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04
금주는 원래 순서대로 하자면 마태 복음 강해 99번째를 설교해야 할 차례입니다만 지난 한 달 한국 가서 겪었던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제 형님의 개인적인 신상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만 신자라면 누구나 꼭 알아야 할 정말 크나큰 복음의 비밀이 그 은혜 가운데에 있었기에 당사자의 허락도 없이 감히 대신 간증하고자 합니다. 이 설교를 듣고 보시는 모든 분에게 저와 제 형님의 개인적인 허물은 성령님께서 가려 주실 줄 믿고 오직 주님의 복음만이 증거 되길 소원합니다. 사도행전 4:9-12 함께 보시겠습니다.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예수 믿어 이해 안될 정도로 바뀐 것
제가 예수 믿기 전과 후를 비교해 볼 때 제가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180도 바뀐 것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본문 12절의 하나님이 구원의 길로 예수 그리스도 외는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을 100% 믿지 않았습니다. 신자가 예수를 믿어야만 천국 갈 수 있다고 하면서 타 종교인마저 전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보았을 때에 자기들만 옳다고 하는 저런 교만하고 앞뒤가 꽉 막힌 자들이 어디 있는가 말도 안 되는 미친 소리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예수가 오기 전에는 의인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말인가? 특별히 한국에 기독교가 전파된 지가 겨우 백년이 조금 넘는데 그럼 그 전의 사람들은 몽땅 지옥 갔다는 말인가? 사람이 착하게 살면 구원을 받고 천국은 각자가 생각하기에 딸린 것 아닌가? 종교는 자기가 선택하면 되지 왜 꼭 기독교가 아니면 안 되는가? 예수쟁이들은 말만 앞서고 행동은 개차반이고 허구한 날 자기들끼리 치고 받고 싸우지 않는가? 뒷구멍으로는 호박씨 까면서 자기들만 옳다고 하니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나 않지?”라고 그들을 비난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을 믿고 난 후 12절의 말씀이 신기할 정도로 100%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기하다고 표현한 이유는 그 동안 기독교에 대해 비평하고 신자들을 비난하며 제 스스로 갖고 있던 의문점들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논리적인 해답을 전혀 갖지 못했는데도 그렇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도 따지길 좋아하고 합리적으로 이해가 안 되거나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누가 뭐래도 아니라고 고집합니다. 그런 저가 단 한 마디도 반발 못하고 믿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1:17에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한다고 했습니다. 기독교 밖에 있을 때는 논리적으로 따졌지만 기독교는 절대 그렇게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일단 먼저 믿음 안에 들어와야만 비로소 그 믿음의 내용이 이해되는 세계에서 유일한 종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을 초월해 무조건 믿으라는 맹신(盲信)이나, 과학과는 동떨어진 미신(迷信)이나, 많이 갖다 바치기만 하면 축복을 받는다는 광신(狂信)과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인간의 지정의로 분석하고 판단할 수 있는 논리의 차원을 넘어 훨씬 더 깊은 영역이 인간에게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자기 마음 먹기에 따라 천국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종교의 자유도 없습니다.
성경은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한다”는 말씀 바로 앞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고 하며, 그 앞 절인 16절에는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인간이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믿음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영을 터치하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세주이며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크신 사랑 외에는 인간에게 아무 소망이 없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아무리 위대한 인간의 사상, 철학, 도덕, 종교라도 인격을 도야하는 데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되어도 인간 존재 전체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데는 아무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죄 많고 게으른 목사의 때 늦은 후회
지난 3/9 화요일 여자 성도님들과 저희 집에서 성경공부를 마치고 점심 먹으며 교제를 나눈 후 잠시 쉬고 있던 오후 2시경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어머님으로부터 다급한 목소리로 울면서 국제 전화가 왔습니다. “네 형이 부산 침례 병원 응급실에 입원했는데 지금 다 죽어 간다. 병원에서 마지막을 준비하라고 했다. 형수랑 아이들 온 식구가 지금 울고 불고 난리가 났다”는 것입니다. 정확한 병명을 물으니 폐에 피가 찬 패혈증에 온 몸의 혈관에 염증이 번져 수혈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예수를 믿은 후에 항상 후회가 되며 도저히 하나님 앞에 면목 없는 큰 죄를 지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버님께 복음을 전혀 전하지도 못하고 돌아가시게 한 것입니다. 마지막 병상에 누워 계실 때에 한 번 가야지 계속 마음은 먹고 있었지만 교회 개척한지 얼마 안 되었고 마침 부활절이 다가와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 돌아 가셨습니다. 물론 제가 복음을 전했어도 워낙 자기 주장이 분명하신 분이라 예수님을 영접했을지는 하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만 단 한 번이라도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은 누가 뭐래도 저의 잘못이자 가장 큰 불효였습니다.
그 후로도 한국에 있는 네 형제가 아무도 교회를 나가지 않는 불신자라 항상 마음에 부담이 되어 생각나면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지만 이제 똑 같은 죄를 다시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그 전화를 받자 저는 솔직히 다시 살려달라기보다 제발 누구가 되었든 돌아가시기 전에 형님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기도를 먼저 했습니다.
조카딸은 제가 유타 주에서 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에 그곳으로 일년간 영어 연수차 와서 저희 교회에 출석하여 예수님을 영접했고 한국에 돌아가서도 저희 형제 식구들 중에 유일하게 교회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엉엉 울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묻는 조카의 전화를 받고는 “빨리 지금 출석하고 있는 교회로 가서 목사님을 모시고 와 예수님을 전하고 영접을 시킨 후 함께 예배를 보도록 하라”고 말했습니다. 경황이 없어 형님이 입원한 병원이 침례 병원이라 병원 안에 원목이 있다는 것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죽어 갈 때에 신체 중에 마지막까지 살아 있는 것은 귀라고 합니다. 말을 못하고 눈으로 볼 수 없고 냄새를 못 맡아도 소리는 들을 수 있습니다. 끝까지 귀가 살아 있는 것은 죽기 직전까지도 복음을 전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원수 된 죄인이 마지막 순간에도 돌아 오시기를 인내하며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귀만 살아 있어도 복음이 제대로 전해지면 고개를 끄덕이든지 눈 빛으로라도 주님을 영접한다는 표시를 할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여러분의 가까운 사람 중에 불신자가 임종을 당했는데 목사님을 모시고 올 시간이 없을 때는 신자라면 누구나 간단하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영접 시킬 수 있습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크게 나눠 본인이 죄인임을 고백하도록 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 시키는 두 가지 절차뿐입니다.
예를 들어 “지난 삶에서 지은 죄가 많은 죄인임을 인정하십니까? 지금 곧 죽어 하나님 앞에 갈 텐데 어떻게 대면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그 분을 뵐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선행과 회개로 그 죄를 다 갚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셔서 우리 대신 우리 죄를 다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구원을 얻는 데 다른 어떤 절차도 필요 없습니다. 그 사실을 믿는 자는 누구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올 바른 모습으로 나아가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진정으로 예수님을 마음 속에 구주로 받아 들이시기만 하면 됩니다”라고 전하며 전한 사실에 대해 환자의 동의를 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각 질문마다 눈 빛으로라도 긍정하는 답을 듣고 다음 질문을 하시면 됩니다.
너무나 싱겁게 되찾은 건강
조카에게 목사님 모시고 예배를 드리라고 당부한 후의 결과는 듣지 못한 채 다음 날 비행기로 한국을 향해 떠났습니다. 혹시 몰라 검은 양복과 넥타이를 준비했고 장례 예식서 책을 갖고 갔습니다. 이 번만은 꼭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하여 아버님 때와는 달리 기독교 식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해야지 나름대로 각오를 단단히 했던 것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가는 열 몇 시간 동안은 정말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 전날 잠을 못자 피곤하기도 했지만 현재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으니 기도를 했다가, 그 동안 왜 만사 제쳐두고 한국 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나 회개도 하고, 또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염려도 되어 완전히 가시 방석에 앉은 것 같았습니다.
한국 시간으로 밤 9시경 부산 공항에 도착하니 바로 그 조카딸이 나와 있었습니다. 어떻게 되었는가 물었더니 응급실에 이틀 있다가 오늘 중환자 실에 옮겨 미음을 드신다는 것입니다. 일단 급한 고비는 넘겼고 복음을 전할 시간 여유는 벌었구나라고 생각되어 너무 기쁘고 한 숨에 긴장이 풀렸습니다. 목사님 모시고 예배 드렸드냐 물었더니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님과 병원 원목 목사님이 오셔서 두 번 예배 드렸는데 예배 중에 목사님이 문답으로 예수님을 영접시켰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한국 도착한 하루 만에 모든 일이 다 해결 되어버린 셈이었습니다.
그 후 중환자 실에 하루만 있다가 제가 한국 간 그 다음날 바로 일반 병실로 내려 왔습니다. 형님의 건강이 너무 빨리 회복되어 제가 생각해도 맥이 빠질 정도였고 혹시 죽을 병이 아니었나 의심이 들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작년에도 폐렴 증세가 있어 병원 응급실로 급하게 들어갔는데 조금만 늦게 왔더라면 죽었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앞으로 퇴원하여 술을 한 방울이라도 입에 대면 바로 죽는다는 선고를 받았는데도 또 다시 술을 드신 것입니다. 당뇨와 간경화증에 알코올 중독이니 좀 안된 말로 스스로 죽으려고 작정한 것이나 다름 없었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폐렴에서 하나 더 나아가 폐에 피가 차고 한꺼번에 일곱 가지 합병증이 동시에 나타나 담당 의사의 설명에 따르면 죽을 확률이 300%가 넘었습니다.
예를 들어 폐에 피가 차 몇 바가지나 받아 내었는데 그 정도 폐에서 피를 쏟으면 열명 중 네 명이 죽어나가기 때문에 죽을 확률은 40%가 됩니다. 수혈이 안 되었던 이유는 일시적으로 콩팥의 기능이 완전히 망가진 신부전증 때문인데 그럴 경우 죽을 확률은 또 몇 십 프로가 넘는다고 합니다. 당뇨인데도 췌장염이 발생해 인슈린이 전혀 생성이 안 되기 때문에 주스 한 잔만 마셔도 당이 300-500 올라 갔습니다. 세포가 녹아 내리고 있어 걸어 다니면 무릎이 내려 앉기 때문에 휠체어를 타거나 누워 있어야만 했습니다.
또 보통 정상인의 체질은 중성으로 ph 농도 7인데 알코올과 당뇨 때문에 온 몸이 산성으로 변해 ph 6.8-6.7까지 내려 갔습니다. 이는 죽은 시체에서나 나오는 수치라고 합니다. 이런저런 합병증들의 죽을 확률을 다 합치면 300%가 넘었으며 그 말은 죽어도 세 번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중환자실에서 조금 의식이 회복된 후에 간호원이 담당 의사에게 “박 OO 환자가 점점 살아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하는 것을 비몽사몽간에 들었다고 합니다.
환풍기 창구 속에 있는 세 사람
보통의 경우라면 확률상 필경 죽었어야 할 경우인데도 그렇게 빨리 쉽게 회복된 데는 이유가 따로 있었습니다. 일반 병실에 내려 온 직후에 형님이 스스로 한 고백을 듣고선 모든 경위를 알 수 있었습니다.
형님은 응급실에 이틀 중환자 실에 하루 지내고 일반 병실로 내려 왔는데도 자꾸만 응급실에서 열흘 이상을 보냈다고 우리가 날자를 잘못 알고 있다고 우겼습니다. 보통의 경우 의식 없이 응급실에 몇 날 몇 달을 지내고 나와도 바로 어제 병원에 온 것 같다고 말하는 데 거꾸로 말하는 것을 보니 그 만큼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 힘들게 보냈던 것입니다. 실제 응급실에 있는 동안 하루는 침대를 여기 놓았다가 다음 날, 그 다음 날 자꾸 또 다른 곳으로 옮기고 간호원들끼리 의사들끼리 서로 화를 내고 큰 소리로 싸우더라는 것입니다.
더 놀랄만한 일은 응급실 천장에 환풍기 구멍이 네모 반듯하게 나 있고 브라인드 식으로 열고 닫는 장치가 되어 있는데 그 창살 사이로 여자 두 명과 남자 한 명이 계속해서 형님을 뚫어지게 내려다 보고 있더랍니다. 소위 말하는 저승 사자가 온 것입니다.
그리고 천장 석고 보드의 요철로 된 작은 무늬들이 지옥도(地獄圖)로 보였다고 합니다. 벌거벗은 남자, 여자, 아이들이 레슬링 하듯 함께 뒤엉켜 있는 모습이 영화 필름처럼 천장과 바로 앞 벽에서 천천히 좌우로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또 병실 침대 주위에 고향 사람들이 와서 모습은 안 보이는데 떠드는 소리가 들렸답니다. 목사님이 와서 예배 보는 동안에도 침대를 가리는 커튼 바로 뒤에서 웅성웅성거렸다고 합니다. 그런 저런 벌어진 일들에 관해 간호원에게 이야기해야 하나 이야기하면 혹시 사태를 더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혼자서 한참 고민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가장 신기한 일은 침대에 누워 있는 발 주변에 번갯불 같은 섬광이 번쩍번쩍 비취고 안개 같은 연기가 뭉게뭉게 감싸더라는 것입니다. 본인 생각에 누군가 나쁜 놈이 내 몸에서 기(氣)를 빼내어 죽이려 드는가 아니면 좋은 쪽에서 좋은 기를 불어 넣어 주어 살리려는 것인가 둘 중 어느 것인지 혼동하게 되었답니다. 어쨌든 생전 처음 겪는 이상한 현상이라 겁이 나 발을 이불 속으로 오무렸다고 합니다.
지옥과 천당의 갈림길
여러분 이것을 단순히 호기심으로만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임종 할 때 많은 사람들이 흔히 겪고 보는 그저 그런 이야기로 치부하시지도 말기 바랍니다. 또 몸이 극도로 쇠약했을 때 보이는 헛것이겠거니 단정 지어서도 안 됩니다.
마침 병문안 오신 성당 다니시는 사촌 형님이 저와 함께 이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단순히 위로하는 차원에서 하셨는지는 몰라도 “몸이 허약해져 헛것이 보인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말게”라는 말씀을 듣고 제가 그 자리에서 단호하게 부인했습니다.
제 형님이 듣고 본 것은 절대 헛것이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있으며 그 영혼이 실제로 지옥의 문턱까지 갔다 온 것입니다. 형님도 혹시 헛것을 보았는가 의심이 들어 의식이 완전히 정상으로 되돌아 온 후에 천장을 다시 자세히 쳐다보았습니다. 환기통의 구멍 브라인드가 완전히 막혀 있어 그 틈 새에 사람이 보일 리도 없지만 들어갈 수도 없는데 참으로 이상하다라고 생각했답니다. 천장 석고보드의 무늬를 보다 혹시 착시 현상이 일어났는가 싶어 당신이 보았던 광경을 그 무늬로부터 아무리 연상 작용으로 떠올리려 해도 도저히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형님이 보았던 광경이 절대 환각이 아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죽었다 살아온 자들의 경험에 따르면 예수를 믿지 않았던 자는 죽을 때 보편적으로 저승사자를 봅니다. 대신에 신자는 너무나 밝은 천국의 빛과 아름다운 정원 등을 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어둠의 사자들과 빛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경우는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몸이 쇠약해 헛것이 보인다면 희미하고 컴컴하고 무엇인가 좋지 않은 것을 보아야 정상이지 밝은 빛을 보거나 아름다운 장면을 볼 수는 없습니다.
제 형님은 응급실에 있는 동안 이쪽으로 가면 천국이고 저쪽으로 가면 지옥이라고 쓰여진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 한 복판에 서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인이 전혀 의식 못하고 있는 사이 하늘에서는 대단한 영적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조카 딸이 보니까 자기 아버지의 눈이 희멀건 하게 초점이 깜박깜박 왔다 갔다 해 곧 죽을 것 같았습니다. 기도 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죽겠구나 싶어 응급실 침대 발치에서 계속 주님께 아버지를 살려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솔직히 이런 때 기도라는 것이 살려달라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어 몇 분 간절히 하고 나면 더 이상 간구할 내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딸의 심경에 기도를 쉬면 죽겠다는 다급한 심정이 들어 그 다음부터는 계속해서 속으로 주기도문을 암송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는 중 예수님이 잠시 스쳐 지나가가는 환상 속에 나타나 아버지 가슴에 손을 얹으시는 모습이 보여 주님이 살려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들고 평강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왜 그 세 저승 사자가 환풍기 속에서 빤히 쳐다보고만 있고 그 방 안으로 내려 오지 않았을까요? 참으로 신기하지 않습니까?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성도가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녀가, 그리스도의 보혈을 덧입은 십자가 군병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제발 저 죽어가는 저 연약한 육신에 새 생명을 허락하시고 불쌍하고 안타까운 저 영혼에 구원을 베풀어 달라”고 하나님께 매어 달리는 모습을 사탄의 졸개들이 본 것입니다. 성도가 기도하면 또 기도할 힘조차 없을 때는 예수님의 이름만 불러도 사탄은 벌벌 떨며 도망 갑니다.
사랑하는 아빠를 위해 그 딸이 기도하지 않았다면 저승 사자들이 틀림 없이 환풍기 구멍에서 내려왔을 것이며 발 주위에 섬광이 비취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자들이 “자 가자!”하고 끌고 가면 그 영혼은 바로 지옥으로 갔습니다. 저도 자기 아버지뿐 아니라 형님마저 복음을 전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게으르고 죄 많은 목사가 되어 먼 훗날 하나님 앞에 도저히 고개를 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같이 부족한 종의 체면과 위신을 회복시켜 주는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결코 제가 예뻐서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을 비롯한 주위의 많은 분들 특별히 가장 가까운 그 딸의 눈물의 기도를 들어 주신 것입니다. 나아가 담임 목사가 한 달이나 교회를 비운 후 아무 성과 없이 와선 구원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고 성도들에게 전도하라고 설교한들 그것이 먹혀 들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리스도 복음이 확장되고 자신의 영광을 더 높이기 위해 그런 큰 은혜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법 없이 착하게 살아도 예수 없이는 지옥 간다.
모든 종교와 그들이 믿는 신은 절대 동일하지 않습니다. 모로 가면 서울을 못 갑니다. 착한 사람이 천국을 가야 한다는 것 만큼 엉터리 같은 생각이 없습니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형님은 가업이었던 양조장을 하고 계시면서 동네 양로원에 매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막걸리 한 말씩을 무상으로 반주 겸해 드시라고 아무도 모르게 갖다 드렸습니다. 기독교적으로 술에 관한 잘잘못은 접어두고 사회적으로 선한 일에 틀림 없었으며 몇 년이나 지난 후에 모 지방신문의 기자가 알아 미담의 주인공으로 기사화 된 적이 있습니다. 집 안에 대소사나 동네의 어려운 일이 있으면 자기 돈을 써가며 도와주었습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참으로 선한 분입니다. 한 가지 흠이라면 사람을 좋아하고 정이 많아 술을 너무 많이 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그도 방금 간증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 지옥으로 끌려 갈 뻔했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하여 믿지 않았다는 이유때문이 아닙니다. 단 한 번도 창조주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이 땅의 모든 사물과 인간을 통치하고 계시다는 인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죄악 중에 있는 인간들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시기까지 하신 그 사랑, 은혜, 권능에 단 한 번도 겸손하게 무릎 꿇고 항복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가 다 똑같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인간들이 지어낸 철학과 사상 및 종교의 교리를 선택할 자유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갖는 궁극적인 목적과 의미는 무엇입니까?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죄 사함을 받아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어느 누가 도덕적 수양과 종교적 훈련으로 자기의 모든 죄를 없애고 인격이 거룩해져 자신은 의로워 구원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하나님 앞에 큰 소리 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속의 진정한 실체를 가리고 있는 지성, 교양, 지위, 외모 같은 것들을 모두 벗어버리고 그 분 앞에 완전히 발가벗어도 부끄럽지 않을 자가 과연 한 사람이라도 있겠습니까?
기껏해야 나는 저 사람보다는 낫지 않습니까라고 말하는 정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보다 낫다고 큰 소리치는 근거와 기준을 과연 어디에 두었기에 그렇게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일례를 들어 친구들 사이에 밥 한끼 제대로 사지 않고 무슨 일에나 돈 쓴 일에 너무 째째하게 굴어 아예 수전노라는 비난을 듣는 자가 있다 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기 수입의 반 이상을 아무도 모르게 양로원이나 고아원에 기부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직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 잘 먹고 잘 사는 것에만 목을 매달아 놓고 남에게 크게 죄 지은 것 없다는 한 가지 기준만으로 자신을 의롭다 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자기가 자신을 평가 해놓고 말입니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전혀 관심 없이 지내면서 자기 성적표만 관리한 자가 뻔뻔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천국으로 들여 보내주어야만 한다고 목을 처들고 큰 소리 칠수 있습니까?
우리 속 깊숙이 숨겨진 시기, 질투, 음란, 분노, 저주, 거짓, 탐욕, 이기심, 고집 같은 것 들을 세상과 심지어 자신에게는 감출 수 있을지 몰라도 절대 하나님 앞에 발견되지 않은 채 넘어 갈 수는 없습니다. 가뭄에 콩 나듯 하는 회개와 그 보다 훨씬 더 드물게 하는 쥐꼬리만한 선행 가지고 자신을 의롭다고 착각하는 그런 하나님에 대한 몰염치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옵니까? 바로 하나님과는 어떤 개인적인 관계를 맺은 적도 전혀 없이 자기가 택한 종교가 맞으니 하나님도 나를 맞다고 인정하라고 고집하는 교만하고 완악한 생각으로 부터입니다. 모든 종교는 동일하고 사람이 착하면 천국 간다고 믿는 무지와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얻으려 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그 분의 주권으로 그 분만의 기준에 의해 그 분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뿐 아니라 영혼까지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뿐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신 눈으로 우리를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살피시며 영혼의 폐부 깊숙이 완전히 까뒤집어서 보시는 분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 없이 바로 설 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성자 같이 고상한 인격자라해도 어디까지나 상대적 평가에 불과합니다. 천하만물의 주인 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절대적 평가를 받아 사형선고를 받지 않을 자 인류 역사상 한 명도 없었습니다.
뒤엉킨 실 타래를 단 번에 푸시는 하나님
조카 딸이 혼자서 외롭고 힘든 가운데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진정으로 소원하는 기도 제목이 하나 있었습니다. 전 가족이 교회 나가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한국 간 첫 주일 날 그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가 위독한 관계로 마침 군대에서 휴가 나온 둘 째 아들, 장남, 딸, 어머니가 휠체어를 탄 아버지와 저희 부부와 함께 침례 병원 안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목사인 제가 전도해서 된 일입니까? 사랑하는 딸이 전도한 것입니까? 둘 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죽을 확률이 300%가 넘는 중병을 통해서 다른 말로 바꾸면 그분이 필요하다면 세 번을 죽였다 살려서라도 베푸셔야 할 영혼 구원의 은혜는 반드시 베푸시고야 맙니다.
여담입니다만 제 집사람이 이번 한국을 방문하기 두어달 전부터 자꾸 한국을 가고싶다고 졸라댔습니다. 미국 이민 온지 두 번을 한국을 방문했었는데 그것도 시아버님 위급해 병원에 계실 때와 장례식 때였으니 차분히 구경하고 쉴 틈이 없었고 마지막 방문도 칠년 전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여러모로 그럴 여유가 없어 투정으로만 여기고 있었는데 본인은 정말 심각하게 기도하고 있었나 봅니다. 한 달 정도만 좋은 일로 방문해 형제, 친척들을 만나 시장 바닥에서 국수나 오뎅을 사먹으며 이곳 저곳 다녀 봤으면 하고 소원했습니다. 집사람은 이번마저 이렇게 위급한 일로 정신 없이 한국 가게 하다니 하나님도 참 너무 하시다고 의심과 불평을 가진 채로 한국에 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하루 만에 모든 일이 다 잘 해결되어 기도한 대로 사주간의 휴가를 받았습니다. 조카의 기도와 집 사람의 기도가 동시에 응답이 된 것입니다. 우리 눈에는 어떤 일이 엉키고 설켜 도저히 풀 수 없는 실 타래처럼 꼬여 있어도 하나님이 하시겠다면 반드시 하십니다.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으로 이루시는 분입니다. 어떤 역경과 환난이 있더라도 심지어 우리의 생명과 맞바꾸는 한이 있어도 그분만의 은혜와 구원을 베푸셔서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특별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눈물을 볼 줄 아는 자가 영혼을 사랑하는 안타까운 마음과 그리스도의 심장을 지니고 모든 사람과 일을 대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은밀히 보응 하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예수 만이 구원의 길
한국 있는 4주 동안 서울 간 한 주를 제외한 3주 동안은 형님 가족과 함께 어떤 한 교회를 정해 출석해 주일 예배를 보았습니다. 지금도 그 교회에 출석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계속 그 교회에서 주일 성수를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본인에게 직접 물어 보지는 않았지만 지금 그 형님의 생각이 어떻겠습니까?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기독교 진리에 관해 지금도 예수 믿기 전의 저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발하실까요? 예수쟁이들은 말만 앞선다고 비난하실까요? 아마 틀림 없이 그 대답은 ‘노(No)’일 것입니다.
제 형님은 교회 나간 지 이제 겨우 몇 주밖에 안되기 때문에 기독교 복음의 진리를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아직 성경의 순서도 모르며 찬송가도 전혀 부르지 못하고 기도도 제대로 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이 천국으로 인도하는 구주이며 십자가만이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라는 사실만은 절대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일 대 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본문 9, 10절에서 베드로는 어떻게 해서 병자에게 그런 기적 같은 치유가 일어났는가 묻는다면 오직 예수님의 은혜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 사건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걸인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6)고 하면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었다”(3:7)고 했습니다.
그 앉은뱅이에게 성령의 역사가 있었고 예수님의 치료의 광선이 비춰진 것입니다. 침대 발치에 섬광이 비췬 후에 제 형님이 바로 나았듯이 여기서도 나사렛 예수의 고귀한 이름이 선포되자 마자 ‘곧’ 힘을 얻고 뛰기까지 했습니다. 이천년 전에 있었던 똑 같은 일이 2004년 3월 부산 침례 병원 응급실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둘 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동일한 이름에 의해 기적적인 치유가 행해졌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이 지금도 그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구원의 역사를 베풀고 계십니다. 그래서 본문 12절대로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인간에게 주신 일이 없음”을 당신을 만난 자마다 증거하게 하십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른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영혼에게는 인간들의 철학, 사상, 종교는 무용지물이며 어떤 교리에 대한 논리적 설명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절대적 선이자 무궁한 사랑이신 주님이 이제는 그 남은 일생동안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내가 회개하고 내가 훈련하고 내가 결단하고 내가 믿으려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잠14:12) 모든 종교가 같기 때문에 꼭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고 대신에 어떤 종교를 믿든 인간의 선행과 공적으로 천국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럴 듯 해 보여도 바로 그것이 지옥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며 구원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덜 악하고 더 착하다고 자부하는 그런 어리석음과 교만을 인간들은 옳다고 자랑할지 몰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모두 죄인입니다. 한 사람도 더 잘나고 더 못나고가 없습니다. 똑 같이 죄의 삯은 사망이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누가 구원되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께 항복한 사람입니다.
제 형님은 선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번도 스스로 하나님을 찾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응급실로 지옥의 사자가 데리려 왔습니다. 그러나 천장에 붙어서 쳐다만 보았지 병실에 내려 오지도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교회 나간 지 얼마 되지 않는 정말 연약한 한 젊은 여자 평신도의 기도 소리에 기겁을 하고 도망갔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그 소리에 말입니다.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을 하나님은 절대로 준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입니다.
할렐루야~ 소중한 간증 감사합니다^^
뒤엉킨 실타래를 푸시는 하나님, 그 끝을 알 수 없는 마치 미로와 퍼즐같은 우리 인간으로서는 가히 상상도 못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인간 모두를 아울러 얽히고 설켜 있는 그 시공간의 인간사를 주관하시며 나아가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는 당연하고도 너무나 놀라운 하나님의 그 빼어난 솜씨에 탄복하며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최고의 선으로 이루어질 하나님 아버지의 때와 방식을 찬양하며 그저 아버지의 그 계획속에 도구로 쓰임받는 저희 자녀들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