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6:9-15) 세 가지 단계로 기도를 발전시켜라.
기도 시리즈 (10)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9-13)
기도는 세 단계로 성장해야 한다.
미국의 한 신학자가 기도는 반드시 세 가지 단계를 거치며 성숙해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나에게 무엇을 달라는(give me) 기도, 둘째 나를 바꿔달라는(change me) 기도, 셋째 나를 들어 사용해 달라는(use me) 기도의 순서대로 진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정황과 의미를 아홉 번에 걸쳐서 살펴봤는데 그의 기도들도 그런 방식으로 성숙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의 본으로 가르치신 본문을 살펴보는 이유도 그 세 가지 기도를 정확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내용으로 따지면 아주 다양합니다. 하나님께 감사 찬양 경배하거나, 그분을 깊이 묵상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알려 달라고 하거나, 그 뜻에 대한 징조나 사인을 보여 달라고 하거나, 특정한 사안을 두고 서원할 수도 있고, 구원의 확신을 심어달라는 기도도 합니다. 억울한 일을 하나님이 대신 갚아주거나,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를 멸망시켜 달라고 하거나,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그분을 의심 원망해도 기도입니다.
사람마다 각양각색으로 기도해도 크게 그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서원기도도 자기가 어떤 헌신을 할 테니까 하나님도 어떤 것을 해달라는 요구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많은 신자들이 주로 첫째의 자기에게 달라는 기도만 하고 둘째 셋째 단계의 기도가 있다는 사실조차 잘 모릅니다. 설교나 성경공부 등을 통해 언뜻언뜻 배웠어도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실제로 잘 하지 않습니다.
물론 신자는 무엇이든 언제든 하나님께 자기 소원을 아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분명히 신자들의 기도가 성숙해지기를 바라십니다. 만약 첫째 단계의 기도에 계속 머무르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실천하지 않으니까 자칫 응답 받지 못한다는 심각한 결과를 맞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세 기도의 이름에 이미 드러나 있지만 아브라함의 경우에 비추어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자기에게 무엇을 달라는 기도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우리 모두가 평소에 늘 하는 기도입니다. 자신의 문제나 고난을 해결하고, 자신의 소망과 계획이 이뤄지고,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고 원수를 갚아달라는 것들입니다. 자신의 현실적 상황을 풍요케 해달라는 최소한 평안하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둘째 자기를 바꿔달라는 기도는 외적인 현실상황과는 관계없이 자기라는 존재 자체를 거룩하게 변화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모든 허물 잘못 죄들을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잘 깨달아서 하나님 중심으로 가치관 세계관 인생관 등이 바뀌고 자기 인격과 성품도 주님을 닮아서 거룩하게 자라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자신의 삶에 실천하고 싶은 소망과 믿음과 열정이 생기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첫째 기도가 신자의 외부 여건을 자기 뜻에 맞게 바꿔달라는 것이라면 둘째 기도는 신자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헌신된 당신의 종으로 양육시켜 달라는 기도입니다.
셋째 자기를 사용해달라는 기도는 둘째 기도로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할 준비가 되었다면 그분의 일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동역자로 불려 나왔다고 철저히 인식했다면 당연히 그분의 거룩한 일에 자기를 사용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이전과 완전히 정반대가 되었기에 실제 생활 방식도 바뀌어져야 합니다. 자신을 위한 요구는 없어지거나 더 이상 큰 문제가 안 되고 하나님의 영광만이 자신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든 나타나게 해달라는 기도를 집중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이 땅에서 더 많은 사람에게 십자가 은혜가 베풀어져서 죄에서 구원받고 그들로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서 평강을 누리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계명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고 가르치면서 이웃 사랑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같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사실상 셋째 기도는 이웃의 어려운 문제를 비롯해 영혼 구원을 간구하는 중보기도인 셈입니다.
아브라함의 기도의 변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우르에서 불려 나올 때 복의 근원으로 세워주고 이름을 창대케 해주며 후손이 하늘의 뭇별처럼 많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자연히 그 약속에 합당하게 자기에게 이것저것 달라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가나안 이민 초기에는 현지인들의 훼방이 없어서 안전하고 초지와 물이 많아서 목축하기에 적합하며 우상 신전이 없어서 영적으로도 평안한 거주지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되어져 가는 상황은 전혀 그렇지 못해서 이곳저곳 옮겨 다니다 네게브 사막에까지 이르렀고 그곳에서 기근을 만나 어쩔 수 없이 애굽으로 넘어갔습니다. 비록 아내 사라가 실제로 이복누이이고 또 가나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그렇게 말하기로 약속했지만 바로의 후궁으로 취택되어 할렘에 속하게 된 것은 아브라함의 큰 잘못입니다. 제발 사라를 안전하게 지켜달라고 애타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자기에게 달라는 기도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적적인 간섭으로 원상회복이 된 후에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던 그 치사한 잘못과 죄부터 깊이 회개했을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언약을 더 충실히 지킬 수 있도록 자신의 믿음을 굳건히 자라고 범사를 주님의 관점에서 정확히 분별하여 담대하게 순종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자신을 바꿔 달라는 둘째 기도에 해당됩니다.
그런 변화의 결과로 애굽에서 돌아오자 조카 롯과 초지와 물이 모자라 서로 헤어질 때는 선택권을 롯에게 먼저, 실은 하나님에게 완전히 일임했습니다. 애굽에서 그 큰 잘못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뜻대로 이루심을 확인했기에 이번에도 자신을 당신의 뜻에 맞게 들어서 사용해 달라는 기도를 한 셈입니다. 당연히 조카의 앞날이 형통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인데 이 또한 셋째의 이웃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 후에 가나안 연합 전쟁에 참여했을 때는 자신과 자기 군대의 생명을 지키고 전쟁에 승리케 해달라는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전쟁 승리는 자신에게 좋은 것을 달라는 기도이나 인명 피해를 최대한 막아달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다른 사람을 살리는 기도였습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통보하자 조카 롯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 여섯 번이나 의인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멸망시키지 말아달라는 중보기도를 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자신이 쓰임 받게 해달라는 기도를 한 셈입니다. 그러는 중에도 삼촌으로서 평소에 조카의 안위와 믿음에 전혀 무관심했음을 크게 회개했을 것입니다. 앞으로 자신의 인격 믿음 소망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성숙시켜 달라는 기도도 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애굽에서 범한 잘못을 다시 범해 사라가 아비멜렉 왕의 후궁이 되었을 때도 아내를 구해달라는 기도부터 간절히 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회개의 기도를 했을 것이며 아내를 무사히 돌려받자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태가 닫힌 아비멜렉 집안을 위해 기도해주어서 생명을 잉태케 했습니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기도까지 한 것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이삭을 바치는 사건에선 그는 지난 모든 기도들의 완결판인 기도를 했습니다. 자신과 이삭의 생명마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라고 온전히 내어드렸습니다. 특별히 이삭을 통해 믿음의 후손이 창대케 되는 당신의 계획을 당신께서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이루실 줄 믿으니 자신은 죽으나 사나 그 일에 쓰임 받은 것만도 감사하며 영광이라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선 각각의 상황에 따라 자신의 이성적 판단력과 당시까지 형성된 믿음에 따라서 자의로 기도드렸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의심 원망하는 기도도 했고 가나안 전쟁 중에는 자연스레 적군을 멸망시켜달라는 저주의 기도까지 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 세 기도에 대해 배워본 적이 전혀 없습니다. 때로 순서가 뒤바뀌거나 한 번에 세 기도를 다 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의 모든 기도는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자기에게 달라는 기도보다 자기를 바꿔달라는 기도를 더 많이 하다가 마지막에는 온전히 쓰임 받게 해달라는 기도에 이른 것도 분명합니다. 믿음이 자라면 반드시 그만큼 기도도 자라게 되며 역으로 기도가 자라지 않으면 믿음도 자라지 않은 것입니다.
주기도문에 포함된 세 가지 기도
예수님이 가르치신 모범 기도문에도 정확하게 이 세 단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선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11절)가 자기에게 달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하루 세끼 어쩌면 두 끼 해결하는 것이 삶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자신의 생업과 일상생활의 모든 차원을 두고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신자라면 자신이 행하는 범사에 하나님의 선한 인도가 따르기를 바라며 기도해야 합니다.
물질계에 제한 받는 인간으로선 아무래도 당장 눈에 띄는 현실에 관심이 가장 먼저 많이 쏠립니다. 자연히 기도도 그런 일 위주로 하게 되는데 그런다고 절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쳐선 마치 큰 나무 밑 성황당에서 매일 아침 찬물 한 그릇 올려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부르는 신의 이름만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처럼 그런 기도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한지 수십 년이 되어도 계속 이것저것 달라는 기도만 하면 스스로 성장할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갓난아기가 배고프면 밥 달라, 잠 오면 안아서 재워 달라, 심심하면 와서 놀아달라고 계속 징징대며 우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는 매번 사탕을 달라고 하지만 그대로 다 주는 아버지도 없고 만약 다 주면 이빨만 썩습니다. 그런 아기도 분명히 자기 아이인 것은 틀림없지만 육체와 정신이 유아상태에서 성장이 멈춘 불치병을 앓고 있는 셈입니다. 아버지가 보기에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신자는 이미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가 계시된 성경과 기도라는 영적무기를 갖고 있고 그 둘을 온전하게 적용하도록 인도해줄 성령님이 내주하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뜻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자기에게 달라는 기도만 하고 있으면 성경과 성령님이 완전 무용지물이 됩니다.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용돈만 달라는데 응할 부모가 없듯이 그런 기도에는 하나님도 귀를 닫으십니다.
오래 전 미국의 한 코미디 영화에서 신이 된 주인공이 신자들의 복권 일등에 걸리게 해달라는 기도에 전부 예스라고 응답해주었더니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일인당 몇 불씩 밖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신자들이 복권 같은 대박의 형통만을 구하는 기도를 한다는 통렬한 풍자였습니다. 신자들의 달라는 기도에 하나님이 일일이 다 응답해주면 모두가 쾌락에 젖어서 육신과 정신이 완전히 망가질 것입니다. 실제로 복권당첨자들의 인생 말로가 거의 대부분 비참해졌다는 것은 통계가 증명합니다.
둘째 자기를 바뀌게 해달라는 기도는 어느 부분입니까?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12,13a)입니다. 자신이 지은 죄부터 회개하고 계속해서 시험과 악을 막아주셔서 죄를 짓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합니다. 당연히 지금껏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 않고 계속 사탕만 요구했던 미숙한 믿음부터 용서해달라는 기도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점점 자라야 함에도 그러지 못한 까닭은 성경을 정확히 배우지 않고서 자기 생각대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이전 불신자 시절의 습성과 사고를 버리지 못해 시험에 빠졌기에 온전한 믿음으로 성숙될 수 있게끔 성령님이 간섭 역사 인도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게 해달라는 기도는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9,10절)입니다.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인데 그런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임해달라는 것입니다. 신자 자신의 삶과 인생은 물론 그가 속한 모든 공동체와 죄악으로 날로 타락해져가는 이 땅을 하나님이 거룩하게 통치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소돔의 심판을 보류하려는 제사장적 중보기도를 했고 아비멜렉의 집안을 위해서 생명을 살리는 선지자적인 기도를 했으니, 주님 오시기 이천여 년 전에 이미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주님의 이 가르침대로 실천한 셈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대로 땅에서도 그대로 실현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으로선 당신의 생명책에 이름이 오른 택한 자들을 구원해야 하며, 각 인생과 공동체와 나라의 운명을 당신의 계획에 따라 통치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인류역사 전체를 주관하기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의 원리가 하늘에서 확정되어 있습니다. 택한 자를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이름 앞에 무릎 꿇게 하고 악인은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며 예수님이 재림하여 마지막 대적인 죽음을 정복하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신자는 그런 하나님의 거룩한 일정표대로 이 땅의 역사가 진행되고 무엇보다 자신이 그 거룩한 일에 미약하나마 일부를 맡아서 동참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제일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가르치신 것도 실은 셋째 기도에 해당됩니다. 하나님의 계명대로 순종해야만 그분의 이름이 얼마나 거룩한지 제대로 알게 되어 참된 경배를 돌릴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도 셋째 기도에 해당됩니다. 이웃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바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남의 죄를 용서해주지 않으면?
놀랍게도 주기도문은 정확하게 이 세 가지의 기도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순서는 다르지만 반드시 주목할 사항은 예수님이 셋째 기도를 가장 먼저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순서에 상관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기도를 했지만 결국은 셋째 기도를 하도록 하나님이 이끄셨지 않습니까?
당연히 우리도 신앙연륜이 쌓일수록 셋째 기도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하고 가능한 빨리 그래야 합니다. 여전히 연약해서 아무래도 급한 순서대로 기도하고 둘째 셋째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기도가 어떤 것인지는 알고서 실천하려 노력은 해야 할 것입니다.
흔히들 주기도문의 내용에만 주목하는데 바로 덧붙인 말씀도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14,15절)
언뜻 남의 죄를 용서해주지 않으면 심판받는다는 식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그런 차원으로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때로는 남의 죄를 완전히 용서하지 못합니다. 단순히 찾아가서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면 되는데도 비겁하게 용서하지 못하는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만 하고 치웁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구원에 적용하면 정말 구원 받을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문맥상으로 주님이 자기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가르친 후에 하신 말씀이므로 기도에 적용하는 것이 옳은 해석입니다. 남의 죄를 용서하는 것은 셋째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기도이고, 내 죄의 용서를 구하는 것은 나를 바꿔달라는 둘째 기도입니다. 따라서 남을 용서하는 즉 셋째 기도를 하지 않으면 자기 죄를 용서해달라는 둘째 기도를 응답해주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자기 죄가 얼마나 심각하고 비참하며 그 삯이 죽음인 줄 절감해야만 자기 죄를 회개하는 기도를 할 수 있고 다른 이의 죄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신자들이 첫째 자기에게 달라는 기도만 하고 둘째 셋째 기도는 하지 않으면 첫째 기도도 응답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기도의 모범을 가르친 후에 굳이 해석이 어려운 이 말씀을 덧붙인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네 자신부터 주님의 자녀답게 변화되어야만 당신의 일에 참여 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가장 먼저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하늘에서 이뤄진 뜻이 땅에서도 이뤄지도록 기도하라고 강조하셨는데 바로 그것이 기도의 종착점이자 본질이라는 뜻입니다.
기도한 대로 실천해라.
주기도문을 모르는 신자는 없습니다. 눈감고도 외우고 때로는 예배 중에나 마칠 때에 다 함께 이 기도를 고백합니다. 그런데 막상 본인이 기도하고 있는 내용이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것뿐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다른 기도를 하지 않는 죄부터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작금의 타락한 세태를 보면 아니 자기 주변만 살펴봐도 신자가 행해야 할 주님의 일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하는 일이라곤 교회에서 조금 열심을 내는 것을 핑계로 사지가 멀쩡한 어른이 발달장애인 시늉을 하고 있으니 그 모습을 계속 바라봐야 하는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런 자리에 머무르게 된 나름의 이유는 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 교회에 출석하게 된 계기는 대체로 자기 힘으로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고난이 닥쳐서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는 심정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했더니 의외로 쉽게 그 큰 고난이 해결되는데 그 체험이 너무 은혜로웠기에 쉽게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계속 자기에게 달라는 기도에 집착하게 됩니다. 자연히 위급할 때만 기도하면서 저는 도무지 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대신 해달라고 열정적으로 떼를 쓰는 것이 좋은 믿음이고 자신이 할 바를 다한 양 착각합니다. 말하자면 달라는 기도만 하는 것을 넘어서 기도한 후에도 하나님이 ‘뿅’하고 응답해주기만 기다립니다.
예수님이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했는데 일용할 양식은 일 년 365일치 양식이므로 기도만 한다고 양식이 생기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게 기도했다면 하나님의 정당한 방식으로 생업을 성실하게 운영해나가야 합니다. 또 자기 죄를 회개하고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으면 실제로 죄를 짓지 않고 범사를 하나님의 중심을 분별하여 반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으려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순종해야 하고 그 전에 자신이 평생에 행할 소명이 무엇인지 기도와 말씀을 통해 확정지어야 합니다.
세 단계의 기도가 이웃을 위한 기도로 성숙되어져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기도한 대로 실천해야만 기도가 완성된다면 예수님 말씀대로 신자의 기도는 결국 이웃 사랑이라는 열매로 드러나야 합니다. 바꿔 말해 이 세 단계 기도원리가 신자가 이웃을 대하는 자세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첫째 초신자 시절에는 아직도 세상 앞에 자기를 높이려는 본성이 생생하게 살아있으니까 남들이 자기가 바라는 대로 해달라는 요구만 합니다. 예컨대 가족이나 교회 성도나 심지어 목사도 자기가 만들어 놓은 기준에 맞춰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요구가 올바르고 성경적일 수도 있으나 자기부터 너무나 연약하고 죄의 본성이 살아 있는 죄인임을 온전히 절감하지 못한 탓입니다. 불신자 시절의 습성이 남아서 자기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만 찾으려 드는 것입니다. 남에게서 무엇인가 받기를 바라거나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이런 자세만 버려도 이웃 사랑에 성큼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더 깊이 깨닫게 되면 비로소 이웃도 얼마나 연약하고 불쌍한 죄인인지 깨닫게 됩니다. 다른 이의 상황과 입장도 이해할 수 있으므로 그들이 자신에게 바라는 바에 맞춰 자신을 바꿔나가려 노력하게 됩니다. 부부 각자가 배우자가 바라는 모습으로, 자식이 바라는 부모로, 하나님이 바라는 신자로 자신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자기는 어떤 대우를 받고 어떤 손해와 희생이라도 감수하고서 기도해주고 있는 상대를 살리는 일에 자신을 바쳐야 합니다. 다른 이를 나보다 낫게 여기는 예수님의 성육신의 정신으로 모든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이웃의 필요에 따라서 나를 사용해주면 어떤 수고와 희생이 따르더라도 기꺼이 섬기겠다는 자리까지 가야 합니다.
주기도문을 내 언어로 바꿔라.
이런 이웃 사랑의 자리에 이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가 정말로 세 가지 단계로 성숙된다면 즉, 빈말이 아니고 진심으로 기도했다면 삶에서 그대로 실천하려 노력은 할 것입니다. 다른 이로부터 돌아오는 반응이 기대에 못 미치거나 정반대라 해도 그 사람을 탓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먼저 그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찾아가 실제로 용서한 후에 그럴수록 더더욱 주님의 긍휼로 품어주려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이 그것이고 실제로 주님이 이 땅의 삶에서 실천하신 성육신의 모습입니다. 만일 기도는 그렇게 해놓고 실천으로 바꾸지 못하면 바리새인들처럼 종교적 위선을 떠는 셈이 됩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정이 커도 도리어 예수님께 야단을 맞으며 교회에서 영적으로는 쫓겨날 것입니다.
이 세 기도가 공부하듯이 순서대로 밟아갈 수 없고 셋째 기도를 할 수 있다고 해서 항상 그런 기도만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눈앞에 보이는 것들부터 신경이 쓰이니까 수시로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지금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진정으로 받기만 해도 둘째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문제들부터 기도하더라도 문득 불쌍한 이웃이 생각나면 성령의 인도이므로 진심으로 그를 위해서 기도를 해주고 기도한 대로 실천하면 됩니다. 그럼 자신의 영혼에서부터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며 이웃이 불신자라면 하나님을 향해서 조금씩 변화되는 모습을 반드시 목격하게 됩니다. 그런 체험들이 한두 번 쌓이면 이웃을 위하는 기도를 더 많이 아니 주로 하게 됩니다. 올바른 믿음에서 올바른 기도를 할 수 있고 그럼 반드시 올바른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을 단순히 암송 고백하지 말고 문구 하나하나의 의미를 깊이 묵상하며 자신의 언어로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가 지금 나의 이런저런 문제와 상황과 가정과 직장과 내가 속한 모든 공동체에 임해달라고 육하원칙을 갖춘 문장으로 구체적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이런저런 일들을 통해서 하늘에서 이뤄진 뜻대로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 앞에 한 명이라도 겸손히 무릎 꿇는 일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 전에 자신의 죄들을 구체적으로 실토하고 습관적인 죄부터 고쳐나가야 하며 이웃이 나에게 범한 잘못들도 진정으로 용서하고 찾아가서 화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 가르치신 기도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것 즉, 발육이 완전히 멈춘 영적 불치병에 걸려 있는 셈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주로 하는 기도가 나에게 달라는 기도, 나를 바꿔 달라는 기도, 나를 사용해달라는 기도 중에 어디에 와있습니까?
(3/6/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