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04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영이 다른 신자와 불신자
멜 깁슨이 만든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이라는 영화를 본 미국 텍사스의 한 살인 강도가 회개하고 자수했다는 것은 기사를 통해 다 아실 것이다. 한국에선 이 영화가 4/2 개봉되었는데 마침 불신자인 한 아주머니에게 그 영화를 본 감상을 물어 볼 기회가 있었다. 예상한 대로 “너무 잔인하더라.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악해질 수 있는가?”라는 답을 들었다. 그런데 이 분이 독실한 불교 신자인 자기 시어머님을 모시고 함께 영화를 보았는데 그 시어머님의 반응인즉 “예수님이 전생에 무슨 업보와 죄를 많이 지었길래 저렇게 심한 형벌과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쯧쯧!” 하더라고 했다.
텍사스의 강도와 한국의 두 불신자 분의 반응이 마치 본문의 십자가 상의 두 강도처럼 완전히 상반되었다. 물론 미국의 살인범은 그 자라온 환경과 교육배경이 기독교적 문화였으므로 예수를 쉽게 받아 들일 수 있었고 반면에 한국의 두 여인은 불교적 사고가 바탕이 되었기에 그런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분석일 뿐 더 중요한 원인은 따로 있다. 그들은 서로 영이 달랐다.
그러나 오해는 마셔야 한다. 예수 믿는 자는 영이 순수하고 깨끗하며 도덕적으로 우월하고 지성적으로 깨인 반면에 불신자는 영이 더럽고 추하며 도덕적으로 비천하며 지성적으로 우매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텍사스에서 회개한 자는 살인 강도였고 한국의 여인들은 선행을 많이 한 자들이었다. 십자가 상의 두 강도도 누가 더 착하고 덜 착한가를 따질 수 없으며 둘 다 사형을 당할만한 사회적 도덕적으로 중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이었다.
‘영이 다르다’는 것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예수를 믿는가 안 믿는가가 인간의 지정의의 범위를 넘어서는 문제라는 것이다. 인간 내부 깊숙한 곳에는 인간이 스스로 통제 할 수 없는 어떤 영역이 있다. 지정의를 넘고 인간이 통제 할 수 없다면 인간 외적인 제 삼의 파워에 의해 좌우 된다는 뜻이며 그 파워는 두 말할 것 없이 하나님과 사탄 둘 뿐이다. 가시적인 피조세계에서 인간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인간보다 더 뛰어난 존재는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영이 태어날 때부터 어떤 자는 깨끗하고 어떤 자는 더럽게 형성되어 죽을 때까지 그 상태로 유지 보관되는 법은 없다. 모든 자연인의 영혼은 아담의 원죄로 인해 우월성의 차이가 없이 본질상 전적으로 부패된 상태로 태어난다. 그 영이 하나님에 의해 간섭 되어지는 순간 예수를 믿고 영이 거듭나 달라지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사단에 의해 조종 받아 죄의 노예로 일생을 마치게 되어 있다. 영이 다르다는 것은 영 자체의 본질상 우월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통제 못하는 영이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른 두 파워에 의해 이끌려 가고 있다는 의미다.
왜 십자가에 세 명만 못 박혔나?
대부분의 신자가 성찬식을 통해 예수를 기념하라고 했을 때 예수님의 피와 살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다 보니 부족한 부분이 하나 있다.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그렇게까지 심한 고통과 수치와 멸시와 조롱을 당했고 그것도 바로 나를 위해 한 일이었는데 어떻게 감사하고 믿지 않을 수 있는가라고만 생각한다. “만약 내가 당시의 빌라도의 법정에 있었더라도 틀림없이 ‘십자가에 못박아라(Crucify!)’라고 고함치는 그 유대 군중 중의 한명이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못 박은 것이 바로 나다. 나는 죄인이다”라고 잠시 회개하는 수준으로 그친다.
성찬을 대할 때의 이런 도덕적 회개는 맞고 필요하며 복음의 진리 가운데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절대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어쩌면 시작도 아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 가실 때에 왜 하필 세 명이 사형당했을까? 그것도 예수님이 중간에 서고(요19:18) 왼 편에 완악하여 구원 받지 못한 강도가, 오른 편에 예수를 믿어 천국 간 강도가 처형당했어야 했을까? (성경 기록에 명시적으로 왼편 오른편의 구분은 없지만 틀림 없이 생명과 힘을 상징하는 오른 편에 구원 받은 강도가 있었을 것이다.) 확률적으로 따지면 예수님 혼자 죽을 수 있었고, 예수님과 회개하지 않은 강도 둘만, 예수님과 구원 받은 강도 둘만, 아니면 넷, 다섯, 여섯 등 여러 죄수들과 함께 뒤섞여 죽었을 수 있지 않았겠는가?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180도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두 죄수가 좌우에서 죽었다는 것은 절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 가운데 있었던 일이다.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최종적으로 완성된 모습으로 계시된 것이다. 그 속에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이 드러나 있다.
십자가를 기념하라고 했을 때 신자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바로 이것이다. 모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오직 두 부류의 사람으로만 나뉜다는 것이다. 세상적으로 지성, 교양, 건강, 종교, 재력, 미모, 가문, 인격 그 무엇으로 사람을 나누든 간에 인간 세계에서만 통하는 기준일 뿐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보실 때에는 오직 예수님을 기준으로 보신다.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예수를 거부하여 영원한 형벌을 받아 지옥으로 떨어질 자와 예수를 영접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품 안으로 돌아갈 자 두 부류뿐이다. 그리고 그 경계선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다. 주님의 보혈의 필터를 통과해야만 인간의 주홍 같은 죄가 눈 같이 희어지고 진홍 같이 붉은 죄도 양털 같이 된다.
뼈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통곡
십자가를 생각할 때 예수님을 못 박은 죄책감에 사로 잡혀 있기만 하면 신자라고 할 수 없다. 십자가 밑에서 주님을 올려 보는 유대 군중 속의 한 사람으로 자신을 대입시키는 것으로 끝나선 안 된다. 왼편 십자가 상에 달려 까마귀에 산 채로 눈알이 파 먹히는 강퍅한 강도의 자리가 이전에 내 자신이 속했던 곳임을 기억해내어야 한다.
우리 모두 본질상 진노의 자녀요, 거짓의 아비에게서 난 행악의 종자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금수와 버러지의 형상으로 바꾼 자였다. 우리 마음에는 하나님을 두기 싫어 했으며 하나님을 미워하고 능욕했었다. 본문 39절에서 강도가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주님을 조롱했다. 네가 메시야라면 어떻게 꼼짝 못하고 당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가 우리 밥 먹여 주느냐고 하나님을 능욕했었다. 교회 다니는 자들을 가장 째째하고 별 볼일 없는 자로 여겼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더 많이, 더 좋게, 더 빨리, 더 편하게 차지할까에만 급급했다. 기껏 신문에 나는 오늘의 운세를 보며 그 날 하루의 기분이 좌우되었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오직 내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과 위신만을 세우려 했다. 세상과 사람과 돈이 이끄는 대로 심지어 점쟁이 무당이 시키는 대로 내 인생의 진로와 삶 자체를 내어 맡겼다. 돈을 주어가며 우리 영을 스스로 사단에게 갖다 바치며 악령의 조종을 받으려 애를 썼다.
십자가란 신자에게 예수를 못 박은 책임감만 일깨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필요 조건일 뿐이다. 충분 조건은 따로 있다. 십자가는 세상의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내 자신이 십자가 좌편의 강도의 자리에 올라가 죽었어야만 했다는 처절한 절망감을 불러 일으켜야만 한다.
그래서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영혼육 모두 동원된 ‘나’라는 존재 전체에서 구체적인 원인이 없는 통곡이 터져야 한다. 죄 지은 행동, 말, 생각 하나하나를 회상해내어 회개하는 울음이 아니다. 나라는 인간 전부가 썩어 없어질 고기 덩어리요 완전히 부패한 버러지에 불과했다는 철저한 자각에서 나오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울음이 끝 없이 나와야 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이 아무리 가족끼리 화평하고 돈을 많이 벌고 형통했으며 건강하고 심지어 주위 사람으로부터 인격자라고 존경과 칭찬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덧없고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뼈 아프게 인정해야 한다.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섭리 운행하시는 창조주 성부 하나님과 나 대신에 십자가에 죽어 나를 구원해주신 성자 하나님이 내 삶에서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 없이는 단 한치도 성공이 아니었으며 오직 실패 투성이의 인생으로 아무 짝에도 의미와 가치와 소용이 없었던 낭비였음을 후회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 교만과 배도와 거부와 심지어 저주로 일관했었던 그런 나를 예수님은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신 것이다. 인간 세상에선 도저히 일어날래야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내가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죄악 가운데서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있었는데 어느 순간 성령님을 통해 살아계신 주님이 나를 찾아 오셔서 나의 영을 바꾸어 주셨다. 사탄의 손 아래 매여 있던 나의 영을 주님의 사랑의 품으로 다시 되돌려 놓았다.
내 영적인 눈을 열어 주셔서 생전 처음 지정의의 차원을 넘어 영적인 세계가 있음을 보여 주셨고 눈에 보이는 영역이 우리 삶의 전부도 실체가 아니며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오히려 더 실체임을 확신 시켜 주신 것이다. 그래서 본문의 오른편 강도처럼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인식을 심어주셨고(40절), 세상에서 우리가 행한 대로 보응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뿐 아니라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예수 없이는 구원이 없음을 알게 하셨고(41절),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며 내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신 통치를 펼쳐 보여 주신 것이다(42절).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이후론 이 땅에서 그 분과 교제하며 동행하며 살고 또 죽은 후에는 그 분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면할 것이 삶의 가장 귀하고 중요한 목표요, 의미요, 가치가 되었다. 세상의 어떤 형통, 재미, 성공, 쾌락과도 도저히 비교할 수조차 없으며 비교할 마음도 없다. 영이 바뀌므로 내 전 존재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왼편에서 우편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또 다시 그 의미가 다른 통곡이 뼈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게 된다.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죄인의 신분에서 주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된 것이 너무나 감사해 슬픔과 회한의 울음이 기쁨과 승리의 울음으로 바뀐다.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사61:3)을 얻게 된 것이다.
성찬의 새로운 의미
성찬식에서 떡과 잔을 나누는 의미는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이다. 오늘의 성찬은 지금까지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인식과 감사와 회상으로 기념해야 한다. 십자가 밑에서 주님을 올려다 본 군중의 자리에 머물러 있어선 안 된다. 우리 자신이 십자가 위로 끌어올려져야만 한다. 십자가 처형을 당하며 예수님의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까 안타까운 마음만 가져선 안 된다. 내가 십자가 좌편에 올라간 죄인 중의 괴수로 내 눈이 까마귀에게 파 먹힌 아픔을 처절하게 느껴야 한다.
나아가 십자가 왼편에 있던 내가 우편으로 옮겨졌음도 분명히 인식하고 감사해야 한다. 나의 도덕적 회개나 종교적 깨우침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간섭으로 주님이 찾아 오셔서 내 영을 바꾸어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필터를 통과했음을 개인적인 생생한 체험으로 간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My personal Savior)라는 고백과 함께 구원을 얻은 이후 내가 속해 있는 소속, 위치, 신분, 누리고 있는 특권과 은총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가 확신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주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에 앞으로의 남은 인생도 완전히 내어 맡겨야 한다.
앞에 예를 든 한국 여자 분은 사실은 제 처형이다. 제 처가집 식구 중 유일하게 아직 예수를 믿지 않고 불교를 신봉하고 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오기 하루 전날 마지막 인사도 할 겸 어떡하면 복음을 조금이라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찾아갔고 우연히 “그리스도의 수난” 영화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시어머님의 의견이긴 하지만 분명히 자기도 공감하는 뜻으로 “예수가 전생에 무슨 업보가 그렇게 많길래…”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제 가슴이 얼어 붙었고 갑갑해 미칠 지경이었다. 서로 영이 달랐던 것이다. 거기에다 대고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에 우리 죄를 대신해 죽었다는 복음이 들어갈 여지는 없었다. 하나님의 역사가 없이는 도저히 그 영이 바뀔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속으로 기도만 하고 헤어질 수 밖에 없었다.
지금 그 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이야기다. 우리 모두 예수를 믿기 전에 똑 같이 그랬었다.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보시기에 얼마나 가슴이 답답하고 안타까웠을까? 바로 그래서 예수님을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어 그 고통을 당하게 하시고 십자가에 죽이신 것이다. 지금 바로 그 분이 이 성찬식에 십자가에 죽으실 때와 똑 같은 자비와 긍휼과 사랑을 갖고 와 계신다. 성찬식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토마스 켐피스가 쓴 “예수님과 교제(On Friendship With Jesus)”라는 시의 마지막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Poorest of all men is he who lives without Jesus, and richest of all is he who stands in favor with Jesus.(모든 사람 중에 가장 가난한 자는 예수 없이 사는 사람이요, 가장 부요한 자는 예수님이 기뻐하는 자다.)” 오늘 성찬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없는 인생은 끝까지 실패한 인생이자 가장 가난한 자일 뿐이다. 그 분만이 우리를 완악한 행악자의 자리에서 회개한 죄인이자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옮겨 주실 수 있다. 십자가 오른 편으로 옮겨진 자는 가장 부요한 자요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자다.
여러분의 눈에 보이고 지정의로 인식할 수 있는 영역에선 지금도 실패와 고난과 장애뿐인가? 절대 그것이 전부이자 실체가 아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이 함께하고 계신 우편 십자가의 영역만이 우리 삶과 인생의 실체이자 전부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9,10)
이제 떡과 잔을 대할 때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찢기신 살이요 흘리신 피임을 기념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오늘만큼은 그 떡과 잔이 나의 살과 피도 됨을 진정으로 인식하자. 우리 모두 십자가 밑에서 성찬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해야 한다. 먼저 좌편(Poorest of all)으로 올라 왔다가 우편(Richest of all)으로 옮겨져야 한다. 내 노력과 공적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의 은혜로 내 영이 바뀌어졌음을 감사해야 한다. 사탄의 종에서 하나님의 의로운 자녀가 되었음을 우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감사하자.
눈도 없는 이 소경을 어떻게, 어떻게 회개한 죄인의 자리로 옮겨 놓으셨는지..
하늘을 가르시고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매일 울어도 울어도 표현치 못할 대속의 은총을 어찌 찬양치 않을 수가...
말씀 너무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