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16:1-3) 인간이 지닌 가장 큰 문제
구약성경강해(33) / 민수기강해(23)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 오십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민16:1-3)
그렇게 쥐어터지고도...
가데스 바네야에서 하나님을 거역한 이스라엘의 20세 이상 기성세대는 전부 광야에서 방황하다 생을 마치는 형벌을 받았습니다. 본문 기사의 연대가 분명하지 않지만 그런 방황의 와중에도 또 다시 모세의 지휘권에 도전하여 하나님의 끔찍한 심판을 받았다는 기록으로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이후에 하나님을 거역하여 여러 번 심판을 받았습니다. 금송아지 우상 사건에서 삼천 명이, 가나안을 악평한 정탐꾼 열 명이 죽음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본문 바로 앞(민15:32-36)에선 안식일에 나무를 한 사람이 진 밖에서 백성들에게 돌로 맞아 죽는 벌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성경을 읽는 독자로선 시쳇말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그렇게 쥐어터지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데스 바네야에서 당신을 멸시하고 모여서 거역하는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레위 자손, 르우벤 자손 몇 명과 족장 이백오십 명이 모여서 거역했는데 단순히 죄악에 참여한 인원이 많아서 죄가 큰 것이 아닙니다.
개인이 은밀하게 지은 죄와 달리 여러 명이 작당해서 공개적으로 당신을 거역하는 것 자체로 이미 당신을 아주 멸시한 것입니다. 다른 회중이 다 보아 알기 때문에 악한 영향을 미치고 결과도 큰 폐해를 낳기 때문에 엄격히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아무렇지 않게 또 다시 하나님을 거역했다는 사실도 이상하지만 거역한 이유는 더욱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여호와의 총회 위에 모세와 아론이 스스로를 높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3절)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모세가 어떻게 출애굽을 이끌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회막에서 매일 여호와와 직접 대면하여 분명하게 교통하고 있음도 압니다. 반역에 참여한 족장 이백오십 인이 총회에서 택함을 받았다고 했는데(2절) 분명히 모세가 주도 하에 선택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시내산에 화염으로 강림하신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백성들은 가까이 가면 죽을 것을 알고 두려워서 근처에도 오르지 못했으나 모세 혼자 올라가 40일 금식을 두 번이나 행하면서 여호와로부터 거룩한 율법을 직접 수여 받았습니다.
특별히 고라는 제사장 지파로서 아론의 두 아들이 하나님께 잘못된 제사를 드림으로써 성막 지성소에서 직접 나온 여호와의 불에 즉사하는 심판을 받았음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더더욱 하나님께 거역할 것은 꿈도 꾸지 말았어야 합니다. 어떻게 이런 궤변 중에 궤변을 내세우며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습니까? 우리로선 겁이 나서라도 꿈도 꾸지 못할 짓입니다.
현재 정책을 완전히 뒤엎자.
그들이 모세가 하나님이 지명한 충성된 종이라는 사실을 몰랐거나 잊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모든 일을 혼자 결정하고 지시하는 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직접 거역한 것도 아닙니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3절)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그분을 믿고 따르니까 그들도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으며 오히려 여호와의 뜻은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 둘이서 밀실에서 결정하여 지휘하지 말고 집단으로 의사를 결정하는 방식 즉, 일종의 민주대의정치로 바꾸자는 요구인 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고라 일당을 심판했습니다. 그렇다고 요즘으로 쳐서 하나님이 교인들에게 최종 의사결정권이 있는 회중교회 체제를 반대하고 장로들 몇 명이 치리하는 당회정치를 찬성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과 상관없이 모여서 당신을 거역한 것이 심판의 원인일 뿐입니다. 무엇보다 고라 일당이 주장하는 바의 진짜 속내를 살펴봐야 합니다. 우선 르우벤 자손이 적극 거역에 참여한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남 즉,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장자 지파였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첩 빌하와 관계를 가져서 아비의 침상을 더럽힌 죄로 야곱으로부터 장자권을 받지 못했습니다.(창35:22)
지금 제사장 지파와 장자 지파가 반역의 주모자였습니다. 레위 자손 고라는 대세자상 아론에게, 르우벤 자손 다단과 아비람과 온은 여호와 총회의 수장인 모세에게 대든 셈입니다. 그러니까 모세가 고라에게 “레위 자손으로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아론의 직분)을 구하느냐”(16:10)고 다그쳤습니다. 모세는 그들의 속내를 이미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모세가 다단과 아비람을 부르러 보냈어나 거절하면서 모세더러 “오히려 스스로 우리 위에 왕이 되려 하느냐”(16:13)고 반발했습니다. 모세가 수행하는 왕의 역할이 도무지 마음에 차지 않기에 바꾸거나 그 직분을 나눠 갖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모세의 독재 아닌 독재를 싫어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도 지도자가 되고 싶다는 욕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현재의 지도부를 완전히 교체 내지 개편하자는 뜻인데 그럼 지금 집행하고 있는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전면 개혁하자는 요구입니다.
현재 모세가 행하는 정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형벌을 내리신 뜻에 순종하여 광야를 40년 간 방황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세 자신이 독단적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여호와가 아침저녁으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 인도하고 있는 중입니다. 따라서 이 반역은 지도체계와 방식과는 사실상 관계없고 하나님의 광야 방황의 명령에 순종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다단과 아비람은 모세가 이스라엘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광야로 올라가지 아니하겠노라”(16:14)고 분명하고도 정확하게 거역하는 의도를 표명했습니다. 또 다시 무미건조한 광야에서 방황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다고 대든 것입니다.
그들은 정말로 그렇게 쥐어터지고도 회개는커녕 새 장관을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데서(민14:4) 단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에게 벌을 받아 이 광야에서 죽게 되었는데 가나안하고 전쟁이나 치러보고 죽겠다는 것입니다. 아말렉 족속에게 패배해서 죽더라도 광야에서 사십 년 고생하는 것보다 낫고, 자기들 힘으로 승리하면 하나님이 다시 용서해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으리라고 지레 짐작한 것입니다.
보고도 믿지 않는 이스라엘
누차 강조하지만 이스라엘이 결코 사악했거나 어리석지 않습니다. 살펴본 대로 그들이 여호와를 완전히 버린 것도 아니며 상황 파악을 잘못한 것도 아닙니다. 아주 영악했고 여호와의 긍휼에도 실 날 같은 소망을 걸었습니다.
어쩌면 자기들 생각이 더 합리적이고 여호와의 언약도 어떻게든 실현하는 것이니까 하나님의 뜻이 자기 쪽에 함께 한다고 확신했을 수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스스로 높이지 않았다는 점을 모를 리는 절대로 없으며 자기들 명분을 강조하기 위한 핑계로 그렇게 말한 것일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로부터 1500년 후에도 똑같은 잘못을 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그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임을 몰랐던 것이 결코 아닌데도 거역으로 그치지 않고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예수님더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즉, 메시아라고 선언한 침례 요한은 헤롯 안티바스의 잘못을 꾸짖는 바람에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옥중에서 소식을 듣자니 예수님의 행적이 석연찮아서 제자들을 보내어 알아보게 했습니다. 메시아라면 예루살렘에 올라가 유대지도자들과 힘을 합치든지 아니면 뭔가 적극적 전면적으로 개혁해야 하는데도 갈릴리 변방에서 주로 세리, 이방인, 중환자, 창녀,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 상담 교제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마11:3) 주님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도 답해주었습니다. 누구라도 당신의 사역과 가르침을 보고 듣기만 해도 당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 그대로 유대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 때에 주님께 열광하며 왕으로 세우려 했습니다. 또 주님처럼 가르치는 자는 지금껏 아무도 없었고 신령한 권세가 따른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정통파도 아닌 나사렛 출신의 한 시골 랍비를 왕에게만 행하는 환영을 보여주었습니다. 야자 나뭇잎을 길에 깔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열렬히 찬양했습니다.
자기에게 말로만 야단 친 요한의 목을 쳤던 헤롯왕의 눈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도 백성들은 대놓고 헤롯이 왕이 아니고 예수가 왕이라고 선언한 셈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어떤 인간도 행할 수 없는 이적을 하늘의 권능으로 베풀었고 또 천국 복음의 메시지에 가슴이 뜨거워짐을 체험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일부 바리새인들마저 예수님께 호의를 보이며 따랐습니다.
그러다 단 삼일 만에 그 적극적인 호응이 정반대로 적극적인 저주로 돌변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자기들이 바라는 바대로 따라주지 않았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정치적 메시아가 되어서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사역 3년 동안에 치유하고 회복시켜 준 사람들 대부분이 보통 이하 아니 최저 계급과 신분에 속했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고 여호와의 총회에서 추방된 자들이었습니다. 모세가 세계 최강 애굽에서 큰 기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해준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입니다. 주님이 그 절기에 예루살렘에 입성했기에 유대인들이 왕의 대관식을 치러준 셈인데도, 여전히 침례 요한의 의아해 했던 행적을 그대로 이어갈 뿐입니다. 자기들에게 유익될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참으로 비겁하고 치사하고 사악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백성들, 지금으로 치면 한국 수도 서울에 사는 중상류층 일반 대중에게 잘못한 점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순전하게 믿으라고 가르친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님을 죽이려 들었습니다.
배후에 사탄의 부하인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조종 농간이 있었지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 뿐 아니라 자기 말대로 안 따르면 미워하고 자기에게 아무 피해가 없어도 저주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자기만 높이 세우려드는 모든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여호와의 총회는 물론 여호와 그분 위에 높여서 왕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가장 큰 잘못은?
본문의 고라 일당이나 약 1500년 후의 유대인들의 공통된 죄악이 무엇입니까? 세속적인 탐욕이 많고 자기 뜻대로만 하려는 고집입니까? 하나님을 거역하고 스스로 자기를 높인 것입니까? 물론 그런 점들이 첫째이자 가장 중대한 잘못입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의 진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잘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옳은 일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러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반대로 악을 따르겠다고 의도적으로 선택했습니다. 최소한 그런 줄 스스로 알면서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아무 말 없이 올라가 죽으셨습니까? 인간은 말로 가르쳐야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야단치거나 형벌을 가한다고 듣지 않는다는 점도 주님은 알고계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도 그렇게 벌을 받았는데도 또 다시 모세와 아론 즉, 여호와께 거역하고 있지 않습니까? 겉으로는 여호와의 이름을 들먹이면서까지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그를 따를 능력도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열광했으면서도, 거꾸로 죽이려 드는 판국에 주님이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당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러 온 침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보고 들은 것을 전하라고 대답하면서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마11:6)라고 덧붙인 까닭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안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확신하기에 주님을 따라 실제로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바뀌고 좁고 협착한 길을 따라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가는 넓고 편안한 길이 오히려 인간으로 실족시키는 것이며, 반대로 머리 둘 곳이 없이 고달프고 외로운 길로 가는 것이 오히려 안전하고 영원한 참 안식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바로 이런 진리에 대한 가장 실감나고도 생생한 증인이지 않습니까? 그느 스승을 목숨 걸고 따르겠다고 큰소리쳤습니다. 실제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을 체포하러 온 대세장의 관원에게 칼을 휘둘렀습니다. 유대 당국과 로마 제국의 반역죄로 몰려 죽어도 좋다는 뜻을 보였습니다. 예루살렘 입성할 때의 유대 대중이 주님께 보인 반응과 동일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스승이 대제사장의 재판장에서 아무 항변도 하지 않고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을 보자 자기 목숨이 아까워서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선 제자들은 물론 스승이 바로 곁에 있어서 안심하고 의를 행했을 것뿐입니다. 그러나 재판장에는 아무도 자기를 도와줄 수 없고 예수의 제자로 밝혀지면 자기도 십자가 처형당할 것이 빤합니다.
베드로가 세 번 스승을 부인하면서 자기가 지금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몰랐을 리는 절대로 없습니다. 진짜 속내는 예수님을 시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얼마든지 겟세마네 동산에서처럼 용기를 내어서 ‘Yes’라는 한 마디 쯤은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뜨겁게 주님을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스승을 세 번이나 배반한 것은 분명히 자신의 선택이었습니다. 장렬한 의로운 죽음보다는 치사하고도 평범한 연명을 택한 것입니다.
세 번 부인한 후에 곧바로 밖으로 나가서 통곡했습니다. 남자 성인이 그것도 고대의 절대적 남성우위 사회에서 속으로 삼키는 울음이 아니라 통곡한다는 것은 예사 일이 아닙니다. 세 번을 부인하는 과정에 베드로는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눈으로 본 것입니다. 이렇게 쉽게 자신의 평소 사상 신념과는 달리 죄악인 줄 알고도 자신이 선택해서 행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 개인으로서는 천지가 개벽하는 것 같은 일이었습니다. 사실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그렇게 행해 왔지만 모르고 지나치다가 평생에 처음으로 진짜 자기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가 의도 계획은커녕 꿈도 꾸지 않았는데도 말입니다. 성령이 그의 심령 깊숙이 역사하여 견고하게 버티던 사탄의 진을 무너뜨렸던 것입니다.
십자가 예수 앞에서 뒤집어진다는 뜻은?
흔히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분의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그 심령이 뒤집어져야 한다고도 합니다. 그 뜻을 너무 신령하고 경건한 차원으로 접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믿었다고 도덕적으로 아주 의로워지고 종교적으로 아주 경건해지고 초자연적인 은사를 받아 아주 신령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 의미를 아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통곡 같은 체험을 하면 됩니다. 또 다시 아주 극적이며 간절하고도 뜨거운 회개를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세 번 부인하기 전에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고 있고, 스스로 그럴 수 있는 능력도 있기에, 자기가 선택해서 의지적으로 실천하여서, 얼마든지 자신도 의로워지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통곡한 후에는 마지막 부분 하나만 잘못 생각했음을 분명히 깨달은 것입니다. 무엇이 진리인지 알고 그렇게 따를 능력도 있는데 자기 속에 의도적으로 반대로 선택하는 힘이 있고 그 앞에 자기는 속수무책이더라는 점을 알게 된 것입니다. 또 그런 자신이 너무 싫고 저주스러워 통곡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너무나 가난한 심령을 발견하고 그 사실을 애통해 한 적이 있습니까? 단순히 교리로 배우고 들은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런 깨달음 자체도 실제로 체험하지 않고는 모릅니다. 배우고 들어서 알고 실천할 수 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이 또한 실제 삶의 사건으로 체험해야만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존재 전부를 걸고서 통곡하는 회심을 최소한 한 번은 거쳐야 합니다.
더 중요하게는 예수를 믿은 후에는 더더욱 수시로 그래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성경의 진리를 다 배웠고 그대로 따르리라고 수도 없이,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짐하고 실현하려고 의지적으로 노력합니다. 그런데도 하루에도 몇 번씩 번번이 실패할 때가, 하루에 한 번이라도 성공한 적보다 훨씬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결코 실망할 필요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동일한 문제로 크게 괴로워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여 옛 자아가 완전히 깨어져서 사도가 된 후에도 그랬으니 그 괴로움은 우리보다 몇 배나 더 심했을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19,23-24)고 피를 토하듯 절규했습니다.
그는 수시로 가난하다 못해 비참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영적 실체를 똑똑히 보았습니다. 스스로의 의지로 아무리 의로워지려 노력해도 번번이 실패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이 직접 제제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명하신 대로 오직 주님의 십자가 긍휼만이 믿기 전이나 믿은 후에나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또 다른 비밀
왜 예수 십자가만 붙잡아야 합니까? 주님의 그 권면을 다시 새기며 기도하면 자기 부인이 되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순종할 수 있습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의지적으로 노력한다고 쉽게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주심의 십자가에서 절대로 간과해선 안 되는 그분만의 은혜를 깨닫고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어 이 땅의 죄인들에게 구원을 베풀 의무와 책임이 전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통곡하기 전이나, 당장 저부터도 불신자 시절에는 내 스스로 의로워질 수 있다고 큰소리 쳤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의, 아니 지금도 모든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 그와 같습니다. “예수가 무슨 필요 있느냐 인간끼리 서로 협력하고 선을 행하여서 이 땅에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는데!”라고 큰소리칩니다.
모든 인간들이 얼마든지 스스로 잘 할 수 있다고 하니까 하나님으로선 그냥 그대로 두어도 됩니다. 구태여 베들레헴 교외의 비천한 말구유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온갖 비방 멸시 박해를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그 극심한 고통과 수치를 겪을 이유라곤 전혀 없었습니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라고 아무도 요구하지도 않았고 그런 구원 방식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당신께서 부활 승천하여 온 천하에 하나님의 독생자임을 완전히 다 드러내었어도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겐 시험거리가 되었고 이방인들에겐 어리석게 여겨져 완전히 배척받았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구원 방식이라고 외면합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당신께서 지은 당신의 자녀일 뿐 아니라 아브라함과 언약했기에 이 땅에 그 약속을 지키려 오신 것입니다. 인간의 이런 너무나 가난하고 비참한 영적 실상이 불쌍해서 당신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었고 또 애굽에서 일방적으로 구출하여서 당신께서 주도적으로 은혜의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지금 고라 일당은 하나님의 구체적 명령을 듣고도 의도적으로 거역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낮아져 자신의 실체를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장 낮아져 오직 그분이 시키는 일만 하신 예수님을 이단의 괴수라고 십자가에 죽였던 자가 유대인들입니다. 본문에선 그 선조들이 여호와 앞에서 완전히 죽었다 살아나 자기 전부를 그분께만 의탁하는 모세를 스스로 여호와 총회 위에 높이는 자라고 비방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전 백성 중에 모세만큼 억울한 자는 없습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던 한국의 가수 사이가 나이 들어서 군대를 두 번째 가는 경우와 비교됩니다. 나이 팔십에 다시 사십 년을 광야에 방황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러다 죽을 수도 있다고 각오했을 것입니다. 모세라고해서 광야 생활이 편하고 좋았을 리는 만무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연약함 무능함 어리석음 나아가 죄의 본성을 절감하고 있었고 그래서 스스로는 절대로 한시도 살 수 없으며 하나님의 베푸시는 긍휼만이 자기 삶의 근거요 힘이 됨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묵묵히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도 베드로처럼 미디안 광야에서 떨기나무 불꽃으로 임재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했습니다. 모세도 그 예수 십자가 앞에서 통곡의 뒤집음이 있었기에 주님 가신 골고다 언덕을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걸어갔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래서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귀하게 여겼다고 선언했지 않습니까?(히11:26)
지금 반역에 참여잔 족장 이백오십 명을 회중에 유명하다고만 했지 특정 지파를 지칭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회중들 모두가 광야만 방황하다 죽는 것은 죽기만큼 싫다고 떼를 쓴 것입니다. 고라 일당은 모세와 정반대로 애굽의 모든 보화를 추구하려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것입니다.
본문의 고라당의 반역 사건을 하나님이 세운 종을 거역했다는 종교적 차원으로만 접근해선 안 됩니다. 솔직히 우리 또한 조금만 삶이 불편해도 하나님을 의심 거역하지 않습니까? 최소한 어떻게든 그 불편함을 없애달라는 기도는 뜨겁게 죽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지금은 시간과 여유가 없어서 그렇지 앞으로 형편이 나아지면 얼마든지 주님 뜻에 따를 수 있고 심지어 아프리카 선교사라도 헌신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러는 자신의 믿음이 상당하거나 최소한 나쁘지는 않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를 변호하기 바쁩니다. 엄밀히 따져서 본문의 이스라엘과 동일한 모습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실체가 너무 싫어서 통곡했던 당시로 돌아가지 않으면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바울처럼 내 속의 흑암의 죄로만 새까맣게 칠해진 또 다른 나 자신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도 저에게 가장 먼저 시급하게, 아니 오직 필요한 것은 주님의 긍휼뿐이라는 고백이 새벽 기도마다, 아니 매순간마다 입술에서 저절로 새어나와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언제든 고라당의 반역에 빠질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약 시대의 두 위대한 사도 베드로와 바울조차 그런 판국에 예수님이 어떻게 십자가에 죽지 않을 수 있습니까? 또 그 십자가 외에 과연 인류에게 어떤 해결책이 가능하겠습니까? 지금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받아 그 은혜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실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모두의 삶과 인생은 물론 존재 자체의 처음과 끝입니다. 날마다 매순간마다 바로 그 십자가의 큰 은혜와 사랑과 긍휼 안에 내가 붙들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벽에 그 은혜를 진정으로 확인하고 붙잡으면 그 날이 승리하지 않고 지나가는 법이 결코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7/13/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