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있었던 여름 수련회에선 ‘봉봉’ 사중창단의 인기가 대단했다. 찬양의 음정, 박자, 춤사위, 제스츄어 모든 것이 관광버스(?) 수준으로 낮았지만 오히려 서투르기에 더욱 열심히 하려는 모습이 보는 이로 더 배꼽을 잡게 했다. 실력으로는 오래 전 한국에 실제로 있었던 봉봉 사중창단의 수준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재미로는 훨씬 능가했다.
‘봉봉’이라고 이름 부친 이유는 네 명 중에 우연히 두 명의 성함에 ‘봉’자 돌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름에 돌림자가 있다는 것은 한 부모 아래서 같은 피를 나눈 형제라는 뜻이다. 이들 네 명 모두 나무십자가라는 이름으로 모이기 전에는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고 예수님의 보혈로 거듭난 형제들이었기에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함께 찬양하고 춤추는 데 어색하고 꺼리는 것이 있을 수 없었다. 네 명 모두 예수 ‘예’자 돌림 자를 가진 형제였다.
캠프장에서 내려 오기도 전에 모두 언제 다시 수련회를 갖느냐고 아쉬워 했다. 그 까닭은 분명 ‘봉봉’ 사중창단의 흥겨운 공연을 빨리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그들이 우리를 웃기고 즐겁게 해 준 까닭은 그들의 서투름 가운데서도 아니 서투르기에 더욱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열심히 서로 사랑하고 섬기려는 모습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아가 그런 형제의 하나 됨 안에는 성령이 틀림 없이 더 충만하게 역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초대교회는 모이기에 힘썼다. 목사가 강제로 자꾸 교회로 소집했다는 뜻이 아니다. 성령 안에서의 교제가 너무나 즐겁고 풍성하고 아름다워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전부 자발적으로 자주 모였다는 것이다. 교회 행사를 거창하게 계획하기 전에 만나지 않으면 서로 궁금하고 안타까운 사이가 먼저 되어 보자. 우리 모두 얼마나 연약하고 서투른 사람끼리 모였는지를 서로 살펴 보자. 약한 사람끼리는 힘을 합치지 않으면 다 같이 실패한다는 것을 말을 안 해도 너무 잘 안다. 나를 주장하기 전에 남을 먼저 세워주지 않으면 도저히 합창을 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면 모이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27:17)
8/5/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