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3:10-14) 신자가 가는 천국이 셋으로 나뉜다.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고통 (14)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3:10-14)
소망이 없는 세대.
세상의 종말이 닥치리라는 두려움은 항상 있었으나 전 지구인들이 동시에 피부로 절감하게 된 것은 현세대가 처음일 것입니다. 지난 몇 년간 코비나 펜데믹이 나라와 인종을 구별하지 않고서 세계인들의 목숨을 크게 위협했고 그 위세는 많이 약해졌어도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과학자들의 예상보다 더 급격히 진행된 지구온난화로 세계가 자연 재앙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온난화가 지속되면 병균이 번식하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므로 혹시라도 중세의 흑사병 같은 엄청난 비극이 닥칠까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펜데믹과 진행 중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두 전쟁으로 세계 경제는 장기 불황에 빠졌고 서민 생활이 아주 궁핍해졌습니다. 갈수록 자원과 지식의 편재 현상이 심해져서 나라별로 빈부 격차가 너무 벌어졌습니다. 자원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자국 이익 우선의 보호무역주의와 신냉전주의 같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거기다 AI 기술에 접목한 자동화가 전통적인 직업을 급속히 대체하고 있어서 명문 대학에서 최고 실력을 쌓은 전문가도 합당한 직장을 잘 얻지 못합니다. 청년들이 부모의 집에 기생하며 하루하루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빠서 꿈을 펼쳐볼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필연적으로 많은 사람이 정서적인 불안 증상을 앓고 있으며 실제로 정신질환에 의한 사망률이 가장 높아지고 있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대중을 상대로 하는 무차별적인 총기 사고나 테러가 빈번해졌습니다. 나라마다 독재자들이 득세하여서 지정학적인 분쟁이 격심해짐으로써 당장 핵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판국입니다. 모두를 더 깊은 절망에 빠트리는 것은 앞으로 나아질 징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세대에 종말 사상이 생겼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 세상은 온갖 불법과 불의는 물론 비극과 재앙으로 가득했었다는 뜻입니다. 거기다 인간의 지성과 양심이 최고로 발달한 이 세대에 거꾸로 도무지 말도 안 되는 불의와 불법이 최고로 성행합니다. 외부 세계에 대한 지식이 늘어갈수록 막상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는 대폭 줄어든 것입니다. 예컨대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은 더 선하게 발달한다는 진화론을 믿는 현대인들이라면 인류 역사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낙관론을 가져야 마땅한데도 오히려 종말의 두려움에 더 크게 떨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렇다면 아무리 인간 이성이 발달해도 정작 인간을 움직이는 힘은 왜곡 파괴된 영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종말에 대해 큰 두려움을 느꼈으면 인생이 어디서 출발해서 어디로 가는지라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부터 답을 얻어야 함에도 이 세대의 사람들은 그저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만 행합니다. 인생사를 의롭게 통치하는 절대자가 있다면 세상이 이 꼴이 되도록 방치할 리가 없으므로 하나님은 없다고 아예 단정 짓습니다. 자연히 인생은 이 땅의 물질계가 전부이므로 자신이 선정한 버킷리스트 달성이 인생의 최고 목적이 되었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격심한 경쟁에 지친 데다 아무 소망이 보이지 않으니까 청년 자살률이 사상 최대가 되었습니다.
순교를 앞둔 바울
예수님은 종말의 징조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24:7,8)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재앙들은 재난의 시작일 뿐이라고 합니다. 대신에 주님은 사람들끼리 서로 미워하고 불법이 성하여 사랑이 식어버리는 현상을 더 경계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특별히 신자는 반드시 핍박받게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9-12절)
지금 주님이 열거한 재앙들이 일어나고 있고 또 이 시대만큼 인간 사회에서 참사랑이 실종된 적이 없습니다. 선진국일수록 종교 중에 유독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늘어나고 교묘한 핍박이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시간 개념이 인간과는 달라도 이 땅의 종말이 시작된 것만은 확실합니다. 인류 역사가 성경이 가르치고 예수님이 예언하신 그대로 주님의 재림을 향해서 착착, 최근에는 아주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온갖 환난과 재앙의 피해 규모는 더 커지고 공중 권세 잡은 사탄의 훼방도 더 심해질 것입니다.
이런 세대에 살고 있는 신자로선 하나님이 인류 역사를 종말까지 어떻게 이끄시는지 올바른 이해를 갖고서 자기 삶과 인생에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의 본문 권면은 바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종말을 대비하는 가르침도 되므로 이 시리즈 전체의 결론이 됩니다.
그 해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인생의 첫째가는 목적을 불신자와는 정반대로 천국을 지향하는 데에 두어야 하고 삶의 모든 차원을 그렇게 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안에 이미 들어온 신자는 자기 인생의 종착지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천국의 아름다운 장막에서 영원히 거주한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이 땅의 일상적 삶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자기 전부를 걸만한 인생의 참된 가치와 의미는 죽음 이후에 본격적으로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신약 성도 중에 억울한 환난을 가장 많이 겪었던 바울은 본문에서 구원 이후 자신의 삶을 바로 그렇게 살았다고 체험적으로 고백합니다. 로마 감옥에서 순교를 앞두고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11절)라는 소망을 표했습니다. 자기 인생의 결론을 내린 셈인데, 고통스러운 이 세상을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천국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그것도 자기는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기를 소망했습니다. 거기다 바로 앞에선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10절)라고, 세 번이나 ‘그’라는 대명사를 사용해 예수님을 지칭했습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똑같이는 될 수 없어도 어떻게 해서든지 최대한 예수님만 닮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활의 권능뿐 아니라 그 고난에 참여하기 위해서 죽음도 주님과 닮겠다고 합니다. 단순히 부활만 소망하는 우리와는 차원이 완전히 다른데, 고난을 통해서 부활의 권능을 얻고 싶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마지막 만찬 때에 제자들 앞에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17:1)라고 기도했습니다. 십자가 죽음이 하나님과 예수님 당신에게 영화가 된다고 합니다. 주님 같은 고난을 통해 부활의 권능에 이르고 싶다면 바울도 십자가 순교를 언제 당하더라도 그 죽음은 너무 영광스러울 것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모든 신자가 순교해야 한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라 거룩하게 살면, 하나님을 거역하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물질적 풍요와 사치만 추구하는 세상으로부터 이런저런 핍박을 받게 마련입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미국이나 한국에서도 주변 동료의 세상 불의에 동참하지 않으면 온갖 형태로 사회적 경제적 불이익이 돌아오는데 그것이 현대 신자가 받는 핍박입니다. 요컨대 예수 안에서 의인으로 살기에 예수 밖의 악인에게 박해받는 것이 신자의 일생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신자답게 살고 있지 않거나 세상과 타협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진정한 천국 소망.
정말로 성령으로 거듭난 참신자에겐 이 땅과 비교할 수 없는 너무나 아름답고 의로운 천국이 기다립니다. 천국이 신자 인생에서 진정으로 가치 있는 실체라면, 아니 실제로 그곳이 종착지이므로 이 땅에서의 삶은 필연적으로 그곳으로 가는 여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바울처럼 영광스럽게 천국에 입성하기 위해서 연습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문제는 신자에 따라 천국에 대한 소망이 두 가지 모습으로 나눠진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이 땅의 고통을 참기만 하면 결국에는 슬픔과 상처와 환난 없이 평안히 살 수 있으리라고만 기대하는 도피성 천국입니다. 이런 천국을 소지한 신자는 하나님은 왜 나에게만 억울한 고난을 허락하는지, 나를 괴롭힌 악인은 형통하는데도 왜 벌을 안 주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사탄에 미혹된 죄인들이 세상 공의를 무너뜨렸다고 머리로는 알지만, 그래도 전혀 손을 쓰지 않는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믿음으로는 고난을 견디는 힘을, 최소한 마음에 평안을 얻는 데에만 주력합니다.
천국은 살아 있는 동안에 불신자에 당한 핍박이나 이유 모르는 고난으로 고생했으므로, 마치 앙갚음 해주듯이 위로와 보상만 주는 곳이 절대 아닙니다. 죄라고는 아예 존재하지 않고 오직 진리와 사랑만이 풍성히 넘치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선 아무래도 부족하고 불완전했던 삼위 하나님과 주변 성도와의 교제가 완벽하고도 충만하게 이뤄지는 곳입니다.
둘째 부류의 신자는 이 땅의 고통을, 그중에서도 불신 세상의 핍박을 필연적으로 거쳐야만 죽음 후에 더 영광스러운 삶을 알차게 살 수 있을 그런 천국을 소망합니다. 최고로 좋은 곳에 가서 최고로 좋은 일만 하고 싶다는 진정한 소망과 뜨거운 열정이 넘칩니다. 그래서 이 땅의 고난이 비록 힘들긴 해도 감사함으로 최소한 담담하게 이겨냅니다. 세상에서 핍박받을수록 자기가 신자답게 살고 있고 또 천국으로 가는 여정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증거이므로 자연히 평안을 유지합니다. 나아가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가는 삶을 통해 죄와 세상과 사탄에게 당당히 이깁니다. 하나님의 공의도 신자가 세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참사랑의 공동체에 온전히 먼저 세워지고 차츰 주위로 번져난다고 확신하면서 그 일에 헌신 충성합니다.
바울이 하나님과 화목한 신자의 삶이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까?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2-4) 신자는 천국에서의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하나님의 영광이 이미 보장되어 있음을 잘 알기에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며 소망을 이뤄나갈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땅의 고달팠던 삶을 마감하려는 소망에 그치는 도피처가 아니라 정말로 아름다운 새 삶을 살 수 있는 천국을 소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순교를 앞두고도 빌립보 교인들에게 주안에서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라고(빌4:4) 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또 그래서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여생에 대해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 간다”(14절)라고 설명합니다. 역사상 최고의 해외선교사요, 교회 개척자요, 기독교의 발판을 그가 다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도 지난 업적은 전혀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전부 잊어버리겠다고 합니다. 언제 주님께 불림을 받아 천국으로 들어갈지 모르니까 매일매일을 이 땅의 마지막 날로 여기고 주님이 맡기신 소명에 하루하루 충성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고 종말의 시기에 대한 일말의 힌트를 주셨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십자가 복음으로 변화시켜서 당신의 나라를 조금이라도 더 커지게 하려는 뜻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이 땅에 열심히 건설하고 있는 그런 모습으로 그런 현장에서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만나고 싶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앞에 있는 천국 푯대를 향해서 걸어가는 그 걸음만큼 이 땅에 복음이 더 진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 가 천국 외에 어폐가 있지만 천국도 완성될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의 권능 참여하고 싶다고 말한 진짜 뜻입니다. 예수님이 사도 요한에게 당신의 재림으로 완성할 마지막 천국을 환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21:1,2)
아담의 원죄로 하나님께 함께 저주받은 모든 피조 세계가 창조 때의 아름답고 완전한 모습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살았을 때 신자가 억울하게 핍박받았던 일이나, 때로 죄로 넘어져 부끄럽고 완악했던 모습까지 선하고 아름다운 상태로 회복됩니다. 그 구체적인 상황은 모르나 새로운 차원의 물질계로 바뀐 이 땅에서 온전히 깨끗하고 신령해진 모습으로 세세토록 주님과 함께 새 땅을 통치하며 살아가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입신(入神)하여 하늘의 비밀을 보고 온 바울도 바로 그 천국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고전15:51,52) 주님 재림 때에 살아있는 자들이 홀연히 신령한 부활 신체로 바뀌니까 이 땅에서 구원이 아름답게 완성됩니다. 신자가 정말로 소망해야 할 완성된 진짜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
이제 하나님이 사탄에게 주님 재림 때까지 공중 권세를 쥐고서 사람들을 미혹시키도록 허락한 이유가 밝혀졌습니다. 비록 죄인들이 온갖 악행을 저질러서 세상 공의가 굽어져 보여도 일일이 벌하지 않는 까닭도 드러났습니다. 마지막 날의 구원과 심판으로 완벽한 당신의 공의가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며 또 그런 영광을 단 한 명이라도 더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신자에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영생이 기다립니다.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원인 모를 불치병에 걸려 요절한 청년 신자도, 나자마자 암에 걸려 인큐베이터에서 죽은 신자의 어린 자녀도, 새벽기도 가다가 음주 운전자에게 비명횡사한 나이 드신 권사님도 천국이 있어서 전혀 억울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받은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따질 수 있는 자격은 신자에게만 있는데, 그 정답도 성경에 분명히 밝혀져 있기에 신자만 소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탐욕과 교만의 화신이 되어서 권력을 휘두르는 세상 독재자들과 추종자들은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바벨론 멸망에 대한 하박국의 기도가 그가 죽은 한참 후에서야 이뤄졌으나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멸망시킵니다. 북한의 사대 세습 김씨 왕조도 당연히 포함됩니다. 지금 같은 말도 안 되는 인권유린이 절대로 무한정 계속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북한과 남한의 백성들에게 가장 유익하게끔 당신만의 계획과 일정에 따라 당신의 거룩한 공의를 지금 실현하는 중입니다. 그 심판의 방식과 시기는 누차 강조한 대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더 많은 이에게 더 온전히 증거되는 목적과 방향으로 이뤄질 뿐입니다.
천국이 확보되어 있기에 신자에겐 억울한 인생이나 고난이 없습니다. 불신자에게 지옥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공의도 절대 굽어지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때가 차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전 지구적인 모습으로 아름답게 강림해서 이 땅에서 실현될 것입니다. 신자는 이 세대의 가장 긴박한 세기말적인 증상에 대해 전혀 근심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어둠이 깊어지면 밝음이 가까웠다는 증거입니다. 종말의 두려움이 커지면 재림의 소망은 더 커지는 것입니다. 어느 때라도 홀연히 임하시는 주님을 바울처럼 맞이해야지, 혹시라도 세상에 빠져있거나 게으르게 주저앉아 있는 모습으로 맞이할까 가장 염려해야 할 것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세상의 굽어진 공의를 보고 단지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과도하거나 지속적인 의심과 원망을 품으면, 죄송하지만 부활 천국에 대한 소망이 절실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생애가 어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서 따른 후로는 일생을 최초의 이민자이자 최초의 해외선교사로 살았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시민권은 천국에 속했기에 땅에선 나그네로만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가 보고 걷는 땅을 전부 차지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으나 죽을 때는 겨우 자기와 가족들의 시신을 눕힐 막벨라 굴만 소지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로 눈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의 나라를 그가 가는 곳마다 차지하게 해주었습니다. 가나안 온 지역은 물론 애굽과 시리아에까지 가시적으로 증거하고 실현할 수 있도록 삶의 모든 차원에서 당신께서 주관한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혼자만 살려고 마누라를 비겁하게 두 번이나 팔아먹는 잘못을 통해서도 이방 족속들로 그것도 그들의 왕들부터 여호와를 찬양 내지는 인정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는 천국 명예의 전당에 이렇게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뜻임)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5,16)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온전히 깨닫지 못한 구약시대 인물이 이렇게 살았다면 지금 매일 신구약 성경 66권을 읽고 배우는 우리는 더더욱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의 삶을 본받자.
바울만큼 유대 사회의 굽어지는 질서를 바로잡으려고 온몸을 던져서 노력한 자는 없습니다. 나사렛 이단이 출몰해서 도덕적 종교적 계명을 위반하는 바람에 세상이 죄로 오염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믿은 도덕과 종교 기준에 따라 권선징악의 방식으로 공의를 바로잡으려 했으나 처절하게 실패했습니다. 자기야말로 동족을 살인하고 이방 족속을 무조건 미워한 사탄의 종이자 천하 죄인의 괴수라는 사실을 그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자기를 필두로 모든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새롭게 되지 않는 한에는 절대로 세상 죄악이 없어지지 않으므로 공의도 자연히 굽을 수밖에 없음을 절감했습니다. 따라서 공의를 바로 잡는 근본적인 대책도 복음으로 인간을 먼저 바꾸는 길임을 깨닫고 부활의 영광을 간절히 소망하며 마지막까지 목숨을 바쳐서 복음을 전하기로 한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예수 만나기 전의 사울처럼 도덕과 종교로 권선징악 하겠다고 나섰다가 처절하게 실패한 적이 더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십자군 원정인데 처음 출발한 의도는 좋았으나 곧바로 재물과 영토 다툼으로 추악하게 변질됐습니다. 그 결과 지금의 중동지역에 기독교에 대한 큰 반감과 증오만 대대로 키웠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만난 후 바울의 본문 고백처럼 신자들이 천국의 푯대를 향해 걸어갔던 예도 많습니다. 중세 시대에 흑사병이 유행해 이번 펜데믹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죽음의 어두움이 유럽 전역을 덮었습니다. 그때 신자들이 자기가 사는 곳을 떠나지 않거나 또는 오염지역으로 일부러 들어가서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병자들을 돌봤는데 그럼으로써 기독교는 그때 크게 번성했습니다.
현재 벌어지는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에서도 신자는 구약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이스라엘 편을 들어선, 나아가 단순히 중립적 위치만 지켜서도 안 됩니다. 이스라엘 내에선 현지인 신자(Messianic Jew)들의 핍박에 동참하며 정통 유대교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큰 곤경에 처한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도우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심지어 하마스 테러단에게도 그래야 하고 그러다 이스라엘의 폭격에 희생될 것도 각오해야 합니다.
북한의 김씨 왕조를 아직도 심판하지 않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은 알 수 없지만, 감히 추측해 보면 한가지는 분명합니다. 일론 머스크도 언급했듯이 야간에 한반도를 위성으로 촬영한 사진을 보면 북한은 완전히 새카만 암흑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가장 큰 대적인 공산주의가 가장 악랄하게 권력을 행사한 결과임을 온 세계 사람에게 가시적 증거로 똑똑히 보여준 것입니다.
반면에 남한은 너무나 밝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어서 물질적 축복을 받았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한국만 아니라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가 북한만 빼고서 그 정도만 다를 뿐 훤하게 밝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틀림없이 남한에 대해서도 크게 염려하며 안타까워하실 것입니다. 흔히들 하나님의 인류 구속사에서 한국은 구약 이스라엘과 버금가는 복음 전파 사역의 큰 역할을 맡았다고 말하고 실제로 제2의 선교 대국으로 열심히 섬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주변 강국에 둘러싸이고 또 남북 왕국으로 분단 되었듯이 유사한 측면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먼저 우상숭배로 멸망 당했고, 남왕국 유다도 똑같은 죄로 조금 뒤에 심판받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북한은 유물사관에 입각한 공산주의를 추종하고 김씨 왕조라는 우상을 숭배합니다. 아직도 세계에서 최고로 가난하고 최악의 인권 탄압 국가로 남아 있는데, 악인의 상실한 마음에 그대로 버려두는 방식으로 그 죄를 심판하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된 것입니다.
남한은 사회적 정치적으로 인권과 자유가 보장되었고 경제적 문화적으로는 풍요한 삶을 영위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맥락을 큰 틀에서 엄밀히 살피면 물질 만능주의라는 북한과 똑같은 우상을 많은 신자를 포함해 거의 모두가 숭배하고 있습니다. 남한 교회와 신자들이 북한 해방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무슬림의 선교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은 아주 선한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로서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그보다 더 시급한 일은 남한에 만연한 맘몬 우상부터 철저히 제거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중학교에만 들어가면 신자 부모가 나서서 교회 출석을 막는 현상을 하나님이 하늘에서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남한에 정말로 이스라엘 같은 제사장 나라 역할을 맡겼다면 한국 교회와 신자가 기복신앙을 철저히 회개하고 십자가의 절대 진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더더욱 모른 척 넘어가실 리는 없을 것입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의사 파업 사태를 보면 그런 걱정이 더 늘어납니다. 정치적으로 진보와 보수 한편을 들 생각은 전혀 없고 의료 현황의 구체적인 사정은 알지 못합니다. 분명히 의사들만의 힘들고 억울한 사정이 있고 또 환자들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파업하는 의사 중에 크리스천도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안식일에도 생명을 살려야만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정부에 항의할 일이 있으면 의료 행위를 한 후에 남는 시간에 교대로 합법적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그러다 의사협회에서 왕따가 되어서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겠지만 주님은 크게 기뻐하시며 충성된 종으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신자가 맡은 책임
하나님의 공의는 오직 십자가 복음으로만, 그것도 신자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때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성경은 물론 세속 역사가 증명해 주듯이 인간들이 스스로 도덕과 종교로 권선 징악해선 더 나빠질 뿐입니다. 이 시리즈를 시작할 때 욥의 마지막 고백부터 살펴보았는데, 마감하는 지금은 그 고백이 저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라는 너무나 거룩하고 광대한 주제는 성경의 욥기도 제대로 결론 내리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그동안 저의 무지한 말로 하나님의 광대한 이치를 가리고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말을 했을까 두렵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하게 하나는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이 땅으로 강림하기에 신자에게만은 절대로 억울한 죽음이 없고 세상의 공의도 절대로 굽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근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모든 죗값을 대신 치러주신 은혜 그것 하나 때문입니다. 주님만이 창조의 시작이요 역사의 끝입니다. 이 세대를 바라보는 불신자는 절망과 죽음 외는 발견할 수 없지만 신자는 그 흑암과 대조되는 영광의 광채인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참 소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결국 종말에 관한 이 세대의 공포가 커질수록 그들에게 소망의 빛을 비춰야 할 책임은 하나님이 신자에게 맡겨 준 셈입니다. 하나님이 인간 사회의 공의가 이렇게까지 무너지도록 방치하지 않는다는 십자가의 진리를 알게 해주어야 합니다. 종말에 관한 그들의 공포를 희망으로 바꿔줘서 그들이 믿든 안 믿든 하나님의 굽은 공의에 대한 의심도 최선을 다해 해소시켜야 합니다.
천국에 입성하는 방식과 시기는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기에 신자는 재촉하지 않아야 하며, 반대로 마냥 안심하고 게으름을 부리지도 않아야 합니다. 지금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자기 삶을 통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그리스도의 향기가 주위에 번져 나가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온전히 증거되면 반드시 생명과 죽음 둘로만 나눠지는 역사는 성령이 일으켜 주십니다.
신자는 이 땅에서부터 예수 안에서 사는 삶이 최고로 기뻐야 하고 사탄에 미혹된 영혼을 보는 것이 가장 슬퍼져야 하는 자입니다. 그런 순전한 마음으로 살아가면 때로 연약한 본성과 진토 같은 체질로 넘어지고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으로 바꿔주십니다. 바울이 선교 열정으로 바나바와 다투고 헤어졌으나 복음은 더 크게 펴졌고 나중에 바나바와도 더 친해졌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뒤에 일은 신경 쓸 필요 없이 잊어버리고 앞만 바라보고 걸어간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시리즈의 결론도 그래서 매일 한 걸음씩 천국 푯대로 향해 걸어감으로써 그만큼 예수님의 나라를 확대하는 신자는, 그 일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받는 고난이 전혀 억울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 실현에 자기가 쓰임 받고 있음을 알기에 오히려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3/3/2024)
어릴 때 교회 도서관에서 읽은 천로역정이 떠오릅니다.
낙심하지 않고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