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3:10-16) 구원의 확신이 없는 진짜 이유
새롭게 읽는 신약성경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 (빌3:13-16)
구원의 확신이란?
구원의 확신에 관해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살펴보려 하는데, 그 확신이 기독교 신자가 되는 입문 절차로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확신이란 예수를 믿기 시작한 이후로 평생토록 자신은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이 좋은 신자도 때로 극심한 고난을 겪거나 이런저런 죄를 범하면 그 확신이 조금 흔들릴 수 있습니다. 너무나 연약하고 가난한 믿음을 가진 내가 과연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을지 선뜻 자신이 서지 않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잠시나마 그런 의심을 가졌던 자신의 믿음이 부끄러워져야 합니다.
엄청나게 무거운 쇳덩어리인 비행기가 하늘에 도무지 뜰 수 없다고 여겨지면 평생토록 비행기를 타지 못합니다. 어쩔 수 없이 비행기를 타야 하는 경우는 이륙해서 착륙할 때까지 제발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계속 빌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교회 생활에 성실해도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전전긍긍하면 교회 밖의 불신자와 같습니다.
반면에 유체역학상 비행기가 뜨는 원리와 사고 확률이 자동차보다 훨씬 낮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안심하고 비행기 여행을 즐깁니다. 그럼에도 난기류를 만나서 비행기가 흔들리면 혹시 사고가 나지나 않을까 불안한 것은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그런 때에 이전에 아무리 흔들려도 난기류가 곧 끝나서 안전했다는 체험을 재확인하면, 자신이 겁쟁이였음이 부끄러워지면서 평안을 회복합니다. 환난이나 죄로 인해 잠시 흔들렸던 구원의 확신도 이전에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십자가의 진리에 비추어서 회상하면 금방 회복되어야 신자입니다.
믿음이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음을 알기에 이 땅에서부터 그분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하나님이 내 친아버지인지, 내가 그분의 친아들인지 헷갈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도록 노력하면서 자꾸 그렇게 되었는지 물어보게 됩니다. 신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과 이미 신자가 되어서 신자가 행할 바에 충성하고 있는 사람은 그 삶의 차원이 전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구원의 확신은 믿음의 출발을 넘어서 그 전부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가 사실은 구원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확신하는 바탕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며, 그것이 하나님에게 절대로 교만하고 무례한 일이 아닙니다. 자녀가 자기 아버지가 누구라고 떳떳이 자랑하면 아버지가 그 자녀를 기뻐하지 자기 체면을 손상했다고 노여워할 리는 만무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구원의 확신이 없는 신자를 도리어 아주 안타깝게 여깁니다.
로마 감옥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유언처럼 당부하는 본문에 자신이 가진 구원의 확신을 당당하게 자랑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우리 또한 바울과 같은 확신이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잡힌 것과 잡을 것
그가 자랑한 말씀은 바로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12절 b)입니다. “예수님에게 잡힌 바 된”이라는 표현은 어떤 방식이든 어떤 의미로든 예수님에게 이미 잡혀있으므로 구원의 확신이 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또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합니다. 이미 잡힌 바 되었으면 굳이 잡으려고 가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닙니까?
논리적으로 따지면 잡힌 바 된 것과 잡으려고 가는 것이 달라야 하나, 분명히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러 간다고 했으니 그 둘은 같은 뜻입니다. 원어로도 ‘소유하기 위해 붙들다, 취하다, 달성하다’ 등의 뜻인데 앞과 뒤에 같은 단어 하나만 사용했습니다. 결국 구원의 확신이 있는데 다시 구원의 확신을 갖기 위해서 노력한다는 의미가 되는데, 그러면 바울도 우리처럼 확신이 자주 흔들렸다는 뜻입니까?
영어 성경을 보면 그 뜻이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에게’라는 문구에서 전치사를 by가 아닌 of를 사용했습니다. 헬라 전치사 ‘휘포’가 아래에, 어디로 향하여, 말미암아, 같이 방향 장소 원인 등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우리말로 쉽게 바꾸면 ‘예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아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바울을 직접 잡고 계신다기보다는 예수님이 이루신 어떤 일로 인해 바울은 그것의 온전한 수혜자(受惠者)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일이 무엇인지는 앞뒤 문맥을 따져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10절)라고 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된 것이 주님이 이루신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 아래에 있는 바울도 그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라고 했다고 해서, 아직 그런 진리를 확신하지 못해 계속 알아보는 중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표준새번역본은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를 알고 있고 부활의 능력도 깨달았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기에 남은 일은 그분의 죽음까지 본받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또는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부활의 능력도 더 많이 깨닫고 싶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자기 믿음의 목적은 물론 그 근거를 오직 부활 소망에만 둔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무엇을 안다는 개념도 학습으로 배우는 것을 넘어서 체험적 확신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권능과 고난을 알고자”라고 말하지 않고 그것들에 “참여함을 알고자”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1:21-23에서 그런 의미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로마 감옥에서 순교를 앞두고 있기에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은 욕망이 크다고 했습니다. 만약 그가 천국 부활의 확신이 없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는 어서 빨리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다고 했으므로 부활의 권능에 참여할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육신에 거하는 것은 빌립보 교인들의 유익을 위해서였습니다.
본문 바로 앞 11절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했는데 어떻게 해서든지가 부활에 들어가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를 받아서 12절 후반에 “잡으려고 달려간다”라고 같은 의미로 표현만 바꾼 것입니다. 그가 잡힌 바 된 것도, 잡아야 할 것도 부활입니다. 예수를 온전히 믿는 순간 부활은 확보되었으나 육신이 죽어야만 자신의 체험적 소유로 완전히 잡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현재 삶을 14절에서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장차 주실 상을 위해서 달려간다고 당당하게 자랑한 것입니다. 신자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 땅의 삶은 부활을 향해 걸어가는 여정입니다. 믿음이 시작할 때부터 그 목적지는 부활로 확정되었고 다른 길로 절대 갈 수 없으니까 “예수에게 잡힌 바 된” 것입니다.
온전한 신자
그런 부활의 확신에 따라 15절에서도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우리’라고 했으므로 바울만 아니라 모든 신자에게 적용됩니다. 그렇다고 예수를 믿음으로써 인격적 도덕적으로 온전해져 결점이 완전히 없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헬라어 ‘텔레이오’에는 완전하다(perfect) 뜻도 있지만 완성하다(complete), 끝내다(finish)는 뜻으로 더 많이 사용합니다.
신자가 온전히 이룬 것이 무엇인지도 문맥 안에서 살펴봐야 합니다. 한 저자가 한 문단 안에서 같은 표현을 사용했다면 당연히 같은 의미입니다. 바울은 12절에서 자기가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하고서 15절에선 온전히 이룬 우리라고 말합니다. 두 구절의 온전히 이룬 것은 같은 뜻입니다.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 한다”는 것과 같은 맥락의 설명입니다. 부활은 어차피 죽음 후에 완성되나 그리스도가 실현한 부활의 권능 안에 이미 들어와 있는 신자에게도 부활은 완성된 것입니다. 그 완성은 중도에 절대로 변경 취소되지 않고 오직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뜻으로, “우리 온전히 이룬 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어서 혹시라도 그렇게 생각하지 못할 자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는 추가적인 설명도 같은 맥락입니다. 혹시 천국 영생에 대한 확신이 아직도 없는 신자라도 만약 하나님이 구원으로 택했다면 반드시 성령으로 역사해서 당신의 때에 거듭나게 해서 부활의 확신을 갖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온전히 이룬 자, 즉 부활의 확신을 가진 신자는 현재 어떤 처지에서 어떤 일을 하든 마땅히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아직 그런 확신이 생기지 않았어도 하나님이 성령으로 그렇게 변화시켜 줄 것을 소망하며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또 구원으로 택한 자라면 반드시 그 확신을 갖게 해줄 것이므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순되어 보였던 본문의 두 가지 표현의 의미는 정확히 똑같았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를 믿는 순간 부활의 권능, 즉 구원은 확정되었고 신자가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면 그 구원이 실체적으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된 이후의 삶은 성령이 내주해 주시므로 부활이 열매 맺도록 성장해 가는 과정입니다. 거듭난 새 생명은 반드시 때를 따라서 자라 열매를 맺습니다. 지옥으로 떨어질 뻔한 사람이 천국으로 완전히 진로가 바뀐 것입니다. 이전의 생명이 현실 생활에 맞게끔 더 풍성해지는 모습이 아니라, 옛사람은 완전히 죽고 천국의 생명을 품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겐 로마의 감옥에서 순교로 빨리 생을 마감하게 되든 다행히 풀려나든 현실적 외부 상황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던 자기 처지가 어떠하든 자기 인생의 표적을 부활 영생에만 맞추고 한 걸음씩 앞으로만 전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미 행했던 지난 일은 잊어버리고 현재 서 있는 자리에서 그리스도만 전하면서 살아가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바는 결국 구원을 확신하는 신자는 자기 일생이 천국행 여정이라는 사실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온전해진 근거
예수님은 십자가에 운명하시면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라고, 본문의 이루었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한마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요19:30) 죽음으로 당신의 공사역이 끝났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십자가 죽음이 바로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런 방식으로 죽으셔야 했고 만약 그렇게 죽지 않으면 그 목적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천하 인간을 만드시고 그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반드시 죽으셔야 할 만큼 인간의 죄가 엄청나게 컸기 때문입니다. 그 죄를 사할 수 있는 길은 세상에는 아예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죗값을 대신 갚으시는 대속 제물로 성부 하나님께 바쳐져야만 모든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죽어 마땅하다는 진노가 풀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 이루셨기에 인간 쪽에서 구원을 위해서 행할 일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구원을 다 이루셨다는 사실을 온전히 순전하게 믿는 순간 예수님에게 붙잡힌 바 됩니다. 원죄로 타락했던 사탄 자식이라는 신분이 하나님의 자녀로 완전히 바뀝니다.
신자의 구원은 예수님의 생명과 맞바꾼 것입니다. 신자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오직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는 그 한마디 말씀 때문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것은 예수님의 다 이루셨다는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기독교 교리에 수긍하는지 못하는지의 차원이 아닙니다. 자신의 죄가 주님이 대신 죽으셔야 할 만큼 엄청났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것입니다. 그 죄를 스스로 깨끗하게 할 실력이나 여지가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남아있다고 여긴다면 다 이루셨다는 말씀이 피부에 와닿지 않을 것입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자기 스스로 이루는 행위 구원은 평생토록 절대 확신할 수 없으나, 하나님 그분이 이미 다 이루신 구원이기에 확신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령 하나님이 한 죄인에게 역사해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해줄 때 가장 먼저 철두철미 추악한 자신의 영적 실체부터 명백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서 온전히 선한 것은 하나도 나오지 않고 오로지 자기를 높이려는 욕심과 고집과 자존심에서 파생되는 죄악뿐임을 생전 처음으로 절감하게 됩니다. 간혹 이웃과 사회에 선행을 베풀었어도 어디까지나 상대적 일시적 선이었을 뿐이었으며 그중에는 심지어 자기 의를 자랑하려는 교만도 많았습니다. 선을 행하려면 가뭄에 콩 나듯이 억지로 쥐어짰어야 했으나, 죄를 범하는 데는 별다른 망설임이 없었고 신나게 즐기기까지 했습니다.
자신의 너무나 가난하고 비참한 실체를 절감한 위에 스스로는 물론 온 세상에 자기를 깨끗하게 할 방도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더더욱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감사하게도 성령이 역사해 주신 은혜로 인해서 자기 전부를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의탁하게 되고 생전 처음 영적으로 온전한 평안을 얻게 됩니다. 신자가 된 후에도 자기 속에 남아 있는 죄악 된 본성에 져서 수시로 죄에 넘어지지만, 그럴 때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님의 은혜만 붙들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외에는 자기 인생에 소망이 없기에 자기 일생을 그분 아래에 둡니다. 예수 아래에서 살고 죽으면서 저절로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려는 소망이 생기면서 그분이 살았던 삶을 따라 살고 싶은 열정도 갖게 됩니다.
필연적으로 자신이 누리는 이 큰 은혜를 아직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현재 위치와 하는 일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든 소개해 주고 싶어집니다. 예수님을 대신해서 오신 성령이 신자에게 평생토록 내주하고 계시는데 신자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요컨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자신의 신분과 특권이 어떠한지 확실하게 아는 신자는 구원의 확신이 흔들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심오하고 경건한 교리라도 구원 확신의 근거가 절대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님이 지금도 성령을 통해서 나와 함께하고 있다고 체험하는 신자는 구원을 확신한다고 당당하게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당당함
바울은 그래서 본문에 이어서 아무리 사도라도 허물 많은 인간임에도 빌립보 교인에게 자기를 본받으라고 당당하게 선포합니다.(17절) 너희도 자기처럼 예수에게 잡힌 바 되어 온전히 이룬 자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확신을 가진 자답게 어떤 고난과 핍박도 두려워하지 말고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만약 아직도 구원받지 못했기에 열심히 노력해서 구원을 쟁취해야 한다고 믿는다면. 고난과 핍박을 계속 받게 되면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주님을 위해서 수고했는데 하나님이 왜 알아주지 않는가, 미리부터 고난과 핍박을 막아주어야 하지 않는가, 아직도 얼마나 더 교회에서 봉사해야 하는가, 지금까지의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인가, 오늘날 신자들이 기도하면서 갖는 것과 같은 온갖 의심과 불안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나아가 내가 교회에서 중직을 맡아서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수고했으니까 이 정도면 구원받을 수 있거나 받아야만 한다고 여기고 핍박을 피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반대로 구원의 확신이 있고 천국 부활에 의심을 전혀 하지 않으면 어떤 수고 핍박도 두렵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매일 성령 안에서 주님과 교제 동행하는 삶이 너무 좋기에, 나아가 십자가 복음으로 사탄에 미혹된 영혼이 새 사람으로 거듭나서 주님을 영접하는 일로 최고의 기쁨과 보람을 느끼기에 범사는 오직 주님의 인도에 맡기고서 자기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바울처럼 오직 예수로 인해 살고, 죽으면 천국에서 주님을 만나서 더더욱 좋기에 순교도 마다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간혹 사도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았고 또 오순절에 성령 충만을 받아서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지만, 오직 성경으로 간접적으로 부활 주님을 접하는 우리는 그렇게 쉽게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만큼 불합리하고 엉터리 같은 말이 없습니다. 자기 말로 사도들이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다고, 즉 주님의 부활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었다고 인정해 놓고 자신의 부활은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당대의 사도들에게만 부활을 허락했다면 그 부활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굳이 성경으로 예수님을 배울, 아니 교회에 출석할 필요도 없습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가 부활의 권능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입니다.
많은 신자가 구원 확신을 극적인 체험을 통해서 단번에 가져야 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간증을 들어보면 성령의 뜨거운 기운이 정수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뚫고 지나갔다고 하거나, 병원에서 포기한 말기 암이었는데 기도하여 나았다고 하니까, 자기에게는 그런 체험이 없으므로 구원 확신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는 아주 특별한 예외로 그런 비상한 방식이 아니면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은 아주 완악한 자들에게 역사한 것입니다. 거기다 그렇게 되기까지 죽을만한 고통을 거쳐야만 하기에 굳이 부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령이 역사하면 기도하는 중에 또는 말씀을 읽는 중에 예수님에 관해 가슴에 넘치는 감동이 와서 눈물 콧물 다 흘림으로써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나 성도의 큐티 나눔을 통해서도 자신의 너무나 가난한 영적 실체를 발견하고 도무지 가망 없는 저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고백이 절로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주님이 자기를 먼저 찾아와서 용서해 주시면서 당신의 자녀로 받아 주셨다는 확신도 생기게 됩니다.
내면의 영혼이 완전히 바뀌는 이런 중생의 과정은 학문을 배우듯이 자기 이성에 의해 체계적으로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구원의 길을 물으러 온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7,8)
바람이 임의로 분다고 했으므로 그 근원과 방향을 모르듯이 성령도 그런 모습으로 역사하므로 신자는 자신의 거듭나는 과정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바람이 불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이전에 예수를 까닭 없이 싫어했고 심지어 미워하다가 별다른 이유 없이 좋아집니다. 그렇게 된 과정은 제대로 설명할 수 없어도 예수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본인은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 까닭 없이 싫어하거나 미워했다는 것은 무조건 본성적으로 싫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완악한 본성은 성령이 역사해도 한순간에 바뀌기 쉽지 않으며, 사실은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으나 한순간에 바꾸면 그 의미와 소중함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대체로 점진적 과정으로 이뤄집니다. 그럼에도 반드시 각자에게 가장 적합하고 필요한 때에, 바꿔 말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그 사람에게 가장 빠른 시기에, 그 사람만이 확신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십니다.
구원 확신이 없다면?
이제 구원의 확신이 없는 진짜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죽은 후에 결정되는 행위 구원과 달리 하나님이 살아 있을 때 구원해 주시는 뜻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런 증인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자기 구원의 의미를 단지 천국에 들어가는 것 하나로만 제한했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믿음을 갖는 목적도 오직 죽어서 심판에서 면제되는 것뿐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자는 반드시 자기가 만났고 체험했고 또 지금도 함께 교제 동행하는 예수를 남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집니다. 굶주렸던 거지가 언제든 누구나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잔뜩 쌓여 있는 창고를 발견했다면 동료 거지에게 그곳을 당연히 알려주지 않겠습니까? 자기 혼자 독차지할 거지는 없을 것이며, 만약 그렇다면 그 창고를 개설한 주인이 당장 문을 닫아버릴 것입니다.
자기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는 자는 다른 자에게 구원받으라고 권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리도 없습니다. 모든 신자가 바울처럼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든지, 만나는 이웃마다 항상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처럼 이미 부활 권능에 잡혀있기에 자신의 부활에 대해선 전혀 염려할 것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심판으로 걸어가고 있는 자들이 너무나 불쌍하게 여겨져야 합니다.
여러 개인적인 사정으로 당장 전도를 실천하지 못해도 예수를 모르는 자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이 구원받은 것만으로 만족하는 자입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니까 그대로 수긍하고 동의만 한 셈입니다. 믿음을 가지는 목적이 자신의 현실 고난을 해결 받고 앞으로도 큰 불행이나 흉사를 막으려는 의도뿐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일꾼으로 세우려고 자신을 세상에서 따로 불러내었다는 인식이 없습니다. 세상 안에 그대로 파묻힌 채 남들보다 더 평안하고 형통한 삶을 살기 위해 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그분께 자기를 드리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하늘에서 불러 내리려고만 합니다.
그런 뜻이 아니라면 자기가 저지른 이런저런 죄악과 인간관계 상처 등으로 정서적으로 괴로우니까, 또는 인간이라면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도덕적 양심에 찔려서 단순히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자신을 수양 절제하려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부터 그리스도에게 잡히도록 한 목적이 무엇인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간혹 신자 된 의무로, 또 이왕이면 우리 교회의 교인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전도하는 자는 많습니다. 나름대로 의미는 있고 선하지만 그런 생각뿐이라면 언제든 전도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입니다. 예수가 그 전도를 받는 사람에게 살고 죽는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라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은 교회에 출석해서 기독교의 가르침대로 따라서 조금 더 선하게 살려는 노력에 불과하지, 자신부터 영원히 살고 죽는 차원이 전혀 아닙니다.
본문은 자기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지 없는지 점검하는 확실한 기준이 됩니다.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기에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하고 있는지 보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믿음은 언제 어디서나 부활을 향한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혹시라도 이런 마음과 실천이 없다고 해서 당장 실망할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자신의 믿음에 무엇이 또 왜 문제인지 정확하게 알게 된 것만으로도 천국행 열차에 올라탄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불어서 점진적으로 구원으로 인도하는 중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현실 문제 해결을 위해서, 또는 정서적 평안과 도덕적 성결을 이루려는 믿음은 완전히 내버려야 합니다. 대신에 주님이 지금 저를 찾아와 만나 주시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예수님에 대해서 다시 깊이 공부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이며 골고다의 십자가에 돌아가신 뜻이 무엇인지 또 그 의미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깊이 살펴봐야 합니다. 바꿔 말해서 나의 진짜 영적 실체가 어떤 상태인지 따져봐야 합니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선을 행할 수 있는지, 최대한 양보해서 죄악을 절제라도 할 수 있는지 곰곰이 살펴보십시오. 도무지 내 죄를 내가 해결할 수 없다고 깨달아진다면 골고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겸손히 엎드려서 진정으로 그분의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러다 어느 순간 정말로 성령의 역사로 예수에게 붙잡힌 바 되면 자기 구원을 확신하고서 당당히 남들에게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6/23/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