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50) 1/12/2003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서로 모순된 두 말씀
신자가 세상과 사람 앞에 예수를 믿는 것이 자랑스럽지 못하고 당당하지 않은 까닭은 너무 빛과 소금이 되려는 데에 모든 신앙생활의 목표를 두기 때문이다. 즉 자기가 자신을 돌아 볼 때에 아직도 빛과 소금의 수준에 도저히 이르렀다고 판단되지 않기 때문에 남들 앞에서나 자신에게 자기 신앙이 떳떳하지 못하다. 예수님은 신자더러 “빛과 소금이 되어라”고 한 적이 없다. 너희는 이미 “빛과 소금이니라”고 하셨다. 세상과 죄악 앞에 아무 두려움 없이 맞서면 너희 속에 이미 함께 한 성령의 거룩한 능력으로 모든 것을 넉넉하게 승리하게 해 주실 뿐 아니라 신자를 통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켜 주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 말씀에는 분명히 신자는 선한 행실을 해야 하고 그것도 다른 사람에게 보이도록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이 신자와 동행하시는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지극히 크신 그 분만의 능력으로 당신의 백성들이 겪는 고통과 시련으로부터 구원해주시고 이기게 해주시기 위해서다. 신자가 선행하여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신자가 훈련하고 실천하고 책임질 몫이 아닌가? 이 말씀을 하신 얼마 후 이어 나오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 하라…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마6:1,4)고 하신 말씀에 비추어 봐도 상호 모순되는 요구인 것 같다. 예수를 믿고 난 후의 신앙 생활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성화(聖化)가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13-15절에선 신자가 이미 빛과 소금이 되었다고 했는데 반해 지금은 또 남에게 보이도록 선한 행실을 하라고 하셨다. 이 두 말씀을 서로 어떻게 연결 지어야 하는가? 본문16절의 구체적인 뜻은 무엇인가?
잘못된 성자의 표본
2002년 12월19일 로마 교황 요한 바오르 2세는 약 2년 전에 돌아가신 테레사 수녀를 성자로 추인하는 공식 절차를 발표했다. 카토릭은 생전에 경건한 삶을 살았고 특별히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섬기는 업적을 남긴 자를 사후(死後)에 성자직위(Sainthood)를 추서(追敍)한다. 한국의 김 대건 신부도 얼마 전에 성자 반열에 올랐다.
그런데 이 성자를 선정하고 추인하는 절차에 특이한 기준이 하나 있다. 반드시 죽고 난 후에 그 사람으로 인하여 기적이 발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테레사 수녀의 경우 인도의 모니카 베르샤란 여인이 위암으로 고생했는데 테레사 수녀에게 기도했더니 치유되었다는 증언을 했고 이를 조사한 결과 사실로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자의 자격요건을 완전히 갖추게 되었고 이제 공식적인 절차만 남은 셈이다.
간혹 기독교 신자나 심지어 개신교 목사 가운데도 테레사 수녀를 개인적으로 칭찬하는 정도를 넘어 신자가 성화를 이루어야 할 표본(Role Model)으로 제시하고 존경하는 경우를 보는데 이는 아주 큰 잘못이다. 그 분의 업적을 폄하하거나, 개인적으로 비난하거나, 카토릭이니까 무조건 존경해선 안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방금 든 예에서 무엇인가 잘못된 점이 있다. 무엇인지 지적해 낼 수 있겠는가? 어떤 목사님이 신자들이 교회에 나올 때 두뇌는 집에 놔두고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하고 가려고 나온다고 하셨는데 설교를 들을 때도 생각하며 들어야 한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테레사 수녀에게 기도했더니 수녀 때문에 기적이 일어났다는 부분이다. 교리적, 신앙적 해석을 떠나 이것이 과연 상식적으로라도 말이 될 법한가?
성경을 잘 이해 하려면 국어 공부 하듯이 분석해 보라고 했는데 다시 본문을 잘 읽어 보자. 예수님이 사람 앞에 비취게 하라는 뜻이 일부러 생색을 내거나 사람의 칭찬을 들으려 선행하라는 뜻은 아니다. 16절 처음에 어떻게 시작하는가? “이 같이 하여”이다. 이 말은 예수님이 우리더러 실천해야 하는 행동의 중심이 “사람에게 비취게 하라”에 있지 않고 그 앞에 설명한 “이같이 하여”에 있다는 뜻이다. 이 같이 하였더니 사람에게 비취더라는 것이다. 그럼 ‘이같이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당연히13-15절에 이야기 한대로 했더니라는 말이다. 세상과 죄악 앞에 숨지 말라, 피하지 말라, 당당히 맞서라, 그러면 자연히 비취게 된다는 뜻이다. 일부러 사람 앞에 나서거나 많은 곳에 가서 선행하라는 뜻이 아니다.
테레비 방속국의 수재 의연금 모금 생방송하는 데 가서 줄 서지 말라는 것이다.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절대 아니다. 평소 때 바로 옆 집이 부도가 나 끼니를 굶고 있는지는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면서 년 중 행사나 몇 년에 기껏 한번쯤 그것도 벙어리 저금통 동전이나 깨어 갖다 내면서 마치 자기가 선한 사마리아 인이나 된 양, 불우 이웃에게 해야 할 책임을 다한 양 뻔뻔한 얼굴로 서 있지 말라는 것이다. 교회 대청소를 해 보면 청소기 들고 강대상 주위를 서성이거나 담임 목사님 곁을 졸졸 따라 다니는 사람들은 많지만 변소에 가보면 아무도 청소하는 사람이 없다. 교회 안에도 이 지경이니 예수님이 선행을 은밀하게 하라고 하실 수 밖에…
빛은 어디 가나 빛으로 보이고 숨길 수 없다고 하셨다. 빛은 강대상 곁에만 빛나거나 더 밝아지는 것이 아니라 변소에 가도 빛이요, 밝기도 마찬가지다. 신자는 빛이니 강대상에 가든 변소에 가든 어디든 어두운 곳에 가 있어라 그러면 그곳에 빛이 비췬다는 것이다.
테레사 수녀도 절대 일부러 칭찬을 받으려고 그 일을 하신 것은 물론 아니다. 인도의 불쌍한 어린이들의 형편이 너무 안타까워 그 일을 감당하셨고 생전에 이미 “빈민의 성자 (the saint of the gutters)”라는 칭호를 받을 만큼 자연스럽게 그녀의 선한 행실의 빛이 사람들 앞에 비춰졌다. 여기 까진 문제가 없다. 그럼 무엇이 문제인가? 본문 후반부의 말씀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고 자신이 영광을 받았다는 것이다.
누가 성자인가?
테레사 수녀 같은 분을 성자로 지명하고 그분의 삶과 업적을 기념하고 인품과 신앙을 존경하는 것이 크게 잘못될 것 없지 않은가, 오히려 권장할만한 일이 아닌가? 라고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카토릭의 성자 제도는 신자에게 단순한 존경만 아니라 경배하도록 요구하며 실제 그렇게 행해진다. 유골함이나 무덤에 입 맞추고 절을 한다. 성자가 있었던 곳은 성지로 신자들의 순례와 참배의 대상이 되며 심지어 유골함은 세계 각지의 성당에 순회 전시된다. 다른 것 다 접어 두고 인도의 그 여인이 고백한 대로 “테레사 수녀에게 기도했더니 그녀가 낫게 해주었다”는 것이 바른 신앙의 내용인가?
이 문제는 이렇게 비교해서 생각해 보면 무엇이 잘못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실명을 들어 죄송하지만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조용기 목사님이 많은 신유의 기적을 일으키지만 기독교 신자 어느 누구도 조 목사님에게 기도했더니 조 목사님이 낫게 해주셨다라고는 하지 않는다. 나중에 목사님이 승천하셔도 그 무덤을 순례 참배하고 가서 절하고 입 맞추지 않는다. 조 목사님이 세계 최대의 교회를 이루고 수 많은 신유의 기적을 이루었다고 그 분만이 성자인가? 그분 교회의 백만 신자는 다들 그 분을 성자로 만들어 주기 위한 실험대상 내지 소모품인가? 그렇지 않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는 자를 성도(Saint)라고 한다. 신자 모두가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고전1:2)들이다. 우리의 인격이 고매해지고 경건한 삶을 살고 있고 위대한 업적을 쌓아서가 아니다. 신령한 문제에 있어선 천재와 둔재가 따로 없다. 조 목사님이 자신의 신령한 능력으로 기적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와 방법으로 사용하셔서 각자의 형편에 맞게 은혜로 베푸시고 그것도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한 것일 따름이다. 어느 잡지의 인터뷰 기사에서 그 분이 스스로 고백하기를 자신도 사람들에게 암이 낫는 등의 기적이 일어나면 자기도 모르게 교만해지고 자신이 대단한 사람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마다 모든 공식 일정을 취소하고 방문을 걸어 잠그고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회개한다고 했다. 또 그래야만 병자들에게 그런 은혜를 계속 베풀 수 있다고 했다.
신자가 죽은 후에 가게 될 천국에는 위계 질서의 차등이 따로 없다. 어떤 평신도가 죽어서 천국을 갔다. 그런데 자기가 갈 때는 별로 반가워 하지도 않고 본척 만척 하시던 예수님이 목사님 한 분이 오니까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고 뛰어나가 너무 좋아하시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예수님에게 아니 천국에도 목사만 대접하고 저 같은 평신도는 무시하는 차별이 있느냐고 따졌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대답하기를 목사가 하도 오랜만에 천국에 와서 너무 반가워서 그랬으니 오해하지 말라는 개그가 있다. 이 땅에서 누리던 신분과 지위에 따른 차등이 계속해서 있다면 이미 그 곳은 천국이 아니다. 신자 모두는 우리 주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면 할 수 있고 하나님 보좌 앞에서 24장로와 함께 거룩, 거룩, 거룩 영원토록 찬양하는 그 장엄한 예배에 함께 참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성도다.
아무리 위인전에 나올 만한 인물이라도 어떤 사람이 인간 세상에서 성자가 되어 인간들의 추앙을 받을 수 없다. 인간의 의는 모두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하다. 하나님을 제외한 어떤 누구도 인간들의 경배를 받아선 안 된다. 인간 세상에서 인간끼리 평가할 때는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시편14:2)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감히 고개를 들고 성자입네 할 수 없다. 아니 하나님께로 나아 가거나 그 앞에 바로 설 수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라는 하나님이 정해 주신 필터를 통과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가기도 전에 그 장엄하고 거룩한 영광 앞에 전부 소멸되어 없어진다. 여기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다.
병신도가 된 신자들
테레사 수녀의 업적도 위대했고 그 동기도 순수했다. 그러나 그녀는 카토릭의 잘못된 교리를 잘 알고 있었고 맞다고 인정했고 그것을 믿었다. 아마 틀림 없이 자신이 성자가 될 것을 목표로 하거나 기대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최소한 자기가 죽고 나면 성자로 추서(追敍)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정도는 알았을 것이다. 생전에 벌써 그런 낌새를 채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아무리 제도와 교리가 잘못되었더라도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꼭 했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그 분의 업적을 가지고 시비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불신자는 물론 신자까지 기독교 신앙이 구제와 선행하는 것이 본질이자 전부인양 오해하게끔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바로 믿고 또 천국 가는 것처럼 믿게 했다. 말하자면 우리 같이 돈과 시간과 여유가 없고 내 코가 석자 목구멍이 포도청인지라 텔레비 방송국에 일년에 일차 아니 몇 년 동안에 한 번도 줄을 서지 못한 신자를 몽땅 도매금으로 위선자로 넘긴 것이다. 교회 다니면서도 가끔 슈퍼 로토의 헛 꿈도 꾸고 일년에 한 번쯤 방송국 대신 라스베가스 가서 쌓인 스트레스도 풀고 교회를 10년 20년 다녀도 술 담배 문제 하나 해결 못하고 수시로 옛날 버릇이 불쑥불쑥 튀어 나오는 대다수의 신자들이 말만 앞서는 예수쟁이가 되어서 어디 가도 예수 믿는다는 것이 부끄럽게 되어버렸다. 테레사 수녀가 한 선행 때문이 아니라 성자로 추앙하는 제도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유혹과 시험에 넘어가는 신자들의 잘못을 변명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다. 기독교인들의 의는 바리새인들 보다 더 나아야 하며 마음의 음욕을 품는 자는 스스로 눈을 뽑든지 초대 교회 교부 오리겐처럼 고자가 될 정도로 피 흘리기 까지 죄악과 싸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 같은 병신도(?)나 오리겐이나 조목사님이나 테레사 수녀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을 처다 볼 수조차 없었다는 것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감히 부를 수 없었으며 하나님께 아무리 기도해도 은혜를 받을 수 없었다.
인간의 찬양과 경배를 받을 수 있는 분은 오직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그 어린 양 뿐이다. 인간 혹은 인간이 만든 제도, 관습, 사상, 철학 그 어느 것이라도 하나님과 예수님이 받을 영광을 대신하거나, 가로채거나, 감소하거나, 훼손시키거나 심지어 오해하게끔 해서 단 한치라도 그 빛이 가려지게 해선 절대 안 된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자라야지 테레사 수녀를 닮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세계 도처에서 자기 생명을 걸고서라도 불쌍하고 어려운 영혼들을 위해 섬기는 선교사, 주의 종, 평신도 들이 얼마든지 많다. 그 가운데는 아마 테레사 수녀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는 분도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자기가 성자라고 생각하거나 성자가 될 것이라곤 꿈도 꾸지 않는다. 어디 가서 무엇을 하건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지 자기의 의는 나타내지 않는다.
돌아가신 수녀님에게는 좀 죄송한 이야기지만 벌써 유명해지면 방송국에 저금통 들고 줄 서든 사람들이 인도의 켈커타에도 수도 없이 몰려들기 때문에 그 때는 이미 그 사역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것으로 명성만으로 큰 어려움 없이 굴러가게 만들어 버린다. 수녀님이 처음 시작했을 당시의 순수한 동기도 훼손되어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도 가려진다. 남은 것은 인간 세상의 갈채를 받는 노벨 평화상과 성자 직위 뿐이다.
신자의 선한 행실
신자가 선한 행실을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전혀 다른 경우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할 때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옛날 신하가 군주에게 대하는 태도를 연상한다. 임금 앞에서 무슨 일이 생겨도 심지어 야단을 맞아도 그저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혹은 “황공무지로소이다” 하는 식이다. 라면 한 그릇 놓고도 온갖 미사여구 다 동원해서5분 10분씩 기도한다. 어떤 일이 생겨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혹은 “하나님 혼자 영광 받으십시오”가 입에 발렸다. 명색이 내가 장로인데 교회에서 힘든 표정을 하면 안 되지 짐짓 경건하고 감사가 넘치는 척 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절대 종교적 공치사에 그쳐선 안 된다.
한 번 더 성경을 분석하듯이 보기로 하자. 16절에서 빛을 보여야 할 너희는 누구인가? 신자들이다. 그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저희는 누구를 말하는가? 불신자들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신자의 입에 붙어 다니는 습관적 문구가 아니라 불신자가 진정으로 고백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는 불신자들이 어떻게 일 순간에 하나님께 영광까지 돌릴 수 있겠는가?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아니 김개똥이가 미국 가서 예수 믿고 변했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마. 뒷골목의 왕자가 절대 그럴 리가 없어. 그렇다면 내 손에 장을 지져.” 그런데도 자꾸 들려 오는 소문은 단순히 옛날의 방탕한 생활을 청산하고 예수를 믿은 정도가 아니라 주일날 기타치고 찬양 인도하고 대표 기도도 하고 어려운 이웃도 자기 형편과 상관 없이 잘 도와 준다고 한다. “도저히 그렇게까지 헷까닥 바뀔 줄은 상상이 안 돼. 참 희한한 일이 다 있네.” 옛날 친구들이 아직 하나님을 믿은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한 적도 없다. 불신자이기에 그럴 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그러나 그 이면의 뜻은 무엇인가? 평소의 기질, 성격, 말투, 습관, 태도, 생활방식, 가치관으로 판단해 볼 때에 김 개똥이에게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김 개똥이의 능력이 향상 되었거나 잘나서도 아니요 특별히 그의 개인적 결단과 노력의 결과도 아니라는 것이다. 불신자 친구들이 겉으로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인정한 것이 따로 있다. 무엇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거룩하고 의롭고 신령한 힘이 반드시 있으며 또 그 힘이 그를 변화시켰구나. 정말 예수를 믿으면 사람이 저렇게까지 변화될 수 있구나. 이전 보다 조금 향상된 정도가 아니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구나. 바로 이것이 불신자가 신자의 선행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의 참 모습이다.
신자의 고통
바로 이런 뜻에서 신자는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형통하지 않는다. 괴롭고 힘든 일이 줄어들지 않으며 어떤 면에선 더 늘어난다. 하나님이 신자를 일부러 골탕을 먹이려는 뜻이 아니다. 꼭 시련을 거쳐 신자의 믿음을 정금 같이 변화 시키려는 훈련의 목적만도 아니다. 신자가 힘든 가운데 있지만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은 불신자로부터 듣고 싶은 고백이 있으며 세상으로 하여금 꼭 인정하게끔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알기 쉽게 말하면 신자를 볼 때 불신자가 이런 말을 해야 한다.
“아니 저 놈이 나보다 형편이 안 좋은 것 내가 뻔히 아는데, 그 놈 참 이상한 놈이네. 쌀 한 가마를 팔아줘도 내가 팔아 줘야 하는데 오히려 저 놈이 나한테 쌀 한 가마를 사 들고 찾아 오네. 옛 날에 저 정도 힘든 일을 겪으면 그저 불안하고 초조해 방방 뛰고 야 괴롭다 죽고싶다 술 한 잔만 하자, 돈 좀 빌려 달라, 전화 통이 불이 나 내가 피해 다니기 바빴는데 전혀 그런 내색조차 안 비취니 어디 가서 히로뽕 주사를 맞았나? 주사 자국도 없고 눈동자도 멀쩡해 그런 기색은 없는 것 같은데 참 이상하네.” 이런 일들이 한 두 번 정도가 아니라 계속되어야 한다.
그래서 잘 나가던 불신자 친구가 아주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이전 같이 권세 있거나, 돈 많거나, 아는 것 많거나, 심지어 술이라도 잘 사주는 친구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대신에 아직 여전히 별 볼일 없이 궁색하게 방 한 칸 아파트에 사는, 이전에는 위선자니 예수쟁이니 멸시하던 그 이상하게 헷까닥 변한 친구, 그 놈의 집으로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이 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자기도 놀라게 된다.
불신자 친구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가 왜 십자가에 죽었어야 했는지 모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도 모르며, 찬양을 하거나 기도를 하는 종교적 행태도 전혀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이 불신자로부터 고백을 받아냈고 세상으로부터 인정 받은 사실이 있다. 성경의 구약의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일관되게 하나님이 인간에게서 하시고 싶어 하시는 말씀은 “상천하지에 나 여호와 하나님만이 너를 지었고 너의 하나님이 되며 너는 나의 백성이니라”이다. 세상의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이름 앞에 무릎 꿇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신자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했다.
바로 이 일 때문에 하나님은 신자로 하여금 신자의 기대, 예상, 불평, 불만, 의심, 믿음의 정도보다 훨씬 초과 해서 어려운 형편에 처하게 할 수 있다. 새벽 기도에 뿌린 눈물의 양이나 작정기도에 동원된 믿음의 양과 상관 없이 신자의 환난을 통해서만 이루실 수 있는 일이 있다. 불신자에게 위로를 주고 나아가 그들로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과 능력과 은혜를 체험케 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4) 이 일을 기쁘게 감당하고 감사하며 순종하는 것이 신자다.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기 때문에 가능하며 그래서 빛과 소금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솔직한 모습은 어떠한가? 교회를 10년 20년 다닌 사람들의 신앙 수준이 이렇다. “하나님 아버지 아니 이렇게까지 말씀보고 찬양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기도했는데도 아직 이 모양 이 꼴이 무엇입니까? 제가 명색이 장로요 안수 집사인데 허구한 날 빚에 쪼들리면 평신도들 앞에서나 교회에 덕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습니까?”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겨우 이런 정도 밖에 생각 못하니까 테레사 수녀가 성자로 추앙 받고 그 앞에 가 절하고 경배하는데도 아무도 꿀 먹은 벙어리 모양 그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도 없고 심지어 기독교 신자나 목사들마저 빛과 소금의 모델로 본 받자고 오히려 난리를 친다.
빛과 소금이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단순히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을 내 열심과 여유로 도와 주는 것이 아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식도 아니다. 신자들 대부 분이 솔직히 이런 정도도 하지 못한다. 심지어 텔레비 방송국의 불우 이웃 돕기 모금에도 제대로 줄 서 본적이 없을 수 있다. 아무리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가 세상 앞에 증거하고 드러내 보여줄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다.
유독 교회 안에는 온갖 죄인들이 모여 있다. 우리 가운데 이전에 뒷골목의 왕자였던 사람뿐 아니라 밤의 황태자도 있고 사기꾼의 왕초도 있으며 창녀 심지어 포주 더 나아가 포주를 등쳐 먹는 기둥서방 같은 이들이 변화되어 경건한 모습으로 주일날 교회 좌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을 수 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제 버릇 개주나 욕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 여전히 그 버릇이 발동하기 때문에 그런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신자가 불신자와 다른 유일한 점, 저들은 모르지만 우리가 아는 것 딱 하나는 우리 모두 그런 소리를 여전히 듣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고 또 그래서 더욱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벌거벗고 엎드리게 된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 모두 나를 손가락질 하고 가장 가까운 부모, 형제, 자식, 배우자마저 어떤 때는 나를 배반하고 외면할지라도 예수님 그 분만은 나를 단 한 번도 배반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영원하고도 다함이 없는 자비와 긍휼로 나를 대해 주시더라는 것을 철저하게 체험하게 된다. 언제 어느 장소 어떤 모습으로 있더라도 그 분은 나를 용납하시고 위로와 은혜를 채워주기 때문에 그 분 안에서 내가 쉼을 얻고 내 멍에를 벗었고 그래서 평강과 자유함을 누리게 된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주위를 살펴 보니까 아직도 이전의 내 모습으로 방황하고 있는 자들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세상의 썩어 없어질 것들, 돈, 명예, 권세, 자존심, 체면, 위신등에 얽매여서 헤매고 있는 자들이다. 그런 것들이 꼭 죄이거나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칭찬과 박수를 받지 못하면 밤새 꽁꽁 앓으며 어쩔 줄을 몰라 하기 때문에 바로 그 안절부절을 없애기 위해 남보다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더 빨리 차지하려고 눈에 시뻘겋게 독이 오른 자들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형통하고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자라도 심지어 교회에 성실히 출석하는 신자들 가운데도 도대체 참 평강과 참 사랑이 없는 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그런 자들에게 우리가 받은 은혜와 빛을 비취고 싶은 열망이 솟구친다. 저들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이 안타깝고 짐이 된다. 나 자신의 멍에는 이미 벗겨졌지만 남이 멍에를 지고 있는 것이 나의 멍에가 되어 짐이 된다.
신자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은 우리가 빛 안에 있고 소금기를 잃지 않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 모습은 후패할지라도 언제 어디서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있기 때문에 절대 흔들리지 않고 기쁨과 평강을 유지하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멍에를 벗고 홀가분해진 우리를 볼 때에 멍에에 눌려 있는 불신자들이 그 짐을 벗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다. 그들도 예수 안에 들어오고 싶어지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경배와 찬양 같은 종교적 형식은 아직 아무것도 갖추지 않았지만 전지전능하신 구원의 하나님을 인정하고 싶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 일을 함에 있어 신자의 외적인 형편과 여유는 아무런 전제나 필요조건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신자가 힘 들어야 더 잘 이뤄질 수 있다.
신자가 자꾸 빛과 소금이 되려면 신앙 생활이 힘들고 괴롭다. 벗어버린 멍에를 다시 덮어쓰려고 애쓰는 꼴이다. 여전히 빛과 소금이 되었다는 확신이 없으니 부끄러울 수 밖에 없다. 성자를 정해 자기 신앙 훈련과 연습의 표본으로 삼고 싶어진다. 그럼에도 빛과 소금이 되었다는 확신은 갈수록 멀어진다. 신자가 선행을 하고 성화를 이루고자 하는 신앙의 목표와 그 노력이 잘못된 것은 절대 아니다. 자꾸 빛과 소금이 되려는 이면에는 어쩌면 신자 또한 사람들의 칭찬과 박수갈채를 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를 믿는 순간 모든 신자는 이미 빛과 소금이 되었다. 세상과 죄악 앞에 당당하고 자신 있어야 한다. 얼마든지 맞서 싸워야 한다. 우리가 당당한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예수님이 당당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