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난 적이 있는가?
사도행전강해 (37)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殺氣)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려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全廢) 하니라.”(행9:1-9)
기독교 역사상 세 번째로 큰 사건
스데반이 돌에 맞아 기독교 최초의 순교를 당할 때에 그 일을 선도했고 또 증인으로서 사람들의 옷을 맡아서 있던 이가 사울(회심하기 전 바울의 이름) 청년이었다. 그 후로도 그는 예수 믿는 자들을 잔멸하려고 예루살렘 인근을 이 잡듯이 샅샅이 뒤졌다. 이제 그 수색의 범위를 유대 지경을 넘어 외국에까지 뻗칠 작정이었다.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의 허가를 받아 나사렛 이단을 잡으러 시리아를 향하고 있는 중이다. 본문은 다마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다.
또 이 일대일의 인격적 대면을 통해 그는 완전한 회심을 이루었다. 정확히 말해 그가 회심했다기보다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예수님이 그렇게 이끌었다. 천국 보좌에서 세상의 모든 일을, 특별히 죄인을 구원하는 일을 당신께서 하고 계신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사울이 회심하여 바울이 된 것은 아마 역사상 가장 중요한 회심 사건일 것이다. 물론 모든 영혼이 하나님 앞에 죽을 죄인으로 동등한 신분과 위치에서 구원 받는다. 인간 사회에서 아무리 초라하고 비참한 자의 영혼이라도 하나님께는 똑 같이 귀하고 소중하다. 단지 교회 역사적 관점으로 볼 때에 바울이 회심함으로써 예수님 다음으로 가장 큰 결과 내지 영향을 끼쳤다는 뜻이다.
초대 교회의 역사들 또한 모두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크고 작음으로 인간이 나눌 수가 없다. 그럼에도 기독교가 태동 발전하는 데에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들은 몇몇 있다. 크게 셋을 꼽으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오순절의 성령강림과 바로 이 회심사건이다. 이 세 사건이 없으면 기독교 자체가 없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우선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 사건은 기독교 구원의 복음 그 자체다. 그러나 당신께선 후세 사람이 그 의미를 알 수 있게 하는 기록이나 저작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직접적인 제자들 또한 당신의 생전에는 그럴만한 계제가 못 되었다. 주님의 가르침을 직접 배우고 사역의 현장에서 훈련 받고 또 십자가 사건의 증인으로 참여는 했지만 기록으로 남길 시간이나 여유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도 주님이 죽고 부활할 때까지도 여전히 그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께서 생전에 가르치고 약속하신 대로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을 보내셨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16:12,13) 제자들이 성령의 권능을 입자 담대하게 순교하면서까지 복음을 전해 이 땅에 교회들을 세웠다.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의 성육신과 사역과 십자가 사건에 내포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의미를 제자들로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 복음의 진리를 알고 성령이 내주하면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된다.
그런데 당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직간접 증인이 살아 있을 때는 말로만 복음을 전해도 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세워지고 또 예수님에 대해 모르는 세대가 생기기 시작하자 복음을 구체적, 교리적으로 정리해 줄 필요가 생겼고 그 일을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감당하게 되었다. 기독교 교리를 바울이 자신의 사상이나 철학에서 고안해내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그도 진리의 영인 성령의 영감을 받아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뿐이다. 성경의 저자는 오직 성령 하나님이며 인간저자는 영감을 받아 문자로 기록케 하는 도구였을 뿐이다. 바울은 신약성경 27권중 13권을 저작했으며 특별히 십자가 구원의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저술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구세주로 인류를 죄에서 구속하는 일을 이루셨고, 성령님은 그분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세주로 고백하는 믿음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교리인데 그 핵심 부분을 바울이 확정지었다. 종교적으로 따지면 예수님은 기독교를 창시하고 성령님은 기독교 공동체를 세웠고 바울은 기독교 교리를 확정지은 셈이다.
간혹 기독교 교리를 바울의 개인적 사상의 산물로 보는 자유주의 학자들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계획하고 시도했던 원래의 기독교 즉, 복음서로만 판단하는 기독교와 그 내용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는 간단히 하나만 따져보아도 금방 모순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예수님의 가장 큰 대적이었다. 예수 믿는 신자들에게 살기등등하게 굴었다. 유대교의 열혈신자로 경건했던 사울은 오히려 도덕적으로는 가장 의로웠고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반면에 나사렛 예수의 이단은 하나님을 위해서도 도저히 그냥 두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던 자다.
그런 자가 어떻게 예수님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가 될 수 있는가? 바로 본문 같이 예수님이 직접 그의 생각을 완전히 뜯어 고쳐 주셨기에 가능하다. 예수를 믿게 된 믿음부터 예수님이 심어 주신 것이다. 말하자면 구원 이후의 그의 종교사상도 전부 예수님이 새롭게 형성해 준 셈인데 어떻게 그 개인의 사상이 될 수 있는가? 만약 그의 사상이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 상치하는 점이 있다면 몰라도 말이다. 그의 서신서와 복음서 사이에는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더 자세히 풀어서 설명한 것 외에는 어떤 모순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런 주장은 아무 믿음도, 성령의 조명도 없이 성경을 읽는 자는 오히려 자기 사상에 맞추어 성경을 제멋대로 재단하게 된다는 사실만 반영할 뿐이다.
바울이 기독교 교리의 기초를 놓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마저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오직 예수님이 하신 일이다. 그분이 사울을 미리 택하여 준비해 놓았다. 당신의 대적으로서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아니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논리로 무장시켰다. 그러다 하루아침에 당신이 직접 나서서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그의 고백대로 그가 이전에 알던 모든 것을, 그를 최고의 위치에 오르게 했음에도, 배설물로 여기게끔 하셨다. 철저한 반대자에게서 철저한 지지자로의 철저한 변신을 그분이 이뤄내셨다. 그리고 그 변신은 본문의 예수님과의 직접적인 대면에서 시발되었다.
가장 드라마틱한 회심
바울의 회심(回心) 사건은 너무나 드라마틱했다. 단적으로 말해 천국보좌에 계셔야 할 예수님이 직접 그를 만나러 다시 강림하신 셈이다. 또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께서 주관하셨다. 바울로선 완전히 속수무책으로 당한 꼴이다. 본인은 회심하리라고는 전혀 작정, 기대, 예상, 나아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니 정반대로 예수 믿는 자는 눈에 띄는 대로 다 잡아들여서 그 믿는 도를 말살할 생각에만 골몰해 있던 상태였다. 예수님이 한쪽 극단에서 정반대편 극단으로 순간적으로 옮기신 것이다.
예수님이 먼저 그에게 가시적으로 직접 현현(顯現)하셔서 단 둘이서만 일대일 대면했다. 비록 바울이 눈이 멀어졌지만 그 직전에 하늘에서 내리비취는 너무나 밝은 빛을 보았고 또 당신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 머릿속의 사고로 고안한 픽션이나 상상으로 이뤄진 판타지가 전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 현장에서 이 사건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이 있었다.
불신자들에게 전도해보면 하나님을 보여 보라는 반발을, 부끄럽게도 저부터 그랬지만, 많이 듣는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세주인지 납득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증명해 보이면 믿겠다고 한다. 단순히 종교적 교리만으로 교화 내지 설득시키려 들지 말고 손에 잡히는 증거를 눈앞에 제시해보라는 것이다. 예컨대 큰 교통사고를 당해 혼수 내지 가사 상태에 있었는데 그 영혼이 천국에 올라가 예수님을 대면하고 다시 소생했다는 식의 확실한 체험을 한다면, 말하자면 본문의 바울 같은 경험을 한다면 안 믿거나 못 믿을 자 어디 있느냐는 식이다.
나아가 기존 신자들조차 기도하는 것마다 뭔가 확실히 손에 잡히는 응답을 받고 싶어 한다. 방언이나 신유의 은사 같은 가시적이고도 극적인 하나님의 간섭을 기대한다. 심지어 자신이 말기 암이나 큰 교통사고에서 확실히 건짐을 받은 체험이 있으면 믿음이 더 견고해져 어떤 고난을 만나도 승리할 수 있을 것처럼 여긴다.
이런 모든 생각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우선 하나님은 당신을 인간에게 직접 보일 수는 결코 없다. 더러운 것과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기에 어떤 죄인이라도 그분을 대면한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당신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먼저 내려 오셨다. 하나님을 보아 알게 하며 또 보아도 죽지 않게 하려는 배려였다. 나아가 어떤 죄인이라도 당신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의 필터를 통과하지 않고는 천국에서의 직접 대면 또한 불가능한 까닭이다.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보이라고 요구하지만 사실은 그들도 그럴 수 없음을 속으로는 알고 있다. 예수 믿기 싫다는 뜻일 뿐이다.
또 이미 예수님의 보혈의 필터를 통과한 신자에겐 극적이고도 기적 같은 체험이 더 이상 필요 없다. 본문 같은 경우는 하나님으로서도 최후의 극약 처방에 속한다. 아니 본문은 사울더러 예수님의 보혈의 필터를 통과시키는 작업이다. 그가 믿은 후에 베푼 기적이 아니다. 물론 바울에게 초자연적 은사와 체험이 많이 따랐다. 그러나 그는 우리 같은 신자와 다른 그야말로 바울 사도였다. 우리가 그가 맡았던 사역을 감당하고 또 그가 당한 모든 환난을 겪는다면 우리에게도 똑 같은 기적이 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우리는 맡은 사역과 믿음의 크기가 그와 다르니 신앙 체험도 다를 뿐이다.
평범한 신자에게 극적인 체험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 전에 이미 죽을 고생을 겪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 이유 없이 하나님이 환난을 주지 않는다. 환난을 이겨낸 극적인 체험 후에는 그 믿음이 오랫동안 아주 견고할 것 같지만 오히려 더 약하고 흔들리기 쉽다. 전번에는 하나님이 이보다 더 큰 위험에서도 건져 주셨는데 훨씬 약한 이번에는 왜 꼼짝도 않는지 의심과 불만만 더 늘어날 뿐이다.
물론 신자로선 예수님을 인격적 개인적으로 만나는 체험이 중요하다. 아니 반드시 거쳐야만 한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가장 다른 점 중의 하나다. 무엇보다 그런 체험에서부터 올바른 신앙이 시작된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 구세주로 죄인에게 참 생명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다. 영원토록 마르지 않는 생수의 원천이다. 예수님을 일대일로 만난 체험이 없다면 아직도 참 신자가 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 같은 그런 극적인 상봉을, 예컨대 환상이나 입신을 통해 주님을 만나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외적 체험 없어도 예수님을 얼마든 만날 수 있다. 바울 같은 경우는 역사상 단 한번 있었던 아주 특별한 경우다. 하나님은 그로 기독교 교리를 확실히 정리토록 만들 계획이었고 또 그렇게 한 치의 어김없이 착착 준비시켜 왔다. 이런 극적인 대면도 그런 과정 중의 하나였다. 말하자면 이 대면으로 인해 그가 복음에 대해 더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단순히 사도로서 기적적인 체험을 한 것, 그래서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확신만 한 것이 아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간섭으로 그로 회심에 이끄는 결정적인 영적인 깨우침을 얻게 되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지만 본문의 경우는 역사상 단 한 명만에게 있었던, 역사상 단 한 번의 체험이다. 단순히 그만큼 최고로 극적이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주기로 작정한 모든 이를 정말 세상에 그 한 명만 있는 양 예비하시고 준비시키고 은혜를 베푸신다. 너무나도 세밀한 개인적 대면이 이뤄진다. 구원 받은 모든 신자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고 가질 수도 없는 자신과 예수님만의 고유한 개인적 만남을 통해 그분의 십자가 은혜 안으로 인도된다. 바울의 경우는 그에게 가장 완벽한 회심 체험이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신자들에게도, 만약 그 회심이 참이라면, 각자에게 가장 완벽한 회심 체험이 일어난다.
바울의 경우는 오히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회심이 안될 만큼 그의 예수님에 대한 반발이 가장 완악했다는 역설적 의미를 놓쳐선 안 된다. 그의 내면에는 그동안 사단의 부추김에 따라 세상의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지성, 학식, 교양, 자존심, 체면, 권세, 지위, 신분, 재물 등으로 쌓아 올린 견고한 진이 강할수록 성령의 역사가 강해져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는가? 반대로 모태 신앙의 경우는 별다른 체험 없이도 구원의 은혜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베풀어지지 않는가?
예수님과의 첫 대면이 사람마다 초자연적 방식, 성경 말씀, 전도 혹은 설교, 일상사적 체험 등 각양각색으로 일어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 방식에는 특별한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또 어떤 방식이 되었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역사는 동일하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아무리 예수님과 초자연적 대면을 했고 또 그 일이 기독교 사상 세 번째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해도 바울 개인의 입장에선 한 죄인에서 구원 받은 의인이 되는 영적 절차를 거친 것뿐이다. 회심의 내용은 다른 모든 이들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던 사울
사울이 다메섹을 향해 가면서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이 대단했을 것이다. 영적인 우월감에 가득 차서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갔을 것이다. 물론 스데반이 순교할 때의 당당한 모습에서 또 혹시 있었을지 모르는 그와의 변론에서 받은 정신적 충격의 여파는 여전히 남아 있었겠지만, 그래도 유대교 내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 상당한 긍지를 가졌을 것이다. 나아가 이제 외국에서조차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해오면 유대 사회에서 출세 길은 탄탄대로로 보장될 판이었다.
그런데 다메섹 성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지점에서 홀연히 하늘로부터 강한 빛이 내려쪼였다.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라 타고 가던 말에서 굴러 떨어졌을지 모른다. 몸을 추슬러 일어났는데 대체 어찌된 일인지 앞이 깜깜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땅에 엎드려 벌벌 길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아마도 원정체포대장의 역할을 맡았을 텐데 부하들에게 그 꼴이 말이 아니었다.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8절) 다메섹으로 들어갔지 않는가? 넘어지고 엎어지며 엉금엉금 기다시피 했을 것이다. 나아가 다메섹에서 이 잡듯 뒤져 기독교 신자들을 체포할 예정이었는데 도리어 이름 없는 신자의 집에서 기숙하고 도움을 얻게 되었다. 사태는 완전히 역전되어버렸다.
빛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나 눈이 먼 이후부터 사흘 후 눈이 떠지고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는 완전히 죽은 사람과 방불했다. 예수님에게 단 한마디 변명, 대답, 항변도 못한 채 아무 것도 먹고 마실 수도 없었다. 하늘을 찌를 듯 유대 사회를 호령했던 그 기세는 완전히 사라졌다. 예수 믿는 신자에겐 저승사자 같이 무서웠던 사울이라는 이름도 단 한 순간에 지상에서 사라졌다. 대신에 완전히 생눈이 멀어버린 불구자 한 명이 도무지 그 앞날을 가름하지 못한 채 너무나 처량한 행색을 하고는 다메섹으로 기어들어갔다.
예수님이 그로 가장 먼저 눈을 멀게 한 것이 참 흥미롭지 않는가? 물론 영적으로 자신이 봉사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다. 실제적으로는 예수 믿는 자인지 아닌지 판단하는데 가장 큰 기능을 할 눈부터 멀게 했다는 뜻이지 않는가? 대제사장에게서 받은 체포영장은 그야말로 휴지조각으로 변해버렸다. 너무 놀랍지 않는가? 세상의 어떤 최고 권력으로도, 아니 이 땅 전부를 동원해도 예수님의 권세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분은 이 땅의 창조주이자 운행자이자 주인이기 때문이다.
사울이 살기등등하게 신자를 핍박한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그것도 똑 같이 창조주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는 자들을 말이다. 그가 자기 입으로 자신의 종교적 배경을 설명하는 것을 들어보면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 하는 자라.”(행22:3)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3:4-6)
말하자면 집안이나, 법적 신분이나, 학문적 지식이나, 종교적 경건과 열심에서나, 무엇으로 따져도 남들에게 하나 뒤질 것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갑자기 갈릴리 어부 출신인 베드로나 헬라파 유대인 스데반이 나타나 율법과 성전 희생 제사로는 구원을 결코 얻을 수 없다고 가르치고 다녔다. 세상 사람들 앞에 칭송 받는 의로운 행위로는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기는 너무나 모자라며 오히려 위선적 죄일 때가 더 많다는 도저히 이치에도 맞지 않는 말을 하고 다녔다. 또 그런 가르침에 많은 유대인들이 열광을 하며 따랐다.
거기다 하나님께 율법을 받아서 잘 지키고 있는 유대지도층들더러 죄인이라고 지적했다. 율법 없는 자의 손을 빌려 아무 죄 없는 나사렛 예수를 죽인 죄를 범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단순 살인범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를 죽인 천하의 죄인이라는 것이다. 율법과 성전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자부하는 자들을 오히려 지옥에 떨어질 자라고 한 셈이다. 반면에 율법과 성전과는 전혀 관계없어 구원과는 거리가 멀었던 세리, 죄인, 창녀, 문둥병자들이 오히려 예수를 믿었다는 한 가지 이유로 아무 선행도 하지 않아도 천국의 생명책에 이름이 올라간다고 한다.
심지어 십자가에 죽은 바로 그 예수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사십 일간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하늘로 승천해 지금 이 땅을 빛 가운데서 다스린다고 한다. 그리고 때가 되면 이 땅을 완전히 심판하러 다시 오리라고 한다. 그것도 이 세대가 가기 전에 말이다. 사울로선 너무나 황당무계한 거짓말을 퍼트리고 다니는 이런 미친놈들을 도저히 자신의 종교적 지식과 여호와 신앙으로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며 하나님을 모욕한 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하나님 그 미친 자를 믿는 자들도 가만 놓아둘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만히 계십시오. 제가 대신 다 해치우겠습니다.” 바울은 지금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경외심과 동족의 앞날을 염려하는 불타는 애국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 잘못된 길로 빠져 들어가는 것을 가만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데 양심의 가책은커녕 거꾸로 의분에 넘쳐 있었다.
계속 풀리지 않는 의문
그러나 바울에게 스데반을 처형한 이후 도무지 풀리지 않는 의문 하나가 계속 남아 있었다. 그의 가슴 한 구석을 짓누르는 갈급함이기도 했다. 바로 신자들이 체포당해 끌려가면서도 불안한 기색을 전혀 내비취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앙을 포기할 테니 살려 달라고 애걸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 것을 감사하며 기뻐하는 자가 더 많았다. 개중에는 스데반처럼 죽을 때에 얼굴에 평강이 넘치고 빛도 나며 “저들이 모르고 그러니 용서하고 구원해 달라.”는 기도까지 했다.
도저히 미치고 환장할 일은 자기는 그들을 이 세상에 그냥 두어선 안 될 천하의 이단으로 여기는데도 그들이 도리어 자기를 긍휼과 연민으로 가득 찬 눈길로 쳐다본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싸움에서 자기 쪽에서 왠지 모르게 지고 있다는 감(感)을 지울 길이 없었다. 자기가 갖지 못했고 또 알지 못하는 것을 그들은 갖고 또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너무나 평온하게 하늘을 바라보던 스데반의 얼굴이 떠올랐고 또 아무리 자기 기억에서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았다.
사울로선 갈리리에서 온 무식한 시골 어부들과 헬라파 유대인들 중에서 핵심 인물 몇 사람만 잡아 없애면 이 신흥종교 운동은 끝이 날 줄 기대했다. 그러나 여타 다른 이단들과는 달리 아무리 죽여도 되살아났다. 나아가 핍박하면 할수록 자신의 마음이 개운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공허하고 까닭모를 초조와 불안에 휩싸였다. 도저히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하니 자꾸만 연약해지려는 자기 자신부터 싫어졌다. 또 분명한 대상과 그 의미도 알 수 없는 극도의 분노만 치밀었다.
본문의 “살기가 등등”하다는 원어표현의 의미는 콧김을 씩씩거릴 정도로 화가 난 모습을 말한다. 자기도 자기 분에 못 이겨 어쩔 줄 모르는 상태다. 말하자면 예수 믿는 신자들과 네 놈들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끝까지 해보자는 투다. 기필코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틀렸고 예루살렘 성전의 동물희생제사가 옳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는 것이다.
지금 사울은 땅 끝까지, 세상 끝날 까지 예수 믿는 자들을 진멸하겠다고 덤볐다. 반면에 신자들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함께 하셔서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있는 중이었다. 단적으로 말해 보잘 것 없는 한 인간이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맞대결을 펼쳐보자고 덤빈 것이다. 자기가 대체 누구를 대상으로 어떤 일을 벌이고 있는지 몰랐다. 실제로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으니 그로선 까닭 없이 초조 불안하고 공허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예수가 사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했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하는 자들을 하나님을 위해 없애야겠다고 덤볐다. 그런데 이제 부활한 그 예수와 정면으로 딱 마주쳤다. 도저히 부인하려야 할 수 없게 되었다. 지금까지 비록 이유 없는 불안, 초조, 갈급, 공허 속에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을 지탱해준 모든 가치관들이 단번에 완전히 우르르 무너져 내려버렸다. 그가 자랑하던 모든 것들이 너들 너들 찢어진 걸레조각보다 못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자신이라는 존재의 의미와 가치마저 산산조각이 났다. 대체 자신은 세상에서 아무 것도 아닌, 벌레나 물건보다 못한 처지에 떨어졌다. 정확히 말해 떨어트려져 버렸다.
이 사건은 바울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게 소외된 채 진행되었다. 자신의 의식, 의지, 능력 등 그 어는 것도 전혀 발휘될 수 없었다. 세상 사람들 앞에 그토록 자랑했던 학문적 지식, 현실적 능력, 신앙적 열심 전부를 다 동원해도 이 사태를 정상으로 바꿀 재간이 없었다. 아니 동원해 보지도 못했고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가 예수님에게 건넬 수 있었던 유일한 말 한마디는 “주여 뉘시오니이까?”라는 질문뿐이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는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예수는 십자가에 처형당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바울이 핍박한 자는 예수 믿는 자였는데도 예수님은 당신을 핍박한다고 말씀하셨다. 물론 예수 믿는 신자 모두에게는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교회는 그분의 지체니까 결국 당신을 핍박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지금 사울에게 주는 의미는 아주 유별났다. “나는 바로 네가 말살하려 덤벼드는 그 나사렛 이단의 괴수다. 네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우겼지만 바로 내가 그 부활한 예수다. 스데반이 목숨을 걸고 죽은 대상인 바로 그 하나님이다. 오순절에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성령의 역사를 일으켜 그 자리에서 삼천 명을 회개시킨 메시아다.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이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 받을 길이 없다고 말한 바로 그 예수다. 자! 네 힘으로 나와 나를 따르는 자를 다 진멸해보라.” 한 마디로 줄이면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알겠느냐?”였다.
예수님은 초자연적 현상을 통해 사울을 만나주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울로 깨닫게 해주려는 것은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그 정체성이었다. 단순히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만 보이려는 뜻이 아니었다. 능력에 초점이 있었다면 그를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든지, 다시 눈을 뜨게 하지 말고 평생을 봉사로 지내게 하면 되었다. 예수를 핍박하는 자가 완전히 봉사가 되어서 다니면 사울 개인으로선 큰 수치인 반면에 살아 있는 예수님의 권능은 얼마나 확실하고도 오랫동안 증명되겠는가?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를 사흘 동안에 완전한 죽음 가운데 몰아넣었다가 다시 살리기를 원하셨다. 당신께서 사흘 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였듯이 사울도 먹고 마시지도 못하고 완전한 암흑세계에서 지내게 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정상으로 회복시켰다.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그대로 맛보게 했다. “네가 나의 부활을 그리 못 믿었지만, 이래도 계속 나를 부인할 수 있겠느냐?”라고 따지고 물은 것이다.
바울이 나중에 어떻게 고백했는지 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十字架)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게 죽으셨느니라.”(갈2:20,21)
영으로 만나주시는 예수님
그 사흘 동안에 사울의 심령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겠는가? 물론 제일 먼저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이 꾸며낸 거짓말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이었다는 점을 확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단순히 예수가 부활했다는 한 가지 사실만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필연적으로 다른 모든 것도 다 바뀌어야 했다. 예수가 말한 것, 가르친 것, 사역한 것 등등 단 한 치의 틀림이 생길 수 없었다. 그 전부가 진리였다. 아니 그가 말한 그대로 예수 본인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기 전에 보인 이적만도 인간으로선 도저히 해낼 수 없는, 하나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지 않는가? 자신의 죽음과 부활마저 스스로 예언한 그대로 이뤄냈다. 생명을 주고 앗는 분이다. 그런 분이 지금 세상에서 최고라고 자부하는 자의 수족을 완전히 묶어서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 전부를 동원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그분이 말 한마디로 이룬 일을 도저히 해결할 수 없었다.
예수 믿는 신자와 끝까지 누가 이기나 따져보자고 덤볐지만 자신이 철저하게 졌음을 절감했다. 단순히 유대교와 기독교라는 종교 간의 기 싸움이 아니었다. 사울은 세상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의인이었지만 실제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의가 인정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아니 스데반이나 베드로 같은 무식한 어부에 비해서 오히려 자신이 더 추하고 더러운 죄인임을 절감했다. 예수가 말한 대로 마음속으로 간음하고, 말로서 형제를 살인하고, 원수를 미워만 했지 사랑은커녕 용서해준 적도 없고, 가슴을 치며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하고 자신이 죄인임을 회개한 일조차 없었다. 원수를 미워하지 않은 것만도 대단한데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오히려 불쌍히 여기는 나사렛 이단이야말로 참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달은 것이다.
바꿔 말해 예수님은 지금 사울의 눈은 가려놓고 그 깊숙한 내면에서 영으로 그를 만나주고 있다. 사울이 자부했던 이전의 모든 것들을 완전히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 그의 옛 자아를 완전히 깨트려 버렸다. 그리고 그 영혼 속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의 새로운 존재를 만들고 계셨다. 사울로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 앞에 완전히 겸비하게 되어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도덕적 종교적 겸손을 갖추게 되었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정말로 예수님이 살아계신 주님이기에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이제부터 바로 그분 예수를 위해서 남은 일생을 걸게 된 것이다. 정말로 생전 처음으로 참 평강과 자유를 누렸기에 기쁘게 자원하여 그분을 따르기로 했다. 아무리 여호와께 성전 제사를 많이 드려도 얻지 못했던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된 것이다. 비로소 스데반 사건 이후에 그의 마음을 지금껏 누르고 있던 의문과 갈급함이 풀렸다. 예수를 만나 그분을 따르지 않은 인간에게는 절대로 소망이 없음을 확실히 깨달은, 아니 실제로 체험한 것이다.
결국 사울이 예수를 실제로 만난 곳은 다메섹 도상이 아니라 그의 캄캄해진 영혼 속이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0,11)
신자와 예수님의 인격적 대면은 반드시 그 동안 사단에게 묶여 있던 그 영혼이 풀려나서 죄 씻음의 확신으로 결말지어진다. 그 방식이야 무엇이 되었든 사울처럼 자기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이제는 오직 예수와 동행하겠다는 자발적 헌신이 따르게 된다. 그 방식이 초자연적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오직 한 죄인의 영혼에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의 광채가 가득 채워지는 일이다. 그래서 죄에 찌든, 아니 탐닉하며 즐기던 한 인간이 죄를 죽기보다 저주하게 되는 자로 변하는 일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9-11)
바울이 자신의 능력과 지성을 과신할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모든 일을 자기 뜻과 계획대로 이뤄나갈 자신이 있었고 실제로 또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메섹 도상까지의 그의 전반기 인생이 그랬다. 말하자면 비록 말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희생 제사를 지내고 율법을 준수하는 것 그 자체가 사실은 자신의 의지와 능력이었다.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지한 것이 아니었다. 천국도 실력으로 우열을 정해서 가야한다는 뜻이었다. 정말 도덕적 종교적 교만이 하늘을 찌를 듯했었다.
예수를 모르는 인간은 모두가 그 정도만 차이가 있지 본질적으로 사울과 같은 존재다. 현실의 일이 잘 되어 가는데 하나님을 구태여 찾을 필요가 없다. 종교적 경건과 의도 사실은 자기를 높이고 세상에서 인정을 받으려는 목적일 뿐이다. 영원한 구원과 심판은 사실상 뒷전이다. 하나님을 절대로 진정으로 찾지 않는다.
그러다가 본문처럼 자기가 계획 했던 일들이, 모든 여건과 실력을 완벽하게 갖추었다고 자신했는데도 또 모든 사람들이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라도 다 인정해주었는데도, 아무 특별한 이유 없이 완전한 실패로 돌아갈 때만이 비로소 하나님에 대해 어렴풋이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한 번으로 하나님께 쉽게 돌아오지는 않는다. 한두 번 두들겨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 여러 번 당해야 한다. 사방이 완전히 막혀서 도무지 인간적 수단이 완전히 고갈되었을 때 비로소 정말 어쩔 수 없어서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인간이다. 특별히 스스로 똑똑하고 능력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의 행태다.
사울은 단지 그 대표적인 예였을 뿐이다. 그는 여러 번 실패한 적은 없었으나 대신에 완전한 죽음에 내몰렸다. 하나님이 그로 세상 수단에 완전 바닥나게 만드셨다. 예수님의 가장 적대적 입장에 있던 끈질긴 자였기에 하나님은 가장 극적으로 그 반대의 극단으로 옮기려 특단의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사울이 결코 쉽게 변할 리 없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아셨던 것이다.
사울이란 이름의 뜻은 “큰 자”다. 반면에 바울은 “작은 자”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영으로 인격적으로 대면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다. 누차 강조하지만 그 대면이 초자연적 방식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그러나 반드시 세상에서 크다고 자부했던 자가 하나님 앞에서 무한히 작은 자로 바뀌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 후의 여생을 어떤 형태로든 예수님께 바쳐져야 한다.
바꿔 말해 이런 변화가 없으면 예수님을 절대 만난 것이 아니다. 물론 만나는 과정이 바울 같이 극적으로 일회로 끝날 수도 있지만, 예컨대 성경공부를 통해 점진적으로 장기의 변화도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님을 자신의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예수를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는 것은 반드시 옛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힌 후에라야 일어나는 일이다. 또 그러면 당연히 예수를 위해 살고 예수를 위해 죽게 된다.
너무나 불쌍한 사울 개인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이려는 사울에게 예수님이 일방적으로 먼저 나타나 만나 주셨다. 그 자리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버렸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당연히 예수님 말씀대로 “당신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예수님의 그릇”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그는 복음의 반대편에서 율법의 최고 전문가로 인생의 전반기를 훈련받았다. 그래야만 오히려 복음을 더 깊이 있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었다. 그야말로 그를 태중에서부터, 아니 태초에서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려 예정하셨던 것이며 이제 가장 적합한 때와 방식으로 그 일을 이루신 것이다.
그런데 사울 개인으로도 구원 받을 이유는 충분했다. 단순히 그 같이 출중한 자니까 위대한 사도로 세우려고 유별난 체험을 하게 했다고 이해하고 치워선 안 된다. 사울도 개인적으로 따지면 사단에게 그 영혼이 묶여 있는 세상의 똑 같은 죄인 중의 한 사람일 뿐이었다. 위대한 사도가 되기 이전에 자신의 죄 씻음부터 절실한 천하의 죄인이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특별히 사울 같은 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정말로 더 불쌍한 자였다.
예수를 믿는 것이 지옥의 영원한 형벌에서 면제 받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렇다고 천국의 영원한 생명을 보장 받은 것만으로 만족해서도 안 된다. 예수의 영이 없는 자는 이 세상에서마저 정말로 불쌍한 존재라는 것이다. 사울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치는 것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모르기에 그 영에 진정한 평강과 자유가 없다는 점이 예수님으로선 가장 안타까운 것이다.
스데반의 순교 사건 이후에 지금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까지 그에게는 어쩌면 단 하루도 평온한 적이 없었을지 모른다. 스데반을 죽인 악령이 그를 붙들고 있다가 이제는 풀어주었다는 뜻이 아니다. 스데반 사건 때에 비로소 그는 영적인 눈이 조금 뜨여서 겉으로는 예수 핍박자의 최고 사령관처럼 굴었지만 내면으로는 처음으로 진실한 영적 갈등을 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도대체 예수 믿는 자의 평강과 자유는 어디서 오는가? 그들의 믿음이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가? 사람이 이 땅에서 살고 죽는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은 과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율법을 지키고 성전 제사만 지내면 구원은 확보되어 있는 것인가?” 율법으로 죄가 없을 정도로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자 도덕군자이자 종교가였던 그도 예수라는 이름을 접하고서야, 또 그분의 십자가에 드러난 복음을 전해 듣고서야 비로소 그 영혼에 틈새가 조금 생긴 것이다. 추하고 더러운 옛 사람에게 하나님의 빛이 새어 들어갈 여지가 나타난 것이다.
예수님으로선 당신을 모르는, 아니 당신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영혼들을 너무나 불쌍히 여긴다. 그중에서도 사울같이 내가 최고이며, 내 능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심지어 나는 이미 하나님을 알고 믿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는 정말로 예수님의 참 사랑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 상태로는 절대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진정한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없다. 그가 이방인의 사도가 되기 이전에, 나아가 구원을 받고 못 받고를 떠나서, 그런 왜곡 모순 굴절된 영혼의 상태로는 결코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없기에 예수님은 더더욱 가장 안타까이 여긴 것이다.
어느 인간이고 예수를 모르고는 절대 그 인생의 참된 가치와 의미는커녕 그 목적과 방향도 제대로 잡지 못한다. 모든 인간에게 가장 시급하고 절실한 일은, 아니 평생을 두고 해야 할 꼭 한 가지 일은 바로 그 영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채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의 십자가 앞에 겸비하게 항복하고 그 이후로 그분을 따라 사는 것이다.
예수를 따르고 난 후에 바울이 한 고백을 보라.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1:15,16)
모든 사람이 미쁘게 받아야할 복음이라고 한다. 특별히 자기의 경우는 정말 오래 참으신 후에 다른 사람의 본이 되게 하려고 결정적인 만남을 허락했다고 한다. 죄인 중의 괴수인 자를 오히려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었다고 현실적 물리적으로 나아지는 것은 전혀 없다. 특별히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정말 예수님과 직접 대면했다고 큰 축복이 임하는 것도 아니다. 오직 그 영혼만 완전히 새롭게 바꾸어준다.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소중하기에 다른 모든 것은 예수를 위해 버리는 일이 가능케 해주신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일대일로 대면한 적이 있는가?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얻었는가? 지금 당장 죽어도 천국 갈 확신이 있는가? 있다고 대답하는 자에게 다시 물어보겠다. 당신이 세상의 큰 자였다가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적은 자가 된 적이 있는가? 아니 적은 자로 바뀌어서 계속 적은 자로 남아 있는가? 그래서 정말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확신하는가? 나아가 불신자로 하여금 자기들의 생각과 사는 방식에 뭔가 잘못과 부족이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가?
만약 천국 갈 믿음은 있는데 두 번째 질문에 확답을 못한다면 자칫 교리적으로만 예수를 믿은 것이지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난 적이 없다고 간주해야 한다. 그럼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해 있는지부터 다시 점검해야 한다. 주님께 자기를 골고다 십자가로 직접 데려가 달라고 진정으로 엎드려야 한다.
유타대학촌 교회 12/29/1996 주일 설교를 정리 보완한 것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