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1/04
제자의 그림을 망친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가 하루는 자기 제자들이 그린 작품들을 둘러 보다가 한 그림 위에다 갑자기 붓을 잡아 큰 글씨를 휘갈겨 적었다. ‘확대(Amplius)”라는 한 단어였다. 그림은 잘 그렸는데 캔버스가 너무 작아 그 구도가 조잡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주님이 오늘날 교회에 오셔서 당신의 제자인 우리들의 인생과 삶을 둘러 보시면 어떤 반응을 보이시겠는가? 특별히 우리 믿음의 상태를 보면 아마 틀림 없이 미켈란젤로가 적었던 똑 같은 단어를 우리 마음 판에다 써내려 가실 것이다. 너희들의 영적인 시야와 범위가 너무 좁다. 믿음을 더 키워라. – “확대”
그런데 믿음의 크기를 키우고 영적 시야를 넓히라고 하면 흔히 자신이 계획하는 일과 목표를 질적 양적으로 높여서 굳센 의지력으로 이루어내는 것으로 생각해버린다. 사업을 번창하게 하고 개인적으로 월간 수입을 늘리는 현실적 문제에서부터 기도를 하루에 몇 시간 하고 성경은 몇 페이지씩 보며 전도는 일년에 몇 명하여 섬기는 교회가 년 말 안에 몇 명까지 부흥해야 한다는 식이다.
그런 것들은 목표의 수치를 키운 것이지 믿음을 키운 것이 아니다. 목표가 커졌다고 믿음이 커지지 않는다. 믿음이 따라가지 않으면서 목표치만 늘이면 자신의 욕심을 하나님에게 무조건 이뤄달라고 억지 쓰는 것이다. 신자의 영적 지경이 확대된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운 목표가 적다고 해서 주실 복을 줄여서 주지 않는다. 반면에 목표를 키운다고 해서 복을 더 크게 주시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고 가장 유익한 복을 넘치도록 충분히 주실 뿐이다.
미켈란젤로가 제자더러 화폭을 키우라고 했지 그림 속에 들어가는 구도를 더 크게 잡으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구도를 잘 잡아도 너무 작은 화폭에 담겨져 있으면 제대로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똑 같은 구도를 더 큰 화폭에 담을 때 더 구체적으로 잘 그려낼 수 있다.
믿음을 키우는 것이란?
믿음을 키우고 영적 시야를 넓히는 것을 너무 신령하게 생각하지 말라. 내가 가진 종교적 실력을 늘이거나 의지력을 갈고 닦는다고 해서 영적인 크기 자체가 크지는 것이 아니다. 찬양과 기도를 뜨겁게 하거나 방언이나 신유의 은사를 발휘하는 문제 또한 아니다. 나아가 우리의 내적인 사고와 철학의 능력을 높여서 더 심오하게 사색하는 것을 말하지도 않는다. 매우 간단하다. 한 마디로 말해 우리 마음을 키우는 것이다.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을 더 크게 더 많이 담아내는 것이다.
하나님을 우리 마음에 많이 담거나 적게 담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나님을 적게 담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일을 적게 기억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은혜 받은 일, 기도 응답 된 일, 잘 풀려 나가 기쁘고 편한 했던 일만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셨다고 생각하는 마음이다.
이제 우리 마음을 키우는 것의 의미는 분명해졌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더 크게 담아 내기 위해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있는 그대로 다 인정하는 것이다. 세상적으로 고통이 많은 일, 육신이 병들고 마음에 상처 받은 일, 도저히 내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 일, 심지어 하나님이 하셨을 것 같지 않아 의심과 불평이 앞서는 일들마저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또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면 그 안에 분명히 그 분만의 선하고 의로운 뜻과 계획이 있음을 확신하고 그것들을 발견해야 한다. 최소한 지금은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이 그 모든 일에 숨겨져 있음을 확신하여 그에 대해 우리 마음을 더 크게 열 줄은 알아야 한다.
캔버스가 작으면 풍경을 그려도 아무래도 깨끗하고 아름다운 부분만 그리게 된다. 길거리에 나뒹구는 잡동사니, 쓰레기 통, 거지들은 생략하기 쉽다. 그러나 화폭이 커지면 그 모든 것들이 들어갈 수 있는 여백이 생긴다. 그런 모습들이 들어가야 더 예쁜 그림은 아닐지라도 완벽한 그림이자 그림으로써 진정한 가치를 갖는다.
우리 믿음도 마찬가지다. 모든 순간과 사건에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있음을 우리 마음에 담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그 당시에는 거리 한 구석에 지저분한 모습으로 있는 쓰레기 통 같을지라도 말이다. 우리의 명철을 의지 하지 않고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하여 그 분 중심으로 생각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여야 한다. 그러면 아무리 힘들고 고달픈 일들도 우리 심령에 아름답게 비춰진다. 나에게 되어지는 모든 일들 가운데 주님의 은혜가 있음을 확신하지 않고는 범사에 감사가 나올 수 없다.
우리 마음을 키우게 되면 우리 삶의 쓰레기 통 같이 겉으로 드러내기 싫어 구석에 감추어 두어야만 했던 사건과 사람들이 반드시 그 때 그 장소에 그런 모습으로 있었어야만 내 인생이 더 완전해질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마음이 큰 자만이 쓰레기 통에서 장미를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나의 실패와 죄악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빛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감사는 자꾸 늘어나고 항상 기뻐할 수 있게 된다.
믿음이 커진 결과는?
마음을 키우지 않고 목표만 키웠다는 것은 자신의 욕심을 키웠다는 말 밖에 되지 않는다. 욕심을 더 키우면 그 욕심이 자기가 원하는 때와 방법으로 달성되지 않으면 더 괴로울 뿐이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는다.(약1:15)
바울 사도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향해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더욱 풍성하게”(빌1:9) 해달라고 기도했다. 믿음이 더 커지라는 것이다. 이어지는 절에서 그 믿음이 커지는 모습을 어떻게 표현했는가 보라.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여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빌1:10,11)라고 했다. 신자의 현실적, 종교적 목표를 크게 잡으라는 것은 눈을 닦고 보아도 없다. 대신에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를 가득 맺어라고 했다. 지극히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온다. 의의 열매도 그리스도가 맺어 줄 수 있을 뿐이다.
신자 스스로 자기 능력으로 도덕적으로 선한 일을 많이 해야 의의 열매가 맺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은 모두 다 지극히 선하다. 우리가 쉽게 선을 베풀 수 있는 일상적인 일에서나 현실적으로 형통하여 여유가 생길 때는 믿음이 없는 자라도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구태여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쓰레기 통에서 의의 열매를 맺기 위해선 반드시 믿음이 필요하다. 그 일은 목표를 키운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마음을 키워야만 된다. 넓고 커진 마음에만 분별력이 생기지 좁고 적은 마음으로는 쓰레기 통 밖에 볼 줄 모른다.
아무리 힘든 일 심지어 우리 눈에 추해 보이는 일이라도 주님이 허락하신 일에는 의의 열매가 맺힐 씨앗이 숨겨져 있다. 신자가 조금만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그 씨앗은 금방 싹이 나고 열매를 맺게 해 주신다. 신자의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시기 때문이다.(빌1:6)
영적인 시야를 넓혀라. 믿음을 키워라. 다 좋은 데 가장 먼저 주님을 있는 그대로 다 담아 낼 수 있도록 마음부터 키워라.
화폭 속에 담겨지는 쓰라림, 아픔, 고통, 환난, 슬픔들
그러나 하나님이 넓혀 놓으신 화폭 속에서 그려지는 그림은
실로...
아름다운 풍경화가 그려지고 있는 중...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