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6;22-27) 물질이 썩는 진짜 이유?
오병이어의 기적 (7)
“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6:22-27)
생애 최고의 소풍날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에 참석한 성인남자만 오천 명이었으니까 여성과 아이들을 합치면 그 두 세배는 모였습니다. 그런데 한 명의 아이만 떡 다섯과 물고기 두 마리의 도시락을 갖고 왔습니다. 그 아이 외에는 아무도 식사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끼니도 못 이을 정도로 가난한 자이고 그 아이만 부잣집 자녀였을 리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질병의 고침을 받으려고 많은 무리가 모였지만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니면 주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자 모두가 갈급해서 부랴부랴 급하게 모였을 것입니다.
거기다 주님이 지금껏 들어보지도 못한 내용을 권세 있게 가르쳤고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권능으로 그 자리에서 불치병을 완전히 고쳐주는 이적을 일으켰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의 큰 잔치가 열린 것입니다. 사람들이 감격에 들떠서 한 명도 떠나지 않았고 지루한 줄도 배고픈 줄도 모르고 있다가 어느 듯 날이 저물었던 것입니다.
도시락을 갖고 온 그 아이는 틀림없이 부모와 떨어져 혼자서 왔을 것입니다. 부모가 동행했다면 도시락을 자기들 것까지 챙겨서 부모가 갖고 있어야 합니다. 아이 혼자 도시락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부모가 반드시 부자가 아니라도 아이에 대한 사랑이 극진하며 나아가 혼자 보낼 정도로 자기 아이를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도시락을 챙겨준 것도 집회 시간이 늦어질 것을 미리 예상한 것입니다. 아마도 부모가 이전에 예수님의 집회에 참여해 큰 감동을 받았기에 아이도 꼭 그 가르침을 듣게 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순전한 믿음의 부모 밑에 순전한 믿음의 자녀가 자라는 법입니다. 예수님이 어렸을 때 처음으로 성전에 결례를 받으러 갔다가 성전에 혼자 남아서 어른들과 율법을 토론했던 일을 연상케 합니다.(눅2;41-51)
그 한 아이만 가지고 있던 도시락으로 나머지 모든 어른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에 물 위를 걷는 기적이나 유대인들과 토론하는 내용을 감안하면 예수님이 이 아이의 도시락까지 포함해 처음부터 끝까지 다 계획하시고 모든 과정을 주관하셨다고 봐야합니다.
그 현장에 있던 유대인들로선 주님의 큰 권능을 한 나절 동안에 세 번이나 생생하게 체험했습니다. 먼저 지금껏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에게서 배운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권위가 말씀에 흘러넘쳐 영혼에 찔림이 생기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해주었습니다. 둘째는 인간이 도저히 고칠 수 없는 각종 질병을 일일이 완벽하게 치료해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침 받을 환자가 더 이상 남지 않자 비로소 모두가 허기를 느꼈는데 주님이 그 자리에서 빵과 고기를 계속 만들어내어서 먹게 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만들어주신 것이라 틀림없이 맛이나 영양에서 특별했을 것이며 먹자마자 기쁨과 힘이 샘솟았을 것입니다. 마치 아이들 소풍에서 특급호텔이 마련한 최고급 도시락과 게임기 같은 선물을 잔뜩 받아서 생애 최고의 날을 보낸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왕으로 삼으려는 이유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노골적으로 주님을 왕으로 모시려 한 것은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할 때를 빼고는 이때가 유일합니다. 이전에도 주님으로부터 동일한 가르침과 치유는 많이 받았으니까 단순히 그 크신 능력과 권세 있는 가르침 때문만이 아닙니다.
왕은 모든 백성의 생계를 책임져 주고 나라 전체의 질서를 유지하며 대적의 침입에서 보호해주는 막중한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백성들도 그 명령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 전까지의 모든 기적은 개인적 혹은 소수의 사람에게만 베풀어졌습니다. 그러나 오병이어는 그 수혜자의 규모가 엄청난데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부 다 받았습니다. 당시로는 이만 명 정도라도 한 나라나 성읍을 세우고 다스리는 왕이 있었습니다. 공개토론을 하지 않았어도 예수님이 왕으로서 자격에 가장 합당해 보인다고 모두가 무언중에 합의한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항은 예수님에게 무기, 군대, 제사장, 신하 같은 체계적인 조직이 없었습니다. 소수의 제자들이 오병이어에서 행한 것이라곤 음식을 배달하는 심부름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혼자서 말씀 한 마디로 혹은 하늘을 보고 기도만 하여 기적들을 베풀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만큼 능력이 출중한 왕은 세상에서 찾아보려야 절대로 없습니다.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고 그들은 판단했습니다. 이제 자기들이 군대와 신하가 되어 충성하면 천하의 로마제국도 단번에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요구를 잘못되었다고 탓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있었어도 당장 왕으로 모시려 했을 것이며 그러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판입니다.
반면에 주님은 그들의 생각을 다 아시고 오병이어 기적이 끝나자마자 곧장 산으로 피신해버렸습니다. 그 사정을 모르는 백성들은 주님이 하루 종일 수고하신 것을 옆에서 보았으니까 단순히 쉬러 가셨나보다 여겼을 것입니다. 일부 사본에만 있다는 표식인 괄호로 쳐진 23절에서 떡 먹던 그곳에 가까이 왔다고 했듯이 이튿날 아침부터 어제의 현장으로 가서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찾은 까닭을 22절은 배 한 척밖에 없고 어제 밤에 제자들만 먼저 배타고 떠나는 것을 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타고 갈 배 한 척만 남겨두고 제자들이 떠났으니 주님은 아직 근처 어디에 남아 계신다고 본 것입니다.
아무리 샅샅이 찾아도 없으니 어쩌면 바다를 건넜을 수 있다고 여기고 디베랴에서 주님을 만나러 온 사람들과(23절) 함께 배를 나눠 타고 가버나움으로 건너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대뜸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서 시작하여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에 관해 리뷰 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이라고 불리는 마태, 마가, 누가의 세 복음서가 저작 회람된 후에 최소한 한 세대 후에 저작된 것으로 봅니다. 앞선 세 복음서는 예수님의 사역을 대체로 발생순서에 따라 사건 중심으로 기록했습니다. 반면에 요한은 세 복음서가 교인들 사이에 회람되어서 익히 알고 있는 내용보다는 숨겨진 이야기와 기적들을 선정했습니다. 무엇보다 유대인과 예수님의 논쟁 위주로 기록하며 주님의 신적인 정체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일곱 기적을 선정했고 또 일곱 강화로 구성되었으며, 지난주에 말씀드린 에고 에이미 표현도 일곱 가지를 선정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에 관한 리뷰는 네 번째 강화이며 본문 25절부터 시작해서 71절까지 이어지는데 그 주제는 예수님이 주실 생명의 떡입니다. 백성들은 오병이어 기적에서 먹었던 그런 떡을 계속 달라고 요구했지만 주님은 그런 떡을 원한다면 왕이 되어줄 수 없고 대신에 다른 떡을 주겠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살펴본 대로 그들의 요구는 비난 받을 성격이 아니며 당시 상황에서 충분히 이해해줄 만했습니다. 주님의 권능을 온전히 인정했으니까 로마에 억눌리며 경제적으로도 궁핍하고 온갖 질병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구출해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우리도 처음 예수를 믿어보려 할 때에 그들과 똑같은 이유 때문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본문은 그들의 숨은 의중을 꿰뚫어 아시기에 첫마디부터 아주 냉정하게 잘라서 거절했다고 말합니다. 그럼 처음 교회에 출석한 우리의 동기 또한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백성들이 구체적으로 요구도 하지 않았는데 첫마디로 거절한 것은 앞으로 전개될 논쟁의 주제이자 전제라는 뜻입니다. 그 뜻을 정확히 알지 못하면 이어지는 말씀들도 정확히 해석하지 못할 것입니다.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사람들이 주님을 보자마자 언제 여기 오셨느냐고 물은 뜻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문자 그대로 언제 바다 건너편에 왔는지 궁금하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제자들만 떠나고 예수님은 떠나지 않은 것을 확인했습니다. 아침까지 주님이 타고가야 할 배 한 척이 그냥 남아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볼 때는 이쪽으로 건너올 방안이 도무지 없는데도 언제인지 모르게 건너와서 제자들과 함께 있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밤에 배를 타고 건넜다는 것은 오병이어 현장에서 가버나움으로 오려면 호수 가로 둘러오는 것보다 훨씬 거리가 짧아 시간을 줄일 수 있거나 아니면 걸어올 길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도 그런 사정은 마찬가지인데도 어엿이 가버나움에 와있습니다. 한 밤중에 물 위를 걸어왔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겠지만 어쨌든 이번에도 뭔가 신적인 능력을 발휘했는가보다 대충 짐작만 했을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들이 예수님을 아주 열심히 찾아다녔다는 점을 제발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를 두고 먼저 갔느냐는 뜻이니까 자기들로선 예수님과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가버나움에 이미 먼저 와있는 능력까지 보니까 왕으로 삼아야 할 확고한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 셈입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당신을 왕으로 추대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릴 테니까 제발 거절하지 말고 승낙해달라는 의미를 넌지시 비췬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속내를 어제저녁부터 꿰뚫어 아는 지라 일언지하에 냉정하게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를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합니다. 언뜻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표적이 바로 떡을 나눠주어 배불리 먹게 한 것인데 주님은 그 둘을 별개의 일로 구분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둘 중에 어느 쪽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전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너희들은 지금 표적보다 배부른 것이 더 좋기에 나를 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어떤 표적을 내든, 아니면 표적이 아닌 어떤 방법이라도 배만 부르게 해주면 왕으로 모시겠다는 뜻입니다. 지금 로마가 지배하고 있지만 황제가 세금을 대폭 줄여주거나 이번 코로나 사태처럼 기본 소득을 준다면 군말 없이 평생토록 왕으로 모시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부패한 유대종교 지도자들과 그에 빌붙어 먹고 사는 성전의 환전상과 제물 장사치들은 기존 체제를 고수하여서 재정적 정치적 기득권을 계속 누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주님께 씌웠고 민족의 원수인 로마의 빌라도 총독과 에돔 족속인 헤롯왕과도 협력 공모했습니다. 배부른 까닭이라는 것은 왕이 될 자격은 오직 현실적 축복을 보장해주는 것에 달렸으며 또 그렇게만 해주면 예수님이 아니라 누가 왕이 되어도 좋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그들이 찾는 양식은 썩을 양식이라고 표현했고 그것을 구하려고 일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현실 삶에 필요한 물질 자체가 부패하면서 더러워지고 역겨운 냄새를 내니까 추악하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물질은 중요한 것으로 신자도 열심히 돈을 벌어서 이 땅에서의 자신의 현실적 삶을 개선시켜 나가야 합니다.
물질을 추구하는 목적과 방법에서 썩는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과 대비하면 영생을 주지 못하니까 즉, 영원하지 못하니까 썩는 떡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왕으로 삼으려 하지만 영원한 구원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이 이 땅에서의 삶만 풍요롭게 채워달라는 목적뿐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표적만 보던지 표적을 떡보다 먼저 본다는 것은 표적을 행한 사람과 표적이 함의하는 의미에 시선을 집중시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성품, 자질, 능력, 나아가 나라와 국민을 다스리는 기본 방향 등을 보고서 왕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떡을 베푼 것도 예수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예수님이 아니면 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만약 백성들이 표적을 먼저 혹은 표적만 보면 너희의 왕이 되어 줄 수 있다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더러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구하라고 권한 것입니다. 현실이 풍요하다고 그것이 영생을 얻는 전제나 조건이 절대 아니며 나아가 영생을 얻은 결과 내지 표식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신께선 너희들에게 현실 풍요를 보장해주려 이 땅에 온 것이 절대 아니니까 당신에 대해서 그런 기대는 아예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결론적으로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 치신 자니라”고 선언했습니다. 인자는 장차 인류를 다스릴 왕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실 것이라는 다니엘서의 예언을(7:13,14) 주님이 자신에게 적용한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이 태초부터 계획해 놓은 대로 당신이 바로 이 땅을 다스리러 오신 왕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통치를 가장 먼저 받아야 할 동족더러 현실 축복 때문이라면 당신이 그들의 왕이 되어주거나 그들도 당신께 순종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말합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이 이미 그렇게 인치셨기에 유대인들이 요구한다고 절대 수정될 수는 없습니다.
현실 축복은 아예 기대하지 말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잘 믿으면 현실이 풍요해질 것이라는 기대는 아예 처음부터 접으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물질이 추악하거나 필요 없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거기다 예수님은 분명 구원 받은 신자의 이 땅의 현실적 삶까지 주관하는 왕이십니다. 그러나 물질은 인간이 평강과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진정으로 인간답게 풍요롭게 살아가는 것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종교적 교리로 억지로 수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신자에게 복을 주시기 싫어서 또 할 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인자로 오셨기에 이 땅에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 고난 가운데 살고 있는지 체험적으로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당장 로마를 물리쳐 줄 수 있고 날마다 오병이어처럼 먹여줄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 밤에도 열두 영도 더 되는 천군천사를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마26:53)
주님이 백성들의 요구를 거절한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인데 백성들 본인에게 결코 유익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도 오병이어 같은 최고 좋은 소풍날은 일생에 몇 번 밖에 오지 않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로또에 당첨되고 그날로 조기 은퇴하여 매일 유토피아처럼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복권당첨자들의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그 인생 말로가 비참해졌다고 실제조사에서 밝혀졌습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그분을 찬양하고 또 그럼으로써 인간끼리 서로 사랑으로 섬기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리 물질이 풍부해도 그 인생은 썩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상 최고의 호사를 누렸던 솔로몬이 전도서에 고백한 내용을 보십시오. 하나님 없이 해 아래서 인간이 행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고 헛되며 헛되다고 탄식했습니다. 비교급 최상급 표현이 없는 히브리 어법으로 따지면 세 번 반복은 최고로 강조한 표현입니다. 헛된 면에서 최고로 강할 뿐 아니라 헛된 것 외에는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번 코비나 사태로 모든 사람이 가장 아쉽다고 절감한 것이 바로 사람 사이의 따뜻한 접촉이지 않습니까? 마음 놓고 허그 하고 입맞춤하고 아니 악수라도 하고 싶은데 못한 것입니다. 단순히 격리되어서 사람과 교제를 못해 외로워진 탓이 아닙니다. 인간은 서로 사랑해야만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감옥에서 최고의 형벌이 바로 독방에 가두는 것입니다. 인생의 기쁨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이성이 온전히 성숙되지 못한 어린 학생들도 왕따가 되면 자살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유대인들의 현실적으로 딱한 사정을 모를 리 없고 함께 아파하고 안타깝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병이어 기적을 베푼 것입니다. 로마도 누가 뭐래도 악의 도성이자 물리쳐 주어야 할 이스라엘의 대적입니다. 그러나 그런 후에는 또 다른 로마가 나타날 것이며 이스라엘 스스로도 로마 이상의 죄악을 범할 것입니다. 현실적 풍요가 인간사회 고난의 해결책이 전혀 아니며 인생에서 추구할 첫째 목표가 되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는 것이 인간 문제의 가장 첫째 원인이자 인간이 범하는 첫째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서로 자신이 형통하고 안일하려는 목적으로 살아가니까 세상은 저절로 추악해지고 그렇게 얻은 물질도 갈수록 점점 더 썩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질 안에는 사랑이 없다.
물질이 썩는다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히”라는 제임스본드 시리즈 영화가 있지만 다이아몬드도 오랜 기간이 흐르면 산화작용으로 인해 썩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당신께서 제정한 이 땅의 법칙인데다 모두가 아는 그런 화학적 진리를 주님이 구태여 다시 강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물질이 썩는다고 즉, 영원하지 않다고 말한 까닭은 물질 안에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자체에는 사랑은 물론 어떤 고유의 가치도 없습니다. 물질은 그냥 물질로 가치와는 별개입니다. 그 물질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이며 특별히 사랑을 부여해야만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이 됩니다. 세상에서 인간이 만들어내는 유무형의 산물 가운데 영원한 것은 오직 진정한 사랑뿐입니다.
어제 오병이어 현장을 겉으로만 보면 도시락 하나로 수많은 물질을 창조해낸 하나님의 큰 능력이 발휘된 기적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진짜 실체는 이름 없고 믿음이 좋은 한 소년의 도시락으로 한 명도 빠짐없이 다 같이 나눠 먹는 사랑을 베푼 현장이었습니다. 떡 자체가 사랑의 떡은 아니지만 사랑으로 나눴으니까 사랑의 떡이 되었고 그것은 예수님이 나중에 주실 썩지 않는 양식의 상징이었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지금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하나님이 매일 공짜로 양식을 채워주거나 단순히 기도만 하면 뚝딱하고 양식이 채워지기만 바라는 것입니다. 물질만 채워지면 자기 영혼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채워질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솔로몬이 누린 온갖 영광도 주님이 먹이시는 한갓 들풀의 영광보다 못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육신의 생명은 매일 먹고 또 먹어야 유지되지만 영원한 참 생명의 양식은 하나님만이 그것도 단번에 줄 수 있는데다 영원토록 썩지 않습니다. 도덕이나 종교로 훈련하고 절제 한다고 결코 영혼의 영원한 안식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더 멍에가 무거워지고 구원에 대한 갈증만 늘어날 뿐입니다. 오죽하면 밤중에 니고데모가 주님을 찾아와서 구원의 길을 물었겠습니까? 그의 영적인 수준은 바다를 건너 급하게 예수님을 찾아온 본문의 유대인들보다 훨씬 높았을 텐데도 날이 갈수록 목마르고 허기졌기 때문입니다.
영원토록 썩지 않는 참사랑을 실행하는 일은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인간에겐 불가능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과 표적에, 특별히 십자가에만 나타났습니다. 니고데모, 베드로, 바울 같은 믿음의 선진들은 현실 양식에 부족함이 없었고 도덕적 종교적으로도 상위 0.1%에 들었던 자들이라 자신들의 구원은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골고다 이전에는 주님의 참 사랑을 알지 못했기에 자기들은 몰랐지만 실은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었습니다.
예수님 사랑을 모르는 세상에선 돈 때문에 부부가, 형제가, 아니 부모와 자식 간에 예사로 원수가 됩니다.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그분의 백성에겐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날 수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조건 자격과 상관없이 나아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조건 없는 용서를 베푸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세상에 없는 하늘에만 있는 참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표적 중에 가장 크고 중요하고 궁극적인 것이 골고다 십자가입니다. 그 표적으로 그 전의 모든 표적이 완성되었고 이전의 모든 표적들은 십자가 표적의 예표 상징이었을 뿐입니다.
흔히들 기독교 신앙을 물질을 멀리해야 하고 물질에 대한 탐욕이 죄의 근원처럼 가르칩니다. 죄송하지만 그것은 다른 도덕과 종교에서 다 가르치는 내용이고 엄격히 말하면 누구나 아는 상식입니다. 교회가 구태여 가르칠 내용이 아닙니다. 이 땅에 직접 오신 예수님이 가르쳤던 내용도 절대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의 탐욕을 추구하는 물질의 양이 많고 적음이나 질의 고급함과 열등함으로 구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게 자기만 사랑하고 자랑하려고 물질을 찾으면 그 액수가 아무리 적고 정당한 물질이라도 탐욕입니다. 하나님만이 물질을 비롯한 만사를 거룩하게 주관하시므로 그분이 나를 어떤 형편에 처하게 하든지 자족 감사하고 또 그 주시는 물질로 하나님 뜻에 맞게 사용하면 아무리 많아도 탐욕이 아닙니다.
물질이 하나님의 뜻대로 인간 사이의 참 사랑을 증가시킬 때만 물질로서 제 기능과 가치를 발휘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지 못하면 자기 창고에만 쌓아두니까 물질은 썩을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은혜로 거듭나서 그 사랑 안에 거하고 있어야만 이웃에게도 물질을 통해서 참 사랑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어떤 마음으로 믿음 생활을 하십니까? 정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라는 표적만 보십니까? 아니면 기도하고 교회 열심히 봉사했더니 문제가 해결되고 고난에서 구출되고 사업도 잘 되고 자식도 일류대학도 입학할 수 있기 때문입니까? 후자는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다는 사실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온전히 깨달아야 합니다. 또 매번 그런 내용만으로 기도하는 순간 첫마디로 거절된다는 사실까지 정말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난을 절대로 그냥 두고 보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식으로 구원해주시므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고난을 반드시 하나님이 합력해서 선으로 바꿔주실 것이니까 그분이 신자에게 바라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오직 당신과 참 사랑 안에서 교제 동행하자는 것입니다. 그럼 신자 본인은 물론 그 이웃까지 참 생명으로 살려내는 참 사랑을 부어주실 것인데 그 참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 인간 사회의 문제는 물론 신자 본인의 고난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없습니다. 또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신자에게도 매일 일어날 수 있는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6/20/2021)
물질에 대해 잘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의 어린시절, 학생시절 교회에서 가르친 것을 되돌아보면 기복신앙이 얼마나 교회안에 침투해있었는지 깨닫게 되고 저또한 육신의 떡만 구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말씀 뒷부분 64절부터
64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66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여기서 제자 중 믿음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물러갔다고 했는데 제자라는 말은 단순히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추종자란 말인지요? 육의 양식을 기대하고 따라다녔다가 더이상 채워주실 것 같지 않자 실망하고 떠난 것으로 이해하면 되는지요. 또 이 무리들을 현대교회에 비춰보자면 하나님이 주실 복을 기대하고 나왔다가 아닌 것을 깨닫자 교회를 떠난 신자라고 생각하면 되는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또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라는 부분은 예정론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