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이 아니라 교환이다.
마태복음 강해(150)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마13:44-46)
기독교를 가장 기독교답게 하는 교리
기독교를 가장 기독교답게 세우는 교리는 두말 할 것 없이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다. 어떤 인간도 자신의 자격, 공적,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도무지 미치지 못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진홍 같았던 우리 죄를 양 털같이 희게 하시어 의롭다고 칭해 주신다. 법적으로 심판에서 영원히 면제 되었다고 선포해 주시는 것이다.
이 교리는 아무리 강조되어도 부족하다. 또 실제로 아주 많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너무 문자적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그친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데에 얼마나 깊은 의미가 있는지 제대로 가르쳐지지 않고 있다. 단지 문자적으로 적용해서 그저 믿기만 하면 되는 양 소개된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를 가장 기독교답게 만드는 교리가 오히려 가장 기독교답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참 믿음을 갖는데 장애마저 되는 것이다. 너무 비평적 비관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그 증거를 하나 들어보겠다.
교인들에게 “구원의 확신이 있는가?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자신이 있는가?”라고 물었을 때에 선뜻 “예”라고 대답하는 자가 의외로 적다. 그것도 교회 출석한지 10년, 20년이 되었고 집사나 구역장으로 봉사하는 분들마저 그렇다.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것은 아무리 도덕적으로 의롭고 종교적으로 경건해도 그 때 까지 믿은 것은 헛것이지 않는가? 엄밀히 말해 믿음조차 없는 것이다.
본문의 천국에 관한 예수님의 다섯째 감추인 보화와 여섯째 좋은 진주의 비유는 왜 많은 교인들이 구원의 확신을 아직도 갖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잘 드러내고 있다. 아주 간단한 비유이고 구체적인 설명이 없지만 예수를 믿는다는 그 깊은 의미가 정말로 어떤 것인지 아주 잘 나타내고 있다.
결단과 선택의 믿음?
이신칭의를 문자적으로 적용하는 첫째 경우는 단순히 의지적 결단으로만 해석하는 것이다. 일단은 믿어보자, 목사와 성경이 그렇게 말하니 믿어볼 수밖에는, 혹은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니까 믿어야지 식의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온전히 믿은 것이 아니다. 참 믿음에는 “믿는다.”라고 간단히 석 자(字) 표현만으로 충분하다. 그 외에 어떤 수식어라도 붙으면 믿음이 아니다. 심지어 믿는다고 큰 소리로 말하거나, 여러 번 강조하는 것조차 실제로는 온전히 믿어지지 않았고 일말의 의심이 개입되었다는 고백일 수 있다.
또 믿기로 선택한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흔히들 세상에 온갖 종교가 많지만 기독교가 가장 숭고한 도덕률을 가르치고 또 구원의 길도 합리적인 것 같아 선택했다고 한다. 그럼 기독교 외에도 좋은 대체 방안이 많다는 뜻이다. 아무리 기독교에 백점 만점을 주어도 다른 종교가 칠십 혹은 팔십 점이면 이십, 삼십 점 정도의 차이 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 타종교는 모두가 빵점이다.
타종교를 폄하하려는 뜻이 아니다. 모든 종교가 그 사회에 필요한 도덕적 훈련을 하고 고달픈 삶에서 정서적 안정을 얻는 유익은 나름대로 다 갖고 있다. 그러나 절대적 하나님과 절대적 인격적인 영원한 관계는 전혀 형성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실체가 그 모든 종교 안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죄에서 구원 받아 영생을 얻으려면 예수를 믿는 길 외에는 절대로 없다.
본문은 믿음이 결단과 선택이 아니고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교환(交換)이라고 한다. 그것도 신자가 갖고 있는 소유 전부 다와 맞바꾼 것이다. 조금 더 많이 드리거나, 분에 넘치게 희생하는 정도가 아니다. 자기 것이라곤 완전히 다 판 것이다. 교회에 전 재산 팔아서 헌납하라는 뜻이 아니다. 전 우주를 만드신 주인 되시는 하나님에게 그깟 돈 몇 푼이 더 있고 없고는 전혀 중요치 않다.
은혜 구원의 두 핵심 의미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에는 두 가지 핵심적 의미가 있다. 우선 율법을 준행하는 선한 행위나, 성전에 제사를 지내는 종교 의식으로는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물론 예수를 모르는 모든 자연인의 본성으로는 무슨 수를 써도 온전한 의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위 구원과 대조하여 그것을 완전히 부인하는 의미가 그 첫째다.
본성으로 하나님 의를 이루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다면 그 본성의 극적인 변화가, 그것도 외부의 힘에 의한 변화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 성령이 초자연적으로 간섭하여 우리를 묶고 있던 사탄의 미혹에서 풀려나는 구체적 과정은 우리가 도무지 알 수 없다. 십자가 앞에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을 발견하여 예수가 믿어지고 십자가의 진리가 이해되어 그분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자 은혜다.
그러나 믿은 후에 자기 내면에 엄청난 변화가 발생했고 그 결과가 계속해서 자시에게 유효하게 작용한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다. 비유컨대 산이 바다로 바뀌거나 바다가 산이 되는 그런 천지개벽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또 그런 내면의 변화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각 개인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외적 증거로 서서히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은혜 구원의 둘째 의미다.
본문에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보화와 진주를 사는 것이 바로 산이 바다가 되는 변화다. 바다와 산끼리 완전한 교환이 이뤄지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이전의 상태로 절대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소유는 다 없어졌다. 교환 이전의 것이 전혀 남지 않는 것이다. 거기다 이전의 것에 대한 미련이 없는 정도도 넘어선다. 이젠 새것뿐이다. 이전 것이 다시 생길 수는 전혀 없다. 오직 보화와 진주뿐이다. 그 새것이 너무 좋아 항상 갈고 닦고 보고 또 보고 어딜 가도 들고 가고 잘 때도 품에 안고 자는 것이다.
교환은 선택과 결단을 포함한다.
이 비유에서 간과해선 안 되는 사실이 하나 있다. 농부와 장사꾼이 교환할 때에 결단과 선택의 과정도 거쳤다는 점이다. 자기 소유와 보물을 서로 비교 검토하여 보물이 좋다고 판단했다. 또 소유와 보물 중에 보물을 선택하여서 사기로 결단했다. 교환을 하려면 반드시 선택과 결단의 과정이 필요하다. 서두에 말한 대로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결단과 선택의 단계로만 그치고 실제 교환이 이뤄지지 않으면 믿음이 아닌 것이다. 반쯤 믿은 것도 아니고 완전히 안 믿은 것이다. 은혜 구원은 그 핵심 둘이 다 만족되어야 한다. 물론 많은 교인들이 예수를 믿기로 선택 결단만 한 후에 교회에 출석하여 신앙생활을 시작한다. 그 가운데도 일종의 교환은 분명히 있다. 쉽게 말해 골프장 가는 대신에 교회에 예배드리러 가는 교환은 이뤄진 것이다.
예수님이 본문에서 말하는 교환은 그보다 훨씬 다른 차원이다. 우선 교환은 교환이되 일대일의 교환이라고 밝혀 놓았다. 따로 선택할 수 있는 대체방안이 전무하다. 인간의 자격, 성품, 공적, 능력으로는 의를 이룰 수 없기에, 심지어 죄 중에 있고 하나님과 원수 되어서 그분을 미워하고 있는 중에도 그분을 믿으면 구원은 허락 된다.
그러나 예수를 안 믿었다면 다른 길이 전혀 없었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하나 선택과 결단만의 믿음에는 그것이 거의 없다. 예수는 절대적이고 영원하고 완전한 구원과 천국이지만 동시에 예수가 없이는 절대적이고 영원하고 완전한 심판과 지옥이다. 구원과 심판이 일대일로 100 % 맞교환된 것이다. 예수 이전 것이 조금만 안 좋은 것이 아니다. 100% 나쁘기만 한 것이다. 또 예수 이후의 새것이 아주 좋은 것이 아니다. 100% 좋기만 한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서 기다리는 것은 처절한 지옥의 실패뿐이기에 예수를 진정으로 구주로 영접하는 것과 단순히 예수가 좋아서 믿는 것은 그 의미에 천양지차가 있다. 비유컨대 사형이 확정되어서 오늘 내일 그저 집행만 기다리던 죄수가 사면 받는 것과 그저 1-2년의 징역형을 받은 일반 죄수가 사면 받는 것과 같다. 사형수는 자신을 사면해준 왕을 평생의 은인으로 모시고 항상 감사하게 된다. 또 그 왕이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기꺼이 순종하게 된다. 예수를 정말로 보화요 진주로서 소유하고 있다면 그분의 뜻대로 순종하며 무엇을 먹고 마시든 그분의 영광을 위해 하게 된다.
부자 관원이 예수를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지 물었다. 주님은 가진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주라고 했다.(막10:21) 구제를 완벽하게 행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을 망라한 전부와 예수와 실제로 맞교환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육신, 생각, 영혼은 물론 생명까지도 오직 예수에게 달렸음을 절감하는지 여부를 물은 것이다.
자신의 전부와 맞교환 했다면 예수가 자신의 새로운 전부, 처음이자 끝이어야 한다. 그분이 모든 신자 인생의 궁극적이고도 유일한 목적과 소망과 의미와 가치인 것이다. 예수에 의해 생각하고 예수를 위해 말하고 예수의 빛을 드러내도록 행동해야 한다. 정말로 내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예수 한 분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해야 한다. 직장, 가정, 건강, 아니 생명마저 없어져도 예수가 내게 남아 있기에 족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모든 신자더러 목사, 선교사 같은 전임 사역자가 되라는 뜻이 아니다. 맹목적인 광신자가 되라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이민으로 국적이 바뀐 신자
서부영화에 보면 인디언과 백인들 사이에 물물교환으로 장사를 하는데 인디언에게 도무지 수지가 안 맞아 손해가 엄청날 것 같은 교환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 낡은 중절모나 안경을 그것도 시력이 나쁜 것도 아닌데 들소 가죽 열 혹은 스무 마리와 서슴없이 바꾼다. 안경과 모자는 생전 처음 보는 진기한 것으로 너무 좋기 때문이다. 밥 먹을 때나 누워 잘 때나 안경과 모자를 절대 벗지 않고 꼭 쓰고 다닌다. 바꾼 대상이 진짜로 너무 좋다면 들소 가죽 백 마리인들 아까우랴!
최근에 동남아 후진국의 가난한 사람들에겐 한국이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으로 이주해서 한국국민이 되는 것이 평생의 꿈이 되었다. 비록 지하 단칸방에 살던, 공장에서 힘들게 일하든 한국이 너무 좋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고 있다. 자기들이 이전에 있던 곳에선 자신들의 안전, 행복, 기쁨을 보장 받지 못하지만 한국은 얼마든지 그럴 소망이 있다는 것이다. 국적을 바꾸는 것은 완전히 새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전의 정체성은 지어지고 새로운 정체성을 얻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실제로 흑암과 죄악과 죽음과 미혹의 나라에서 빛과 의와 생명과 소망의 나라로 이민 가게 되는 것이다. 그 정체성이 바뀐다. 자신의 시민권이 이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로 변경된다. 정말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 본성 안에 천지개벽이 일어나는 것이다.
본성이 바뀐다고 해서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썩어질 옛 습성이다. 신자의 체질이 진토같이 연약하고 죄의 영향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어서 수시로 죄에 넘어진다. 그러나 예수를 저주받은 자라고 매도하던 그 본성이 이제는 그분의 보호와 인도가 없으면 한시도 온전히 살 수 없음을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내 기분과 소견에 좋은 대로 행했던 옛날의 삶 전부가 허망한 실패로 끝났음을 절감하기에 이제는 절대 그렇게 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예수를 진정으로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소속 신분과 국적이 실제로 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겨진다. 예수의 거룩하고 진실하고 아름답고 풍성한 생명이 신자의 매일의 삶 속에서 살아 역사한다. 절망과 허무의 인생이 소망과 활력의 인생으로 바뀐다.
예수 없이는 아무리 재물, 건강, 지성, 명예, 권력 다 갖춰도 비참한 실패일 뿐 아니라 전혀 나아질 소망과 가능성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기다리는 것은 극심한 고통의 지옥임을 절감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예수와 함께라면 아무리 현실이 궁핍하고 남들 앞에 그럴싸해 보이는 것이 없을지라도 예수 그분만으로 기쁨, 만족, 행복, 감사, 평강,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요컨대 하나님과 멀어져 그분의 뜻 안에서 보호 인도 받지 못하면 항상 두렵고 부끄러운 결과만 낳더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지금 너무 과장해서 표현하는 말이 아니다. 전혀 불가능한 꿈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죽어도 천국 갈 수 있느냐는 질문의 뜻이 무엇인가? 바로 다른 모든 것을 잃더라도 예수 한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느냐는 것 아닌가? 그에 대해 예라고 즉시 당당하게 답하지 못하면 구원을 못 받은 것이자 믿음도 없는 것 아닌가 말이다.
등가(等價)의 교환
본문의 비유에서 정작 눈여겨 봐야할 내용이 또 하나 있다. 농부와 장사꾼이 대박의 횡재를 한 것이 아니다. 보물을 공짜로 주었거나 얻은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등가(等價, same value)로 교환한 것이다. 좋은 진주가 십만 불짜리라면 그만큼의 현금을 지불한 것이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땅 주인이 몰랐던 것은 비유가 말하는 핵심이 아니다. 초점은 그 밭의 가격과 농부가 소유한 전부의 금액이 같았다는 것이다. 둘 다 바가지를 쓰거나 바겐세일로 산 것이 절대 아니다. 구매자가 그 가치를 온전히 인정하고 그에 충분한 가격을 지불한 것이다.
무슨 뜻인가? 십자가 복음이 절대 값싼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실제로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으셨다. 기독교의 구원이란 그분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과 일대일로 맞바꾼 것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생명과 우리 생명이 같은 가치를 지닌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일대일의 교환이 실제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선택 옵션이 하나뿐이기에 선택이라는 말 자체가 성립 될 수도 없다. 오직 교환 외에 다른 방안이 없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하나님과 재물이라는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이 교환의 의미라는 것이다. 재물은 이 땅에서 살아감에 필수적이고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 되어선 안 된다. 재물이 하나님과 동격(同格)의 자리에 위치할 수는 결코 없다는 것이다. 재물이 자신의 안전, 행복, 만족과 기쁨을 절대 줄 수 없고 하나님만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재물에서 그것들을 추구하려 든다면 기다리는 것은 그야말로 허무한 실패뿐임을 절감하는 것이다.
이 비유의 뜻은 그래서 예수 안에서 완전히 죽고 예수 안에서 완전히 되살아난 체험이 없다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구원의 확신을 너무 신령하게 영적으로 따질 것 없다. 간단히 말해 내가 이전의 내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는 확신이다. 재물을 주인으로 삼았던 삶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음을 언제 어디선 어떤 일을 만나고 누구 앞에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작금 기독교와 신자가 이렇게까지 힘이 빠진 이유가 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너무 강조했기 때문에 문자적 껍데기뿐인 믿음만 남아서 그렇다. 본 비유처럼 완전한 맞교환의 구원이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거룩하고 완전하고 아름다운 생명과 나의 죄에 찌들어 더럽고 추한 생명의 바꿈이 없는 구원들뿐이다. 너무나 값 싸게 복음이 소개되고 의지적 결단과 선택만으로 천국행 티켓을 남발해주었기 때문이다.
교환이 이뤄지긴 했는데...
그런 가운데도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일종의 교환은 이뤄지긴 했다. 우선 불신자라는 명찰과 교인이라는 명찰의 명목상의 교환이다. 인간적 의지적 결단과 선택을 기독교의 이신칭의라는 종교적 사상 내지 교리와 바꿨다. 주일에 야외로 놀러가지 않고 취미활동이나 운동하는 것과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기도 헌금하는 종교적 의식과의 교환이다.
물론 주일에 놀러가지 않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엄청난 변화이자 은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참 생명과 나의 거짓 생명의 실제적 교환이 체험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에 따라서 그 예배는 천국이 되고 또 지옥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작금 진짜로 예수로 인해 살고 죽는 믿음을 주위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강단은 성경이 절대적 영원한 진리임을 선포하지 못하고 있다. 심판을 선언함에 주저함 아니 부끄러움마저 생겨버렸다. 대다수의 신자들이 구원의 확신마저 갖지 못한다.
절대적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거의 없다. 절대라는 단어 자체를 사용하지 못하게끔 만드는 분위기가 되었다. 갈수록 세상에 죄악은 더욱 관영해지고 신자들마저 절대적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의 심판은 임박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라고 하신 말씀이 응할 때가 곧 다가오지 않겠는가?
정말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라.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직접 이 땅에 오셨다. 그분이 온갖 이적으로 당신의 메시아 되심을 증거했다. 죄인, 세리, 과부, 고아, 귀신들린 자, 각색 불치병자들, 심지어 죽은 자들과도 교제하며 사랑으로 섬겼다. 구약성경과 당신이 예언한 그대로 죽은 지 사흘 만에 사망을 이기고 무덤을 박차고 되살아 나셨다. 그 모든 것이 역사상 한 번 있었던 엄연한 사실이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거기다 바로 그분께서 나를 선택 예정하시고 일방적으로 나를 먼저 찾아 오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성령의 간섭으로 십자가의 앞에 겸허히 엎드리게 만드신 후에 실제로 나의 진홍 같이 붉은 죄를 양털 같이 희게 씻어 주셨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 하시고 있다. 이 얼마나 엄청나고 고귀하며 놀라운 은혜인가 말이다.
그래서 예수 믿은 후에는 날마다 그분의 보호와 인도를 간절히 바라면 그분과 평생을 동행할 수 있다. 그래서 죄와 죽음과 절망의 낭떠러지로 향하는 세상 사람들의 흐름을 역류하여서 날마다 기쁨과 감사와 안식과 평강과 자유가 넘치는 의와 빛과 생명의 길을 향해서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다. 실제로 그분으로 인해 이 땅에서부터 의로워질 뿐 아니라 우리를 통해 그분보다 더 큰 일을 그분께서 이뤄주실 수 있다. 하나님의 경륜과 지혜가 얼마나 신비한가?
“Amazing Grace"라는 불후의 찬송을 작사한 John Newton은 알다시피 노예선 선장이었다. 젊었을 때에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하며 죄와 쾌락에 탐닉했던 자다. 세상 재미는 전부 다 맛본 자다. 그러다 예수를 일대일로 만나자 산이 바다로 바뀌는 천지개벽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저 극악무도 했던 사람이 저렇게까지 새 사람으로 바뀌다니 모두가 놀랄 정도였다.
그가 늙어서 기억력이 점차 희미해지자 이런 말을 했다. “다른 것은 다 잊어도 내가 죄인이었다는 사실과 죄에서 구원 받았다는 사실만은 절대 잊지 않는다.” 예수 없었던 삶이 아무 의미가 없어서 기억도 하기 싫다는 것이다. 아니 잊어버릴수록 더 좋다는 것이다. 대신에 새로 얻은 보배인 예수만이 자신을 버티는 생명의 근원이기에 그 예수만으로 기뻐하고 만족하면서 천국 갈 때까지의 여생을 보내겠다는 것이다.
지금 모든 신자가 얻은 구원이 또 교회가 가르치는 은혜의 구원이 과연 무엇인지 겸허하고도 솔직하게 되돌아 봐야 한다. 선택과 결단만의 믿음인지, 정말로 산 생명과 죽어가는 생명끼리 맞교환이 이뤄졌는지 점검해 봐야 한다. 교환이 이뤄지고 새로 얻은 예수만이 보배가 되어서 세상 앞에 자랑거리가 되어있는지 말이다.
이것은 너무나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다. 예수가 진짜로 좋은 보배가 아니라면 신자가 자랑하는데 주저할 수밖에 없다. 예수의 영광의 빛이 신자를 통해 세상을 향해 비춰져 나오지 않는다. 그럼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대신에 신자의 인간적 허물과 잘못이 드러나며 또 교회는 그로 인해 세상의 조직과 하나 다를 바 없어진다.
단순히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 결과다. 결단과 선택만의 믿음은 교환이 없다. 교환이 없다면 신자 안에 예수가 없다. 자기 속에 없는 예수를 어떻게 자랑할 수 있고 그 빛이 비춰져 나오겠는가? 이신칭의라는 가장 기독교다운 교리가 너무 피상적으로 강조됨으로써 오히려 기독교의 장애가 된 셈이지 않는가?
다시 말하지만 구원의 확신이 유별난 것이 아니다. 재물이 나의 주인이 되는 삶은 실패뿐이었기에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확신이자 그 실천이다. 그럼 하나님은 십자가 복음의 무한한 권세와 은총으로 신자의 인생과 교회마다 온전한 부흥을 틀림없이 불러일으켜 주실 것이다.
9/30/2012
그러하기에 이젠 예수님 한 분이면, 인생에 오로지 예수님만 계시면 되기에, 그 예수님이 와 주셨기에 참 행복한데... 이런 예수님을 자랑하는 일엔 왜 이다지도 게으르고 또 소심한지... 예수님 자랑이 아닌 사람자랑이 되어지기도 하고, 뒤돌아 보면 그게 그리도 부끄럽고 죄송하여서 또 숨어 버리고 싶고..
산이 바다가 되는 기적을 이루어주신 우리 예수님만을 진정 자랑만 하는 삶이 되길 간절히, 간절히 기도드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