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금이 무료이고 선생 일인당 학생 숫자의 비율이 가장 낮아 개인적인 지도를 충분하게 받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학교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가장 가기 싫은 학교로 소문난 곳이 있다. 사연인즉 암에 걸려 살 확률이 50% 미만인 부모를 둔 자녀들만 다니는 학교이기 때문이다. 오늘(7/12) 미국 ABC TV에서 소개한 시애틀의 암 전문 병원(The Seattle Cancer Care Alliance)에서 운영하는 Hutch School의 이야기다.
어린 자녀를 둔 부모가 암이라는 치명적 선고, 그것도 현대 의학적으로 살기보다는 죽을 확률이 더 높다는 통보를 의사로부터 받게 되면 가장 먼저 어떤 생각이 들까? 백혈병을 앓고 있는 학부형 Susan Butcher는 우선 “내가 죽으면 엄마 없는 아이들이 될 텐데”와 또 “치료 기간 동안 가족들이 겪을 고통은 어떡하나”라는 걱정부터 들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과제를 학교가 해결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이들에게 죽음에 대해 공개적으로 직접 가르치는 아마도 세계 유일의 학교일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아이들이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어른들이 걱정하는 것 이상으로 잘 견딘다고 한다. Anna White 교사는 오히려 아이들에게 배울 점이 너무 많아 자기는 앞으로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도 잘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야말로 예의 Butcher 여사가 고백한 대로 “하나님이 보낸 정말로 경이적인(amazing) 학교”라 할만하다.
그 어린이들이 어떻게 죽음, 그것도 사랑하는 부모의 죽음을 담담하게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좋은 시설에서 실력 있는 선생님들의 자상한 가르침 때문일까? 그보다는 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들끼리 모였기에 자기만 겪는 불운이나 비극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리라. 그들 사이에 함께 위로하는 작은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공동체야말로 정말 진실하고 사심(私心)이라고는 일절 없는 곳이지 않겠는가?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두면 어느 누구라도, 어린아이라도 진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 학교에선 죽음과 함께 희망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죽을 확률이 더 높은 환자라 해도 살 확률이 단 몇 %라도 남아 있으면 살아날 수 있는 기회는 있는 것이다. 또 실제로 완전히 치유되어 새 삶을 누리는 모습도 간혹 목격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죽음이 절실한 현실이듯이 소생의 희망도 절실한 현실이다. 요컨대 그 학교는 참 생명과 참 죽음을 가르치는 곳이다.
다른 말로 교회가 진정으로 되어져야 할 모습의 표상이다. 교회는 다른 무엇보다도 삶과 죽음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는가? 모든 인생이 살아남을 확률은 사실은 제로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단 한 사람의 예외 없이 인생에서 반드시 겪어야 할 가장 절실한 문제를 가르치지 않는 교회는 직무 유기를 하는 셈인데도 요즘 거의 모든 교회가 솔직히 그렇다. 교회마다 그저 예수 잘 믿으면 잘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성경이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을 말하니까 개인의 주장이라고 표현할 수밖에는....)
참 생명은 참 죽음이 반드시 전제가 되어야 한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죽음 뒤의 온전한 심판이 있어야 그것에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진실된 소망이 생기며 또 그런 구원을 얻은 자라야 참 생명을 소유한 것이지 않는가? 진짜 죽음을 먼저 가르치지 않으면서 아무리 생명을 이야기해 봐야 그것은 가짜 생명일 뿐이다.
요컨대 교회가 참 죽음을 가르치지 않자 교회가 오히려 죽어버렸다.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실종 내지 약화되면서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라 거대한 사교 단체로 전락해버렸다. 사회와 사람들에게 진짜 생명력이 넘치는 영향을 전혀 끼치지 못하고 있다. 교회 스스로 참 생명이 없는데 어떻게 주위에 생명을 나눠주겠는가 말이다.
작금 교인이 숫자가 줄고 교회가 상업적 물량주의로 흐르고 목회자가 도덕적으로 부패하여 개신교의 위기라고 난리다. 새삼 교회 성장 세미나를 한다, 양적 성장을 지양하자, 내노라 하는 목회자들이 모여서 회개를 한다고들 하지만 그 위기의 진짜 원인이자 유일한 원인은 따로 있다. 교회에서 예수의 십자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도 살려 주신다는 그 경이로운 은혜(Amazing Grace)가 없는데도 어떻게 성장을 기대하는가?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 앞에서조차 개신교는 너무 뻔뻔스러워져버렸다.
목회자들이 어처구니없게도 정말 오해하는 것이 하나 있다. 교회에서 죽음을 이야기 하면 교인들이 줄고 새로운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야말로 엉터리 중의 엉터리다. 가짜 죽음을 이야기했을 때만 그렇다. 교회에서 진짜 참 죽음을 가르치면 반드시 교인이 늘게 되어 있다. 죽음만큼 모든 인간에게 절실한 과제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당장 교인 숫자가 안 늘더라도 참 생명을 갈구하는 참 인간들은 모이게 마련이다. 목회자들이 교인 머리 숫자보다 그런 참 인간을 먼저 찾고자 하지 않는 한 개신교의 위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뜻이다.
7/12/2006