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은 또 다시 한일간에 불거진 독도 영유권 문제로 전국이 들끓고 있다. 신자도 신자 이전에 한국 국민인지라 이런 소동에 휩쓸리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 그럼 우리도 머리 띠를 매고 규탄 집회에 참석해 구호를 외치고 혈서 쓰며 일본 제품 불매 운동에 참여해야 하는가? 아니면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주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저 용서와 사랑으로 참아 넘겨야 하는가?
예수님이 원수를 용서하라는 뜻은 일차적으로 개인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지 국가나 민족에 관계되는 것이 아니다. 마5:43-44에 나오는 ‘이웃’, ‘원수’, ‘핍박하는 자’ 모두 개인을 나타내는 말이다. 일본이 한국의 원수일 망정 신자 개인의 원수는 아니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지금은 단순히 독도 영유권을 두고 말로서 싸우는 단계지만 만약 사태가 악화되어 양국간에 전쟁이 벌어졌는데도 신자가 원수를 사랑하기 위해 병역기피를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물론 그런 사태가 되기 이전에 양국간에 서로 화해할 수 있도록 계속 기도하고 모든 힘을 보태야 하지만 한국이 일본을 향한 일방적이고도 잘못된 침략전쟁이 아닌 이상 신자도 그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
말하자면 독도 사태 같은 국가적 위기는 신자 개인의 기도를 떠나 국가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말이다. 성경은 특별히 구약에 그런 경우 한 국가가 어떻게 대처할지를 곳곳에 제시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여호사밧 왕이 개혁을 통해 외부의 대적을 물리치는 내용(대하17장)을 들 수 있다. 일본이 심심하면 독도 문제를 들고 나오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자기 영토가 아니라고 단 한번도 부인한 적이 없다는 것을 천명하고 항상 국제적인 이슈화를 해 놓겠다는 뜻이다. 그들로선 영원토록 한국의 신경을 건드리며 우려먹을 논쟁 거리로 삼고 있는 셈이다.
저들은 수시로 독도 분쟁을 일으킬 것이므로 한국이 오히려 신경 써야 할 것은 분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문제화 시키는 시기(時期)다. 왜 하필 이때에 그런 방법으로 문제 삼는가를 따져야 한다. 그런데 그 이유도 간단하다. 한국 내의 상황이 어지럽고 전열(戰列)이 흐트려졌다 싶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국력이 얼마든지 얕잡아 봐도 되겠다 싶을 때만 건드린다. 그러면 그에 대한 대책은 오직 하나다. 얕잡히지 않으면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실력을 길러 저들이 오히려 한국을 겁을 내게 하면 된다.
여호사밧이 어떻게 개혁을 했으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첫째 산당과 아세라 목상을 제하여 영적인 부흥을 일으켰다. 한국도 전국가적으로 내부 성찰부터 해야 한다. 온갖 부정부패를 제하고 사회 정의가 실현되며 정직하고 성실한 자가 대우 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즉흥적, 정파적, 감정적 대응을 자제하고 나라 전체의 장기적인 목표를 분명히 하여 그에 따라 제도와 법령을 정비하며 모든 역량을 미래지향적으로 집중하여야 한다. 신자들도 나라와 국민들이 죄악에서 벗어나 바른 길로 걸어가게 해달라고 눈물로 기도해야 하며 빛과 소금이 되어 실제 삶에서 모범을 먼저 보여야 한다.
여호사밧 왕이 신경을 쓴 두 번째 부문은 전국민의 교육 사업이었다.(7-9절) 제사장과 레위인들로 모든 성읍들을 순행하며 여호와의 율법책으로 인민을 가르쳤다. 아무리 외적인 제도를 고치고 전국적인 부흥 운동이 일어나도 백성들 개인적으로도 내면적인 영적 부흥이 일어나야 했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고질적인 교육제도의 폐해를 백년대계를 바라보며 바로잡아야 한다. 지금은 비참했던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기억하고 있는 세대들이 많이 남아 있지만 갈수록 그 때 일을 알고 있는 자들이 없어질 것이므로 올바른 역사 교육을 시켜야 할 뿐 아니라 국제 경쟁에 이겨나갈 수 있는 실력과 분별력들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신자들도 자기 가정에서부터 영적인 부흥을 이루며 자녀들을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잘 양육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여호사밧 왕은 국방을 튼튼히 했다.(12-19절) 견고한 채와 국고성을 건축하고 각성에 용맹한 군사들을 두었다. 현실적인 일은 다 제쳐두고 기도해서 여호와의 기적적인 도움만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한 손에 율법책을 다른 한 손에는 창을 들고 항상 대비했으므로 감히 외적들이 침입할 꿈을 못 꾸었다. 일본과 전쟁을 대비해 국방을 튼튼히 하라는 것이 아니다. 현대의 국방력은 경제력이다. 그저 무슨 일만 생기면 한두 번 결의 대회에 혈서 쓰고 구호 외치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 정말 기업인과 노동자 정부 당국 모두 마음이 하나가 되어 나라가 부강해지도록 힘을 써야 한다. 신자들도 교회에 모여 일본 규탄 독도 사수 구국기도회 같은 것을 할 것이 아니라 실제 자기가 처한 어떤 환경과 장소에서도 가장 필요하고 없어선 안 되는 존재가 되어 주위에 선하고 거룩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
그러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겠는가? “여호와께서 유다 사면 열국에 두려움을 주사 여호사밧과 싸우지 못하게 하시매.”(10절) 일본이 한국에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얕잡아 볼 수가 없게 된다. 이 길 외에는 현재 아니 앞으로 계속 이어질 독도 사태를 해결할 길은 없으며 또 바로 그것이 성경적인 해결책이다.
3/20/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