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53) 2/9/200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하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낮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18-20)
국민학교 도덕교과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단지 율법이 요구하는 도덕적 삶의 표본을 제시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에 예언된 메시야의 사명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세에게 떨기 나무 불꽃의 모습으로 나타나 불꽃은 타면서 나무는 타지 않게 한 하나님처럼 우리의 죄를 몽땅 짊어지고 스스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 죄인은 살려주셨다. 바로 17절에 설명된 내용이었다.
본문 18절 이하 20절까지는 이제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구약 성경 전체를 지칭하는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을 쓰지 않고 율법만 따로 지칭하여 그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비록 내가 너희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몽땅 짊어졌고 또 너희가 현재 어떤 모습과 형편에 있더라도 너희를 향한 용서와 사랑의 은혜는 한결 같지만 율법의 도덕적 요구는 절대 약해지거나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6:1에서 염려한대로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거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는 것은 항상 예수님을 닮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본문을 볼 때에 바로 이런 뜻에서 신자들이 너무 오해하고 교회에서 잘못 가르치는 부분이 있다. 예수님이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나아야 된다고 하니까 신자의 선행과 구제가 질적, 양적으로 수준이 훨씬 높아라고 권면하는 말씀으로만 생각한다. 성경, 나아가 산상수훈의 예수님의 말씀을 이 정도로 밖에 해석하지 못하면 너무 가난한 신앙이다. 죄송하지만 유치하기 까지 한 신앙이다.
상식적으로 한 번 생각해보라.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 없이 너무나 당연한 말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드러난 죄와 은혜의 상관관계를 몰라도 된다. 천하에 흉악한 살인범도 겉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속으로는 반드시 일말의 양심이 있게 마련이고 자기가 한 짓을 회개하고 선하게 살아 보려고 노력은 한다. 거기다 신자가 불신자보다 더 선하게 살아라는 것도 너무나 ABC같은 이야기 아닌가?
본문이 지금껏 너희들이 국민학교 도덕 수준으로 밖에 살지 못했으니까 이제는 대학교 윤리 수준을 실천하라는 것이 아니요 구제 헌금할 때 10불 하던 것을 이제는 100불은 하라고 권하는 말씀도 아니다. 본문의 강조점은 이미 제시 되어 있는 율법에서 빼먹지 말고 다 지켜라는 것이다. 국민학교 도덕 교과서라도 제대로 다 잘 지키면 모두 다 천사 소리 듣는다는 뜻이다.
고추장의 십일조
우선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불신자가 아니었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었다. 나아가 저들만큼 구약성경에 정통하며 율법을 하나 빠트리지 않고 철저히 지킨 사람들도 없다. 당시로선 선행과 구제에 가장 열심이었던 사람이다. 오늘 날의 신자가 감히 따라 갈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자들이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 십일조와 선행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의아해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들은 개인적으로도 선행을 많이 했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십일조, 엄밀하게는 소득의 근 30%까지 바쳐야 했고 그 바쳐진 십일조로 고아, 과부, 나그네, 걸인 들을 구제하는데 사용했다. 그런데 이들은 양념의 십일조도 바쳤다고 예수님이 인정했다.
옛 날 한국에 쌀 한 가마가 한달 수입의 전부요 그것으로 모든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때에 우리 믿음의 어머님들은 성미(聖米)를 모았다. 밥할 때마다 십의 일을 따로 떼어 교회에 갖다 바쳤고 교회에서 흰 쌀밥을 해서 주일날 나눠 먹는 것이 교회 가는 큰 기쁨 중의 하나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 때에도 고추장, 된장의 십일조는 바치지 않았는데 이들은 그렇게 했다는 뜻이다. 오늘 날 우리가 이 정도의 열심을 하나님 앞에 보일 수 있겠으며 또 그렇게 하고 있는가? 30%는 커녕 10%라도 제대로 십일조로 바치는가?
인간더러 착하게 살아라는 것은 두 말하면 잔소리에 불과하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인간이 없고 또 나름대로 조금이라도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착하게 살아라고 권하는 것이 잔소리가 되는 또 다른 이유는 말로 타일러서 알아 처먹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인간 관계에서 사랑에 바탕을 두고 순종과 존경의 정도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는 부모 자식 간에도 말로 해 관계가 더 나아지지 않는다.
음치의 지정곡
말로 해서 제대로 알아 듣는 자 없다는 것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선을 베풀 능력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너무 심한 이야기 같은가? 고아원과 양로원 위문도 갔고 여름 방학 때 농촌 봉사활동도 했고 또 불쌍한 이웃이 안타까워 도와 주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인데 왜 선행을 할 수도 없다고 단정 지을 수 있는가?
그러나 솔직히 우리 모두 자신을 되돌아 보며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우리가 이웃을 돕고 구제하고 섬기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는가? 벼르고 벼르다 어쩌다 한 번 한 것 아닌가? 정말 내 시간과 돈과 여유를 쥐어짜내야 했지 않았던가? 누구를 도우려고 마음 먹은 것을 100% 다 실천했던가? 실천했다고 할지라도 마음 먹은 것과 실천한 것 사이에 시간적으로 얼마나 긴 간격이 있었으며 또 처음 결심했던 도움의 정도와 양이 실제 섬기고 갔다 준 양과 정확히 일치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심지어 기도 응답 받아 은혜가 넘쳤을 때 감사 헌금해야지 마음에 떠 올랐던 그 액수 만큼 정확히 했던가? 설사 정확히 했다 할지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일주일 내내 스스로 기쁨에 자원한 마음을 변함없이 유지했는가, 갈수록 아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하나님이 처음 마음 먹은 작정 헌금의 액수를 아시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들어 마지 못해 그 액수 그대로 헌금한 적은 없었는가?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 마저 이럴진대 사람들 사이에서 두말할 필요가 있으랴? 정말 내 자신을 완전히 죽이고 주고 받는 이해관계가 전혀 개입 되지 않고 혹시라도 내 의와 자존심과 교만한 마음으로 폼 잡으려고 한 적이 없었는가? 아가폐의 참 사랑을 평생에 한 번이라도 한 적이 있었는가?
대신 세상의 쾌락과 죄악을 따라가는 데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는가? 나쁜 친구의 꾐에는 별다른 주저 없이 조건반사적으로 자동적으로 따라 나섰지 않는가? 이번에는 이런 죄를 한 번 지어봐야지 라고 심각하게 고민하고 결심하고 실천하는 데 따로 시간과 돈을 지어 짜내거나 벼르고 별러서 한 적이 있는가? 또 그런 문제로 하나님 앞에 기도해 본 적이 있었는가? 기도할 리가 없다. 스스로 기도하면 죄를 따라가는 데 괜히 기분만 나빠지고 뒤에서 잡아 댕기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다는 것마저 잘 알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3:15에 지적한 대로 우리의 발은 피 흘리는 데는 빨랐다. 우리 모두 살인 죄를 범했다는 뜻이 아니라 죄의 삯은 죽음이요 영원한 멸망인데 그 멸망으로 향하는 발 걸음은 아무 생각 없이 자연적, 습관적이었으며 그 앞에 어떤 장애나 방해물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죄악은 우리 모두의 습성이자 일상 생활이었다. 그 죄악이 없으면 심심했고 심지어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모든 사람들이 내가 선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과 우리 속에 실제로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모른다. 마치 완전 음치가 노래 방에 가서 어쩌다 한 번 부른 노래의 점수가 90점 이상 나오니까 자기가 일류 가수가 될 수 있거나, 된 양 착각하는 것과 같다. 한국의 모든 음치들의 영원한 18번 지정곡은 “사랑해”이다. 음치가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우선 가사가 단순해서 외우기 쉬워야 하고 반음 올림과 내림도 없어야 하며 변조가 없어 어린아이로부터 늙은 노인까지 누구나 쉽게 따라 불러야 하는데 그 곡은 이 모든 조건에 다 맞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선행을 하는 것이 꼭 이 음치들이 노래하는 것과 같다. 일년에 한 두 번 씩 방송국에서 하는 불우이웃 돕기 모금 운동에는 전국민이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줄을 길게 서 있다. 왜 그런가? 방송에 얼굴이 나가고 신문에 이름이 나가는 것이 좋아서이기도 하지만 정작 이유가 따로 있다. 남들도 다 하니까 꼭 내 포켓에 내 돈만 나가서 나만 손해 보는 기분이 안 들기 때문이다. 수만 명이 참여하니까 특별히 많은 액수를 할 필요 없이 단 돈 천원만 내어도 된다. 선한 소망을 실천했다는 만족감을 조금은 채울 수 있고 평소 때에 이웃을 사랑 못한 죄책감을 씻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놓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라도 선행을 하는 그 자체를 탓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다. 음치가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노래를 부르고 마치 가수가 된 양 착각하듯이 우리 모두는 이웃을 찾아가 그 고통을 실제로 나누는 그런 어려움과 부담 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선행 한 번 해놓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처럼 착각한다. 참 사랑을 정말 은밀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는 갖고 있지 않다. 평생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재수 없는 예수 쟁이들
세상 사람들이 유독 예수만은 아무 까닭 없이 싫어한다. 싫어하다 못해 저주까지 한다. 그 이유가 바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너는 사랑할 능력조차 없는 놈이다. 썩을 대로 썩은 죄인 중의 괴수요, 사망의 몸이요, 진토요, 썩어 없어질 존재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요, 오직 더럽고 추한 냄새가 진동해서 코를 막을 정도라고 하니까 격렬하게 반발할 수밖에 없다. “무슨 소리 하느냐? 나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고 살 수 있는 자신이 있다. 그런데 내가 왜 죽어야 해? 예수 믿는다고 말만 앞서고 뒷 구멍으로 호박씨 까는 너희들이 더 위선자지?” 맞다. 목사라고 예수 쟁이들 변호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내가 생각해도 위선자요 재수 없는 놈들이 예수 쟁이들이다.
신자들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내 자신을 생각해 봐도 재수 없는 예수 쟁이임에 틀림 없다. 예수 믿고 목사가 되어도 썩어 없어질 물질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여전히 슈퍼로토에 걸려 대박을 터뜨리는 부질 없는 공상을 가끔 한다. 그러나 이곳 캘리포니아 주로 이사 온 후에 로토를 단 한 번도 사지 않았다. 목사라 신령하고 거룩해진 까닭이 아니다. 순전히 걸릴 확률이 없기에 단 돈 5불 10불도 아까워서 사지 않은 것뿐이다. 더 중요한 이유는 혹시나 하는 마음은 여전히 남았는데도 목사가 복권을 사는 것을 누가 볼까 봐 사지 않은 것이 더 큰 이유다. 이런 내 모습을 보느라면 내가 생각해도 내가 한심한 놈이요 정말 재수 없다.
인간이 선하게 살려는 소망이 있고 노력하고 아주 초라한 모습이라도 실천할 수 있는 것 그 전부가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 모든 피조물 중에 오직 인간에게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만드셨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사랑이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소원과 능력을 하나님의 영의 형태로 심어 주신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영이 자리 잡아야 할 곳을 아담이 사단의 꾐에 넘어가 범죄한 이후로는 세상과 죄악과 사단이 차지해 버렸다. 인간의 영혼이 전적으로 부패되었고 희미하게나마 흔적이 남아 있는 형태가 인간만이 갖고 있는 양심이다. 동물이 양심을 가진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따라서 그 영이 부패되었지만 흔적은 남아 있어 모든 인간이 사랑할 소원은 있고 노력도 해 보지만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절대 발휘하지 못한다.
지금 기독교 교리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지난 경험으로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지난 평생 동안 정말 하나님 앞에 내세워 떳떳하고 자랑스런 선행을 한 적이 몇 번 되는가? 그에 비교해 하나님 앞은커녕 쥐구멍이라도 찾아 가고 싶을 정도로 죄를 지은 적은 몇 번 되는가? 선행과 악행의 비율이 혹시 2:1 혹은 3:1인가? 인류 역사상 그런 자는 아무도 없다. 그 비율이 역전되어 1:2, 1:3 정도라도 되는가? 그 정도만 되어도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가 전혀 없다. 단지 시간과 여유가 없어 사랑 못하는 것이지만 여전히 사랑할 능력은 갖춘 셈이다. 솔직히 우리 모두 백대일, 아니 천대일, 아니 만대일 보다 더 내려가지 않는가?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롬3:11,12)
우리가 한 선행과 악행의 비율이 만 대 일이 넘는데 어떻게 우리에게 더럽고 추하고 썩어가는 냄새가 진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평생에 기껏 한 두 번 남들 다하는 선행한 것은 완전히 그 진동하는 냄새에 파 묻히고 거룩과 생명과 의의 향기는 맡을래야 맡을 수가 없다. 모든 사람의 형편이 이럴진대 감히 누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으니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 없다고 큰 소리 칠 수 있으며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단 말인가? 감히 예수쟁이를 위선자, 재수 없다고 하는 것 자체도 썩어가는 냄새를 피우는 일의 하나일 뿐이다.
교회 안의 위선
본문은 예수님이 일차적으로 종교 지도자에게 하신 말씀이다. 요즘 식으로 하자면 목사나 전도사에게 하신 말씀이다. 분명히19절에서 율법에서 빼고 가르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나아가 단순히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아라는 권면을 넘어 천국에 관한 말씀이다. 천국에서 크거나 작다고 일컬음을 받느냐, 심지어 천국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의 문제다. 쉽게 바꾸어 말하면 교회는 착하게 살아라고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국 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뿐이라고 선포하는 곳이 교회다. 그것 외에 교회가 가르칠 것이라곤 없다.
그럼에도 오늘 날의 모든 교회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저지른 잘못을 똑 같이 저지르고 있다. 저들이 율법을 613계명으로 세분화 시켜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해야만 천국 간다고 가르친 것처럼 오늘날 강단에서 들려 오는 이야기는 거의 전부가 착하게 살아야 복을 받습니다, 신자는 불신자 보다 더 착해야 합니다 정도이다.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 아닌가? 구태여 교회에 나와서 듣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야기다. 국민학교 도덕 교과서 그것도 일학년 짜리 하나라도 제대로 지키면 교회가 필요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필요 없다. 그럴 수 있으면 이 땅에 오시지도 않았다. 착하게 살아라, 그렇게 살면 복 받는다는 말을 들으려 일요일 낮의 황금 같은 시간을 투자할 필요는 전혀 없다. 그것도 돈을 바쳐가면서 까지 말이다. 아무 쓸데 없는 낭비다. 차라리 집에서 도덕 교과서 읽고 반성하는 것이 낮다.
기독교는 인간이 더럽고 추할 뿐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완전히 부패된 영혼 위에서만 십자가의 은혜가 구원의 능력을 발한다. 사랑할 수 있는 소원은 있되 그 능력이 없어진 우리 영혼에 하나님의 영이 부어져야 우리의 소원이 제대로 소원으로 작동이 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롭게 거듭나고 그래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길 말고는 절대 이웃을 사랑할 능력이 생기지 않는다. 예수쟁이들만 하나님께 잘 보여 신령한 은혜와 능력을 부여 받았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만이 인간이 얼마나 진토이며, 썩어 없어질 버러지 같은 존재인지 철두철미하게 깨달은 것 뿐이다. 그리스도가 없었다면 우리 모두 썩어 없어졌을 존재였지만 오직 그 분의 십자가에 드러난 의 때문에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살려 주고 계심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분만이 우리의 구세주이며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에 그 길로 들어선 것 뿐이다. 나아가 예수를 믿었다고 거룩하게 바뀌었다는 것도 아님을 우리는 잘 안다. 여전히 우리는 입만 앞서는 위선자 같은 신자이기에 날마다 세월이 갈수록 주님의 긍휼만을 소원할 뿐이다. 우리가 우리 능력으로 선행을 하려는 소망을 키워나가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렇게 못함으로 더욱 주님의 십자가 앞에 꿇어 엎드리는 것이다.
오늘 날 기독교가 힘을 잃고 한국 교회도 드디어 신자가 줄기 시작한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뿐이다. 교인들이 죄를 지어 위선자처럼 살아서가 절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가 강조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얼마나 더럽고 추하고 썩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고 선포하는 것을 소홀히 하고 있다. 대신에 너희는 선하게 얼마든지 살 수 있으니 그렇게 살아라고 한다. 죄는 실종 되었고 싸구려 복음만 성행하고 있다. 복음을 부끄러워 하고 있다. 죄인이라고 하여 마음에 찔림을 주면 당장 그 다음 주 교인 수가 줄까 걱정하게 된 것이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 대신에 싸구려 도덕주의, 경박한 율법주의, 착하게 살면 복 준다는 식으로 도덕으로 위장된 기복주의가 판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양념은커녕 쌀의 십일조도 못 바치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기대하고 뻔뻔하고 치사한 얼굴로 매주 교회 출석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감히 함부로 이야기 하지 못한다. 목사도 슈퍼 로토 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는 고백을 하면 목사의 권위가 떨어질까 교회서나 목사관에서나 항상 경건한 척 하고 있다. 목사가 세울 것은 자기의 권위가 아니다. 신자들 앞에 오직 하나님의 권위를 세워야 한다.
교회 와서 서로 착한 척, 경건한 척 위선을 떤다. 주의 종이나 일반 신자나 할 것 없이 외식하는 자가 되어버렸다. 교회 밖에서 우리더러 위선자라고 비난하는 것은 사실 큰 문제가 아니다. 불신자가 우리더러 아무리 예수 쟁이라고 욕을 해도 일일이 대꾸하지 말고 속으로 그냥 웃어 넘기면 된다. 그래도 우리가 죄를 지어도 그들 보다는 적게 짓는다. 교회 와서 예배 드리고 성경 공부하고 봉사하는 시간만큼은 죄를 짓지 않으니 말이다. 또 매주 목사님으로부터 죄짓지 말라고 야단 맞는데 감히 어떻게 마음 놓고 죄를 지을 수 있는가?
정작 우리가 위선을 떨지 말아야 할 것은 다른 것이다. 내 속에 참 사랑할 능력이 없으면서도 있는 것처럼 가장 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큰 위선이다. 우리에게 있는 사랑하고자 하는 소원과 열심과 노력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는 다르고 우리가 얼마나 피 흘리는데 발걸음이 빨랐는지 정말 겸비하게 인정해야 한다. 오늘도 사랑하려고 노력은 많이 했지만 여전히 또 실패했습니다. 저에게 필요한 것은 정말 주님의 긍휼과 자비 뿐입니다. 이 죄인을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영으로 채우시고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날마다 가슴을 지어 뜯으며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의 십자가 앞에 엎드려 항복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고귀한 이름을 꽉 붙들고 절대 놓치지 않는 것이다.
그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의 실제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고, 그 때 비로소 신의 성품에 참여하여 거룩해지며, 그 때 비로소 이웃의 눈물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고, 그 때 비로소 우리에게 참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소생된다. 또한 우리의 의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아지게 되는 것이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