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95) 2/15/2004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한 밤 중에 걸려오는 괴 전화
미국 샌디에고의 혼자 사는 한 할머니가 한 밤중에 시도 때도 없이 전화가 걸려와 받으면 어떤 남자가 개 짖는 소리만 내고는 아무 말 없이 끊어 버리곤 했다. 장난 전화치곤 너무 심하다 싶어 경찰에 신고해 범인을 잡고 보니 바로 옆집에 혼자 사는 할아버지였다. 사연인즉 할머니 집의 개가 밤중에 아무 때나 짖어대 잠이 깬 할아버지가 화가나 그렇게 앙갚음을 한 것이다. 내가 개 소리에 잠을 설쳤으니 너도 개 소리에 잠을 깨 고통을 당해 보라는 뜻이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지적했듯이 남에게 대접한 대로 그 할머니도 대접 받았다. 남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그 사랑이 우리 자신에게 되돌아 오고 반대로 미워해도 어떤 형태가 되었던 그 결과가 우리에게 미친다.
기독교계에선 17세기 이후부터 본문을 두고 황금율(the Golden Rule)이라는 명칭을 붙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왔다. 기독교의 이타주의(利他主義)를 한 마디로 가장 잘 표현했기에 신자라면 반드시 그대로 실천해야 하는 규범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기독교 고유의 말씀이 아니다. 고대 서양의 아리스토텔레스, 세네카 같은 현자나 동양의 공자도 비슷한 말씀을 했고 조로아스터교에도 같은 계명이 있다. 예수님의 말씀도 유대교적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외경 토비아서에 “네가 싫어 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행하지 말라”는 계명이 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 신학자들은 타종교의 “싫어하는 것을 하지 말라”는 계명은 소극적, 수동적, 부정적 차원으로 해석한다. 불신자들이 흔히 주장하듯이 내가 남에게 손해 끼친 적이 없으니 의롭다고 자부하는 정도라는 것이다. 반면에 기독교에선 적극적, 능동적, 긍정적으로 "남을 사랑하라”고 명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죄로 취급하므로 내용과 질에서 차원이 훨씬 다르다고 주장한다. 일견 기독교의 주장에도 분명 일리는 있지만 그것은 팔이 너무 안으로 굽은 듯한 해석이 아닌가 싶다. 남이 싫어 하는 것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남이 좋아 하는 것을 하라는 것과 같은 내용인데 표현만 다르게 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마태 7;12는 기독교의 황금율이 아니다.
대신에 본문을 자세히 묵상하며 읽어 보면 몇 가지 의문이 생긴다. 우선 예수님은 “구제할 때에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마6:3)고 하셨듯이 남을 사랑할 때 아무 조건을 붙이지 말고 은밀히 하라고 하셨다. 보상을 바라거나 상대를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남에게 잘하면 그것은 벌써 참 사랑이 아니다. 본문은 분명히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라고 했다. 다른 말로 하면 네가 남에게 대접 받고 싶으면 남을 대접하라가 되는데 우리 속담의 엎드려 절 받기를 하라는 말인가?
사랑에 관한 기독교적인 원리는 남이 나를 어떻게 대접하든, 내가 어떤 취급을 받든 남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며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그런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다. 바울 사도도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의 것을 다 잃어 버리더라도 그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다.(빌3:8) 또 “천사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고전4:9)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고전4:13)같은 취급을 받았다고 고백했지 않는가?
그런데다 7-11절까지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하나님이 좋은 것을 주신다는 내용이었는데 왜 갑자기 내가 남에게 대접 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하는 것인지? 기도하는 것과 남을 대접하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기도해보고 사랑하라는 것인가, 사랑하기 위해 기도하라는 것인가, 기도해서 받은 복을 나눠 주라는 것인가?
본문은 차라리 마7:1-5절의 다음에 오는 것이 더 적합할 것 같다. 2절에 남을 비판하고 헤아리면 상대로부터 비판과 헤아림을 돌려 받는다고 했는데 그 다음에 남의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말하는 것이 내용의 흐름상 자연스러워 보인다. 혹시 성경을 기록한 마태가 순서를 착각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미하여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으며 순서 또한 반드시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게 마련이다. 예수님은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그런 모순되어 보이는 표현을 하셨고 또 일부러 그런 순서로 말씀하셨다.
한번 생각해 보라. “남이 싫어 하는 것은 하지 말라. 남이 좋아 하는 것을 해 주라”는 정도는 도덕적으로 조금만 깨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말할 수 있는 내용이다. 여러분 중에도 본문 말씀을 배우기 전에 알고 실천하는 자도 이미 있을 것이다.
물론 수동적으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는 것과 능동적으로 남을 사랑하라는 차이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것도 점수로 따지면 60점과 90점 정도의 차이밖에 더 되겠는가? 불신자들에게 전도하면 자기들의 황금율- “왜 예수쟁이들은 남이 싫다는 것을 억지로 강요하려 드는가?”로 반발한다. 그렇다고 역으로 우리의 황금율을 적용할 수도 없다. 불신자도 우리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신앙을 갖기 바라는 대로 그들을 대접하며 전도했지만 별다른 능력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어느 쪽 황금율이 더 우월한가로 따질 문제가 아니다. 또 본문이 그런 내용 정도로 제한되어져서도 안 된다. 말하자면 단순하게 적극적으로 더 열심히 사랑하라는 뜻만으로 기독교의 황금율이라고 자랑한다면 본문은 단순한 도덕 계명이 되고 그 말씀을 하신 예수님도 도덕 선생에 불과하게 된다.
예수님이 기껏 어느날 제자들에게 “내가 누구냐? 내가 아리스토텔레스나 공자보다는 낫지 않느냐? 그들 제자들이 60점짜리 사랑을 한다면 너희들은 내 제자답게 최소한 90점짜리 이상으로 남을 사랑해야 해? 저들이 수동적으로 한다면 너희는 능동적으로 해야 해”라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셨겠는가 말이다. 그것이야 말로 불신자와 타종교인들이 기독교를 이해하는 내용과 같지 않는가? 복음을 알고 십자가 진리의 은혜 가운데 있는 신자들이 갖고 있어야 할 신앙 내용은 달라야 한다.
하나님을 어떻게 대접하는가?
그럼 예수님의 본심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을 알려면 처음 제기했던 의문 왜 그런 모순된 표현을 했고 또 꼭 그 순서로 말씀하셔야 했는가를 따져 보면 절로 풀린다.
본문은 처음에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한다. 바로 앞에 까지 말씀한 내용이 본문의 이유와 근거로 제시되었다는 뜻이다. 그 앞의 내용이 무엇이었는가? 기도라는 행위를 하기 전에 먼저 구하는 이가 되어라고 하셨다. 세상의 악한 아버지라도 자기 아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거늘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너희를 어떻게 대우하겠는지 제대로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당연히 공급해주시므로 신자는 먼저 하나님과 진정한 부자관계를 이루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신자더러 하나님을 제대로 하나님 아버지답게 대우하라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 식으로 바꿔 말하면 “하나님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하나님을 대접하라”가 된다. 그 다음에 본문이 어떻게 연결 되는가 보라. “그러므로 남에게(도)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제 조금 감이 잡힐 듯 하는가?
본문은 남을 사랑하는 방법, 열심, 세기나 누가 먼저 사랑할 것인지 순서를 따지는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은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각각 다른 이유 때문에 하는 별개의 행위로 보지 않았다. 하나님 사랑은 신앙 행위이고 이웃 사랑은 도덕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신자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된다는 단순한 의미도 아니다. 동전의 앞 뒷면이 항상 같이 붙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로 그 둘은 동시에 해야 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동일한 근거와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바로 그것이 신자의 신앙 생활의 전부요, 삶이요, 인생 자체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22:36-40으로 가보자.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유대인의 질문을 오늘의 주제로 바꾸면 “선생님이여 성경 말씀 중에 어느 것이 황금율이 됩니까?”이다. 좋게 해석하면 가장 중요한 계명은 꼭 지키겠다는 것이고 나쁘게 해석하면 그것만 열심히 지키고 다른 계명은 조금 등한히 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뜻이다.
그런 속셈을 알아차린 예수님은 37절에 “둘 째는 그와 같으니”라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격이라고 못을 박아버렸다. 우월을 가릴 문제도, 각기 따로 시행해도 될 별개의 사항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정한 자신의 아버지로 대접하는 신자라면 이웃도 참다운 이웃으로 사랑하고 그렇게 대접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또 성경의 계명 중에 따로 황금율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더 정확하게는 마7:12 한 구절이 황금율이 아니고 7:7-12까지 전체가 황금율이라는 것이다. 마22:40에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했고 마7:12 끝에도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했다. 성경 전체의 계명을 한 마디로 줄이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이웃도 사랑하라” 나아가 “하나님과 진정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맺는 자는 당연히 이웃과도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맺는다”이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황금율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의미는?
지금까지 어느 것이 황금율인지 따져 보자고 드린 말씀이 아니다. 오직 신자만이 이웃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잘 믿는 자는 결과적으로 그 믿음이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 기도해서 병이 낫고 사업이 형통하거나 대표 기도 잘하고 제자 훈련 과정을 수료하고 방언한다고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다. 이웃 사랑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신자가 아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예수를 믿었다고 당장 도덕적으로 거룩해지고 인격적으로 고상하게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을”(행11:26) 때에 그 뜻은 “작은 예수(little Christ)”다. 예수를 닮은 자, 예수의 작은 분신이 된 자가 신자다.
또 예수를 닮았으면 당연히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너무 쉽게 생각해선 안 된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라고 해 놓고 이제 와선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그럼 여러분에게 하나 물어보자. 지금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가? 만약 이 질문에 확실하게 예라고 대답하지 못하면 여러분은 신자가 아니라는 말인가? 그렇지 않지 않는가?
우리가 예수를 닮는다고 할 때에 가장 크게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꼭 도덕적으로 죄를 짓지 않고 인격적으로 거룩해지고 희생적으로 남을 섬기며 사랑해야만 예수를 닮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를 닮고 난 이후의 결과이지 신자가 정작 닮아야 할 예수님 다운 목표가 아니다. 그렇게 닮으려면 구태여 예수를 닮지 않아도 된다. 슈바이처, 간디, 공자 역사상 현자나 성자로 불리운 누구라도 닮으면 된다. 예수를 닮는다는 것은 그런 위인, 성자와 예수님이 절대적으로 다른 점을 닮아야 한다는 의미다. 예수님 만이 갖고 있던 유일한 특성을 닮아야 제대로 예수를 닮는 것이다.
예수님 만이 갖고 있었던 유일한 특성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과 마음을 예수님도 똑 같이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대접하는 것과 단 한치도 다름 없이 예수님도 인간을 대접했다. 또 다시 그 마음과 생각을 인간을 향한 사랑이라고 속단하지 말라.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불쌍하고 안타깝고 긍휼하게 여기셨다.
여러분이 처음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았을 때를 회상해보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구석이 있었는가? 잘났었는가? 똑똑했었는가? 거룩했었는가? 예뻤는가? 그 어느 것도 아니지 않는가? 나아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는커녕 심지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겠다는 마음조차 없었지 않는가? 그 대신 오직 사람에게서 대접을 잘 받아 보려는 마음 뿐이었다. 솔직히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기에 바빴다. 눈가림으로 아웅하더라도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남이 자기를 알아 주고 세상에서 이름 날려 보려 급급했다.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더 영악한 놈들이 출세하고 더 힘이 센 놈들이 부귀를 차지했다. 반사적으로 우리 마음에는 질투와 시기와 분노와 저주만 잔뜩 차 있었다. 갈수록 세상은 더욱 죄악과 모순이 빈틈 없이 채워지고 우리 삶의 하루하루는 상처와 실망과 짜증과 불안과 염려 뿐이었다. 평강과 자유와 안식은 눈을 닦고도 찾을 길이 없었으며 오직 절망 뿐이었다. 하나님 마저 우리를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단 한 사람도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 아래 눌리고 묶이고 매이지 않은 자 없었다. 인간의 상태는 추하고도 참혹해 도저히 사랑해줄 만한 여지라고는 하나님에게 조차 없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
이 땅에 죄악이 차고도 넘쳤던 바로 그 때에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좋은 일, 선한 일, 옳은 일, 바른 일만 하셨다. 병자를 낫게 하고 굶주린 자를 먹이고 눈 먼 자를 보게 하고 죽은 자를 살려 주셨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그를 십자가에 죽였다. 그 이유가 무엇인 줄 아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장 큰 계명을 제대로 가르쳐 준 것 오직 한 가지 때문이었다. 그것도 자기들은 얼마든지 남을 사랑할 자신이 있다고 큰 소리 친 자들이 주님을 더 미워했다.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치사하고 비겁하고 처량한가? 유대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이야기다.
감히 단언컨대 예수님이 만약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이웃을 사랑하라 둘 중 하나만 말씀하셨다면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해 하나님이 주시는 세상적 축복을 받거나 인간을 사랑해 사람의 칭찬을 받고 싶은 두 가지 마음 뿐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향해선 욕심이, 하나님에 대해선 교만으로 가득 찬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 둘 중 하나만 하거나 따로 떼어 각기 별개로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우릴 사랑했기 때문에 구원하셔서 자비와 긍휼을 베푸신 것이 아니다. 자기 백성들의 상태가 너무 비참하고 안타까워 자비와 긍휼을 베풀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우릴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다. 긍휼이 먼저였고 사랑은 결과였다. 아니 그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뗄래야 뗄 수 없었던 것인데 비겁하고 치사한 인간들이 그 동안 자기들의 죄와 무지와 나태를 가리려고 주님의 무조건적 사랑만 강조했던 것이다.
신자가 예수님을 닮는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고상해지고 영적으로 신령해지며 이웃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 수 있으리라고 착각해선 안 된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 말고는 주님을 닮을 재간이 없다. 우리 속에는 신자가 된 지금도 죄의 본성이 남아 있다. 자존심, 체면, 위신, 세상을 향한 기대와 욕심이 아직도 펄펄 살아 있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남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 모두 정말 솔직히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한 적이 있는가, 하고 있는가, 할 자신이 있는가? 바울처럼 내가 정말 개똥 취급을 당해도 그 이웃을 사랑했던 적이 있는가? 복음 증거할 때에 기꺼이 세상의 웃음 거리로 떨어져도 소망을 잃지 않고 더욱 열심을 낸 적이 있는가? 아니 그럴 마음이라도 있었는가? 그 어느 질문에도 우리의 대답은 ‘아니오’일 것이다.
대신에 우리는 불신자들이 자랑하는 황금율을 우리에게 적용했다. 똥이 무서워 피하나 더러워 피하지라는 비겁한 핑계만 대기 바빴다. “내가 예수를 믿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더라면 벌써 너는 세상에 없는 몸이야”라고 하면서 남에게 손해를 입히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아주 큰 의인이라도 된 양 하지 않았는가? 그럼 적극적인 사랑을 실천하라는 기독교의 황금율은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인가?
멀리 이웃까지 갈 것도 없다. 친척, 형제, 부모, 남편, 아내, 자식에게 만물의 찌끼 취급을 당해도 참아 낼 수 있는가? 간혹 자식에게만은 조건 없는 진정한 사랑을 한다고 자부할지 몰라도 부모로서 자존심이 조금이라도 건들리면 앞뒤 가리지 않고 분노를 폭발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물론 신자니까 이웃을 사랑해보려 노력하고 다시 결심도 해보았지만 결국 남은 것은 하나님 앞에 셀 수조차 없는 회개의 반복 아니었던가? 그 때마다 스스로 자신을 돌아 보면 얼마나 비참하고 초라했던가?
그럼 상대인 남편, 아내, 자식, 형제들은 나에게서 사랑만 받으려고 그저 가만히 앉아만 있었겠는가? 절대 아니다. 똑 같이 나를 사랑하려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또 실패한 것이다. 그들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후회와 연민과 상처를 잔뜩 안고 있는 똑 같이 불쌍하고 가련한 존재들이다.
기독교의 참된 황금율
이웃을 사랑하려 들어선 제대로 사랑할 수 없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를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에서 풀어 주셨지만 사랑할 수 있는 능력까지 우리에게 심어주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신자더러 불신자보다 더 적극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황금율이 되어야만 한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부어 주신 능력은 다른 것이다. 매일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 볼 수 있는 능력, 오직 하나다.
신자가 매일 십자가를 바라 볼 때마다 우리 육신적 형편과 영혼의 상태가 얼마나 초라하고 가난하고 불쌍하며 애통한지 알게 된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여지는 어느 모로 보나 전혀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추하고 더럽기 짝이 없어 도저히 은혜를 받을 자격이라곤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온전한 부자 관계에 들어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가 되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잠길 수 있다. 그분의 의롭고 강한 손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를 세상 속에서 바라 볼 때는 여전히 초라하고 불쌍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 보면 정말로 고귀하고 영원한 소망이 함께 함을 알게 된다. 신자는 절대로 불쌍한 존재로만 끝나지 않는다. 세상이 상상하고 기대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로 이끌리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나서 남을 보니까 저들은 아직도 비참하고 가련한 자리, 내가 이전에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 모두 누구라 할 것 없이 너무나 불쌍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때 비로소 신자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 생각하고 대우한 대로 예수님이 우리를 대하셨듯이 우리 또한 예수님이 인간에 대해 생각하고 대우한 대로 남을 대하게 된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시에 이웃을 사랑할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이웃도 똑 같이 사랑하게 된다.
적극적으로 남을 사랑하라는 것만으로는 절대 기독교의 황금율이 될 수 없다. 기독교의 황금율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하나다. 신자는 매일 아침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겸비하게 엎드려야 한다. 순간순간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나 같은 죄인을 어떻게 대우하셨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한 그 바탕 위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대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신자라 할지라도 천국 가는 구원은 받았겠지만 여전히 불쌍하고 초라하고 비참한 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간 적이 없는 자일 뿐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