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8/04
행복은 채굴하는 것이 아니라 저축하는 것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한 치과 의사와 선을 본 자매의 상담을 받았다. 상대를 잘 몰라 아무런 감정이 생기지 않는데 집안에선 결혼을 하라고 서두른다는 것이다. 남자 뿐 아니라 사실은 자매도 제가 잘 몰라 객관 타당한 충고는 해줄 수 없어 결혼에 관한 원칙적 이야기만 해 주었다.
젊은 사람들은 연애 결혼만 선호하고 중매는 기피하는 경향이 많지만 꼭 그렇게만 생각해선 안 된다. 연애 결혼은 서로 좋아서 그 좋은 것을 계속 유지하고 키울 목적으로 결혼한다. 그래서 서로 좋은 것이 줄거나 없어지기 시작하면 불행해진다. 반면에 중매는 오직 결혼 자체가 목적이다. 서로 좋아 하는 것과는 상관 없이 어떻게 하든 가정을 잘 꾸려 나가려 한다. 힘든 일이 닥쳐도 서로 협력하여 극복하지 가정을 깨려는 생각은 좀체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처음에는 좋은 감정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상대와도 차츰 좋아지게 된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가 “가정은 행복을 저축하는 곳이지 채굴하는 곳이 아니다”라고 했다. 중매 결혼의 원리와 같은 맥락의 말이다. 힘든 일이 생길수록 부부와 자녀들이 양보하고 희생하며 협력하여 이겨 나가야 한다. 가족 간에 서로 사랑으로 상처를 씻어주고 용서하는 일들이 하나하나 쌓아져야 한다.
결혼하면 당연히 남편은 열심히 돈을 잘 벌어다 주고 식구들에게 자상하게 대하며 아내는 무조건 남편에게 순종하며 검소하고 현숙하리라 기대하는 것 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좋은 차, 큰 집, 세련 된 옷들을 갖추었다고 행복이 절로 솟아나지 않는다. 가정에서 행복을 찾아 내선 안 되고 만들어 가야 한다.
이 원리는 가정 뿐 아니라 인간 관계의 모든 분야에 다 적용된다. 학교, 직장, 군대, 사회 어디에도 행복을 쌓아 놓고 찾아 가라고 기다리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자기가 행복을 쌓아가지 않으면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스스로 자기 위치를 분명히 하여 자기가 할 바를 성실히 해야 한다. 자기가 하고 있는 바로 그 일에 의미와 가치를 찾아 내거나 부여하여야만 보람과 기쁨을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름 받은 신자
행복은 전적으로 자기 소관과 책임 하에 있지 남이 개입해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가장 가까운 배우자, 부모, 형제가 더 보태거나 빼앗아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원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 생활에도 적용 된다. 믿음 생활의 승리도 신자가 스스로 쌓아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갑자기 이상한 말로 들리는가? “우리는 연약하고 무지하며 무능하여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하지 않는가? 스스로 할 수도 없지만 하려고 해서도 안되지 않는가? 하나님이 신자의 일생을 당신만의 섭리로 이끌어 가시지 않는가? 그래서 우리 뜻과 계획대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내 스스로 어떤 일을 정해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창출할 수 없지 않는가?” 당연히 신자가 그럴 수는 없다.
그러나 꼭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신자를 동역자로 불렀다는 사실이다.(고전3:9) 물론 우리는 어리석고 제대로 할 수 없으며 어떤 일에든 욕심이 앞서고 죄성이 훼방을 한다.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갖고 계시는 계획과 뜻에 마음을 열고 순종하며 반응은 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동역 하겠다는 것이 우리 인생을 향해 갖고 계시는 당신만의 뜻을 변경하거나 포기하실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또 신자가 스스로 행복을 쌓으라고 해서 신자가 자기 인생의 뜻을 독단으로 판단하고 제 마음대로 하나님의 것과 대체해도 된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룸에 있어 신자가 가만히 손 놓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뚝딱 해 치워주시는 것도 아니요 반대로 신자의 손발을 강제로 묶어 놓고 일방적으로 해 치우시지도 않는다.
신자가 신앙 생활에서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다. 급하고 힘든 일이 생길 때만 기도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고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 생겨야 기도한다는 것은 그 동안 어렵지 않은 일은 신자 독단적으로 다 해치웠다는 의미다. 또 자기 생각에 지금 골치 아프고 고통거리가 되며 마음에 안 드는 문제만 들고 나와 해결해 달라는 것은 하나님더러 어서 빨리 내 뜻대로 해결해 나를 좀 편하게 해 달라는 의미다. 그 안에 신자가 하나님과 동역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애쓴 부분이 전혀 없다. 그런데도 과연 하나님이 그런 기도에 응답 해 주시겠는가?
하나님과 중매 결혼한 신자
주님은 우리의 신랑이요 우리는 그 신부다. 결혼으로 맺어져 일생을 함께 살아야 한다. 신자가 행복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 신자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경우처럼 스스로 행복을 채굴하려 하지 말고 주님과 동역하여 저축하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매일 클래식 음악을 틀어 놓고 향기 좋은 커피를 나눠 마시며 비오는 호수를 창 밖을 내다보며 살 수 있는 부부는 아무도 없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다. 예수 믿어 구원을 얻었다고 평생이 형통해지고 환난이 사라지리라는 기대는 망상이다. 신자로 부름 받은 목적이 그런데 있지 않다. 하나님의 사람답게 변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신자가 책임지고 행복을 쌓아야 한다는 말이다.
신자는 평생을 하나님과 함께 동역하며 행복을 저축해 나가야 한다. 얼마든지 손 쉽게 할 수 있는 아주 일상적인 작은 일에서부터 인생 전부가 좌우되고 삶의 뿌리가 흔들리며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까지 주님과 함께 하나하나 해결하며 쌓아나가야 한다.
때로는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 앞에 나오겠지만 또 때로는 원망과 슬픔으로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가 되었든 반드시 하나님과 함께 갈등하고 고민하고 씨름해야 한다. 그러면 아무리 고통스럽고 슬프고 눌린 일들 가운데도 반드시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인자와 자비와 긍휼과 은총을 발견할 수 있다. 매일 쓰러지고 또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묵묵히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 하루하루를 믿음 안에서 쌓아 나가다 보면 하나님 만이 우리의 위로요 요새요 반석이요 방패이심을 알게 된다. 하나님 외에는 기쁨이 없음을 절실히 깨닫는다.
범사에 얍복 강가에서 밤새도록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절대 보내 주지 않겠다는 야곱처럼 주님을 꽉 붙들고 씨름 해야 한다. 신자가 스스로 행복을 저축하지 않고는 주님의 주님 되심을 절대 알 수 없다. 여호와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 것(시84:10)을 아는 것만이 신자의 행복이며 그것은 자기 책임 하에 쌓아나가는 수 밖에 없다.
하나님과 결혼이 인간의 결혼과 다른 것이 그 능력의 크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 인간끼리 결혼은 서로 좋은 감정이 줄어들면 불행해지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아무리 어리석고 약점이 많으며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다른 쪽으로 달려 가려 해도 그 사랑의 강도를 줄이지 않으신다. 인간과 달리 우리가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고 우리를 더 사랑해 주고 우리가 덜 사랑한다고 우리를 덜 사랑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평생에 항상 끝이 없는 사랑을 베푸신다.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넘친다. 선을 본 그 자매의 경우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잘 몰라 이해가 되지 않고 감정적으로 좋은 생각이 들지 않을 때도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연애로 만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라는 중매로 만났기 때문이다. 하나님 쪽에선 절대 우리 관계를 깨고 싶은 마음이 없다. 오직 우리와 결혼 생활을 희생하고 양보하며 사랑으로 섬겨 잘 가꾸고 싶은 생각뿐이다. 그 결혼을 함께 쌓아 나가는 것은 오직 신자의 책임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연애로 만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라는 중매로 만났기 때문이다.
아멘!!!!!!!!!!!!!
그 원리를 똑같이 가정에도 또 자신의 신앙에도 접목시키면서 사는 것이 지혜겠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늘 이런 깨우침, 깨달음을 주시는 글들이 저는 너무 너무 좋습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