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고로 부모마저 부양하기를 포기한 9형제를 대신 키워주는 한 아름다운 부부의 이야기가 아침 뉴스로 소개되었다. 그것도 박봉을 받는 학교 선생인 아내와 2년 전 실직해서 월 800불의 실직 수당에만 의존하는 가난한 부부가 말이다. 노스 케롤라이나주 Charlotte에 사는 Becky and Brian Doss 가 그 주인공이다.
그들의 바뀐 생활을 간단히 보면; 음식 값은 몇 배로 들고, 일주일에 화장실 휴지가 15 두루마기, 주스가 6갤론(약 23리터, 쉽게 말해 2 리터짜리 큰 병 11개), Half 갤론 주스가 30 통, 거기다 세탁기를 어떤 때는 일주일에 30번 돌릴 때도 있다고 한다. 참으로 대단하다 싶지 않는가? 모든 비용을 외부 지원 하나 없이 그 박봉으로 감당하니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아내 Becky는 정말 평화롭고 더 중심이 잡힌 삶을 살고 있는 기분이라고 고백했다. 나는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고 느낄 뿐이라고 했다. 밖에서는 가정 수입의 거의 전부를 벌어야 할 책임을 지고, 아직 출가하지 않은 자기 아들 한명까지 합계 열명을 집 안에서 뒷바라지할 최종 책임도 결국 주부인 자기에게 돌아올 텐데도 말이다.
이런 미담을 접하면 단순히 어려운 이웃을 돕는 참 의로운 자다라고 치부해선 안 된다. 말하자면 올 데 갈 데 없는 고아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었다는 것만이 선행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들 부부가 법적 보호자가 되어 주지 않았다면 9명의 형제는 여러 집에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만 했었다. 아이들 모두가 이 새 가정에서 느끼는 것은 안정감(stable)과 안전함(safe)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엇이 정상인지를 그 동안 모르고 지냈다고 고백했다. 아이면 아이답게 열심히 뛰어 놀고 학교에서 공부하며 친구들과 사귀는 생활을 해야 함에도 그럴 꿈도 못 꾸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인간에겐 먹고 입고 자는 것을 넘어서 기본적으로 그 자신에 걸 맞는 인간으로서의 생활이 꼭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이 부부는 회복시켜 준 것이다.
단순히 구제하는 것은 의외로 쉬울 수 있다. 돈과 시간에 조금만 여유 있으면 일부 떼어내면 된다. 거기다 그 부분은 세금 감면 혜택을 받으니 일석이조다. 그래서 미국민의 2/3가 어떤 형태로든 기부하고 있고, 가구 당 평균 기부금도 연 1,894불(약 2백만원)이라고 한다.(2005년 12/26자 Time 지 보도) 또 미국 전체로도 2,485억불(약 250조원)에 달하며, 빌게이츠는 세계 최고 갑부답게 현재까지 33억5천만 불을 기부하고 있어 기부에서도 세계 최고다.
이 부부의 선행을 금액으로만 따지면 크게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은 아홉 명의 아이들을 자기 집에 받아 들이기로 결정했을 때의 심경을 이렇게 고백했다. “아이들을 낳기로 결정할 때의 심경과 같았다. 그것은 정말로 오랜 기간 동안의 헌신(really long-term commitment)을 요구하기 때문이었다.” 돈과 시간의 여유만으로 불쌍한 이웃을 진정으로 섬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완전히 다자라 스스로 자립할 때까지 자신들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나아가 일생을 거기에 걸어야만 했다. 말하자면 자기 아이들을 사랑하는 그런 똑 같은 헌신으로 지금도 그 아홉 형제를 돌보고 있다는 것이다.
참 사랑이란 자기는 죽고 상대를 살리는 것이다. 그 말은 상대가 완전히 살아날 때까지 그래서 스스로 혼자 살 수 있을 때까지 자기를 끝까지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 중도에 포기하거나 그런 헌신이 조금이라도 바뀌면 아무리 그 동안 돈과 시간을 많이 투자했어도 참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사랑은 내가 가진 여유나, 인격적 품성으로나, 도덕적 책임감이나, 심지어 종교적 열심으로도 실현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사랑이란 상대가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최소한 정상이 아닌 것에 대한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다. 그래서 내가 아니면 그가 도저히 살아날 방도가 없기에 내가 가진 것과는 상관 없이 지금 당장에라도 나서야겠다는 행동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살아날 때까지 모든 것을 참고 버티는 헌신이다. 그래서 긍휼+실천+인내가 사랑이며 이 중 하나라도 빠지거나 부족하면 사랑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은 일년에 한두 번씩 저금 통 깨서 구호 성금 낸 것으로 마치 큰 의인이라도 된 양 착각하고 있는 우리들 모두 앞에 바로 그 참 사랑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셨다. 도저히 주체할 수 없는 죄인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시며 죽으셨다. 그리고 부활하셔서 구원할 자에게 성령으로 거듭난 새 생명을 부어주셨다. 한 죄인이 의인으로 완전히 되살아 날 때까지 사랑하셨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그런 똑 같은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신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성경도 사랑이란 Long-term Commitment라고 세 번씩이나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혹시라도 지금 누구를 섬기고 있거나 섬기려 하는가? 정말 내 자신을 완전히 죽여서 상대가 완전히 살아날 때까지 참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아니면 한 때의 감정과 열심에만 사로 잡혀 있는가? 만약 후자라면 차라리 전문 구호 기관에 헌금을 하면서 그 사람을 섬길 생각을 잠시 미루거나 완전히 각오를 새롭게 바꾸어라. 아직은 참 사랑을 할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1/13/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