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6:34-40) 기독교의 핵심교리는 예수님이 제정하셨다.
오병이어 기적 (10)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34-40)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
예수님은 백성들이 달라고 요구한 모세가 준 떡은 이 땅의 육신적 생명만 보존할 뿐이므로 하나님이 하늘에서 주시는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달라고 요구합니다. 여전히 당신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에 생명의 떡에 관해 다시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 본문입니다.
놀랍게도 주님은 이 짧은 말씀 안에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 몇 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당신이 바로 생명의 떡이라고 선언했습니다.(35절)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인간의 삶에 없으면 안 되는 필수적인 요소인 떡, 빛, 생명 등에 비추어서 일곱 번에 걸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밝혔습니다. 떡이 상징하는 기본적인 의미는 모든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해서 보존하고 성장시키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문맥상의 의미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앞 33절에서 하나님이 하늘에서 주시는 떡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말씀을 받아서 자신이 바로 그 생명의 떡이라고 즉, 당신이 성부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라고 부연 설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38절에서 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동일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않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35절) 같은 뜻을 표현만 바꾸어서 두 번 강조했으니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는 생명의 떡은 반드시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믿으면 평생 동안 영적으로 갈급한 일이 전혀 안 생기고 평강과 풍요만 있을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어떤 힘든 일이 있더라도 주님께로 순전한 믿음으로 나가서 그분께 온전히 의탁하면 언제든 영적으로 다시 충만해질 수 있기에 더 이상 목마르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러 직접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므로 모든 인간이 반드시 믿고 경배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의 은혜 안에 들어오지 않은 자는 아무리 도덕적 종교적으로 의로운 일을 해도 항상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의 세 가지 핵심 교리
이어서 주님은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36절) 사람들이 당신의 사역과 이적과 가르침을 보고 들으면 당연히 믿어야 하는데도 완악하게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예수님께 마음을 열고 누구인지 진지하게 알아보려 하지 않는 한 믿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담의 원죄 하에 태어난 자연인의 영적인 상태는 전적으로 타락해서 스스로는 구원의 길을 도무지 알 수도 모색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주어야만 즉 성령이 간섭하여 그 영혼이 거듭나야만 당신께로 나와 믿게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37절) 이는 하나님이 당신의 절대적 주권으로 택한 자만이 믿게 된다는 예정구원을 뜻합니다. 주님은 이어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결코 내쫓지 않으며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목적도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37,38절) 성부와 성령과 성자 간의 위계질서를 지키는 차원이 아닙니다. 구원은 삼위 하나님이 태초부터 작정하여 택한 자에게 삼위께서 합동으로 은혜를 베푸신 결과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자는 당신께서 마지막 날까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시 살려준다고 합니다.(39,40절)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구원하신 자들에게 다시 구원을 취소하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죄에 빠지더라도 성령이 역사하여 반드시 회개케 하고 나아가 죄를 짓는 기회도 막아주면서 그리스도를 닮아서 거룩하게 자라도록 주님이 인도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신학적 용어로 이를 하나님의 ‘견인’(堅忍, perseverance 끝까지 견딤)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와 반대로 예수를 믿어도 죄를 범하면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교회에서 중직으로 열심히 봉사하다가 나중에 믿음을 버리고 타락하는 자들도 종종 있으니까 그 주장이 타당해 보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반드시 성령이 간섭하여 거듭나야만 이뤄지고(요3:3) 또 구원 후에는 성령님이 신자에게 평생을 내주해 계십니다.(고전3:16) 신자가 다시 타락하여 사탄에게 넘어가는 것을 성령님이 두고 볼 리는 없습니다. 그럼 성령님이 내주할 필요와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스스로는 도무지 의로워질 수 없으니까 당신의 생명으로 우리의 죄 값으로 다 감당하셨습니다. 구원 받은 신자는 단순히 그 형벌이 면제된 것이지 본성 자체가 완전히 거룩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상의 변화만 생겼습니다. 스스로는 깨끗케 될 수 없는 본성은 구원 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다시 죄를 지었다고 심판해 버리면 처음부터 조건부 용서라는 하자 있는 구원이 되며 결과적으로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와 효력까지 없어집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본성은 연약한 채로 두고 구원하셨기에 성령님을 내주케 하셔서 죄에서 지켜주고 건져주시는 은혜를 신자의 일생동안, 주님의 표현대로 하자면 마지막 날까지 베푸시는 것입니다.
어떤 신자의 종교적 의식과 행동 그것도 교회 안에서 봉사 기도하는 모습으로 믿음이 좋고 나쁘고는 물론 구원여부를 판단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한국 속담처럼 신자가 실족하는 모습을 두고 구원이 취소된 것처럼 함부로 비난 정죄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좋아 보였는데 교회를 떠나 완전히 세상으로 돌아 가버린 경우는 처음부터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다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평생을 죽을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정말로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 은혜 안에 있는 자라면 반드시 언젠가는 회개로 인도하거나 강권적으로 간섭하여 당신의 품 안으로 되돌려 놓을 것입니다. 그 전에 죄에 빠져 있을 때도 그 본인은 스스로 진심으로 회개하며 괴로워했을지 제 삼자는 모릅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끝까지 견인하시는 이유가 신자를 편애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승천하기 직전에 제자들더러 세상 끝 날까지 땅 끝까지 모든 민족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하여서 실천하게 하라고 명했습니다. 그 사명을 신자가 잘 수행하도록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함께 해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두 번 잘못했다고 구원을 취소시킬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베드로와 바울도 선교사명에 충성하는 중에도 죄를 지었다고 증언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불과 여섯 절인 이 짧은 말씀으로 구원에 관해서만 최소 세 가지 교리를 직접 가르쳤습니다. 원죄 하에 있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따른 예정구원과 구원 후의 성도의 견인이 그 셋입니다. 특별히 예정에 관해선 6장의 오병이어 논쟁에서 세 번이나 강조했습니다.(37,44,65절) 다시 말씀드리지만 바울이나 칼빈 같은 신학자들이 이 교리들을 각성 고안한 것이 결코 아니며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정리만 했을 뿐입니다. 예정구원이 하나님을 냉정하고 불공평한 분으로 만드는 성경저자인 사도들의 실수나 오류가 결코 아닙니다.
교리와 구원은?
자연인의 전적타락을 부인하는 것은 죄가 얼마나 심각하고 강력하며 교묘하고 끈질긴지 모르는 탓입니다. 자신의 영적 비참함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는 비겁함입니다. 예정구원을 부인하는 것은 삼위 하나님의 광대하시고 완전하신 주권과 섭리가 골고다 십자가에서 차고 넘치고도 오묘한 은혜로 완벽하게 실현되었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당장에 멸망당해 마땅하고 평생을 두고 한 치도 더 나아질 수도 없는데도 스스로 하늘에 올라갈 수 있다고 큰소리치는 교만입니다. 견인교리를 부인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과 의지가 얼마나 연약하고 부패했는지 철두철미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 받았으니 본성까지 의롭게 바꿔졌다고 착각하는 영적인 어리석음입니다.
물론 이 교리들을 몰라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교리는 구원의 여정을 사후에 체계적으로 설명한 것이지 실제로 구원이 이뤄지는 과정에선 어느 누구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합니다. 예수님도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처럼 성령의 간섭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모른다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요3:8) 그럼에도 구원은 반드시 이 교리가 말하는 과정과 의미에 따라서 이뤄지는 것은 분명합니다.
구원은 그래서 자신이야말로 천하죄인 중의 괴수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어 마땅하다고 절감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스스로는 자기 죄를 도무지 씻을 수 없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대신 죽어 그 형벌을 다 감당하셨다는 은혜를 순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 받은 결과는 반드시 이전의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 멋대로 살았던 삶을 청산하고 예수님만 주인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살면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하게 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일 뿐입니다.
무엇보다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이미 되어 있고 그 관계를 깨뜨릴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없습니다. 아들이 잘못했다고 내치는 아버지가 없듯이 하나님은 신자가 구원 후에 때로 죄에 넘어져도 언제든 십자가 긍휼을 바라며 눈물로 회개하면 씻은 듯이 용서해주십니다.
정말로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 자신의 전 인격을 걸고 항복한 체험이 있는 신자라면 본문의 예수님 말씀도 교리적 맥락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교리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바울이나 칼빈이 중생 회심한 과정이 오늘날 우리가 거친 구원의 과정과 결코 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심령의 깊숙한 내면을 다 아시는 예수님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진리라고 선포했지 않습니까?
청소년기부터 방탕한 삶을 살았던 어그스틴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옛 자아가 단번에 완전히 깨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는 그래서 믿기 위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서 믿는다고 고백했습니다. 믿기 전에는 하나님 쪽에서 주도적으로 인도하신 구원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몰랐지만 믿은 후에는 명료하게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교리를 안다고 구원 받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생명의 떡을 내려주어 구원받은 신자는 교리를 알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대로 주님이 그 믿음을 심어주었고 지금도 주님이 성숙시켜 주고 있고 앞으로도 어떤 장애가 있더라도 주님이 지켜주실 것입니다.
영생은 한 번 뿐이다.
본문에서 유대인들은 불신자시절의 우리처럼 주님의 십자가 구원의 도에 대한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들 생각과 욕심만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떡을 항상 내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나님이 내려줄 생명의 떡은 영생 즉 구원입니다. 구원은 한 번 얻으면 끝입니다. 구원으로 바뀐 새로운 신분에 변화가 없는 것이 영생입니다. 영생을 매일매일 다시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이 항상 줄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니까 한번 먹으면 결코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도 않는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므로 따로 구원을 얻을 필요와 염려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죽은 후의 구원을 확보했다고 믿으니까 이 땅에서 믿음으로 행할 일은 더 많이 충성하여서 더 많은 상급을 받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하나님의 일로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물었던 것입니다. 비록 주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지만 바리새인은 선행 구제 봉사에 열심을 내었으니까 민족의 반역자인 세리와는 달리 특별한 대우를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눅18:11)
충성한만큼 더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의 근본 사상은 행위 구원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하나님을 자신의 선행으로 조종할 수 있다고 여기는 엄청난 불경죄입니다. 그러니까 혹시 잘못하여서 구원에서 벗어나거나 벌을 받지나 않는지 염려하고 어쩌다 벌을 받더라도 가능한 적게 받고 싶어 할 뿐입니다.
거기다 구약성경만 믿은 유대교의 종말론은 오늘날의 기독교와 조금 달랐습니다. 육신의 부활을 믿긴 했지만 죽은 후에 음부에서 의식 없이 마지막 날의 부활 때까지 잠자듯이 기다려야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영생을 주는 떡에 대해 크게 실감하지 못하고 예수님 말씀의 초점을 계속 놓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그런 종말론이 잘못되었음을 당신의 가르침으로나 특별히 나사로의 소생과 당신의 부활로 입증했습니다. 십자가상의 우편 강도가 진심으로 회개하며 당신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자 네가 오늘 낙원에서 당신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신자가 죽으면 음부에서 무한정 대기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낙원에서 주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본문의 결론으로 하나님이 보내주신 자는 당신께서 마지막 날까지 살려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의도적으로 음부에서 마지막 부활을 맞게 된다는 유대인들의 종말관에 빗대어서 마지막 날에 부활을 얻을 수 있는 조건도 당신을 믿는 것뿐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당신께서 이 땅의 현실 삶은 물론 음부까지 다스리는 하나님이라고 밝힌 셈입니다.
아멘이 가진 두 가지 뜻
유대인들의 생각과 주님의 가르침의 차이는 아주 간단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주는 생명의 떡을 받은 후에 판단해보고 믿겠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당신을 믿을 용의가 있으니 먼저 믿을 만한 복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병이어 기적을 일으킨 당신에겐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것이 바로 생명의 떡을 먹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신께 받은 복 때문에 당신을 믿는 자는 나중에 그 복이 떨어지면 언제든 믿음이 떨어지거나 취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호산나 호산나 외치며 열광적으로 추종하더니 자기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구원을 취소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이 내민 손을 뿌리친 것입니다.
주님이 먼저 믿으면 복을 주겠다고 해서 그들을 의심하고 당신에 대한 복종 경외를 먼저 테스트하겠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옹졸하거나 협량하신 분이 아닙니다. 인간본성의 완악한 면모를 누구보다 잘 아시기에 그런 것입니다. 당신께 받은 보상 때문에 당신을 믿지 말고 진정으로 당신을 따르고 싶은지 최소한 어떤 분인지 알고 싶어 하는지 여부를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너희가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너희에게 이미 말했다고 한 것입니다.(36절) 너희가 나를 왕으로 삼으려는 것이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고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26절) 조금 전에 이미 지적해주었다는 것입니다. 본다는 것은 마치 과학자가 실험하듯이 모든 측면을 면밀하게 관찰하는 것을 뜻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표적을 다 보여주었기에 그 표적들을 보면 그것을 행하는 자가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여전히 나를 믿지 아니하는데. 표적을 보고도 믿지 못하면 아무리 말로 설명해주어도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당신을 알아보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자라면 굳이 표적을 보지 않고도 바리새인과는 다른 당신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당신으로부터 신적인 권위를 감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표적에 관한 유대인과의 이 논쟁에서도 첫 마디를 진실로 진실로라는 단어로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아멘 아멘인데 정말로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고 또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일상적으로 기도한 후에 붙이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 단어를 서두에 붙였으니까 소원을 간구하는 뜻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이어서 하실 모든 말씀 즉 6장 전체가 절대적 진리라고 못을 박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감히 영생을 주는 떡을 자신이 준다고 그것도 절대적 진리라고 선포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단순히 문학적 수사법에 관해 따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이 계시해줄 수 있는 심오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너희는 기도 후에 지금까지 간구한 내용을 제발 응답해달라고 아멘 아멘 하지만 나는 지금 너희의 그런 아멘을 받아서 집행하는 이로서 너희에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껏 아멘이라고 기도한 모든 내용을 내가 들었고 이제 그 기도를 응답해주려고 이 땅에 직접 왔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두 가지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내 백성이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래선 터진 웅덩이가 되어서 물을 절대 저축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렘2:13) 이스라엘이 그랬다면 다른 민족들의 영적 상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마리아 수가 성의 한 불쌍한 여인에게도 주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여인은 정말로 그런 물이 있다면 나부터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주님이 그 여인의 한 많은 과거는 물론 너무나 비참한 현재의 영적상황을 그대로 드러내자 여인은 주님이 메시아임을 알아봤습니다. 주님이 주실 물도 단지 갈증을 적시는 우물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는 물인 줄 깨달았습니다. 동네에 들어가 내가 메시아를 만났으니 와서 보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영적 교만에 빠진 유대인들은 주님을 무시 외면했으나 인생의 절망에 빠져 하늘로부터 오는 생명에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은 주님 앞에 진심으로 항복하며 엎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도 나를 믿으면 결코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다시 약속했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가장 괴로워하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내 삶과 인생을 거룩하게 보호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갖고서 먼저 자신의 주인으로 삼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로 찾아들어가 그 여인을 만났듯이 당신 쪽에서 먼저 모든 갈급한 자들에게 생수를 주시길 간절히 더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당신께 나아와 당신을 믿으라고 호소한 것이 주님이 공사역 중에 행한 일의 전부입니다.
유대인들의 영생의 떡을 항상 먹게 해달라는 요구는 자기들의 행위 하나하나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 혹은 소원해진다고 믿는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하나님께 받을 상벌에만 신경 쓰거나 혹시 구원이 취소되지 않을지 불안해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은 하나님이 보내 주신 자는 당신을 보면 믿게 되고 또 당신께서 끝까지 지켜주신다고 했습니다. 신자라면 어찌 주님께 와서 보라고 온 세상에 외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그러면 주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작동해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주지 않겠습니까?
유대인들과 똑같은 신자들
유감스럽게도 오늘날도 본문의 유대인들과 똑같은 신앙 행태를 가진 신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믿겠다고 합니다. 물론 처음에 신앙을 가지게 되는 계기는 현실의 문제와 고난을 해결 받으려는 것이어도 됩니다. 아니 성인이 된 후에 신자가 된 자들의 거의 대부분이 그런 동기라는 것이 통계로 밝혀졌습니다.
교회에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은 분명히 본인의 결심에 따른 것이었어도 그마저 하나님이 배후에서 간섭하여 교회로 보내준 결과입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당신의 사랑과 권능을 베풀어주려는 주님의 계획입니다. 현실 삶에서 절망에 빠지면 자신의 무가치 무능력은 물론 영혼의 가난함을 깨닫게 해서 당신만 바라보고 전적으로 의탁하게 만들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되면 이전의 자기 삶이 얼마나 처절한 실패요 절망이요 죽음이었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비록 현실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았지만 정말로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알고자 하면 주님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인격적으로 만나주시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은혜를 주십니다.
안타깝게도 성령의 거듭남이 없는 즉, 자신의 옛 자아가 철저하게 깨어진 체험이 없어서 주님과 개인적인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교인들이 아주 많습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형벌을 대신 감당해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구원 얻는다는 객관적 교리만 수용하고 그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영적으로 똑똑해서 믿을 수 있었다고 여기고 세상 사람들을 도덕과 종교적으로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괄시합니다.
거기다 이제 구원을 얻었으니 교회를 찾았던 처음 목적대로 삶의 문제와 고난을 해결 받는 것이 믿음으로 행할 일의 전부가 됩니다. 예수님 그분을 믿고 따르기보다는 그분이 주시는 복에 따라서 믿음이 수시로 변합니다. 현실상황이 나빠지면 주님과의 관계도 나빠지고 믿음이 떨어집니다. 엄밀히 따져 주님과 관계가 형성되지도 않았기에 믿음이 아니라 스스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런 분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하나 있는데 자신들의 영적인 우월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주님이 마지막 날까지 지켜주신다는 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소유한 자답게 거룩하게 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거 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아니 그러고 싶다는 소망조차 없습니다. 구원받은 양 착각하거나 그렇게 자기를 위로하면서 본문의 유대인들처럼 현실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줄 떡을 항상 달라고만 졸라댑니다. 말로는 주님의 은혜를 더 받고 싶다는 핑계를 대지만 사실은 자신의 죄에 더 거하는 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얼마나 대단하고 고귀한지 현실 삶에서 항상 체험해야 합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고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셔서 항상 보호 인도해주신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세상의 어떤 것도 나를 무너뜨릴 수 없기에 매사를 당당하게 대해야 합니다. 비록 유혹 시험 위협 훼방은 있어도 쉬지 말고 기도하면 범사에 감사할 일로 채워주시므로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신자의 삶에 거룩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해주시고 신자는 항상 그것을 불쌍한 이웃과 나눔으로써 인간으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을 맛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지금 자신의 믿음을 진지하게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 정말로 내 전부의 주인이 되어있습니까? 주님이 주시는 복이 좋을 때만 주인으로 모시려 듭니까?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싶어서 말씀과 기도를 끊이지 않고 무엇보다 주님 계명대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예수님이 주시는 복으로 내 자신을 형통케 하고 싶어서 말씀은 뒷전이고 내 문제만 해결해달라고 떼만 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영생할 떡을 이미 받아먹었는지 썩을 양식을 항상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지 잘 따져보시라는 뜻입니다.
(7/11/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