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자가 예배드려라.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葬事)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마8:21,22)
점쟁이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우선 동양철학을 배워서 사주팔자, 손금, 관상 등으로 어떤 이의 사전에 결정되어진 운명을 알아맞히는 자입니다. 다음은 점쟁이에게 정말 귀신이 들어와 그 귀신이 지시하는 대로 혹은 점쟁이의 몸만 빌린 귀신이 직접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알아맞히는 경우입니다.
대개 전자의 경우는 구체적이지 않고 두루 뭉실 하게 예언하므로 단지 참고로 하되 불길한 점괘만 조심합니다. 반면에 후자는 아주 신기할 정도로 지난 일에서부터 현재의 개인적 신상명세를 정확히 알아맞히고 또 앞으로 일어날 일도 구체적으로 예언합니다. 그런 점괘를 받은 자는 당연히 그 능력에 놀라고 두려워서라도 점쟁이가 하라는 대로 따릅니다.
그런데 귀신들린 점쟁이를 더 두렵게 만드는 까닭은 간혹 나이든 박수가 아주 앳된 어린 소녀 목소리로, 혹은 처녀 무당이 늙은 남자의 굵은 목소리로 점괘를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성대 묘사를 능수능란하게 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그 순간에는 다른 사람 혹은 제 삼의 힘이 점쟁이 속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누구라도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첨단 과학 지식과 실험을 동원해 그 현상을 분석해보려 해도 설명이 안 됩니다. 생판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의 시시콜콜한 과거사와 현재 상황과 앞일까지 알아맞히는 것은 분명히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것입니다.
그럼 그 현상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는 인간의 눈에 보이는 영역 말고도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차원이 분명히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인간도 물질로만 이뤄진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눈에 보이는 육체와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으로 이뤄졌다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만약 인간이 스스로 그런 현상을 해보일 수 있다면 당연히 제 삼의 힘이 작용한 것이 아니라는 증명이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의지력으로 부단하게 연습해도 결코 그런 일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지정의를 다 동원해도 할 수 없고 제 삼의 힘이 인간을 꼼짝 못하게 조종한다면 인간에게 육체와 지정의 외에 제 삼의 영역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제 삼의 영역이기에 지정의로는 당연히 설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지정의를 관할한다고 할 수 있는데 영혼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의 육신을 정신이 통솔하는데 그 정신을 관할한다면 사실상 인간의 가장 핵심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혼의 문제를 제대로 규명하지 않고는 인간의 진정한 자아를 알지도 찾을 수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생을 두고 자아를 찾는 여정을 보내지만 찾지 못하고 마감하는 까닭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영적인 차원을 인정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믿는 자는 한 쪽 눈이 안 보이는 애꾸이거나 뻔히 보이는 것을 안 보려고 일부러 한 쪽 눈을 감고 사는 꼴입니다. 엄연히 존재하는 세상의 반쪽 실체를 보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진정한 자아마저 더더욱 못 찾을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태초부터 우연히 선재(先在)하고 있던 물질이 우연에 우연을 반복해 인간으로 진화되었다고 믿는 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물질인 육체와 그 육체가 아주 고급화 되다 보니 지정의도 우연히 생겼다고 밖에 생각 못하는 자에게 영혼은,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는 부인 혹은 외면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자신의 실체의 1/3 아니 핵심을 놓치고 있기에 자아를 찾을 방도는 아예 없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기독교에도 점쟁이가 다른 목소리로 점괘를 내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있습니다. 바로 방언(方言)입니다. 목소리는 자기 것이되 본인이 미리 훈련한 적도 심지어 아예 들어본 적도 없는 이상한 언어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시골의 무식한 할머니가 뜻은 물론 abc 도 모르면서 영어로 기도합니다. 더 신기한 사실은 통역이 안 되는 외국어가 아닌 신비한 언어로 방언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된 초기에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예수 믿는 자를 두고 흔히 서양 귀신을 믿는다거나 심지어 서양 귀신이 들렸다고도 했습니다. 이천년 전에 죽은 서양인 예수를 교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엄격히 따지면 이스라엘은 동양에 속하지만 생소한 이방인이라는 의미로 말했을 것입니다. 또 신자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언어로 방언 기도 하는 것을 보고 무당이 완전히 다른 사람 음성으로 점괘를 풀어나가는 것과 동일한 현상으로 여기고 서양 귀신이 들었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럼 과연 그럴까요? 예수가 서양 귀신이며 예수교가 믿는 하나님도 수많은 신(神)들 중 하나에 불과할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무당이 하는 방언과 기독교의 방언의 특성이 외형적 형식을 제외하고는 그 내용과 의미가 전혀 다르기, 아니 아예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무당의 경우는 본인의 지정의적 인식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뤄집니다. 신이 내리면 본인도 모르게 점괘를 풀어놓고는 끝나면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모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은 오직 인간의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에 관해서만 예언합니다. 그것도 그 신에게 반드시 음식이든 돈이든 치성이든 푸짐하게 바쳐야만 예언해 줍니다. 결국 그 제 삼의 힘은 점쟁이나 점을 치러 온 자를 종으로 부려 먹으려는 것입니다.
그 신에게 무엇이든 바쳐서라도 길흉을 알려는 자도 그야말로 먹고 마시는 문제에서 형통하려는 동기뿐입니다. 점괘도 오직 그런 쪽으로만 가르쳐 줍니다. 예컨대 사업이 흥하려면 혹은 아들을 낳으려면 지금 사는 마누라가 재수 없으니 헤어지라고 하기가 예사입니다. 돈이 가족보다 우선이며 가장 기본적인 도덕마저 아예 도외시합니다.
그리고 일단 귀신이 내리면 꼼짝 없이 평생을 무당 짓을 해야만 합니다. 도저히 그만 둘 수 없습니다. 나아가 자손 대대로 부려 먹습니다. 가끔 무당들이 날이 시퍼런 작두 위에 맨발로 올라가 둥실둥실 춤추는 초인적 능력을 보이긴 하지만 그 얼마나 기괴한 행태입니까? 도무지 아름답고 선한 모습이라고는 없습니다. 그것도 돼지머리의 커다란 코에 돈을 많이 꽂아야만 춤을 추겠다고 우기니 얼마나 추한 본색을 드러낸 것입니까? 점쟁이를 조종하는 제 삼의 영적인 힘이 도덕적으로 악한 세력 즉 사탄의 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점쟁이에게 자기의 운명을 물어보지 못해 안달입니다. 자기 인생을 그 무당에게 맡기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 영혼을 사탄에게 파는 것입니다. 영혼을 팔았으면 돈을 받아야 함에도 거꾸로 돈을 바치면서 팝니다. 오직 먹고 마시는 문제에 형통해보려는 생각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적 안위만이 인생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기독교에서 하는 방언은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처음 방언을 할 수 있게 될 때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지만 그 후로는 반드시 본인이 하고 싶어야 합니다. 제 삼의 힘이 신자를 종으로 묶지 않습니다. 자발적으로 따르기 원합니다. 방언으로 기도한 내용을 스스로 모르는 경우가 많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방언을 하는 중이나 한 후에는 본인의 영혼이 평안하고 충만해진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방언으로 기도한 내용을 알 수 있도록 해주시기도 하고 신자에 따라 통역하는 은사를 함께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점쟁이가 하는 방언과 가장 큰 차이는 기독교 방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려는 목적입니다. 현실에서 돈과 권력과 명예로 형통해지는 사안과는 전혀 관계없습니다.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여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전14:12,15)
방언에는 마음과 영 두 주체가 번갈아 가며 기도한다고 합니다. 제 삼의 힘, 즉 하나님의 영이 신자의 영혼에 채워져 그 영이 시키는 대로 기도하게 될 뿐만 아니라 반드시 마음의 기도도 동반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지정의가 충분이 인식하고 동의하며 기꺼이 소원하는 일들을 기도시킨다는 것입니다. 또 마음과 영 둘 중 누가 기도하든 그 내용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 하나라고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방언 기도는 가장 먼저 신자의 품성을 거룩하게 변화시킵니다. 본인의 숨겨진, 그래서 자기도 알지 못하거나 회개하기 꺼리는 죄부터 하나님의 영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회개케 하여 깨끗하게 씻어줍니다.
또 주위의 힘들고 어려운 형편에 있는, 특별히 죄 중에 빠져 있는 동료 신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그 환난과 시험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하게 합니다. 동료의 어려움이나 죄악을 동료 신자가 구체적으로 알면 나중에 잘못될 우려가 있으니 하나님께 영으로, 즉 신자가 알 수 없는 언어로 기도 하게 하여 그 비밀을 지켜주려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나아가 신자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가시적 세상을 어지럽히려 하는 흑암의 세력들과 벌리고 있는 영적 전쟁이 방언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땅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까지 거룩하게 다스리는 그분의 사역에 신자를 동참시키려는 것입니다. 신자를 이 땅과 영계에 까지 실질적인 당신의 대리자로 세운 것입니다. 귀신 들린 점쟁이는 예수 믿는 신자가 신자라고 밝히지 않아도 도저히 점괘를 못 맞추는 것이 그 좋은 예입니다.
반면에 점쟁이에게 찾아가는 자들이 자신의 죄를 씻고 거룩하게 살겠다고 소원하여서 그 방안을 물어보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지 않습니까? 나아가 신의 뜻대로 순종하여 그 뜻을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에 반영하며 이 땅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보겠다고 상의하는 자도 전혀 없지 않습니까? 오직 잘 먹고 잘 사는 문제, 즉 가시적 세상에서의 형통만 궁금해 합니다.
그런데 이 또한 참으로 흥미로운 영적 결론을 도출해 냅니다. 물질계 안에서 물질로 풍부해지는 방안을 물질계 밖의 물질이 아닌 존재에게 물어보고 있습니다. 그럼 그 존재는 이 땅의 물질을 풍부하게 제공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존재라고 인정한 셈입니다. 결국 잘 먹고 잘 사는 문제는 귀신이 통괄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한시적으로 사탄더러 공중권세 잡도록 하나님이 허용해 놓았으니 절대 틀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역으로 말해 잘 먹고 잘 사는 문제만 인생의 목표로 삼는 자는 귀신의 장난에 놀아나고 있다는 뜻이 되지 않습니까?
기독교의 방언 기도에는, 아니 엄격하게 말해 통상적인 기도에도 어떻게 하면 풍성하게 먹고 마시고 입을까 염려하는 내용이 우선적 과제로 절대 포함되지 않습니다. 자신을 위해선 일용할 양식과 환난을 당해 끼니가 없어 고통당하는 이웃을 위해선 빌어도 말입니다. 대신에 오직 하늘의 신령한 은혜가 땅에 임하여 죄인이 의로워지고 또 그 의로워진 죄인으로 인해 그 주위 사람들이 함께 의로워지게 하는 것이 방언이자 기독교인의 진정한 기도입니다.
이미 살펴 본대로 무당이 다른 목소리로 점괘를 말하는 것과 기독교에서 다른 언어로 방언 기도하는 외적 현상을 보면 세상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힘이 오히려 세상을 조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각각의 내용을 따져 보면 그 영적인 힘도 선한 것과 악한 것, 즉 하나님의 영인 성령과 사탄의 영인 악령으로 나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성령과 악령이 각기 지배하는 영역도 당연히 다를 것입니다. 바꿔 말해 천국과 지옥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래서 인간이 죽으면 영원한 구원과 심판으로 나눠진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을 좇아 제자가 되겠다는 어떤 사람이 부친의 장례식을 먼저 치른 후에 따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를 들어서 그러지 말고 지금 당장 따르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 믿는 자는 부친의 장례식마저 안 해도 되고 그 대신 모든 것을 예수 믿는 일에 다 바쳐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라고 했습니다. 문자적으로 해석하자면 전혀 말이 안 됩니다. 죽은 자가 어찌 죽은 자를 장사할 수 있습니까? 따라서 ‘죽은 자’가 육체적 죽음을 뜻하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대신에 영적으로 죽은 자들로 저희와 같이 영적으로 죽은 자를 장사하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이야기 하면 예수를 따르는 자는 영적으로 살기에 그 후로는 전혀 다른, 정확하게는 정반대의 인생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를 따르지 않는 자는 영적으로 죽었기에 사탄의 영역인 지옥으로, 예수를 따르는 자는 영적으로 살았기에 하나님의 영역인 천국으로 그 영원한 운명이 갈린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부친의 장례식이라는 인륜대사마저 무시하라는 광신적 태도를 절대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육체적으로 아무리 살아 있어도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육체적으로는 아무리 병약해도 영적으로 풍성하게 살아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길은 오직 당신을 따르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 한다”(요11:25,26)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오늘 저희가 아버님이 돌아가신지 11주기 추모 예배로 모였습니다. 그러나 아버님을 위한 예배가 아닙니다. 고인에 대해 회상하고 생전에 베푸신 사랑에 감사하며 또 불효했던 죄를 회개하는 것은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아니 이 예배를 통해 당연히 또 더 많이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입니다. 그러나 이 예배를 통해서 그분과 교통이 되거나 혹은 그분이 이곳에 영으로 와 있을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것은 예배가 아니라 제사입니다. 본문의 표현을 빌리면 “죽은 자들이 저희 죽은 자를 제사하는 것”입니다.
제사에 돌아가신 선조의 혼이 와 있다는 것은 완전히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선조에 대한 존경심을 악용해 자기에게 절하게 만들려는 흉계입니다. 사탄은 사람을 수단과 방식을 가리지 않고 종으로 만들어 부려 먹으려고만 합니다. 때로는 사업이 흥하게도 하고 소원하던 아들도 주고 병도 낫게 합니다. 그러나 항상 더 큰 불행이 이어지게 해서 자기에게 다시 찾아오도록 만듭니다. 비근한 예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나쁜 일도 생기게 합니다.
그러나 사탄의 궁극적 목적은 인간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죽은 자로 죽은 자를 장사케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인간을 끌고 가는 종착지는 오로지 지옥입니다. 그래서 사단에게는 항상 어두움과 더러움과 추함과 죽음의 냄새만 납니다. 시퍼런 작두 위에서 맨발로 춤춘다든지, 점쟁이 집과 사당은 항상 어두컴컴한데다 향을 피워야 하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의와 거룩과 생명을 주되 넘치도록 줍니다. 진정한 아름다움과 절대적인 선과 온전한 진리가 드러납니다. 현실에서의 형통과 안위와는 관계없이 그 영혼에 도저히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과 기쁨이 넘쳐나며 또 세상 어떤 것으로도 흔들 수도 빼앗을 수도 없습니다.
추모 예배가 이미 돌아가신 분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바로 여기 모인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예배를 통해 바로 그런 평강과 기쁨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예배란 이 땅에서부터 천국의 기쁨을 맛본 자가 하나님 앞에 감사와 경배와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신자의 이 땅에서의 삶도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준비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예배를 통해 그분께 드릴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감사하고 여생을 정말로 신자답게 거룩하게 살며 이웃을 주님의 사랑 안에 이끌겠다는 헌신과 결단입니다. 나아가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 사탄에 묶여 있는 자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나는 점을 믿지도 않고 점치러 간 적이 한 번도 없으니 사탄과 아무 상관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지옥과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다고 방치할 문제도 아닙니다. 무당과 신자의 방언이 지금도 분명히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듯이 영적인 세계는 분명히 있습니다. 또 그 세계가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분명히 나눠지는 데도 그것과 나의 운명과는 별개의 문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방언을 통해 영적인 세계를 인간에게 이미 분명히 보여서 알게 해준 것 자체가 그 세계와 인간과 아주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아무리 부인하고 외면하고 거부해도 사실은 사실입니다. 나는 별로 흥미 없으니 진리에 눈과 귀를 막는다고 해서 사탄에게 떨어지는 것을 결코 막을 수 없습니다. 타조가 모래 바닥에 머리만 쳐 박는다고 대적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듯이 말입니다.
나아가 많은 사람들이 나는 점쟁이도 싫지만 기독교도 별로 호감이 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점쟁이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스스로 거룩하게 살고 이 땅을 만드신 분의 뜻에 따라 아름답게 바꿔나가는 일에 대해선 절대 묻지 않듯이 그런 자들 또한 마찬가지이지 않습니까? 자신의 안위와 형통만이 인생에서 해결해야할 급선무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것은 둘째 치고 그분에 대해 단 한 번이라도 알고자 소원하거나 궁금증마저 가지지 않았습니다. 이 땅은 오직 물질로만 이뤄졌고 인생은 죽음으로 끝이라는 믿음이 그 사고의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점을 보지 않는다 뿐이지 점치는 자와 점쟁이와 똑 같은 생각으로 인생을 산다면 마찬가지로 귀신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외면, 거부, 반발, 심지어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원한 운명이 천국과 지옥으로 나눠지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점쟁이는 지옥 가고 방언 기도할 줄 아는 자만 천국 갑니까? 물론 그렇게 나눠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더 정확한 기준은 오직 예수를 믿었느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해서 믿기로 한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 당신 되시는 예수님이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 된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 은혜를 감사히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가장 먼저 알아 본 자들도 사실은 귀신들린 자들이었습니다. 속에 있는 악령이 그를 알아본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1:24) “저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8:29)
인간은 아무리 지성적으로 똑똑하고 도덕적으로 선하고 종교적으로 신령했어도, 아니 그럴수록 그분의 정체성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차라리 무식하지만 단순하고 마음이 순수했던 어부들이 그것도 한참 뒤에야 겨우 눈치 챘을 정도입니다. 마음이 순수한 자, 그래서 이 땅이 흑암의 세력에 의해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자는 예수님이 누구인줄 필연적으로 알게 됩니다. 이 세대가 전혀 바른 길로 가지 않을 뿐 아니라, 그렇게 만든 것이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의 죄, 그것도 하나님을 거부한 죄 때문이라고 솔직히 인정하는 자라면 성경을 풀어 설명 듣지 않아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이해하고 믿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의 영을 새롭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종교적 권면이 아닙니다. 얼마나 영적인 감수성이 뛰어난지 테스트 하겠다는 뜻도 아닙니다. 우주 만물을 만드시고 운행 섭리하는 창조주 하나님이 있다면 인간이 가장 먼저 보여야 하는 그 분에 대한 반응은 그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것 말고는 절대 없다는 뜻입니다. 또 그래야만 인간이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고 회복할 수 있습니다.
진짜로 창조주가 살아 계신데 인간끼리 선한 것을 다툼하는 것은 정말 도토리 키 재기이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꼴 아니겠습니까? 아니 이런저런 사정을 다 제쳐두고 하나님이 지금 내 앞에 나타났다면 당장 무릎 꿇지 않고 어떻게 견딜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기독교 신앙이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참 된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들을 지은 창조주인 당신마저 무시하고 제 멋대로 살면서 죄와 사탄과 죽음의 종이 되어 있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이 먼저 죄로 저주받은 모습으로 죽어가면서까지 제발 당신께로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죄 값은 치르되 죄인은 살리셨습니다.
다른 말로 죽은 자가 죽은 자를 장사하는 것이 안타까워 살아 있는 자로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미하라고 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제사를 예배로 바꾼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외면, 거부, 반발, 저주했던 인간의 가장 큰, 아니 근본적인 죄를 회개하고 겸손히 그분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미 예수의 은혜 안에 있는 자는 정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고 미지근하게 믿어선 안 됩니다. 예수 믿는 것이 단순히 도덕적으로 선해지고 힘든 일을 당하면 정서적 안정을 얻는 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혼자서 도 닦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진정한 참 사랑의 관계로 바꾸는 작업을 하는 것이 예수를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자신의 영원한 운명이 이미 결정되어졌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더 이상 사탄에게 놀아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한 보호와 인도를 받고 있으므로 그러지 못한 자들을 신자가 돌봐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사탄의 흉계를 알도록 예수를 전하고 예수의 사랑 안으로 초대해야 합니다.
바꿔 말해 이제 회복된 자신의 정체성 즉 하나님의 기업을 영원토록 이어받을 신분과 특권에 걸맞게 살아야 합니다. 무슨 일에든지 기도하여 그분의 인도를 받을 뿐 아니라 그분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뜻을 가장 가까운 사람과 공동체에서부터 펼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자기보다 남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자신은 죽더라도 상대를 살릴 수 있도록 자신의 전부를. 생명까지 바쳐가며 사랑해야 합니다. 현실의 어려움을 단순히 도와주는 사랑이 아니라 그 영혼이 예수의 영으로 가득 채워지도록 사랑해야 합니다.
아직 예수를 믿지 않은 자는 과연 이 땅이 전부인지, 물질이 자기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지, 아니 자기가 정말 물질에서 우연히 진화된 존재인지 그래서 원숭이가 내 할아버지인지, 알기 쉽게 말해 점치러 가지는 않지만 신문과 잡지만 펼치면 오늘의 운세부터 보는지 다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도 풍성하게 살고 죽어서도 더욱 풍성하게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가는 것뿐입니다. 예수가 아니면 절대로 죽음뿐이라는 것은 아무리 인정하기 싫어도 진리입니다. 무당과 박수에 귀신이 든 것이 분명하듯이 진리입니다. 귀신은 인정하면서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아니 인정도 못하는 것은 너무나 큰 모순 아닙니까? 모순의 문제가 아니라 그분의 입장에서 보면 그만큼 큰 죄가 따로 있겠습니까?
아버님을 추모하는 이 자리에 그분보다 우리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먼저 되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오직 예수를 위해 살고 죽는지 점검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주님의 십자가 앞에 다시 한 번 경건하게 엎드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우리 모두를 대신해 죽으신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22/2008
한국에 있는 저희 형제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부친추모 예배에 보낸 설교문입니다. 함께 나누고저 올립니다.
죄에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아니함이요.(요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