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100) 5/9/04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보수 우익 골통 목사
한국은 지금 진보 좌익이다 보수 우익이다 하면서 선진국에선 벌써 용도 폐기 된 이념 논쟁이 한창이다. 세계 유일의 완전한 공산국가와 대치하고 있는 분단국이라는 특수 상황 때문이다. 또 통상적으로 국민 소득이 만불 대에 도달하면 계속 경제를 성장시킬 것인가 저소득 소외 계층에게 분배를 우선할 것인가 두 의견간에 갈등이 생기게 되어 있다.
기독교 신학에서도 좌익과 우익이 있는데 그것을 나누는 기준도 100% 맞지는 않지만 바로 이 분배와 성장이다. 좌익 신학은 분배를 우선해 불쌍한 이웃 사랑을 강조한다. 우익 신학은 반대로 성장에 중점을 두어 신자 개인이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적 성숙을 이루는 것을 강조한다. 저는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어느 쪽이겠는가? 신학적으로는 한마디로 우익이다. 그것도 극도 보수 우익의 골통이다.
그럼 당장 예수님의 뜻과 반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분명히 둘째 계명이 첫째와 같다고 했으니 둘 다 중요해 구분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한 쪽을 더 강조할 수 있는가? 신학자들과 제가 틀린 것인가? 여러분의 신앙관은 좌우 어느 쪽이라 말할 수 있는가? 담임 목사의 입장에 무조건 따라야 하는가? 오늘의 본문은 기독교 보수 우익 신앙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설명해 줄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예수님은 산상 수훈의 결론으로 가르침 대로 행하라고 말씀하셨다. 본문은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나타낸 첫 번째 반응이다. 우선 28절에 의하면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놀랬다고 했다. 원어적으로 한 방 맞은 것처럼 얼이 빠질 정도로 충격적이었다는 뜻이다. 29절에선 그 가르치심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다고 했다. 지금껏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듣고 배운 것과는 내용이 판이하고 그 주는 감격도 전혀 달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권세 있는 자 같다고 했다. 왕이나 대통령처럼 권력을 가진 자라는 뜻이 아니라 말씀에 능력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도저히 그 말씀 앞에 오금이 저려 기도 못 펼 정도였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에게 만약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더라면 하셨을 그런 말씀이었다. 물론 아직은 아무도 명시적으로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고 인정한 자는 없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고 나니 자기들도 모르게 예수님을 따라 다니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르침대로 행하라고 하셨으므로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 형제와 화해하고 원수를 사랑하고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예수님만 따라 다니면 어떡하겠다는 것인가? 예수님은 좌익 신학적 입장에서 말씀을 하시고 이들 무리는 우익 측에 서겠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들 무리는 오히려 좌익이다. 우익은 따로 있었다. 그 허다한 무리 중에 딱 한 명 있었다. 바로 예수님께 나아와 치료 받은 문둥병자다.
정신 나간 문둥이
이런 기적적 치유의 성경 기사를 보는 대부분의 신자의 심정은 이렇다. “어쩜 예수님은 저렇게 능력이 많으시지. 그런데 왜 나한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지?”다. 그럼 그런 응답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간단하고도 쉽게 생각해 보라. 문둥병자는 나았다. 문둥병자처럼 하면 낫는다는 말이다. 그럼 우리가 기도해도 낫지 않는 까닭은 문둥병자처럼 하지 않았다는 이유뿐이다.
아니 우리도 예수님께 나아가 낫게 해달라고 간구하는데 문둥병자처럼 하지 않았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40일 작정 특별 새벽기도에 열심히 출석하고 일주일씩 산상 기도원에서 금식하고 철야한다. 그것도 슈퍼 로또에 걸리게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자녀들 학비 감당할 정도 수입만 달라고 하는데도 여전히 감감 무소식이니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일까? 나아가 문둥병자가 “주여 원하시면…” 이라고 했듯이 우리도 내 뜻 대신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그 뜻에 따를 각오가 되어 있다. 그런데도 이제껏 화끈하게 응답되어 신나 본 적이 없다.
우리가 문둥병자처럼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처럼 기도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가 처해 있었던 그런 상황과 여건에서 그가 가진 생각과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문둥이는 당시 어떤 신분이었고 어떤 대접을 받았는가? 민수기 12:10에 모세의 누이 아론이 하나님의 종 모세를 질투하여 불평하자 하나님이 징벌로 문둥병을 내렸다. 이처럼 문둥병자는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죄인 중의 죄인으로 간주되었다.
또 성 안에서 생활하지 못하고 격리된 장소에서 철저하게 대중과 분리된 생활을 해야 했다.(레13:45,46) 문둥병자와 접촉한 자도 같은 죄인으로 취급당했다. 벤허 영화에 주인공 벤허의 엄마와 누이가 문둥병자였는데 예수님의 처형을 구경하러 나왔다 돌에 맞는 장면이 나온다. 만약 문둥병자가 격리된 장소에서 나오면 돌에 맞아 죽기도 하는데 돌을 던진 사람은 아무 잘못이 없었다. 문둥병자는 이미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도저히 구원 받지 못할 자로 낙인 찍혀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나와 간구한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병 낫기를 기도하는 것과 그 차원이 전혀 다르다. 틀림 없이 그는 무리 속에 함께 있지 못하고 남들 눈에 잘 띄지 않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갑자기 허다한 무리를 헤치고 앞으로 나왔다. 단순히 격리된 장소를 외출한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한 사형수가 탈옥하여 수만 명이 모인 서울 시청 앞 광장의 무대 위로 갑자기 뛰어 오른 꼴이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관습, 매너, 예의, 제도, 규율, 법률, 상식을 뛰어 넘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가를 의식하지 않았고 비판, 비난, 냉대, 핍박을 각오했다. 심지어 하나님의 율법 규정마저 위반했다. 하나님의 징벌도 감수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기도할 필요가 없는 신자들
그런데 우리의 기도가 과연 이런 생각과 각오의 바탕 위에서 하는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들의 눈 높이에 맞추려 노력하고 세상에서 좋다는 것을 남들 가진 이상 차지하려고 얼마나 하나님에게 치성과 정성을 갖다 바치는가?
여러분이 오랫동안 기도했는데도 아무 응답이 없는 기도 제목들을 전부 세밀하게 정리해 보라. 그 기도하고 있는 내용과 전후 사정에 대한 통찰력과 분별력을 달라고 진심으로 기도해 보아라. 기도 응답 받으려는 열심을 제쳐두고 기도 제목 자체를 위한 기도를 해보라. 그럼 십중팔구는 기도할 필요가 없는 내용을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러분의 사정이 급하지 않고 문제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무엇이든 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기도하면 하나님이 지혜를 주시기 때문에 스스로 나가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인데도 그저 하나님이 돈 나와라 뚝딱 도깨비 방망이 두드리듯 해주길 가만히 앉아 바라는 내용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얼마나 많은 기도가 자신의 자존심과 체면을 세우고 탐욕을 채우려는 내용인지 모른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의 사정을 모르고 계시지 않는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사59:1) 우리가 아예 응답 안 되는 것들, 기도해선 안 되는 것들만 기도해서 그렇다.
혹시라도 여러분 중에 “말기 암 환자가 사람의 눈치 볼 것 없이 기도원에 올라 가 사생결단으로 살려달라 기도하듯이 문둥병자도 갈 데까지 갔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어 달린 것 아닌가? 우리의 평상시 하는 기도와는 다른데도 어떻게 그와 비교하는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일상적으로 하는 아무리 작은 기도라도 정말 '나'라는 전 존재를 걸고 기도해 보라. 반드시 어떤 형태라도 응답이 된다. 응답을 받아 내기 위해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나온 그 분의 피조물이자 여전히 죄에 찌든 인간이 그 분의 도우심을 바라는 간구를 하면서 어찌 자기 생명을 걸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생명을 걸지 않고도 기도하고 응답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교만이자 불신앙이다.
나아가 본문의 문둥병자 경우에는 생명을 걸고 기도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 또 있었다. 문둥병이란 어떤 병인가? 당시나 지금이나 인간의 의술로는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다. 더구나 당시는 지금처럼 페니실린이나 마이신 같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지금부터 이천년 전에 감히 문둥병을 어떤 사람이 고쳐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완전히 미친 짓이다. 어린아이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그가 한 간구는 요즈음 말기 암 환자가 기도원에 올라가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지금은 성경에 기적의 치유가 기록되어 있음을 알고 또 주위에서 그렇게 낫는 경우를 듣고 보기 때문에 나을 수 있다는 가능성과 기대를 갖고 기도한다. 마태 복음으로만 따지면 이 사건 이전에 예수님이 병을 고쳐 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방금 전까지 산 위에서 설교한 내용에도 병 고치는 이야기는 전혀 없었다.
그 위에 더 놀라운 사실은 그가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한 것이다. 단순히 예수님이 고쳐 주시길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 아니면 귀찮게 여기는가 예사로 여기는가를 묻는 질문이 아니다.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간구하든 주님이 응답해주기 싫거나 귀찮아 하는 법은 절대 없다. 심지어 우리가 멋 모르고 정욕으로 쓰려고 구해도 진정으로 기도하면 무엇이 잘못인지 깨닫게 해 주는 형태로 응답하신다.
문둥병자는 “주여 고칠 수 있겠나이까?”라고 치유 가능성을 물어 보지 않았다. “주여 저도 최선을 다 할 것이니 주님도 최선을 다해 주시지요? 정 할 수 없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서도.. ”라고 미리부터 응답되지 않을 것에 대비하지도 않았다. 나아가 “주님이 하실 수 있을 줄 믿슙니다. 할렐루야 아멘!” 믿기지도 않는 것을 억지로 믿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단지 “주여 원하시면…”이라고 했다. 무슨 뜻인가? 예수님이 고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기정 사실화 했다. 문제는 오직 당신의 뜻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주님의 자비와 은총과 긍휼에 완전히 내어 맡겼다. 고칠 수 있는 능력은 전혀 문제 삼지 않았고 오직 주님의 인자만을 소망했다.
신앙 생활의 가장 큰 딜레마
그런데 문제는 우리도 기도하면서 분명히 주님의 인자와 자비에 맡긴다는 것이다. 바로 된 신자라면 주님의 처분에 맡기지 내 뜻대로 하겠다고 고집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우리도 주님이 응답 해 주실 능력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으며 주님의 뜻대로 하겠다는 준비가 되어 있는데도 왜 이런 이적이 일어나지 않는가? 바로 여기가 모든 신자가 신앙 생활에 겪는 가장 큰 딜레마이며 이 기사에서 우리가 반드시 알고 넘어 가야 할 핵심이다.
문둥병자의 기도 내용은 단지 병을 낫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당시 그가 가장 절실하게 괴로워 했던 것이 문둥병에서 오는 육신적 고통이었겠는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 죄인 중의 죄인으로서 모든 사회에서 격리되어 도대체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이었겠는가? 우리가 그 같은 입장이 되었어도 답은 분명히 후자다.
말하자면 그가 저를 깨끗케 해달라고 간구한 속에 감춰진 내용은 이것이다. “보시다시피 저는 문둥병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로서 그 죄의 징계를 받은 자입니다. 사회적으로도 완전히 매장된 자입니다. 내 인생과 삶과 존재에 더 이상 참 소망이 없습니다. 살아가는 재미와 가치와 의미가 전혀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 온 내 인생은 참담한 실패 뿐이었습니다. 선하고 아름답게 이룬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차라리 죽어 없어지니 못합니다.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돌에 맞아 당장 죽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제 인생을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 전부를 주님 앞에 내려 놓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응답이 될 것인가 안 될 것인가 여부만 주님의 자비 아래 맡겨 두지만 그는 자기 병이 고쳐지는 응답 여부는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대신에 자기 자신 전부를 하나님의 긍휼 아래 내어 맡겼다. 이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자의 반응은 주님이 권세 있는 자 같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었다. 성령의 능력이 설교 듣는 자들에게 힘있게 역사했다는 것이다. 특별히 그에게는 성령이 강하게 임재하여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저분이 바로 나를 고쳐 주실 분이라고 아무런 의심 없이 믿어지게 된 것이다.
그에게 주님은 단순히 불치병을 고치는 비상한 능력만 가진 자가 아니었다. 세상에서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었고 산산이 찢어진 걸레 조각 같으며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어 버린 자기 인생을 되돌려 주실 분이었다. 소생의 가능성이라곤 0.00…1%도 없는 자기를 새롭게 해 줄 분이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물이 흐를 것”(35:6)이며, “청년 때의 수치를 잊겠고 과부 때의 치욕을 다시 기억함이 없으리니”(54:4), 나아가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말하지 말라”(56:3)고 하신 그 약속을 실현시킬 분임을 알게 된 것이다. 아니 그 약속의 말씀을 주신 바로 그 당사자임을 믿었기에 그 허다한 무리를 뚫고 나아와 주님 발 아래 완전히 엎드린 것이다.
그가 예수님을 어떤 호칭으로 불렀는가? ‘주여(퀴리에)’이지 ‘선생이여 (랍비)’가 아니었다. “주여! 당신은 나 같은 자에게도 희망을 주시고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셔서 정말 인간다운 인생으로 바꿔주시며 하나님의 구원 받은 자녀로 삼아 주실 분입니다. 세상은 나를 버렸고 저도 세상을 버렸기에 오직 하늘만 바라 봅니다. 이제 내 전부를 내어 드립니다.” 그래서 저의 '몸’을 '고쳐달라'고 하지 않았고 ‘저’를 '깨끗케해' 달라고 했다.
오늘 날의 신자는 예수님이 어떤 불치병도 고칠 수 있음을 이미 다 알고 믿는다. 실제 그런 기적이 일어남을 주위에서도 많이 본다. 믿음으로 기도하고 주님의 뜻에 따르겠다고 각오한다. 그럼에도 능력이 따르지 않고 신앙 생활에 승리가 없다.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따르겠다는 의미는 기도의 응답이 어떤 것이 되었든 따르겠다는 정도일 뿐이다. 기실은 응답으로 나타난 것을 따르지 않고는 다른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따르겠다고 재삼재사 각오를 다졌을 뿐이다. 쉽게 말해 우리는 기도하면서 오직 응답 될 것인가 말 것인가, 응답이 되면 언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 것인가에 목숨을 건다. 응답에 미쳐 있지 예수님에게 미쳐 있지 않다. 자기 전부를 건 것이 아니라 순종이라는 미명으로 포장된 우리의 고집과 게으름만 내어드린 것이다. 문둥병자는 예수님 당신에 미쳐서 자기 인생 전부를 걸었다.
퀴리에와 랍비
기독교 신학을 좌와 우로 나누는 것은 분배와 성장이 그 기준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신학들이 추구한 모습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진짜 기준은 따로 있다. 예수님을 ‘퀴리에’로 부르느냐 ‘랍비’로 부르느냐 오직 이 한 가지다. 이 땅에 비천한 종으로 오셔서 죄인을 구원하고 병자를 고치러 오신 하나님 본체 당신인가, 아니면 심오한 사상과 고매한 철학과 고급한 도덕을 가르쳐 실천시키시는 선생인가의 차이다.
예수님을 도덕 선생이나 종교의 창시자 정도로 보는 사람들은 기적을 절대 맛 보지 못한다. 기도의 능력 있는 응답을 받지 못한다. 기도원에 가서 나은 말기 암 환자의 경우도 하나의 생리학적 현상으로만 이해한다. 사람이 지극 정성을 다하다 보면 몸 속에 막혔던 기가 다 뚫리고 생체 역학적으로 극한치에 이르러 일어난 우연한 사건이지 그 속에 하나님의 역사와 은혜가 개입되었다고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를 이웃 사랑에만 중점을 두는 종교로 인식한다. 교회에 나와도 죄 안 짓고 스스로 수양하여 마음의 평강을 얻는 것에만 모든 목표를 둔다.
기독교가 이웃 사랑과 사회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그러나 예수님이 내 인생을 새롭게 해 주시고 그 분의 사랑이라면 어떤 굽은 것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확신 없이는 신앙 생활에 승리가 절대 없다. 그 분이 내 전 존재를 책임져 주시는 ‘퀴리에’가 되지 않고는 마음의 평강도 없을 뿐 아니라 기독교 좌익이 그렇게 강조하는 이웃 사랑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아무리 선행과 구제를 해도 그것은 자기 인격을 성숙시킨 결과로 나타난 것이므로 따지고 보면 남보다 자기 도덕성이 더 우월하다는 자기 증명 밖에 안 된다. 자기를 희생하거나 남보다 못한 처지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참 사랑에 이를 수 없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맛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 사랑을 증거하고 실천할 수 있겠는가? 말 그대로 자신의 선행을 쌓아 나가는 적선(積善)일 뿐이다.
문둥병에 걸려라
신학이 우익인가 좌익인가 따지는 것은 정작 신학자의 몫이다. 본문에서 신자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예수님이 문둥병을 낫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고 해서 신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께 병을 고침을 받아 나아야만 신자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도와 찬양을 뜨겁게 해야 하는가? 말씀공부와 봉사를 열심히 해야 하는가? 다시 간단하고 쉽게 생각해 보라. 문둥병이 나으려면 문둥병에 걸려야 한다. 문둥병자가 아닌데 어떻게 문둥병의 고침을 받을 수 있겠는가?
신자더러 육신적으로 불치의 병에 걸려 죽을 고통을 겪으라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으로 찢어지게 가난해서 매사에 쪼들리며 살아라는 것도 아니다. 사회적으로 사람들에게 왕따 당하고 배척과 미움의 대상이 될 필요도 없다. 정치적으로 가진 권세와 명예 하나 없이 살아라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 앞에 엎드린 문둥병자가 현실에서 실제로 겪은 그런 고통을 은혜를 받기 위해 일부러 조작할 필요는 전혀 없다.
세상에서 나의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이 단 하나도 없음을 뼈저리게 확인하라는 것이다. 나를 의와 거룩으로 인도하고 내 생명의 근거와 능력이 되는 것을 세상에서 단 하나라도 발견한다면 아직은 문둥병자가 아니다. 신자가 아니라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능력 있는 치유는 받지 못한다.
내 속에서 우러 나오는 것에는 단 하나도 선한 것이 없으며 내 생각과 계획과 뜻이 얼마나 무지몽매한지 그것에 의지하면 할수록 실패와 고통만 따르더라는 고백이 절로 나와야 한다. 그래서 내 인생의 모든 순간과 내 삶의 모든 부분에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임해 주기를 간절히 소원해야 하고 그 통치 아래 실제로 내어 드려야 한다.
그리고 그 통치에는 단 한 치도 선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사랑이 아닌 것, 생명이 아닌 것, 능력이 아닌 것, 은혜가 아닌 것도 단 하나 없음을 날마다 순간마다 체험해야 한다. 지금 당장 아파 죽을 지경에 이르러도, 당장 끼니가 없어 굶어 죽을 처지에 처해도 그 속에 하나님의 공평과 선하심이 충만하게 있음을 발견하고 감사해야 한다.
꼭 암에 걸리고 사업이 부도가 나 쫄딱 망하고 가정 파탄이 나야만 문둥병에 걸리는 것이 아니다. 어떤 기도를 하든 그 기도 제목이 우리에게 중요하고 급한 것이든 아니든 내가 바로 문둥병자라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예배, 찬송, 성경공부, 금식, 봉사, 전도, 선교 모두 마찬가지다. 그 뿐 아니라 현실에서 누구를 만나든 어떤 일을 겪든 그래야 한다. 매사에 아무리 적은 일에도 주께 하듯 충성해야 한다. 언제 어디에서라도 세상과 사람 앞에 문둥병자가 되어 허다한 무리를 뚫고 주님 앞에 완전히 벌거벗은 인생 채로 엎드릴 수 있어야 한다.
기도하면 응답될 것이라 믿는 것으로는 신자가 아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과 권능의 품 안에 전 인생을 내어 드려서 그 속에 완전히 잠기길 원해야 신자다. 주님의 쳐 놓은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만 살고 밖으로 나오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주님은 자기 울타리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입장권은 오직 문둥병자에게만 판매한다.
병이 낫길 소원해서 주님을 따라 다니는 무리는 항상 허다했다. 그러나 그 중에 실제로 병이 나은 자는 언제나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따라 다니며 기도 열심히 한다고 병이 낫지 않는다. 자신이 병에 걸려야 한다. 기도 응답에 미친 병이 아니라 예수님 당신에 미친 병이라야 한다. 그리고 그 병의 증세는 이렇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 앞에 나와 완전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전 존재와 하나 밖에 없는 그 생명을 주님을 위해 내어 놓는 것이다. 이 증세가 아니면 아무리 기도해도 주님이 절대 치유해 주지 않으신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