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지 말라.(눅22:60-62)

조회 수 1484 추천 수 34 2011.04.18 16:4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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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지 말라.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아 나는 너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방금 말할 때에 닭이 곧 울더라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22:60-62)


스팔타카스와 십자가 처형

로마 시대 노예 반란을 그린 스팔타카스라는 영화의 마지막에 의미심장한 장면이 나옵니다. 반란을 평정한 로마 사령관이 노예대장과 그 직속부하더러 칼을 들고 싸워 이기는 자에게는 십자가처형을 시키겠다고 명합니다.

마치 중고등학교 시절 수업시간에 떠든 두 학생더러 서로 뺨 때리는 벌을 준 셈인데 친구 사이에는 미안해서라도 처음에는 살살 때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두 사람은 처음부터 철천지원수인 것처럼 격렬히 싸우다 대장이 부하를 전혀 망설이지 않고 찔러 죽입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십자가 처형의 고통이 너무 극심하기에 사랑하는 부하 대신에 자기가 당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고통이 칼에 찔려 죽는 것과도 도무지 비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그래서 로마가 제국의 통치에 맞서는 자에게 가차 없이 십자가 처형을 시켰고, 주님도 그런 죄목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금주는 주님께서 수난 받은 고난주간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고 예배드립니다. 많은 신자들이 일주간 내내 주님의 고난을 조금이라도 더 실감해보려고 금식하거나 십자가를 지고 행진하거나 간혹 실제로 십자가에 달리는 모습을 재현하기도 합니다. 그런 의식에 동참하지 않는 신자라도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애틋한 심정에 젖습니다. 얼마 전에 십자가 처형을 실감나게 묘사한 멜 깁슨 감독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 영화 장면들을 떠올리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고난주간의 그런 행사들이 뭔가 형식적인 것 같고, 또 우리의 안쓰러운 마음도 엄밀하고도 솔직히 따져보면 조금은 가식적인 것 같지 않습니까? 물론 주님의 고난을 회상하는 것은 좋은 일이며 신자라면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어떤 극심한 고통도 그분의 십자가 고통의 1/100 아니 1/1000이라도 될까요? 주님을 위해 좌우에 날선 로마 군인의 칼에 기꺼이 찔려 죽을 수 있지 않는 자라면 그 고통에 참여하고 있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주님께는 죄에 빠진 인간을 보고 민망하고 통분해 하신 당신의 심정이 정작 더 고통스러웠지 않겠습니까? 우리 또한 진정으로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려면 주위의 사단에 미혹된 영혼들부터 참으로 안타까이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의 십자가 은혜 가운데 온전히 초대될 때까지 꾸준히 눈물로 기도하며 사랑으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잠시 일주간 섣부른 감상에 젖다가 마는 연례행사로는 그분의 고난에 동참은커녕, 신자 스스로의 영적 만족 내지는 체면치례 한 정도에 불과할 것입니다.      

주님은 고난 가운데 있지 않았다.

거기에다 수난일을 회상할 때에 거의 모든 신자들이 간과하는 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성금요일에 주님은 고난 가운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뜰에 잡혀와 있는 본문의 상황에서도 그러했습니다. 물론 그 육신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쳤고 얼마 안 있어 빌라도 법정과 십자가에서 엄청난 육체적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또 가장 흉악한 죄인도 받지 않을 온갖 수모, 비방, 조롱, 멸시를 다 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지금 이 고난과 상황은 주님이 의도적으로 계획하신 것입니다. 태초 전부터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려고 세워두신 경륜과 일정대로 모든 환경과 사람과 사건을 당신께서 주도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각본을 쓰시고, 연출을 맡으시고, 당신께서 직접 주연하시고, 베드로와 열두 제자와 대제사장과 빌라도 등의 조연배우들을 일일이 캐스팅하셨고, 조명과 무대장치 등을 다 마련하여 드라마를 이끌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제 드디어 골고다 언덕이라는 마지막 절정을 향해 숨 가쁘게 치닫고 있는 중입니다. 엄밀히 말해 당신 뜻대로 당신께서 감독 주연까지 맡고 있는데 고통스러울 수 있겠습니까? 비록 모든 사정이 고통스럽긴 해도 주님의 내면은 오히려 다가올 승리를 예상하며 감사로 가득 차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해석 아니겠습니까?

비유컨대 권투선수가 세계 챔피언 쟁탈 시합에서 마지막 15라운드 공이 울리기 직전까지 왔고 또 전원일치 압도적 점수 차의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는 셈입니다. 분명히 15회까지 오도록 많은 고통이 있었고 지금도 마지막으로 죽을 힘을 다하는 상대의 펀치를 맞고 있기에 아주 힘들긴 합니다. 그러나 이제 곧 영광스런 승리가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까? 찬란한 챔피언 벨트와 트로피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순간에 선수가 느끼는 기대, 설렘, 감격은 엄청날 것입니다.  

성금요일에 대한 복음서 기록을 잘 살펴보십시오. 예수님 한분을 빼고는 모든 주변 상황과 사람들이 완전히 미처 돌아갔습니다. 전혀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뭔가에 급히 쫓기듯이, 올바른 이성과 지성으로는 해선 안 되는 일들, 아니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짓거리들을 자행했지 않습니까?

그 중에는 가룟 유다의 배반은 물론, 겟세마네 동산에서 뿔뿔이 도망간 제자들도 포함됩니다. 순진하고 열정적이라 본의 아닌 실수가 잦았던 베드로마저 하녀의 닦달에 그 자랑하던 의리는 휴지조각처럼 너덜났고 정말로 치사하고 비겁한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냈습니다. 삼년이나 주님과 동고동락하면서 배웠던 수제자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더럽고 추한 실체가 사단의 장난에 놀아나 훨훨 춤추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만은 사단이 벌여놓은 그 광란의 춤판에서, 당신께서도 온갖 수치와 고난을 당하면서도, 단 한 치도 평강을 잃지 않았습니다. 어떤 심문과 조롱에도 답변 하나 하지 않았던 의미가 여럿이지만, 당신께선 전혀 두려워하거나 조급해 하거나 흥분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던 분은 오직 주님뿐이었습니다

성육신하신 궁극적인 뜻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궁극적 뜻이 무엇입니까? 인간을 죄에서 구원해 주는 것입니까? 물론 가장 일차적인 이유는 그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이라면 구태여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구원을 주려고 예정한 자를 죽기 직전 혹은 직후에 천국으로 인도하면 끝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이 다른 종교의 그것과 아주 다른 점은 살아 있는 동안에 구원의 확신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신지 앎으로써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요17:3) 말하자면 구원 얻은 후에 주님의 은혜와 권능 가운데서 범사에 넉넉히 승리케 하는 것이 주님이 성육신하신 최종 목적인 것입니다.

말구유에 아기 예수가 태어났을 때에 천사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3)라고 찬양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문을 잠그고 겁에 질린 제자들에게 오셔서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요20:19)라고 두 번이나 강조했습니다.

주님이 태어나실 때와 승천 직전에 하신 말씀이 모두 평강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구원 받은 것만 붙들고 있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자리에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정말로 환난 중에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최소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평강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양보하여도 그분을 향한 믿음만큼은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성금요일에 주님을 회상할 때도 사실은 그분의 고난보다는 평강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또 지금 어떤 형편에 처해 있던 실제로 주님 안에서 평강을 회복해야 합니다. 물론 주님은 하나님으로서 그 현장을 주도하기에 평강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연약하고, 불완전하며, 어리석고 무능하며, 무엇보다 탐욕과 교만과 죄에 찌든 인간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환난 중에 기뻐할 수 있기는커녕 의지적으로 범사에 감사하려 해도 잠시 잠간뿐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솔직히 기도마저 안 나올, 아니 하기 싫을 정도로 힘들 때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기억할 것은 단 하나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주님 안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범사에 평강을 유지하는 일이 초자연적 권능을 받아야만 가능하리라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 평강이 어디서 올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베드로를 그윽이 쳐다보신 눈길입니다. 그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님은 자기가 택한  자에게 어떤 경우가 생겨도, 비록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해도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관저의 뜰은 밤중에 미쳐 돌아가는 사람들로 혼란의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주님의 관심은 오직 베드로 한 사람에게만 가있었습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어느 구석에 숨어서 어떤 말을 하고 있는 지까지 다 알고 계셨습니다. 닭이 세 번 울자 비로소 베드로가 어디 있는지 두리번거리며 찾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금방 베드로가 당신의 제자인 줄 눈치 챘을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주님은 정확히 베드로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또 고개를 돌렸어도 사람들이 모르게 바라보았습니다. 두 사람의 눈길 사이에 교감했던 의미들은 현장에 있던 어느 누구도 눈치조차 못 챘습니다. 그 성급하던 베드로도 이때만은 스승의 뜻을 알았습니다. 조롱, 멸시, 비방, 야단, 정죄는 물론 판단과 재확인하는 뜻이라곤 전혀 없이 주님이 나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최소한 야단치기는커녕 나를 용서해주고 또 이 자리에서 끝까지 나에게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점만은 확신했을 것입니다.

정작 고난주간에 할 일은?

여러분이 지금 어떤 경우에 처했든지 간에 주님의 이 눈빛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알고, 믿고,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고 있기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서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시지 않습니까?

혹시라도 나는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해서 주님의 동행하심에 확신 없습니까? 너무나 어리석은 착각이자 전혀 하지 않아도 될 염려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그분은 우리가 어떤 땅 끝에 가더라도 우리와 함께 하셔서 세상 끝날 까지 절대 떠나지 않습니다. 그것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엡4:30) 모든 성도에겐 성령이 영원토록 내주하십니다. 그래서 천국 가는 날까지, 아니 마지막 부활의 날까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인을 쳤습니다. 절대로 변개, 수정, 포기, 취소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입성할 자녀답게 살라는 것이 이 구절 전후 문맥의 뜻입니다. 단순히 도덕적 선함을 실천하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만약 신자가 천국에 들어갈 자답지 못하세 산다면 내주하신 성령이 근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주님이 함께 하셔서 당신의 영광 가운데로 이끌고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마저 모르거나 잊고 있다면 더더욱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근심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권투시합 15라운드의 초반이나 중반에서 아주 열세에 몰려서 두들겨 맞느라 너무 아파도 마지막 공이 울리면 승리의 월계관은 우리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조금 힘들다고 그 시합의 주관자에게 의심, 불평, 부인하려 들면 얼마나 어이없겠습니까?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여서까지 이미 그 월계관을 확보해 놓았는데도 말입니다.    

육신적 큰 질병이나, 불경기로 인한 경제적 고난이나, 왜곡된 인간관계로 인한 상처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여러분 인생을 이끄시는 이는 여러분이 아니라 바로 주님입니다. 그분이 각본, 연출, 주연까지 맡고 계십니다. 그분이 각본을 짰다면 비록 현재는 고통스러워도 그 결말도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맞도록 이미 짜여져 있다는 뜻입니다. 반드시 합력하여 선으로 이끄시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고난 주간에는 더더욱 주님의 십자가 앞에 우리의 어떤 고난, 슬픔, 상처, 문제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꺼내 놓고 그분의 보혈로 깨끗이 씻음 받으시어 평강을 회복해야 합니다. 보혈의 은혜가 기도하고 찬송한다고 그냥 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예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때로는 원망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 해도, 주님은 나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그윽이 바라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기에 평강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 처형의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조연으로 캐스팅한 자는 베드로가 아니고 사실은 사탄이었지 않습니까? 신자를 훼방할 수 있는 존재는 사탄뿐인데 그 사탄이 최고의 지혜를 짜내어 꾸민 골고다이지만, 주님이 그 모든 흉계를 다 꿰뚫어보시고 그것마저 이용해 부활 승리로 이끄셨지 아닙니까?

주님의 본심은 우리에게 징계를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어리석고 연약하며 무엇보다 아직도 죄의 본성이 생생히 살아있는 우리가 어울리지 않게 수난일이라고 해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듯이 괜스레 감상에 젖으려들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베드로에게 그랬던 것과 똑같이 주님은 지금도 나를 세상에서 단 한명의 사랑하는 사람으로 삼아서 나만 바라보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어떤 환난 가운데 있더라도 이번 주간 동안에 오히려 나를 그윽이 바라보시는 주님의 사랑의 눈길을 발견하시어 너무나 기뻐하여야, 최소한 평강을 되찾아야 합니다.  또 그래야만 주님이 고난당하신 목적과 의미가 정말로 온전히 성취되는 것입니다.  

4/18/2011

정양호

2011.04.19 03: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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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가 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그가 찔림은, 그가 상함은”

성경 찾아 보기 : 이사야 52:13~53:9

지난 2004년 4월 8일 예수의 수난일인 금요일(4월 9일) 수난주일 예배 설교를 준비하면서, 당시 유행한다는 영화 '예수의 수난'을 보러 아내와 함께 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았다. 우리의 주요 사역이 국공립학교를 순회하면서 학생들에게 예수 영화를 접촉점으로 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화 예고 광고가 나오기 전부터 이미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담임목사가 먼저 본 후 신앙생활에 좋겠다고 생각되면 선교사의 호주머니를 털어서라도 한번 모두 보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학교를 순회하며 누가복음을 배경으로 한 예수 영화(CCC 프로젝트) 420여 회를 상영하면서 전도에 상당히 많은 효과를 보았다. 그러나 늘 아쉬운 점은 이 영화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피 흘리는 장면을 찾아볼 수 없어, 왜 이런 실수를 했을까 하고 아쉬워하곤 했다.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처음부터 수난과 피로 점철되었다. 그러나 왠지 영적인 느낌이 이상야릇하기만 하였다. 다 보고 나서도 그 감동이 어떤 은혜와는 동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내 영의 코드가 자꾸 거부를 하는 것 같았다.

로마 군인들의 잔인성, 사탄의 역사…, 정작 강조되어야 할 복음의 핵심 부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인 구원이요, 연민을 불러일으킬 육신의 고통보다 어쩌면 영혼의 고통일 텐데, 알 수 없는 아람어와 라틴말 대사에 영어 자막으로 확실히는 잡히지 않지만, 뭔가 본질이 다른 방향으로 시선을 끌고 가는 기분이 들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이런 대목인지도 모른다. 구태여 카톨릭 신자가 만든 영화이기 때문이라는 안경으로 평가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관람 후 왠지 교인들에게 여러분도 한번 보라고 권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 영화는 카톨릭 전통주의자인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는 말하기를 “그것은 나의 신앙을 반영한다”(A Catholic Film with a Catholic Message.), “나는 카톨릭교회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믿는다”라고 하였다. (Gibson has declared, “It reflects my beliefs.” “There is no salvation for those outside the [Catholic] Church…I believe it.) 따라서 일반인들이 잘 관찰하지 않으면 눈치 챌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성경적 메시지보다는 카톨릭적 메시지로 가득 차 있다.

Richard Bennett and J. Virgil Dunbar은 지적하기를 “이 영화의 가장 치명적인 영향은 잠재적인(subconscious) 신성 부정과 은근히 그리스도의 수난 과정 속에서 예수보다는 마리아를 생각나도록 준비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Andrew J. Webb은 이 영화는 다만 슬픔의 절정인 그리스도의 희생의 환상과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마리아를 떠올린다고 하였다.

놀랄 필요가 없지만 비성경적 비복음적인 카톨릭 신학에서는 현재 온갖 액세서리를 동원하여 마리아의 역할을 과대 포장하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머니 품에 쌔근쌔근 잠들어 힘없는 어린 아이의 이미지를 갖게 하고 있다. 요즘도 세계 도처의 동상에서, 사진에서 마리아는 피눈물을 흘리며 현현하여 역사하는 신으로 주변의 카톨릭교도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확실히 로만카톨릭은 “예수,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기보다는 마리아라는 이름을 빌린 하늘의 여신을 믿는다는 것이 틀림없다.

영화는 하나의 영상 작품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작품 속에서 사실의 과장이나 왜곡 축소가 전혀 문제될 필요가 없다. 어떤 면에서 재미있는 작품으로 관객을 동원하여 비즈니스에 재미를 보면 그만이다. 멜 깁슨은 자기의 재능을 이용하여 그가 따르는 카톨릭 사상과 교리에 충실하면서 사업적인 수완을 보였다고 할 수도 있다. 혹자는 “어떤 내용들이 성경에 있지 않지만 성경에 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비록 성경의 사실을 변경하지 않는다 해도 성경의 사실이 잘못된 인상(Image)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설령 이 영화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수난과 부활에 눈을 뜨게 되고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킨다 해도 이 영화는 성경이 보여주는 복음의 진수가 아님을 알아차려야 한다.

본문에 하나님은 환상의 사람, 이사야의 눈앞에 신령한 망원경을 대시며 먼 미래를 보게 하신다. '구약의 최대 사상'(思想)이라고 소개하는 내레이터의 해설과 함께 여호와의 종의 노래 그 네 번째 곡인, 뮤지컬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의 막이 열린다.

장엄한 서곡 “보라, 내 종!”

여호와께서는 손가락으로 저 먼 앞을 가리키며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선지자를 향해 우렁찬 목소리로 "보라, 내 종!"이라고 하시며 장중한 종의 노래 서곡을 시작한다. 처음에 이사야는 혹시 종이라면 자신이 아닐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이 종은 인간의 여느 다른 종과는 차원이 다른 종이다. 무지몽매한 인생들이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은 보지 않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땅만을 보고 소망이 없는 땅의 것에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있는데, "하늘을 보라, 영원한 슈퍼스타 메시아를 보라!"고 주의를 환기시킨다.

마치 이것은 세례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힘차게 외친 말을 회상하게 한다(요 1:36). 종(Servant)이란 죽어도 살아도 오직 주인만을 위해 봉사하는 자유의지가 없는 자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신 사실을 증거한다(빌 2:6~8).

죄인들 앞에 무릎을 꿇어버린 하나님의 종

팡파르를 울리며 화려하고 멋지게 출현할 메시아를 학수고대하던 유대인들은 수난자(受難者)이신 '여호와의 종'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휘황찬란한 왕관을 쓰고 위풍당당하신 메시아라면 쉽게 납득할 수 있는데, 죄인이 써야 할 초라한 가시관을 쓰고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고 남루한 누더기에 무릎을 꿇은 왕이라면 성령께서 주시는 믿음의 눈이 아니고는 전혀 상상을 불허하는 대목이다.

섬기러 오신 종을 말하고 노래하기는 쉬워도 그를 닮아가는 종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삿대질을 하며 증오하고 달려드는 원수를 위해서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목숨을 버린 대속의 지고한 사랑을 어떻게 이성으로 감히 측량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백만 분의 일이라도 그를 따르는 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랑은 못할망정 미워하지는 말아야지", "내 속에는 사랑할 힘이 없으니 주여 도와주소서." 어쩌면 이것은 그리스도인만이 가진 남다른 고민이요 항구적인 기도 제목이리라.

“내 종이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

성육신으로 시작된 수난의 생애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인생의 죄 짐을 짊어지신 수난의 절정에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 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라고 하신다. 오직 순종의 삶으로 일관하였던 그의 지혜는 십자가에서 열방의 죄를 대신 지시고 속죄의 피를 뿌린 대제사장이셨다.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어 끝장난 메시아, 침을 뱉음을 당하고 내동댕이쳐서 완전히 매장되어버린 이 나사렛 예수가 그 십자가로 죄를 용서하고 삼일 만에 인류의 최대의 적,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하늘의 보좌에 앉으시니 오고 가는 역사의 길목에서 사탄이 깜짝 놀라고, 온 지구촌이 깜짝 놀라 할 말을 잃어버린다.

구원 받기로 작정된 택자들이 동서남북에서 그 참혹한 십자가를 사랑하며 모여들고 있으니 놀랄 일이요, 마침내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니, 세상 열방은 너무 당황하고 너무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어 버렸는가. 이것이 오늘 교회가 만민을 향해 깃발을 힘차게 드는 이유이며, 신앙고백이며, 그를 따르는 성도들의 긍지와 축복이리라.

한 옥타브를 높여 중반부의 절규 :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종의 노래는 중반부에서 분위기가 반전되면서 한 옥타브를 높여 종의 낮아짐을 노래한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라고 절규한다. 은혜의 시대, 구원의 날이 왔는데도 여전히 불신앙의 세대는 복음을 거절한다. 영육의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 앞에서 오히려 보았기 때문에, 오히려 들었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죄인의 완고한 모습을 보여준다.

도대체 왜 믿지 못할까? "그는 주 앞에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묘사한다. 한마디로 없는 것이 너무 많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기(biography)는 한마디로 형편이 없다. 역사 속에 몰락해버린 로마 식민지 유대 출신이요 게다가 사람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고 무시하던 그 나사렛 동네 출신이다. 명문가문도 아니요 사회적 신분도 별 볼일 없는 "연한 순 마른 땅"인데 그 누가 쳐다본단 말인가.

그의 한평생은 목마름과 시장함으로 이어져 예수님의 실제 나이 서른 셋보다 훨씬 더 들어 보인 것 같고(요 8:57) 그의 최후가 저주의 십자가임에 무슨 매력이 있겠는가? 그럼에도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를 노래하고 그를 높이며 그분만을 섬기는 자들은 웬일일까. 오늘 내가 십자가 그늘에서 영원한 안식을 발견한 것은 오로지 그의 은혜이다. 이것이 믿는 자의 비밀이다.

종반부의 엄청난 스타카토로 클라이막스 : “그가 찔림은, 그가 상함은”

이제 종의 노래는 점점 세기(crescendo)를 더하여 수난의 종반부 클라이맥스에 이르러서는 마치 바닷물이 요동치는 엄청난 스타카토로 연주가 진행된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은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그가 찔림은…그가 상함은…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세상에 있을 때 "자기를 능히 죽음에서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지만" 세상은 그를 천대하였고, 우리 주님이 빌라도 총독 앞에서도, 자신이 만든 피조물들 앞에서 조롱을 당해도, 벌거벗은 수치를 당해도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아무리 죄가 많은 죄인일지라도 욕을 먹을 때는 먹더라도, 죽을 때 죽더라도 한마디 하는 것이 본능이요, 지극히 정상일 텐데 더구나 죄 없으신 예수님의 침묵(amazing silence)에 빌라도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기이히 여길 수밖에 없었으리라(막 15:4~5).

왜, 무엇 때문인가? 죄! 다름 아닌 바로 내 죄가 그를 벙어리가 되게 하였다. 다름아닌 바로 내 죄가 그를 찔렀다. 바로 내가, 내 죄가 그를 죽인 것이다. 그가 찔리고 터져 죄 없으신 옥체가 성한 곳이 없이 파열된 것은 죄로 인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는 우리의 영육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함이었다(사 53:5). 이 위대한 영감의 계시 앞에서 헨델은 '메시아' 작곡의 펜을 떨어뜨리고 흐느적거리기 시작하였단다. 철저히 인권이 유린당하고 자유를 박탈당한 이 처절한 죽음 앞에 "다 이루었다"고 승리를 선언하신다(요 19:30).

하나님의 구속 사랑을 확증하였고(롬 5:8), 범죄자에게 내리는 형벌을 담당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셨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Infinite wisdom planned), 하나님의 섭리인 이 위대한 구속 계획을 성취하신 것이다. 이 갈보리의 완벽한 승리에 인간의 그 어떤 것을 더 할 필요가 없다. 구속의 시작도 마침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역사의 현장에서 그 누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었는가? 그 누가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였는가? 오직 예수뿐이다.

이사야에게 보여준 종의 노래는 마침내 약 700여 년 후 AD와 BC의 한가운데 우뚝 서신 메시아, 인류의 유일한 소망인 예수 그리스도, 갈보리 승리의 교향곡이 온 누리에 울려 퍼졌다.

오늘날 성령께서 성경을 통해 모든 성도들에게 보여준 이 갈보리의 노래는 지구촌 인류의 마지막, 최대 최고의 '새 예루살렘 영광의 교향곡'으로 막을 내릴 것이다(계 21:4). 그때는 그야말로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천군천사의 관현악단이 팡파르를 울리고 주의 택한 뭇 백성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풍당당한 백 보좌에 앉으신 만왕의 왕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오직 예수 제일의 신앙을 지키고, 복음 일념으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린 선한 용사들을 우리 주님이 직접 어루만져주시며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 더 이상 설교를 할 필요가 없고, 세계 선교도 끝이 나고, 더 이상 예수 믿으라고 외칠 필요가 없어진다. 그분은 지금도 문 밖에 서서 "내 사랑아, 문 열어 다오"(계 3:20) 하시면서 곤욕을 당해도 입을 열지 않으셨던 그 인내하심으로 사랑하는 자들을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신다. 그러나 그의 목숨 버린 사랑과 용서를 끝까지 저버리고 전도자의 복음을 듣지 아니한 자들에게는 순진 무궁한 어린양 예수의 불 같은 진노와 심판에 놀라고 또 놀랄 것이다.

사랑하는 친구여,

이 부활의 계절에 아직도 꽁꽁 얼어붙은 저 북녘 하늘의 깜깜한 지하에서도, 어두운 무슬림의 쇠사슬에서도, 예수 구원을 외치다 형장의 이슬처럼 사라지면서도 소리 높여 부르는 승리의 노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을 우리 함께 노래해보자. 이사야처럼.

* 이 설교는 영화 "패션어브크라이스트"를 비판적 코멘트를 함과 동시에 이사야의 환상을 묵상하며 우리 교회에서 설교한 내용인데 미주 뉴조에도 올려진 글입니다. 위의 말씀에 공감을 하며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94

Caleb Kim

2011.04.19 04:20:40
*.145.1.22

목사님의 강해는 요17:13의 주님기도에서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며칠전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은 부활의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의 고난을 기쁨으로 받으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를 본받아 바울도 자신의 고난을 기쁨으로 받은 것 같습니다.

요17: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운영자

2011.04.19 11:00:38
*.108.161.206

정양호 선교사님, Caleb Kim님
자칫 오해를 살 수도 있는 글인데 공감을 표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도 그 영화를 보고 도무지 말도 안 되어서
그 영화를 주제로 해서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반박하는
성경공부를 저희 교인들과 별도로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선교사님의 상기 글은 댓글로 두기보다 게시판에 따로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

김유상

2011.04.19 20:56:04
*.234.34.98

그렇습니다. 주님께선 그 모든 고난과 조롱과 멸시를 기꺼이 받으셨습니다. 원치 않고 당할 때는 분하고 억울하고 수치스럽고 고통스럽겠지만, 자신이 주도하여 그 고난을 받았던 주님께선 자신에게 가해진 고통과 모멸에는 전혀 괘념치 않으셨을 겁니다.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명확히 밝혀 주고 있듯이, 예수님의 수난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 내고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을 얻는 승리와 환희의 사건입니다. 목사님께서 적절하게 예를 들어 주신대로, 마지막 한 라운드만 견디면 승리가 확정적인 권투선수의 팬들이 그 권투 선수가 겪고 있을 고통으로 아파 하겠습니까, 아니면 마지막 3분을 잘 견디고 승리를 확정짓기를 응원하겠습니까?

우리가 십자가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뒤를 따라 골고다 언덕을 오르며 그를 응원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시는 것을 알지만, 내가 받아야 할 고통과 죽음을 대신 받으시는 것을 알지만, 그래서 그렇게 응원하는 것이 참으로 염치없지만, 그렇다고 베드로처럼 주님을 만류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을 아파하고 예수님께 연민을 갖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그 고통은 실은 우리가 지옥에서 받아야 할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란 점을 생각하며, 우리를 그러한 고통에서 건져 주신 예수님과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겠노라 재다짐하는 기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반응이 앞부분에서만 그친다면 우리는 자칫 하나님보다 더 측은지심이 많은 자라는 황당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측은지심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온전한 순종을 원하십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금욕과 자학과 감상적인 묵상으로가 아니라, 내 삶에서 한 가지라도 더, 한 번이라도 더 주님의 계명대로 살려고 분투함으로써 합시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정순태

2011.04.21 11:41:49
*.75.152.183

창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But Noah foundfavor in the eye of LORD).

이 말씀을 통해 크게 깨우침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의 알기 쉬운 설명에 감사합니다!!!

Matthew Park

2011.04.25 07:15:30
*.64.127.110

쇼 쇼 쇼 쇼를 하라! 신성이신 예수가 뭐 실제 고통을 느꼈겠는가? 그냥 쇼 한거다. 어짜피 조금 있으면 죽었다 부활하는걸 다 알고 있는데 사실 기뻐하고 있었던 거다. 음... 맞습니까?

그래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외치셨을까요? 실제 감사하고 기뻐하셨다면 숨을 거두시며 "아버지 감사합니다." 라고 하시지 않았을까요?

예수께서만 그 진실을 아시지 않을까요?

운영자

2011.04.25 12:40:55
*.108.161.206

Matthew Park 님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회원 가입하자마자 댓글로 본인의 생각을 나눠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제가 성금요일 저녁의 다른 측면을 강조하다보니 조금 오해가 있으신듯 합니다.
제 글의 요지는 사탄의 놀음에 모두가 놀아나 광분하다시피 하는 가운데도
주님은 여전히 육체적 정신적으로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었지만
유일하게 평강을 잃지 않고 곧 완성될구원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갖고 계셨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신성으로 아무 고통 없이 쇼쇼쇼만 하고 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승리를 목전에 둔 15라운드 권투선수의 비유대로입니다만,
인간의 어떤 바유와 설명도 주님의 그날 밤의 고통과 평강과 소망에 대해
완전하게 표현 묘사할 길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주님만이 그 진실을 아시겠지만
구원 사역의 완수에 대해서만 완전히 몰두해 있었기에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고
안도와 감사의 말씀을 하실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샬롬^^

정양호

2011.04.25 14:45:34
*.54.202.195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다 만족시킨 십자가 사건은 어떤 면에서
도저히
이성으로 측량할 수 없기 때문에

위의 "이사야가 본 패션오브 크라이스트"라는 글에서는

"Amazing silence",
"Infinite wisdom planned" 라는 신학적인 표현을 빌렸습니다.

사라의 웃음

2012.03.19 22:42:34
*.109.85.156

그윽하게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을 볼 때마다 죄송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겠는 것이 심히 부패한 본성적인 죄인을 그다지도 사랑하시고
계심에 정말 어찌할 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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