 네 계명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이고 그것들을 먼저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면 나머지 수평적 인간관계 여섯 계명도 온전히 지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이런 구조 자체부터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하게 됩니다. 실제로 아담이 하나님을 부인하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 하자 가장 먼저 서로 부끄러워졌습니다. 자신의 온전했던 자아상이 헝클어지고 부서졌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깨어졌으므로 원래의 모습을 스스로는 회복할 수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부끄럽고 두렵고 불안하고 뭔가 부족하고 갈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서로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았고 자기 살과 뼈처럼 사랑했던 아담과 이브는 상대 앞에 자기부터 감춰야 할 정도로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꾸중을 듣자 서로 상대에게 책임이 있다고 비방 음해하기 바빴습니다. 그들의 자식은 친형제인데도 종교적 질투심으로 살인까지 질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이 비록 왜곡된 상태이긴 해도 그런대로 남아 있기에 인간에게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존경심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원죄 이후로는 무의식적으로도 자기들이 벌거벗었다는 잘못을 아니까 심판을 받지 않으려는 목적으로만 그분을 찾게 됩니다. 어떻게든 그분의 기분을 누그러트려서 불행한 일만 당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랍니다. 자기가 정말로 하나님 앞에 철두철미 죽어야 할 죄인이고 오직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순종 헌신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싫어지고 대신에 자기가 원하는 현실의 축복만 달라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두려움으로 그분과 멀리 떨어져 서 있던 이스라엘도 결국에는 그분을 진심으로 따르지 않고 오히려 우상을 숭배하여서 심판받아 멸망 당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이 땅에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진심으로 찾는 자는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도덕적으로 음란하고 사악하고 포악해진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땅만 목표로 살고, 하나님을 찾아도 그런 목적으로만 경배하니까, 본문처럼 하나님을 대면하면 죽을까 두려워진 상태가 된 것입니다. 

 

성경의 주제

 

신구약 성경 66권이 일관되게 연결되어서 강조하는 사항 하나가 있는데 성경 전체의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창조 때 선악과 금령과 본문의 모세 십계명과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똑같은 뜻을 드러낸 것입니다. 선악과 명령은 하나님 품만 벗어나지 않고 전적으로 의지하면 당신의 사랑을 넘치도록 베풀어 주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도 그런 뜻을 분명히 드러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 선악과 명령과 같은 의미인 첫째 계명을 온전히 지키면 나머지 계명도 자연히 지키게 되고 그러면 너희는 내게 거룩한 백성이 되므로 너희 모든 것을 당신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셔서 아무 말 없이 모든 인간의 죗값을 감당하시고 대신 죽으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선악과 명령과 십계명을 준 바로 그 삼위 하나님이다. 너희를 위해 대신 죽을 만큼 너희를 사랑하니까 제발 그 사랑 앞에 다시 겸손히 돌아 오라”는 간절한 호소입니다. 하나님 그분이 실제로 이 땅에 직접 오셔서 아무런 선행 공적 자격 조건을 요구하지 않을 테니까 당신의 목숨만큼 사랑하는 그 사랑만 받아들이라고 초청한 것입니다. 하나님만의 그 조건 없는 사랑을 거부한 자에게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지 않아서가 아니고또 교회에 출석하지 않아서도 아니라 그 사랑을 받지 않아서, 영원한 심판이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심오한 윤리 규정과 기발한 구원 방식을 가르치려고 기독교를 창안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바로 하나님이므로 당신을 따르고 믿으라고만 했습니다. 기독교 교리를 믿어야만 구원 준다면 불공평하고 독선적인 종교라고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을 일대일로 직접 대면했을 때 고개를 바로 들고 끝까지 의롭다고 자신할 수 있는지 심각하게 물어보는 질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모세더러 자기들을 대표하는 중보자로서 하나님을 대신 만나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어 마땅한 모든 이의 형벌을 대신 갚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그런 중보의 은혜가 없이도 네가 과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는지 엄숙히 묻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아무리 도덕적 종교적으로 착하게 살았다고 자부할지라도 평소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고 두려워한 적이 없다면 그분과는 아무런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이 땅이 좋아서 네발로 기면서 물질적 풍요와 개인적 쾌락만 추구하다 마지막 순간에 심판이 두려워서 예수 믿겠다고 해봐야 이미 늦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대에서 당신의 사랑만이 삶의 참 기쁨이므로 정말로 당신을 자신의 아버지로 모시고 살았는지 그 하나만 보십니다. 

 

지금껏 불신자를 탓한 것이 아니며 교회 다니는 신자들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거룩한 인도만 바라고 전적으로 그분만 의존하고 계십니까? 인생의 목적과 삶의 방식이 삼위 하나님의 영광만 높이는 것으로 바뀌었고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도덕적 의로움이나 종교적 경건함을 실현해야 한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함 없는 사랑의 품 안에서 계속 머물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가끔 원죄로 타락한 본성에 져서 넘어질 수 있어도 그런 넘어짐이 얼마나 비참하고 그냥 두면 영적 죽음으로 몰고 가는지 잘 알기에 매번 오직 주님의 십자가 긍휼만을 붙들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까? 

 

만에 하나 내심으로는 여전히 네 발을 땅에만 딛고 하나님에게 자신의 필요와 풍족과 부요를 채워주어서 세상 사람들 앞에 수치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떼만 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정말로 하나님을 얼굴로 맞대면할 그날을 기쁨과 설렘으로 기다리며 부끄럽지 않고 떳떳하게 대면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손잡고 걸어가는 삶이 정말로 좋아서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5/26/2024)


모루두개

2024.05.26 15:09:32
*.230.44.2

설교를 듣고 보니 부끄러움을 외면하는 시대인 것 같아요. 설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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