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무 불에 던져질 자는?
마태복음 강해(149)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13:36-43)
예수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사항
많은 신자들이 성경을 읽을 때에 예수에 대해 쉽게 잊어버리는 사항이 하나 있다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사항임에도 그렇다. 바로 예수님이 아주 평범한 유대 남성이었다는 사실이다. 율법을 포함한 구약성경에 능통했다는 뜻이다. 그분의 가르침과 사역은 1세기 유대 땅의 문화, 관습, 언어, 전통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럼에도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하니까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사나 슈퍼맨으로 착각하고 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구약성경과 연결해서 해석하지 않으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인데, 그 대표적 예가 바로 본문이다.
천국에 관한 두 번째 비유인 알곡과 가라지에 대해 제자들이 궁금해 하니까 예수님이 풀어서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구원으로 이미 예정된 제자들에게 엄격한 심판을 강조했다. 구원에 관해선 43절 한절로 의인은 아버지 나라에서 해 같이 빛날 것이라고 아주 간단하게 언급했다.
반면에 심판에 대해선 40-42절에 걸쳐 길게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특별히 풀무 불에 던져질 자에 대해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불법을 행하는 자”(41절)라고 그 조건과 상태까지 제시했다. 당신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에 절대로 들어올 수 없는 자라는 것이다.
넘어지게 하는 것은 남에게 상처 주고 잘못을 범해 손해를 끼치는 것인가? 불법을 행하는 것은 율법을 온전히 준수하지 못하는 것인가? 그럼 우리 중에 아무도, 당장 저부터도 구원 안에 있지 못할 것이다. 십자가상의 강도는 예수를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즉시에 낙원으로 보냄을 받았지 않는가? 교리를 배운 오늘날의 신자는 예수님 설명이 결코 행위구원을 뜻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추측할 수 있다. 그럼 과연 어떤 자를 지칭하는 것인가?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제자들은 그 의미를 잘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기독교 교리는 당연히 모르고, 복음서조차 기록되기 전이었는데도 말이다. 추가 질문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기 때문이지 않겠는가? 그들이 영적 천재도 아니고 초자연적 간섭으로 절로 터득하게 된 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제자들도 구약성경을 숙지하고 있는 유대인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설명이 이미 익숙한 표현이었다는 뜻이다.
임박한 여호와의 날
예수님은 구약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을 사용했다. 특별히 스바냐서의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스바냐 선지자는 기원전 7세기에 남 왕국 유다에서 요시아 왕이 개혁을 하기 전에 죄로 타락한 유다와 주변 열방에 대해 여호와의 날이 임박했다고 경고했다. 처음부터 곧장 여호와가 사람과 공중의 새와 바다의 고기 등 지면의 모든 것을 진멸하고 멸절할 것이라고 아주 강하게 심판을 선포했다.
특별히 심판 받을 사람의 상태에 대해 “거치게 하는 것과 악인들”(1:3)이라고 표현했다. 거치게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말한 “넘어지게 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또 유대사회에서 악인 혹은 죄인이라고 할 때는 율법을 어기는 자를 뜻한다. 예수님의 “불법을 행하는 자”와 스바냐의 “악인”은 동의어인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비유 해석을 들었을 때에 곧바로 스바냐의 그 예언을 떠올릴 수 있었다. 풀무 불에 던져질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묘사가 어떤 사람을 뜻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거기다 유다가 멸망할 당시의 참상을 기억하고 있기에 여호와 심판의 절박성과 엄격성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스바냐가 말하는 거치게 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가나안의 바알과 밀감 같은 우상 신을 섬기고 일월성신(日月星辰) 즉,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한 해와 달과 별들을 숭배했던 자다.(습1:4,5)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를 멸절하리라.”(6절) 이들은 심판 받아 마땅한 자들이다. 악인은 또 어떤 자인가? 단순히 율법을 어긴 정도가 아니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을 폭력으로 수탈하고 사리사욕만 채운 지도자와 특권층이었다.(7-9절)
그러나 문제는 아무리 포학한 행위를 자행했어도 그 악행만으로 심판하면 여전히 행위구원이 된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아니었다. 동일한 인물임을 이어지는 구절들이 입증해준다. 먼저 “그 때에 내가 등불로 예루살렘을 두루 찾아”(v. 12a) 보았다고 한다. 구원을 줄 의인이 있나 보았더니 전부 우상을 숭배하는 자와 악행을 일삼는 자들뿐이었다는 것이다.
또 그들이 동일한 종교적 사상을 갖고 있었다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심중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벌하리니.”(v.12b) 여호와가 복(福)도, 화(禍)도 내리지 않는다고 즉, 하나님은 구원주도 심판주도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마음 놓고 우상도 숭배하고 악행도 일삼은 것이다. 예수님의 본 비유대로 심판은 단지 연기되었을 뿐인데 아예 없는 것으로 여긴 자들이다. 하나님의 인자는 무한하여 노하기에 더디시고 모든 이가 회개하여 구원이 이르길 간절히 소원하신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 땅을 향한 마음을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여호와를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다. 형식적 의무적으로 믿고 따랐다. 다만 현실생활의 풍요를 보장받는 데는 가나안의 음란한 농경 신들이 더 낫다고 여긴 것이다. 여호와를 알고 믿기는 하되, 그와 동시에 자신들에게 돈과 권력을 주어 세상에서 출세, 형통케만 해준다면 어떤 신이라도 경배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뜻은 그 당시 유다의 상황이 스바냐 시대와 하나도 변하지 않고 똑 같다는 것이다.
귀신은 믿으면서....
그럼 오늘날의 상황은 어떠한가? 예수 믿는 자가 동시에 우상도 숭배하는가? 주일에 회교도 사원, 불교의 절, 교회 예배당을 순회하는 자는 없다. 지금 넘어지게 하고 불법을 행하는 자는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가라지에 해당된다. 말하자면 불신자 전체다. 씨가 뿌려진 밭도 예수님은 세상이라고 풀어주었다.(38절) 교회로 제한하지 않았다. 그 때는 교회가 생기기도 전이었다. 반면에 제자들은 지금의 신자에게 해당된다.
결국 본문은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뜻이다. 또 스바냐의 예언에 비추면 불신자들도 하나님이 실존한다는 것까지는 인정하지만 신령과 진정으로 그분을 경배하지 않는 자라는 것이다. 정작 현실에서 자기들의 복과 화를 주도하는 세력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
쉬운 예로 점을 치러 가는 자들은 영적인 존재가 있음을 이미 인정한 것이다. 거기다 그 지시대로 따른다. 또 최근 한국에선 부쩍 흉악한 범죄가 많이 발생하는데 그런 일을 보는 모든 불신자도 천벌을 받을 짓이라고 탄식한다. 하나님이 주는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 우스개에 불과하지만 스님이 외나무다리를 건너다 실족하여 강물에 빠져 죽게 되자 부처님은 부르지 않고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간구한다고 하지 않는가? 불교에는 절대적인 실체가 없는 까닭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처럼 불신자들도 영적 세계는 물론 절대적 존재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점치러 가서 거룩하게 살려고 하니 그 방안을 가르쳐 달라고 묻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오직 이 땅에 사는 동안의 현실적 형통만, 그것도 나와 내 가족을 위해서만 빌고 또 빈다. 또 그런 일을 위해서라면 귀신이 하라는 대로 얼마든지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은 귀신은 물론 하나님마저 인정하면서도, 유독 기독교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절대 믿지 않는다. 대체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일까? 성경은 그 이유를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고후4:4)라고 선언한다. 불신자들을 스스로 인식 못하는 사이에 사탄이 미혹시켜 예수를 절대 믿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대체 어떻게 미혹시켰다는 것인가?
임사체험이 뜻하는 것은?
완전히 죽음을 맞이했다가 다시 소생하는 것을 임사(臨死)체험이라고 한다. 교통사고나 심장 발작 등으로 의학적으로 명백한 사망의 판정을 받았다. 심장의 박동과 뇌파의 활동과 호홉이 완전히 중지하고 체온이 급격히 떨어져서 분명 죽은 것이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실에서 다 철수했는데도 얼마 후에 소생하는 것이다.
소생 후에는 자신이 자기 몸밖에 나가서 자기를 보았다고 증언하는 일들이 종종 있다. 단순히 환상을 본 것이 아님은 그 동안에 의사의 말이나 간호사들의 행동을 그대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자기 시신을 붙들고 통곡하며 대화를 나누는 것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또 그 모습을 바라볼 때에 안타깝고 슬펐던 자신의 심정까지 증언한다.
불신자들 중에 100% 완전한 무신론자는 거의 없다. 귀신이라는 영적 존재를 인정한다. 막상 죽을 때에는 몇 번 예를 들었지만 고 이병철 회장처럼 사후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다. 그럼에도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는 영접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영혼, 정확히 말하면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영혼을 단순히 안개나 허깨비 같은 정도로 간주한다. 몸을 벗어나면 물질계와 시공간을 초월하기에 구원을 받든 심판을 받든 고통, 슬픔, 기쁨 등과는 무관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들의 죽음에 대한 이해는 셋으로 나뉜다. 우선 죽음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난다고 즉, 존재의 멸절로 생각한다. 혹은 죽은 후의 영은 모든 것을 초월하기에 아무런 느낌도 없다. 아니면 귀신이 되어서 우주에 떠돌거나 아니면 지구로 환생할 것을 꿈꾼다. 아주 막연하게 스스로도 자신의 생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모른다.
임사체험은 이 모든 생각들이 전부 틀렸음을 입증한다. 사후에도 지정의가 활동하고 희로애락을 느낀다. 예수님도 풀무 불에 던져진 자가 울며 이를 간다고 하지 않았는가?(42절) 비유는 상징을 내포하지만 지금은 그 비유를 풀어 설명한 것이니까 사실을 말한 것이다.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도 지옥으로 떨어진 부자가 어떻게 탄식하는가?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물 한 방울이라도 혀에 떨어트려 달라고 간구한다. 혀는 몸에서 가장 예민한 부분이며 조금이라도 아프면 그 고통은 참을 수 없다. 풀무불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지 가히 짐작이 된다.
물론 이것도 비유이기에 지옥의 구체적 상황을 우리는 알 수 없다. 또 요한계시록을 인간의 지혜로 섣불리 해석할 수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에서 벗어난 자에게는 참혹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의 의미는?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은 응급실에서 소생한 임사체험과는 그 차원이 훨씬 다르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서 시체가 이미 썩기 시작했다. 예수님이 어떻게 소생시켰는가? “나사로야 나오라.”고 무덤에서 불러냈다 이처럼 이름을 부른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새로운 이름을 주지 않았다. 이전의 이름 그대로 불렀다. 나사로가 깨어난 후에 이전의 기억이 생생했을 것이다. 평생토록 자기가 배우고 체험한 것들 모두를 그 내면에 보존한 채 되살아났다.
너무나 당연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무덤 속에 썩어가던 나사로는 나사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몸을 잠시 떠난 그의 영혼이야말로 나사로의 실체였다. 영혼이 돌아오자 나사로의 몸도 살아났다. 그의 지정의도 온전히 작동되고 육체는 활기를 찾아서 온전한 한 인간의 인격체, 존재로 회복된 것이다. 예수님의 품속에 있던 나사로의 영혼을 예수님이 다시 나사로의 몸속에 불어넣어 준 것이다.
나사로를 되살리는 것은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에겐 식은 죽 먹기처럼 간단한 일이었다. 실제로도 말씀 한 마디로 살리셨다. 그것도 “영혼아 들어가라. 들어가서 최선을 다해 힘을 발휘해서 되살아나라.”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았다. 단순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나사로라는 한 인간을 예수님이 인격 대 인격으로 대하며 만나주시고 되살려 주신 것이다. 인간의 눈에는 완전히 죽어서 누구나 다 끝나고 아무 소망 없다고 간주했는데도 말이다.
예수님만이 인간의 실재(實在)를 주관하신다. 예수 밖에 있는 자들은 자신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조차 모른다. 인간의 존재의 참 의미, 그 정체성은 오직 예수만이 바로 확립해줄 수 있다. 육신적 생명은 너무나 당연하고 인생의 의미, 가치, 소망, 목적 등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모든 것을 하나님만이 부여해주고 또 성숙시켜 줄 수 있다. 하나님 품안에 있는 자는 영원토록 복락을 누리고 밖에 있는 자는 그 반대다.
나사로가 소생한 사건은 예수를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임을 뜻하는 것이다. 오늘의 비유에 견주어 생각하면 그런 자에게는 영원한 풀무불 심판이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순서로 기다리고 있다는 진실을 극명히 보여주는 실례다. 또 단순히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예수의 능력을 보여주는 정도가 그가 바로 그리스도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불신자의 평생의 목표
불신자들이 재물과 권력만 탐하지는 않는다. 일부 그런 자도 있지만, 그들의 욕심이 끝이 없는 것이 절대 아니다. 스스로 인식은 못하지만 항상 갈급하고 허전하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자꾸 헛된 것을 찾는 것이다. 또 그들이 죄를 즐기고 더 짓고 싶어서 죄에 빠지는 것도 아니다. 죄로 따지면 신자도 뒷구멍으로 호박씨를 까니까 도토리 키 재기이다.
그들도 인생의 진정한 의미, 가치, 소망, 목적을 열심히 찾고 있다. 그들의 평생의 목표가 무엇인가? 자아실현 혹은 자아충족이지 않는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각종 취미 활동, 여행, 운동, 독서, 묵상, 수양, 봉사, 심지어 기도도 한다. 그 결과 충족이 되는가? 아니다. 단지 일시적이다. 그런 일을 할 때 잠시만의 만족일 뿐 금방 사그라진다. 더 자극적인 일을 찾는다. 쾌락이나 타락의 정도를 더하려는 것이 아니다. 감정에 임팩트를 더 주는 것을 찾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것도 계속 하게 되면 시들하여져서 별로 좋은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그런 과정들이 나름대로 의미와 가치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항상 결말은 “이것이 아닌데...”라는 것이다. 미진하다. 충족하지 못하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방법이 잘못되었겠는가? 아니다. 자신의 자아 자체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는데 어찌 그것을 실현하고 충족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내 속에 있는 내가 과연 누구인지 그 질문에 대한 답도 못 얻었다. 실체가 없는 나를 어떻게 더 성숙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되기 전에는 무엇을 해도 갈급하고 허망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죽었던 나사로가 소생한 것은 하나님이 단순히 생명만 주관한다는 뜻이 아니다. 구원과 심판만 주관한다는 뜻도 넘어선다. 인간의 영혼을 처음부터 영원토록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인간을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자 비로소 인간은 생령이 되었다. 인간존재의 실체가 정말로 인간다워진 것이다. 영혼이 인간존재의 궁극적 실재이고 인간을 인간답게 그 정체성을 온전하고도 바로 세워주시는 분도 오직 그 영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전15:10)이라고 고백했다. 예수 그리스도 대속의 은혜 안이라는 것이다. 다매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그도 최선을 다해 자기 자아를 찾으려 헤맸다. 성전제사도 열심히 드리고 율법준행도 성실히 행했다. 하나님을 위한 열성은 최고였다. 그러나 예수가 사단의 미혹에서 건져주어 영혼이 새롭게 되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해도, 심지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을 해도 갈급하고 허망했을 뿐이다.
불신자의 잘못은 하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와 영적존재도 인정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정체성 확립과 자아발견에 전혀 연결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의롭고 사회적으로 큰 업적을 남겨도 그 본인에게는 온전한 평강이 없다. 너무나 간교한 계략으로 조종하는 사탄의 미혹에 빠져 있는 것이다.
사탄은 불신자들을 어떻게 속이는가? 얼마든지 네 스스로 네 자아를 실현하고 충족시킬 수 있다고 부추긴다. 에덴동산의 이브도 바로 그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다. 사탄은 그녀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면, 말하자면 하나님을 거부하고 스스로 서면 네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고 속였다. 이브가 선악과를 먹자 어떻게 되었는가? 성경은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3:7)고 증언한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기 전에도 아담과 이브는 서로 벗은 줄 알았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 했다”(창2:25) 외부적 상황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선악과를 먹고 나니까 벗은 것이 부끄러워지고 두려워지게 된 것이다. 그 전에는 벗었어도 오히려 그것이 가장 아름답고 진실하고 가치 있음을 알았지만 그 반대가 된 것이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나니까 모든 것이 뒤틀린 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부한 채 스스로 자신을 찾으려 해본들 아무리해도 자아충족이 안 되는 오늘날 불신자들의 상태다.
생명과 사망 둘 중의 한 가지 냄새를 피우는가?
지금 불신자들만 탓하려고 드리는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이 구원이 예정되어 있는 제자에게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를 유독 풀무불 심판에 대해 강조하며 해석해주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유대 대중은 그 해석은 듣지 못하고 비유만 듣고 돌아갔다. 곡식과 가라지가 마지막 날까지 공존한다고 해서 심판이 유보된 것이지 절대 취소되지 않았음을 그들더러 깨우쳐 주라는 것이다.
여호와가 복도 화도 내리지 않는다고 안심하고 우상숭배를 하고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게 여호와의 날이 이르면 모든 것이 진멸되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애끓는 심정으로 선포한 스바냐처럼, 유다 백성에게 선포하고 깨우치고 가르치라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에게서 찾지 않고 또 그래서 심판은 영원히 없을 것 같이 마음 놓고 죄에 빠져 있는 불신자들에게 신자는 스바냐와 같은 선지자로 서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은 구원 얻는 자에게나 망하는 자에게나 항상 그리스도의 향기가 된다고 했다. 단순히 선한 행실과 주님의 사랑으로 섬긴다는 뜻이 아니다.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고후2:16) 언제 어디서 어떤 경우에 누구를 만나도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진리만 증거하겠다는 것이다. 구원과 심판의 구분이 분명하게 보이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본문에 비추면 풀무불의 심판이 분명히 있음을 알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의 행동과 말을 통해 그의 영이 영원한 천국에 소망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불신자들에게 명확히 보인다는 것이다. 하늘의 거룩한 가치를 이 땅에 옮겨 심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 자아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고도 정확히 발견했기에 세상 사람과는 다른 자아실현과 충족의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만 자신의 육신과 정신은 물론 영혼이 하나가 된 온전한 존재로서 건강하고 아름답고 거룩해짐을 누구나 보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 말씀을 “누가 이것(그리스도의 향기)을 감당하리요”라고 끝맺었다. 그를 보는 모든 불신자들이 자동으로 그가 예수 믿는 신자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심판과 구원이 있되, 예수 믿는 자만이 그 풀무불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그들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 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자기 스스로 발견하고 실현하고 충족하려 했던 것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 일임을 바울을 통해 배운다는 것이다.
너무 어렵고 거창하게 생각할 것 없다. 종교적 도덕적으로 거룩하고 큰 업적을 쌓으라는 것이 아니다. 신자는 이제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된 자다.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발견한 자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겸허히 엎드려 “하나님! 이제 제가 누구인지, 어떤 신분인지 확실히 알았습니다.”라고 고백한 자다.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과 권능에서 끊을 것이 하나도 없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럼 자기가 확립한 자기 정체성 그대로, 간단히 말해 예수 믿는 신자답게 그렇게 당당하게 살면 된다. 이미 영원하고 궁극적인 정답을 확보한 자다. 자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으며 결국에는 하나님 나라에서 해같이 빛날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주님께 순종하며 의와 거룩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아직도 자아실현과 충족은커녕 자아발견도 못한 자들에게 “인생에서 참 자아를 발견하는 길이, 정말로 인간답게 사는 길이 바로 저것이구나!”라고 인식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예수 믿은 지 일이십 년이 되었어도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내 모양이 왜 아직 이 모양 이 꼴이냐?”는 불평을 갖고 있다면 어떻게 되는가? “제가 헌금과 봉사도 힘에 지나치도록 했으면 뭔가 형통하거나 기도응답이라도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고난만 겹치니 대체 어떤 연고입니까?”라는 의심이 있다면 말이다.
바로 스바냐 시절에 하나님은 복도 화도 내리지 않으니 스스로 해결책을 구해 우상도 섬기겠다고, 오늘날에는 현실에서 형통케만 해주면 귀신도 섬기겠다는 불신자와 같은 자리에 떨어지는 것 아닌가? 거기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특별히 엄격하게 더 강조하셨는데도 작금강단에선 절대적 심판을 선언하지 않는다. 이러다 다들 영원한 풀무 불에 떨어지지 않을까 두려울 뿐이다.
9/23/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