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104) 6/6/04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시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국어 실력이 모자라 성경을 잘못 읽는 신자.
신자가 성경을 읽을 때 근본적으로 잘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 성경을 하나님과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로만 간주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이 온갖 조롱과 수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으시다니 참 안되었다 생각한다. 본문의 경우도 예수님이 방금 전까지 많은 사람의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쳐 주었는데도 올 데 갈 데 없다니 쯧쯧 하고 그친다.
성경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임에는 틀림 없다. 그러나 개인의 일생을 기록한 일반적인 전기와는 다르다. 하나님 본체이신 그 분께서 왜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할 수밖에 없었던가에 관한 이야기다. 역으로 말하면 인간이 도대체 어떤 상태에 있었기에 하나님이 그러셔야만 했던 가에 관한 말씀이다. 그 말은 결국 우리 모두에 관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따라서 성경을 읽는 독자는 모든 사건의 주인공의 입장이 되어서 읽어야 한다. 독자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의 사건에서 돌을 들고 정죄하려는 군중의 입장에 그쳐선 안 된다. 바로 그 부정한 여인이 되어 주님 앞에 벌거벗은 부끄러운 모습으로 엎드려야 한다. 십자가에 매달린 주님을 밑에서 바라보는 군중이 아니라 십자가 상에 함께 매달린 강도의 자리까지 올라가 주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보이신 이적의 능력과 가르치신 말씀의 권세에 크게 감동을 받은 한 서기관이 어디든 쫓아 가겠다면서 제자로 받아 달라고 간청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스’다 ‘노’다 대답은 하지 않고 갑자기 본인의 신세 타령 같은 말씀을 하셨는데 바로 이것도 우리에 관한 내용이다. 이 사실을 잘 깨달을 수 없으면 영적 수준은 둘 째 치고 국어 실력을 점검해 봐야 한다.
예를 들어 아주 유명한 외과 의사가 있다고 하자. 죽어 가는 사람도 수술로 살리고 대학에서 강의하며 존경도 받고 월간 수입도 엄청난 것을 본 대학생이 찾아 와 자기를 제자로 받아 달라고 요구했다. 그 의사가 “나는 하루에 두 세 시간 밖에 자지 못하는 데다 응급환자가 있으면 한 밤중이나 공휴일에도 병원에 불러 나가야 돼” 라고 대답했다. 그럼 너무 바빠서 제자들 둘 수 없다는 뜻인가? 그 보다는 “네가 혹시 나의 겉 모습만 바라보고 혹했는지 모르지만 내 제자가 되면 이런 생활을 각오해야 해”라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나는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 신세라고 말씀하신 것은 내 형편이 그러하니 제자로 못 받아 들이겠다고 거절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 같이 위선과 가식으로 찾아 온 자들을 제외하고는 진정한 필요에서 당신을 찾아 온 자들을 외면한 적이 없었다. 지금도 주님은 단 한 명이라도 진실로 신령한 자를 찾고 계신다. 그 한 사람을 통해 이 땅을 변화시키는 것이 소원이다. 그것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 지금껏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이 세상과 성도를 위해 기도하시고 있는 가장 중요한 제목이자 어쩌면 유일한 제목일 것이다.
나아가 예수님은 이 땅에서 받은 멸시와 천대와 핍박을 불평하거나 회피하거나 저항하려 한 적이 한 번도 없으셨다. 이 땅에 영웅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 오실 때부터 인간으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으실 줄 다 아시고 각오하고 계셨다. 더 정확하게는 인간 본성이 영웅에는 갈채를 보내지만 비천한 외모를 가진 자는 괄시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일부러 비천한 종의 모습을 택해 오셨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 것이 아니라 내 제자가 되려면 내처럼 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대답하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을 때 당시의 주인공이 된 입장에서 보라는 것은 그 말씀을 아주 진지하고 엄숙하게 대하라는 것이다. 그 읽은 말씀에 신자 자신의 운명과 인생을 걸고 반응해야 한다. 만약 오늘 날의 신자도 세상에 머리 둘 곳이 있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며 주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본문이 엄숙하고도 단호하게 선포하고 있다는 뜻이다.
잘못된 제자의 길
여러분은 어떠하신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이곳 캘리포니아의 집값이 너무 비싸 평생 내 집 마련하는 것은 꿈도 못 꾸기에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충분한 것인가? 베드로 사도는 신자를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벧전2:11)라고 했다. 바울 사도는 신자더러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3:2)고 했다. 현실적 의식주의 수준과는 상관 없이 이 땅의 인생을 나그네 같이 살아 가는 자가 예수님의 제자다.
그럼 신자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나그네 같은 삶을 사는 것인가? 가장 먼저 한국의 한 유명한 스님처럼 이 땅에 대한 모든 미련과 집착을 포기하고 산 속에 들어가 자연을 벗 삼아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 땅에 생육하고 번성하며 정복하라고 하셨다. 인간은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의 뜻을 쫓아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릴 책임과 권세를 부여 받았다.
모든 사림이 산 속에서 도를 닦고 있으면 사람들 사이에 미움과 시기와 다툼이 없어지고 세상에 평화가 도래 할 것 같은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곳에서도 산삼과 더덕을 서로 차지하려고 진짜 짐승처럼 물고 뜯으며 피 터지게 싸운다. 아무 가진 것 없이 맨손으로 싸우려니 그럴 수밖에 더 있는가?
아니면 나그네라는 어감이 말해주듯이 방랑자(vagabond)가 되어 동가숙서가식(東家宿西家食)하며 누가 밥을 주면 얻어 먹고 안 주면 굶어가며 살아야 하는가? 이것도 나그네와는 거리가 멀다. 한 번 상상해 보라. 세상에 거지 천지가 되면 어떤 삶의 의미와 가치가 있겠는가를…
예수님이 70명의 제자를 전도 여행에 파송하면서 돈 주머니와 신발을 갖고 가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탁발승처럼 동냥해서 먹고 살든지 기도해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좇아 낸 대가로 사례비를 받아 선교 비용에 충당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면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은 하나님이 책임 져 주시는 것을 실제로 체험해 보라는 것이다. 제자들을 통해 복음을 증거 하는 것 뿐 아니라 제자들을 훈련시킬 목적이었다.
전도하는 것이 기특해서 제자들은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하늘에서 뚝딱하고 기적적으로 먹을 것을 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천국의 복음을 증거하다 보면 하나님이 곳곳에 숨겨둔 택하신 백성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과 서로 기도하고 교제하며 동역하다 보면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은혜를 맛보게 된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절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주위에 동역자와 후원자가 어느 틈에 나타나 서로 돕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생전 처음 보는 타인이며 좋아할 만한 구석이 없어도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평생을 사귄 이웃보다 더 친밀감이 들고 사랑스럽다. 두 사람 사이에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이 있고 또 그 주님이 당신의 나라를 자기 백성들을 통해 이뤄나가고 있음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는 금과 은은 자기에게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으로 사역을 했다. 바울 사도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다. 그럼 신자도 돈을 벌지 말고 황금을 돌 같이 여겨야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고 나그네 같은 삶을 사는 것인가? 아니다. 그들은 평생을 완전히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한 전임 사역자였기에 그럴 수 있었고 또 그래야 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크리스찬 사업가, 크리스찬 정치가, 크리스찬 의사가 나와야 한다. 돈을 얼마를 벌든 그 벌고 쓰는 방법과 목적이 세상 사람과 다르면 된다. 저들은 ‘돈 벌어 남 주나’하고 벌지만 신자는 정말 ‘돈 벌어 남 주기 위해’ 벌어야 한다. 성경에 신자가 물질적으로 가난해져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 하나님의 뜻과 능력에 완전히 의지하여 살면 궁핍에 처하든 부요에 처하든 자족할 수 있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것을 항상 체험할 수 있다.
어두운 곳을 찾아 나서라.
신자가 가장 잘못 사는 나그네 같은 삶이 하나 있다. 세상의 종말이 당장 닥치고 예수님이 곧 재림할 것이므로 전 재산 팔아 교회 갖다 바치고 매일 교회에 모여 박수치고 찬양하는 것이다. 그 날과 그 때는 인자이신 예수님도 모르고 오직 성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사항이다.(마24;36) 그 때를 미리 지정해서 준비할 수 있는 신령한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나아가 종말과 심판이 닥치면 돈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 오셨던 초림 때도 예수님은 돈으로 통치하신 적이 없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을 배 불리 먹이고도 열 두 바구니를 남겼던 분이다. 영광과 권능 중에 오실 재림 때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예수님의 통치는 권력과 물질로 하지 않는다. 오직 죄인 된 인간을 향한 애 끓는 긍휼, 자비, 사랑으로만 다스리신다.
간혹 신자 가운데 나그네 같이 살아라고 하니까 하루 종일 찬송 듣고 기도와 말씀으로만 지내는 분이 있는데 잘못이다. 물론 찬송과 기도와 말씀으로 예수님과 교제하는 감격은 이 세상의 어떤 재미와도 비교조차 할 수 없이 좋다. 여호와의 궁정에서의 하루가 세상에서 천 날보다 낫다. 그러나 예수님 당신조차 새벽 미명과 한 밤중에는 그렇게 보냈지만 대낮에는 열심히 병을 고치고 천국 복음을 가르치고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일로 여념이 없었다.
신자가 하루 종일 그러고 있는 것이 혹시라도 세상에 나가 정말로 신자답게 살 자신이 없거나, 신자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기도와 찬양이 주는 감정적 흥분 상태에 빠져 있거나, 말씀 수양으로 스스로 영적으로 경건해졌다고 자기 도취되거나, 종교적 형태만 취하고 있으면 제자가 된 양 착각하고 있는 것일 가능성도 다분히 있다.
신자는 세상으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야 한다. 길 잃은 양은 주로 어디에 있는가? 더럽고 추하고 죄가 많은 곳이다. 늑대가 설치거나 벼랑 끝 같이 위험한 장소다. 신자는 시험 받아 타락한 자나 소외되고 가난하며 고통 중에 있는 자들 앞에 가서 예수님 대신에 예수님의 모습으로 서야 한다.
나그네 같은 인생을 살아라고 하니까 자꾸 시공간적 개념이나 삶의 외형적 모습으로만 판단하려 든다. 빨리 천국 가서 주님을 만나야지, 더러운 죄악의 도성을 벗어나 산 속에서 경건을 훈련해야지, 까마귀 노는 골에 백로가 갈 수 없지 등은 전부 틀린 것이다. 교만 중의 교만을 범하는 죄다. 그럴싸한 동기와 목적을 갖고 어떤 종교적 신령한 모습을 띄든 간에 미혹된 영혼과 고난 중에 있는 자들을 멀리하는 것은 신자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나그네 같이 사는 것이란?
나그네 같이 산다는 진정한 의미는 의외로 간단하다. 이것도 국어 실력에 관계되는 문제다. 나그네의 정의는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이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했으니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 돌아 다니는 것이 나그네인가? 그 정의는 틀렸다. 앞에서 살펴 본 대로 무소유, 방랑자, 거지, 전재산을 교회에 헌납한 자들처럼 자기 집이 없는 자를 두고 나그네라고 하지 않는다.
나그네의 정확한 뜻은 여행자다. 자기 집은 따로 있으면서 집을 떠나 여행하고 있기 때문에 여행하고 있는 동안만 거처가 없는 자다. 예수님이 인자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뜻은 이 땅에 내 집이 없다는 것이다. 내 집은 따로 천국에 있다는 것이다. 또 오해하지 말아 주시기 바란다. 천국을 소망해야 하니까 세상살이는 다 포기하고 항상 기도하고 찬양하며 지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제발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라.
제가 캘리포니아로 이주하면서 로스앤젤레스 외곽의 리버사이드에 집을 샀다. 그런데 시내에서 너무 멀고 불편해 한 6개월 살다 시내 쪽에 가까운 곳으로 콘도를 렌트해 한 2년 살았다. 신자가 이 땅을 나그네 같이 산다는 것이 바로 이처럼 자기 집은 딴 곳에 두고 임시로 콘도 렌트해 사는 것과 같다.
콘도에 살 동안은 파이프에 물이 새거나 히터가 고장 나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주인에게 전화만 하면 자기 비용으로 고쳐 주기 때문이다. 대신에 건축회사에서 바로 지은 새 집을 분양 받았던 본 집은 싱글 남학생에게 세를 주었다. 그 학생이 또 다른 남학생 두 명을 재임대(sub-lease)해서 남학생 세 명이 살게 되었다. 얼마나 험하게 해 놓고 살 것인지 안 보고도 눈에 선했다. 콘도에 살고 있는 동안 걱정은 내가 현재 살고 있는 콘도가 아니라 두고 온 리버사이드 집이었다. 뒷 뜰에 잡초가 무성할 텐데, 쓰레기는 제 때 버리는지, 새 페인트와 새 카펫인데 콜라나 쏟지 않는지, 염려가 끊일 수 없었다.
당시에 정신이 없어 화재 보험 갱신하는 것을 깜박 잊고 있다가 집 팔려 내 놓는 순간 무보험 상태임을 알았다. 화재보험은 일년씩 계약하기 때문에 집 팔리는 기간 한 두 달 때문에 재계약하기에는 돈이 아까워 하지 않았다. 이전에는 가끔 생각날 때만 걱정했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무보험 상태라 혹시 불이 나지 않을까, 집을 판다고 학생들이 이사 나가고 빈 집으로 두는 동안 도적이 들어 집을 망치지나 않을지 자나깨나 걱정이었다. 집이 팔려 완전히 명의 이전 될 때까지 제발 아무 일이 없도록 속으로 간절히 기도도 드렸다.
신자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죄악과 사탄과 사망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불신자들과 함께 살게 되어 있다. 마누라와 아이들과 찌지고 볶으며 열심히 살아야 한다. 좋은 차 큰 집 여유 있는 수입 등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원들 모두 다 중요하다. 아무리 콘도에 렌트해 살아도 파이프가 새고 히터가 고장 났는데도 내 집이 아니니까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사는 바보는 없다. 그렇지만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항상 두고 온 본 집이다.
참 제자의 길
신자에게도 돈과 건강과 명예와 권력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자체는 가치 중립적이다. 그것만으로 선과 악을 구분 지을 수 없다. 신자가 벤즈 타선 안 된다는 법이 없으며 벤즈를 탄다고 갑자기 악마가 되는 것도 아니다. 벤즈를 소유하고 사용하는 목적과 의미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가치 중립이라는 것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에 따라 그 대상의 가치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누구나 살아야 할 인생 자체도 가치 중립적이다. 각 인생의 주체가 자기 인생에 부여하는 가치의 내용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나그네 같이 산다는 것은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산다는 것이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세상의 것들에 부여하는 가치와는 다른 가치를 각각에 매기며 살아야 한다. 불신자는 세상이 본향이며 자기 집이다. 저들은 세상을 렌트해서 살지 않는다. 그들의 모든 걱정과 염려는 오직 세상 속에서 시작하여 세상 안에서 진행하며 세상의 것으로 결말 짓는다. 그들의 세상 장막을 지탱해 주는 돈, 건강, 사업, 명예, 권력, 자존심, 체면, 위신에 금이 가면 집 전체에 충격이 간다. 자기들의 존재 가치와 인생 자체가 무너져 내린다.
우리는 다르다. 세상 장막이 무너져 내려도 더 좋은 장막이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잠시 렌트해 사는 세상의 집이 고장 나면 집 주인에게 전화만 하면 고쳐 준다. 하나님에게 기도하면 된다. 그러나 불신자와 달리 문제가 생기면 기도로 해결 받고 축복 받아서 좋은 것이 전부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이 따로 있다.
신자는 돈, 건강, 명예, 권세가 삶의 질을 좌우하지 못하고 인생의 가치를 흔들 수 없으며 이 땅에서 존재하며 살아가야 할 목표와 의미에 하등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런 것들이 많고 적음으로 인해 내가 내 된 것을 증명할 수 없다. 오직 만유를 창조하시고 만유를 충만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이 내 속에 살아 역사하는 것만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해 낼 뿐이다. 그래서 내 영혼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가득 채우며 사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와 가치가 되며 실제로 그렇게 산다.
다른 말로 하면 불신자들이 두려워 하는 것을 전혀 두려워 하지 않는 자가 신자다. 저들은 이 땅의 생명이 죽는 것만 두려워 한다. 신자는 그런 것으로 두려워 하지 않는다. 비록 겉 사람은 후패해질지라도 우리 속에 보배와 참 능력 되시는 주님이 있으며 이 땅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 더 거룩하고 영원한 새 생명이 시작함을 믿기 때문이다.
또 불신자들이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신자는 두려워 한다. 저들은 죄악과 사탄과 영원한 심판에 관해선 관심이 없다. 세상의 집과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줄 착각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세계가 따로 있으며 우리 인생과 이 세상의 참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며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저들은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와 겸비하게 항복하며 엎드린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행하며 이 땅을 사는 것에 관해 전혀 무지하다. 그러다 보니 신자가 식사 기도하는 것을 두고도 예수쟁이들이 자기들 신에게 복 받으려 온갖 정성을 다 바쳐 열심히 꼴값 떨고 있는 것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밥 먹을 때 마다 잠간 머리 숙이는 그 순간들 속에 얼마나 풍성하고 아름다운 내용이 담겨있는 줄은 눈치도 채지 못한다.
반면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죽음보다 죄를 더 두려워 한다. 나아가 죄보다 주님과 교제가 끊기는 것을 가장 두려워 한다. 주여 주님마저 저를 외면하시면 저는 단 한 순간도 이 세상에서 살 소망이 없다고 고백하게 된 자다. 하나님과 함께 웃고 울고, 함께 기뻐하고 슬퍼할 줄 알게 된 것이며 바로 그렇게 사는 것만이 삶의 유일한 목표요 가치다.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삶은 절대 살지 않기로 한 자다. 주님과 교제하는 것만이 신자의 유일한 위로요 힘이 됨을 순간순간 체험하며 사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질문 해보자. 당신은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확신하는가? 제자 훈련을 몇 기까지 수료했는가를 묻는 질문이 아니다. 혹시라도 지금 불신자가 두려워하는 것을 같이 두려워하고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장막 집이 무너질까 오늘도 그저 안절부절하고 있는가?
이 세상에 머리 둘 곳이라곤 단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을 확신하여 나그네가 된 신자는 그럴 수 없다. 우리가 신령하고 거룩하고 능력이 뛰어나서 알게 된 것이 아니다.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 세상 끝날 까지 우리가 가는 땅 끝까지 그 분의 영원하신 권세와 은총으로 우리와 함께 함을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는 이 땅을 나그네 같이 살지라도 절대 외롭지 않다. 우리가 혼자가 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님의 사랑이 신자가 만나는 어떤 사건과 사람에 개입 아니하는 적은 없다. 매 순간을 주님의 손을 잡고 그 분의 인도 하심에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만이 참된 나그네의 삶이자 신자가 예수님의 제자 된 유일한 증명이다.
많은 사람들이 비웃는 삶일 것 같으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자들과 서로 서로 도우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표현치 못할 관계의
기쁨이 있는 삶, 나의 집이 분명하게 있음을 아는 자들의 이 땅에서의
가치기준이 바뀌어 버린 삶을 자세히 배웁니다.
말씀을 읽으며 사람시선으로 아파했던 싸~아 했던 맘이 오히려 이웃의
사랑으로 푸근했던 그리고 지금도 너무도 많이 받고 있는 그 사랑으로
시선이 바뀌어갑니다.
나의 시선을 어디에다가 두는 것이 나의 기쁨과 한숨을 가져다 준다는 것을
배웁니다. 늘 이 곳에 와서 다시 가다듬고, 다시 힘을 얻을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감사합니다. 목사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