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밤 중에 일어났더니 집사람이 갑자기 옆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사연인즉 이렇다. 미국 이민 오자마자 샀던 침대를 14년 만에 새것으로 바꾸었다. 한국에서 갖고 온 자석 요에 맞추느라 두 사람 쓰기에 좁은 풀사이즈를 샀었는데 마침 누가 퀸사이즈 새것을 주었다. 좁은 침대에서 조금만 뒤척여도 서로 몸이 닿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가 침대가 넓어지니까 무의식 중에 옆이 허전해져 잠이 깬 것이다.
풀과 퀸 사이즈의 차이가 겨우 5인치(13cm 정도)인데도 그 만큼 넓게 여겨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누워 자는 동안에는 두 사람 사이에 몇cm 아니 몇 mm만 간격이 있어도 돌아 누우면 완전히 남이 되어 버린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워야 할 부부 사이도 그렇다. 각자가 싱글 침대 하나씩 들고 들어가 따로 누워 자는 꼴이나 다를 바 하나 없다. 새삼 외로운 생각이 들었다.
뒷 뜰 페티오 들보에서 어미 새가 지난 몇 주간 꼼짝 않고 알을 품어 새끼 두 마리를 낳았다. 새끼들 먹이고 날개 짓 가르치느라 또 2주를 보냈다. 가만 쳐다만 보아도 생명의 신비와 부모 자식 간의 극진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전재산이 날아가고 자식은 다 죽어 완전히 망하게 되어 아내마저 떠나자 욥은 차라리 태에서 죽어 나왔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근 삼십 년을 함께 산 아내를 바로 몇 센티 곁에 두고도 외로움을 느끼는 저나, 세상 실패 때문에 낳아 준 부모마저 원망하는 욥 같은 인간이 그 새보다 나을 것 하나 없었다.
인간은 적신으로 이땅에 왔다 적신으로 돌아 간다. 부모가 자녀를, 부부가 서로의 인생을 보장하지 못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죽음을 인식할 때에 즉 자신이 동물과 달리 인간이라는 것을 자각할 때는 누구라도 외로워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닮아 지어졌기 때문에 생명을 주시고 앗아가는 이가 육신의 부모 대신 따로 있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인간은 아무리 훌륭한 부모, 사랑하는 배우자가 바로 곁에 있어도 근본적으로 외로운 존재다. 그러나 외로움은 인간의 불행이 아니라 참 행복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진정으로 찾는 자를 절대 홀로 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성령님을 내주케 하셔서 한 순간도 단 1mm도 떨어져 있지 않게 하신다. 또 인간이 동물과 확실하게 다르게 살아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4:17)
6/13/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