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손님이 어떤 집을 방문하여 다치거나 개에게 물리는 등의 사고가 나면 집 주인이 책임을 져야 하므로 보험에 들어 대비한다. 그런데 아주 사나운 종자의 개는 아예 보험에서조차 들어주지 않는데 그 중 대표적인 예가 투견 종류인 Pit Bull이다. 심심찮게 사람을 물어 죽여 자기 주인으로 감옥 신세를 지게끔 하는 개다.
저희와 바로 이웃한 집에서 이 무시무시한(?) 개 두 마리를 키우고 있다. 이사 온지 3년이 넘도록 담장 하나 사이의 이웃집 아저씨에게도 짖어댔다. 개는 냄새에 민감하기 때문에 익숙한 냄새는 잘 짖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 개만은 예외인가 싶었다. 어쨌든 시도 때도 없이 짖어대므로 우리 집의 방범까지 책임지는 것 같아 그리 나쁘게 여길 것만은 아니었다.
문제는 매일 새벽 산책 길에 그 집 펜스 곁을 통과할 때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큰 소리로 짖어대니 간이 떨어지도록 덜컥 놀라고, 아직도 우리와 통성명도 하지 못한 것 같아 섭섭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우연히 “내다”라고 소리를 질렀더니 잠잠해졌다. 아뿔싸! 이 개는 냄새보다 소리에 민감한가? 실제로 앰블런스나 경찰차의 경적 소리만 나면 어김 없이 짖어대니까 말이다. 어쨌든 내 목소리를 알아주니 그 무시무시하던 개에게도 귀여운 구석이 조금 생겨났다.
그러나 어떤 때는 “내다”라고 해도 여전히 왕왕 짖어 도저히 종잡을 수 없고 아이큐가 아주 낮은 개인 것 같아 다시 미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오늘 아침에는 혹시 싶어 아주 점잖게 타이르는 목소리로 (은근히 아부를 좀 실어서) “내다”라고 했더니 순식간에 양처럼 온순해졌다.
Pit Bull을 다스리는 것은 냄새도, 소리도 아니라, 오직 그를 개답게(?) 대해주는 것이었다. 한 집에서 줄로 매지 않고 함께 뒹구는 주인에게는 덤벼들지 않는 것을 보면 너무나 간단한 해답이지 않는가? 자기를 미워하는 이웃집 아저씨를 3년이 넘도록 못 알아 본 개가 바보가 아니라, 개도 사랑으로 대해주면 변할 수 있다는 것조차 눈치 못 챈 내가 바보였다.
앗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는 구비오 마을 사람을 잡아 먹던 늑대를 양처럼 길들였고, 3천명의 수사가 모인 미사에서 설교를 하려는데 새들이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니 짹짹거림을 멈추라고 다정히 일렀더니 새들이 즉각 순종했다고 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창조의 마지막 순서로 당신과 동역하며 심히 기뻐할 존재 인간을 만드셨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고 명하셨다. 첫째 인간 아담은 그 명령을 잘 준행했다.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이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창2:20) 말하자면 아담은 Pit Bull이든 늑대든 사자든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짐승들이 아담을 보면 먼저 온순한 양처럼 굴었다. 아담에게 신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아직 죄가 들어오기 전이었기 때문이었다.
범죄 전까지 아담으로선 동물들을 무서워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럴 이유도 없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기에 미워하는 마음이라고는 한 치도 없이 동물들을 바라 보았기에 동물들도 자연히 아담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아담은 하나님과 항상 함께 동행하며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과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각기 종류대로 만드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던 그분의 심정에 동참한 것이다.
말하자면 아담이 이 땅을 잠시나마 하나님 대신에 거룩하게 다스릴 수 있었던 유일한 능력은 사랑이었다. 하나님의 본성대로 인간에게 주어졌던 그 사랑이 아직 오염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범죄한 이후의 두드러진 결과는 사랑으로 화목하는 자리에 공포가 대신 차지했다. 사랑이 실종되자 미움이 들어섰고, 서로 미워하자 다툼이 있고, 다투기 시작하자 무력의 강약이 세상을 지배하는 규칙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 이 세대의 가장 큰 특징은 죄의 범람이기 이전에 사랑의 실종이다. 간음이다 동성애다 하는 죄는 모두가 참 사랑을 아직 찾지 못한 인간들의 마지막 발악이다. 참으로 비참하고 허탄한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인간끼리만 그런 것도 아니다. 목사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직접 지으신 피조물인 Pit Bull을 사랑하지 않고 미워했다. 하나님은 Pit Bull도 지으신 후에 틀림 없이 보시기에 좋았을 것인데도 말이다.
그런데 세상이 이처럼 완악하고 부패해진 책임은 저들이 죄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신자의 책임이 훨씬 더 크고 먼저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참 사랑을 맛보고 소유하게 된 유일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은 참 사랑을 전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이 이 땅을 번성케 하여 당신의 뜻대로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의 사랑인데도, 신자가 그런 사랑을 알고도 주위에 실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Pit Bull 같은 무시무시한 개를 보험으로 처리하려는 것은 이미 사고가 일어난 이후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스리면 아예 그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세상의 온갖 추잡한 죄악도, 어떤 흉측한 강도도, 허공을 치며 향방 없는 달음질 하는 불쌍한 인간들도, 심지어 어떤 자연적 재앙마저도 그들을 온순하게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엡1:23)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뿐이다. 그런데도 갈수록 예수님과 그 십자가는 힘을 잃어가고 있으니…
10/17/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