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금요 찬양 예배를 준비하는 동안 평소와 같이 교회 정원에 나와 있었더니 몇 주 전에 사라졌던 토끼가 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돌아 왔다. 그 동안 안 보였던 것이 단지 기온이 내려간 까닭이었지 특별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역시 길쌈도 하지 않고 수고도 하지 않았지만 천부께서 그 토끼를 먹이시고 기르시고 보호하고 계셨던 것이다.
또 주말에는 오랜만에 둘째 아이가 다니러 와 이틀을 함께 지냈다. 금요일 저녁 학교 기숙사에서 할로윈 파티를 하는데 온갖 귀신 가면으로 분장하는 동료들과 영적으로 도저히 융화되지 않아 피할 겸해서 왔던 것이다. 그런데 학교로 돌아 갈 때 기숙사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하라고 했는데도 잊었는지 연락이 없었다. 괜히 또 혹시 가다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이 앞섰다. 꼭 전화가 와야만 안심을 하는 것이 토끼가 건재하는 모습을 눈으로 보아야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는 것과 같았다.
신자들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잘 믿는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는 것”(마6:26)을 믿습니까라고 물으면 이구동성으로 ‘아멘!’ 하고 그 즉시 크게 화답한다.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공중의 새’ 대신 자기 이름을 넣어 낭독하게 한 다음 다들 이 말씀을 믿습니까라고 물었을 때도 여전히 같은 목 소리로 즉시 아멘 할 수 있을까? 우주만물을 주관하시는 객관적인 하나님은 잘 믿는데 자신의 일생을 세밀하게 인도하시는 주관적인 하나님은 잘 믿지 못한다. 나의 주님이 아니라 멀리 계시는 모든 사람의 하나님을 믿은 것에 불과하다.
이미 자기에게 일어난 일은 단지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반추만 하면 되지 따로 믿음이 동원 될 필요가 없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분명히 이루실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토끼가 건재함을 내 눈으로 보아야 하고 또 아들로부터 안부 전화를 내가 직접 받아야만 안심 되는 것은 나를 믿은 것이지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 목사가 아무리 성경을 잘 강해 해도 여전히 객관적인 하나님을 믿으라고 가르친 것 뿐일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은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고전4:15)라고 했다. 목회를 할수록 자식에게 몸으로 본을 보이는 아비가 아니라 말로만 학생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려는 타성이 자꾸 몸에 베려고 한다.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하신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신18:22)
10/28/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